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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마 5:13-16

by 【고동엽】 2021. 12. 23.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마5:13-16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이 세상이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어두운가를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영적으로 썩어 냄새나는 곳인가, 또 얼마나 캄캄하고 어두운 곳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눈에 그렇다면 예수님의 눈에는 오죽하겠습니까? 캄캄한 세상을 앞에 놓고, 또 썩어 냄새나는 세상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여기에 너희라는 말은 굉장한 강조형입니다.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아무리 세상이 썩고 어두워도 나는 너희만을 믿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만 믿어. 하는 의미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 너희가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열두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해당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오늘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우리 모두가 너희에 해당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참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기대를 갖고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인 열두 명의 제자들이란 세상적으로 볼 때 얼마나 초라한 사람들입니까? 배운 게 있습니까? 가진 것이 있습니까? 기댈 데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놓고 마치 이 세상의 내일이 그들의 어깨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은 점이 많습니다.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 그 당시 제자들의 믿음 보다 우리의 믿음이 훨씬 더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캄캄하고 썩어 냄새나는 세상이라고 하는 괴물 앞에 우리 자신을 놓고 보면 얼마나 초라해 보입니까? 얼마나 작아 보입니까? 무슨 빛을 발할 수 있으며, 무슨 소금 노릇을 할 것 같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조용히 내려다보시면서 나는 너희만 믿어. 왜냐하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너희마저 없다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어. 절망이야. 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니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고, 한편으로는 주님의 우리를 너무 잘 봐 주심에 대해서 감격도 하고 긍지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팔복을 가지고 먼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의 성품이 어떠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되고, 마음이 청결해야 되고 화평케 해야 되고 마지막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작은 예수로서의 성품을 가져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너희들이 이와 같은 성품을 가진 나의 제자가 되면 이 세상에서 너희만이 소금이요, 너희만이 빛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마 팔복의 요건을 우리가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오늘 말씀이 실제로 우리 하고 관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닮은 팔복의 성품을 다시 한번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것도 많고 안 되는 것도 많지만, 성령께서 이 시간에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시면 내 힘으로 갖출 수 없었던 것들이 주님의 힘으로 갖추어 지는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소금을 잘 아시지요? 소금은 짠 맛이 특징입니다. 그 짠 맛 때문에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그 당시 지중해 연안만 해도 온도가 꽤 높은 지역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냉장고도 없던 시절, 식품을 오래 보관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만 넣어 놓으면 적어도 한두 달은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의 태양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소금이다. 하는 말을 할 정도로 소금을 무척 아끼고 귀히 여겼다고 합니다. 썩지 않게 하는 이 방부제의 특성은 마치 예수님을 잘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끼치는 감화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 세계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어만 줘도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짠 맛이 들어가서 고기나 음식물에 신선도를 유지하여 썩지 않도록 하듯이 우리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우리를 통해서 내비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때문에 다른 사람이 좋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어딘가 다른 데가 있어. 나도 좀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네. 하는 감동을 받습니다. 어떤 면에는 소극적이긴 하지만 조용히 다른 사람에게 짠 맛을 내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가정 안에 이런 사람이 한두 명만 있어도 그 가정에는 절대 사고나지 않습니다. 직장 안에서 이렇게 짠 맛을 가진 사람 얼마만 있으면 그 직장은 영적으로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습니다.


빛은 무엇입니까?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 가운데 있는 것을 환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빛은 그 특성상 굉장히 직선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어두움 앞에서 머뭇거리는 빛을 우리는 본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세상의 빛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열려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대신 그 빛 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양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예수님의 달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8절, 9절에 참 소중한 말씀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너희가 누구입니까? 예수 믿는 우리 모두입니다.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를 빛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빛인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보고, 우리의 의로운 행동을 보고 세상이 우리를 빛으로 본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모두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물론 자신이 볼 때 내가 무슨 소금이냐 빛이냐, 냄새만 안 나도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크게 보시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빛과 소금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확인했으면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에서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할까, 빛의 역할을 할까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 도덕적 우위를 지키는 일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도덕적인 우위라는 말이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선악을 앞에 놓고 이것은 선이다. 저것은 악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서 도덕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선과 악을 놓고 선을 선택하고 선을 추구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보면 도덕성이 건전하다.고 이렇게 칭찬합니다. 그러나 선인지 악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흐리멍텅하게 잘못된 것을 선택해서 따라가는 사람을 보면 도덕성이 낮다고 말하기도 하고 도덕성이 실종된 사람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도덕적 표준이 높아야 합니다. 도덕적인 우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빛이니, 소금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요즘 특히 젊은이들 세계를 가만히 보면 도덕적 표준을 자꾸만 하향 조절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밖에 있는 젊은이들이 절대라는 말이 붙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절대신이라고 하면 절대신이 어디 있느냐?고 반발하고, 절대선이라고 하면 요사이 세상에 무슨 절대선이 있느냐?하고 빈정대고, 절대악이라고 하면 무엇이 절대악이냐?고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표준을 자꾸 끌어내림으로써 자기가 부담을 덜 느끼게 되고 또 그만큼 편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제 좋은 대로 도덕성을 디자인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절대선이신 하나님을 놓고도 필요하면 나의 하나님 하고 부르지만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내가 하나님 하는 건방진 소리를 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입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변덕스러운 인간성처럼 도덕적 표준도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부로 느끼지 않습니까?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라는 책에서 한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밀어내 버리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선과 악이 따로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허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선이 악이 될 수도 있고 악이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 맘대로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이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는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정직을 예로 든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디까지가 정직인지가 분명하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상황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를 수도 있다고 하는 생각들을 마음에 감추고 있는 것을 봅니다. 벌써 표준이 흐릿해진 것이요, 흑과 백을 구별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어때해야 됩니까? 여기에 따라가면 안 됩니다. 우리의 표준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의 표준입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우리는 미워합니다. 거짓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참과 거짓을 뒤 섞어 놓고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분명히 거짓은 배격하고 참을 따라 가려고 하는 자세를 갖습니다. 설혹 그렇게 하다가 우리가 바보스럽게 보여도, 손해를 보아도, 진실과 거짓을 혼돈하면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도덕적인 우위를 유지하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될 수 있고,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지 바나라고 하는 리서치 센터가 미국에 있습니다. 주로 기독교계를 대상으로 해서 여론 조사를 많이 하고 또 상당히 신빙도가 높은 기관입니다. 거기에서 내 놓은 데이터 중에 굉장히 가치 있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성에 있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 비해 40% 이상의 격차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직이라는 것을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백 명을 모아 놓고 그 가운데서 정직한 사람이 20명이 나왔다고 합시다. 정직한 사람 불신자 중에 20명이 있어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 백 명 모아 놓고 그 가운데서 정직한 사람이 몇 명 나와야 됩니까? 40%의 격차가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적어도 몇 명이 정직해야 합니까? 80명, 90명이 정직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조사를 해 보니까 그 정도의 수치가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직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 좀더 실감나는 이야기를 하지요. 포르노 영화를 놓고, 미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가끔 이 음란 영화를 봅니까? 그랬더니 그들이 솔직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크리스챤 100명 가운데서 30명이 가끔 본다고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 100명 모아 놓고 조사를 했어요. 포르노 영화를 가끔 봅니까? 그러자 40명이 나왔어요. 여러분, 이 정도는 차이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열 명 적은 것 가지고는 도무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이렇게 비슷합니다. 약간 나은 것 같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는 도덕적인 우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도덕적인 우위가 유지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인이 소금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그것은 다 헛소리고, 빛이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것은 과대 선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영향을 주고 짠 맛을 내기를 원하면, 또 강렬한 빛을 비추기를 원하면, 도덕적인 면에서 달라도 한참 달라야 됩니다. 격차가 나도 한참 나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놓고 우리 주님 앞에 얼마나 죄송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카톨릭 유선 텔레비전을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방영을 했나 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셉은 10대 소년으로 애굽에 팔려 가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애굽의 바로 왕의 제 1 경호실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신임을 얻어 그 가정의 총무가 되었지요. 이제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어섭니다. 얼마나 젊음이 광채가 나는 멋진 젊은이였는지요. 얼마나 우아하고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으로 비쳤는지 모릅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가 눈독을 들였습니다. 상대가 노예였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날마다 유혹합니다. 같이 잠자리에 들어가자고 날마다 유혹합니다. 요셉이 거절했습니다. 자기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만 불행하게도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둘이서 마주쳤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옷자락을 잡고 사정을 합니다. 너무나 급한 나머지 요셉은 자기도 모르게 웃옷을 벗어 놓고 도망갔습니다. 요셉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여자가 요셉의 옷을 움켜쥐고 드디어 그리움이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이 놈, 두고 보자. 내가 너를 가만히 둘 줄 아느냐? 너는 오늘 끝장이다. 이 놈아. 이러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습니다.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남편이 오자마자 옷을 내놓으면서 당신이 돈을 주고 사온 히브리 소년 저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를 성폭행하려고 달려 들길래 내가 소리를 질렀더니 옷을 벗어 놓고 도망갔다고,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보디발이 불쾌했겠지요. 그래서 요셉을 감옥에다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감옥에 넣을 수가 없어요. 그 집안 주인의 아내를 범하려고 한 사람이면 감옥도 필요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 죽입니다. 노예인데 무슨 재판이 필요합니까? 당장 죽여 버리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입니다. 살려 놓을 수가 없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로서는 당장 요셉을 죽인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살려서 감옥에다 집어 넣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났습니다. 그날 밤에 남편을 걸고 넘어졌습니다. 당신 아내를 겁탈하려고 하는 그 나쁜 짐승 같은 놈을 왜 살려 둡니까? 무엇 때문에 살려 두는 것이죠? 뭐가 좋아서 살려 두는 겁니까? 그때 보디발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말을 한 번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어.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믿어. 그랬더니 진짜 이 부인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습니다. 그럼 내가 거짓말했단 말이야? 내가 거짓말했어요? 하고 달려들었어요. 그랬더니 정말 보디발이 열을 받았어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가지고 아내를 때리면서 이 요사스러운 것 같으니, 네가 유혹했지? 네가 꼬리쳤지? 네가 꼬리친 거지?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실감나는 사실 묘사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보디발이 요셉의 말을 아내의 말보다 더 믿었을까요? 요셉의 도덕성이 얼마나 높은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 이런 악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의 도덕적인 표준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평소에 보디발이 그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면서 맹세하다시피 하는 말에는 절대로 거짓이 없다는 것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어느 정도 도덕성의 우위를 유지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이 요셉 정도로 유지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복음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부패를 막는 소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그 자체가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 가장 짠 맛을 낼 수 있습니까? 전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언제 강한 빛을 불신자들의 세계에 비칠 수 있습니까? 예수 믿으라고 말할 때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전도는 소금을 많이 만들어 내는 생산 작업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믿게 했다면 그 사람이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면 그 사람이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이 땅에는 소금은 많아 지고 빛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것 만큼 대단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지난 50년 동안 우리 한국 교회가 복을 받은 것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진짜 복을 받은 것은 교회 부흥입니다. 50년 전만 해도 한국 교회에 믿는 사람이 불과 30만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지나니 300만이 되고, 조금 더 지나니 800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돌아왔습니까? 물론 이렇게 수적으로 많아짐에 따라서 냄새나는 일들도 가끔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한 모퉁이의 일이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사회의 이곳 저곳에서 빛이 되려고 노력했고, 소금이 되려고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이며 기도하고 산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큼 회개하는 사람 봤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만큼 양심을 바로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 봤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봤습니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이 땅에서 소금이요, 빛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야 됩니다. 전도해서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전국민을 복음화 시켜서 다 하나님 앞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앞장서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빛이 되고 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자연보호에 앞장 설 수 있어야 소금이고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미래를 걱정하는 세계 석학들의 논문이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몇 개만 뽑아 가지고 한번 읽어보십시오. 똑 같은 말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 무엇이냐면 바로 환경오염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읍니다. 인류가 멸종하느냐 살아 남느냐를 좌우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이,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무서운 요인이 환경오염이라고 합니다. 15년, 20년 전, 이 교회를 개척할 당시만 해도 누가 생수를 마신다고 하면, 웃기네. 수도물이 어때서 생수 마시냐? 돈이 남아서 감당을 못하나 보지? 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생수를 마시는 것이 상식이 아닙니까? 생수를 안 마시는 사람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저러면 큰일 날 텐데 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변해 버렸습니까? 20년 전에 남의 이야기 같이 들리는 것들이 오늘날 지금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더 잘 먹고 더 많이 즐기기 위해 자연을 함부로 파괴한 결과, 온도는 점점 올라가고 날씨는 어떻게 변할 줄 알 수 없는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그리하여 세계 곳곳에 끔찍한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동시에 생태계는 혼란에 빠져서 1년에 몇 백 종씩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자연파괴를 예사로 하는 나라가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만큼 후손의 내일을 걱정하지 아니하는 무감각한 백성이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하나 잘 살다 가면 그만이라는 식인 것 같습니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과수원 얘기 들으셨죠? 벌이 자꾸 없어집니다. 나비가 자꾸 사라집니다. 그러니 열매가 안 맺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니면서 벌이나 나비처럼 수정을 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나비와 벌을 다 죽여 놓고 사람이 벌이나 나비처럼 다니면서 수정을 합니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야생 동물, 바다 고기는 점점 씨가 말라갑니다. 하천은 썩어 가고 지하수마저 오염이 되어 먹을 수가 없고, 심지어 먹을 수 없는 그 물 자체도 점점 양이 줄어서 나중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끔찍한 상황을 우리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세계 약 200개 국가 중에 물부족 국가의 하나로 한국이 꼽힌다는 것 여러분 아시죠?


정부는 환경보호에 대한 미래의 청사진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환경부만 만들어 놓았지, 아무 소용이 없는 정부 기구에 예산만 쓰고 있습니다. 경제논리에 끌려 다니느라 손바닥만한 땅과 바다를 방치해 두고 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준농림지 개발을 허용해서 전국이 어떤 꼴이 되었습니까? 마치 이리떼가 달려들어서 물어뜯어 놓은 짐승의 사체처럼 전 국토가 엉망이 되어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못 본 체 하고 있다가 신문이 떠드니까 뒷북이나 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정부입니다. 우리만 잘 살면 되는 것입니까?


환경운동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생존하는 가장 존경받는 50인 중의 하나입니다. 레스터 브라운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그를 우리 나라 모 일간지 기자가 인터뷰한 것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그가 하는 말 가운데 참 가슴이 섬찟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처럼 환경을 계속 파괴해 가면 우리 후손은 우리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저의 마음에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습니다. 맞았어. 나라도 용서하지 않아. 앞으로 20년, 30년 후,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함부로 파괴하고 오염시킨 자연으로 인해 온갖 재난을 겪으며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이 조상들의 무덤에 와서 침을 뱉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자기만 잘 살다 갔지 후손의 행복은 조금도 생각하지 아니한 짐승보다 못한 조상이라고 그들이 저주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런 저주를 받을 수 있는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우리 모두는 파괴되어 가는 자연 앞에 심각한 고민을 안고 씨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 하셔서 우리에게 남겨 주시고 하사하신 이 아름다운 자연 동산, 이 하나 밖에 없는 지구를 놓고 우리가 이것을 살리기 위해,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 자손에게 아름다운 땅을 물려주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연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지금 성경을 쓰신다면 이 말을 반드시 첨가하실 것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셋째는 자연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틀림없이 삽입할 것 같습니다. 자연을 사랑합시다. 한 포기의 풀도 사랑하는 눈으로 봅시다. 별 것 아닌 잡목이라도 마치 자녀를 쓰다듬듯이 쓰다듬어 주면서 사랑합시다. 조그마한 다람쥐 한 마리라도 내 자식을 보듯이 아끼고 소중히 여깁시다. 자연을 사랑해야 이 자연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이 자연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아니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욕심을 버립시다. 사치하지 맙시다. 모피를 수입량이 가장 많은 제일 첫 번째 나라가 어딥니까?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왜 그 많은 모피를 수입해야 합니까? 날씨가 뭐가 그리 춥다고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닙니까? 우리가 모피를 그만큼 과잉 수입함으로써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짐승 한 마리라도 더 죽는 것입니다. 정말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 제정신이 아닙니다. 녹용도 이제 그만 먹읍시다. 곰쓸개도 이제 먹지 마십시오. 여기에 한의사 하시는 분들 죄송합니다만, 이제 그런 것 안 먹어도 됩니다. 그래도 건강해서 80까지 사는 세상에 얼마나 더 살겠다고 그렇게 야단들입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자꾸 탐함으로서 생태계가 파괴됩니다. 야수라도 우리가 멸종을 시키면 안됩니다. 야수가 멸종되면 그만큼 생태계는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사치하는 우리의 습관을 버리고 절제하고 검약하고, 좀 더 적게 먹고 적게 쓰는 방향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너무 큰 집 가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30평에 사나 40평에 사나 50평에 사나 살다 보면 똑같습니다. 30평에 살던 사람이 50평에 산다고 해서 잠이 잘 오는 것도 아닙니다. 50평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음이 평안해서 천국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그 차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구는 불과 2명, 3명 밖에 안 되면서 왜 집을 자꾸 늘리려고 합니까? 10평을 더 늘려서 살면 그만큼 이 나라 좁은 땅을 잡아 먹는 것입니다. 넓은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름을 얼마나 더 써야 됩니까? 물을 얼마나 더 써야 됩니까? 왜 그렇게 낭비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까? 우리 그런 짓 하면 안 됩니다.


방금 소개한 레스터 브라운이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을 기자가 그 집에까지 좇아갔나 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갔더니 방 하나가 있는 작은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실까지 오고 가는데 20분씩 걸리는데 걸어서 다니고, 가지고 있는 교통수단은 자동차가 아니고 자전거 한 대였다고 합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 자신이 가책을 받았습니다. 비록 당장은 잘 안 되지만 이렇게 근검절약하려고 하는 노력을 조금씩 가질 때 이 자연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습니다. 오염되고 파괴되어 가는 이 자연을 우리가 끌어안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 대학부 청년부 젊은이들이 상당히 의식이 건전한 사람들인 줄 알지만, 어떤 때는 실망을 많이 합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휴지 쓰는 것을 보면 정말 실망입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사용할 만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심하니까 손에 둘둘 말아서 낭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분명히 예언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불과 10년, 20년 안에 다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살아야 될 앞으로 30년 후는 피눈물을 쏟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라고 하는 사람이 매우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간소화하고 간소화하십시오. 하루에 세끼를 먹는 대신 필요하면 한끼만 먹으십시오. 백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이십시오. 그리고 다른 일도 그런 식으로 줄이도록 하십시오. 자연 보호에 앞장서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위급한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될 역할을 찾읍시다.


지금까지 세 가지를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는데 빛과 소금이 되자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빛과 소금이 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연보호에 앞장서는 자로서 빛과 소금이 되자고 했습니다. 우리 신분은 감출 수가 없어요.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저 이태리나 지중해 연안에 여행을 가보면 높은 언덕, 높은 산 위에 아름다운 도시들이 자주 눈에 띱니다. 멀리서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밤에는 더 휘황찬란합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자신을 숨기고 가만 있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항상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조금만 잘 하면 금방 소문이 납니다. 조금만 무언가 잘못 하면 금방 냄새가 나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자신을 이렇게 감추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노출성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좋아, 어디 가도 우리 자신을 숨길 수가 없다면 빛으로서 살자. 소금으로서 살자. 그러면 굉장한 파급효과를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빛으로서 소금으로서 아름다운 환상을 가집시다. 우리나라를 도덕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환상을 가집시다. 우리 국민 전부를 복음화시키겠다고 하는 환상을 가집시다. 그리고 이 땅을 아름다운 금수강산으로 다시 만들어 우리 후손에게 잘 사는 나라로 넘겨주겠다고 하는 꿈을 가집시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앞에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만 잘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교회 3만 명만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환상을 가지고 우리 모두 다시 세상을 향해서 달려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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