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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믿음만큼 중요하다 / 마 7:15~29

by 【고동엽】 2021. 12. 23.
순종은 믿음만큼 중요하다 / 마태복음 7:15~29




이 세상에는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가르쳐야 하고 선생은 제자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르치다 보면 가끔 마음에 염려가 생기고 불안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처럼 힘들게 가르쳐봐야 그대로 살지도 않을 텐데. 가르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도 다 듣고 그만 흘려버리고 말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가르치다가도 맥이 풀리는 일들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아마 이것은 가르치는 선생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라면 한두 번씩 느끼는 감정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무리를 앞에 놓고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이르는 긴 산상수훈을 가르치시면서 마음으로 아마 이런 불안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는데 이걸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아마 이렇게 생각을 하셨는지 산상수훈 마무리를 하시면서 순종에 대해서 아주 강도 높은 말씀으로 끝을 맺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잘 아는 집 짓는 비유를 가지고 순종하는 자와 순종하지 못하는 자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마치 자기집을 반석 위에 세워서 짓는 자와 같다. 나중에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 수고는 영원히 남는다. 그렇게 집을 짓는 자는 지혜로운 자다. 순종하는 자는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다.' 반면에 '말씀을 듣고 배우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무너질 줄 뻔히 알면서도 모래 바닥 위에다 집을 짓노라고 땀 흘리며 온갖 돈을 다 집어넣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무너질 줄 알면서 땀 흘리고 돈 집어넣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 중에 어리석은 사람이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런 자와 같다.' 하고 단단히 못을 박고 순종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5장에서부터 7장에 이르도록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 작은 예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품을 가져야 되며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를 여러 가지 사례와 내용을 가지고 세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잠깐 뒤로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복 있는 자가 되려고 하면 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애통하라고 합니다. 온유하라고 합니다.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를 위해서 핍박도 감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강도 높은 진리입니까?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나서는, 이어서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고 합니다. 노한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추악한 생각에 끌려 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위해서 축복하는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될 때 작은 예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한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그런 외식주의자가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보물을 땅에 쌓고 돈을 하나님처럼 숭상하지 말라고 합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 좁은 길을 걸으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내용을 예수님께서 모두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읽고 고백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는 최고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아래 생명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이외에 우리 인류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은 권세를 가지고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28절, 29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산에서 들은 모든 무리들이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권위가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서기관들의 비해서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습니다. 어두운 마음을 환하게 열어주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런 절대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듣고 배우는 우리가 조금 지나서 다 잊어버리고 흘려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무너질 줄 알면서 땀 흘리고 집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똑같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구원도 못 받는다는 말인가요? 순종 안 하면 구원을 못 받습니까?" 아마 이런 질문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할 확률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21절 말씀을 마음에 잘 담아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것이니라.' 예수님이 무슨 빈말을 하실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오해해서 '순종을 조금 못해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 말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이 더 권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순종하는데 관심이 없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남는 것이 없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못 받을 확률도 있습니다. 그 점을 마음에 꼭 기억하길 바랍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은 믿음만큼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에 대해서 명확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혼란을 겪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가 하나가 저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제 후배가 예수를 믿은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생겼나 봅니다. 그래서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형, 어떤 성경에 보니 누구든지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또 다른 성경에 보면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했는데, 성경에 일관성이 없는 것 같아서 약간 헷갈려요. 선배가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자기도 그 말을 듣고 보니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답을 해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약하고 교리적으로 기초가 잘 안 닦여 있으면 이런 약간의 혼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하고 해결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이 믿음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깜박 놓쳐버리고 제 맘대로 사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잘 못 배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좋지 못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잘 못 배웠거나 좋지 못한 영향을 받으면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은 순종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길게 말씀을 하시다가 마지막에 와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15절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짓 선지자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항상 안과 밖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양들이 풀을 뜯는 목장 주위에는 언제든지 이리들이 여기저기 배회하고 있으면서 양을 덮치려고 기회를 노리는 것은 유대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이 거짓 선지자들을 일컬어서 흉악한 이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리들이 교회 안에 있고 교회 밖에도 있습니다. 이들은 어그러진 말과 잘못된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유인하고 시험합니다.


또 사도 바울의 말을 들으면, 정말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어 예수를 믿었고, 사도의 눈에 들 만큼 신앙생활을 잘 하고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장로로 피택이 되어 초대 교회에 장로가 된 사람들 앞에서 그가 무엇이라고 한 줄 아십니까? '너희들 중에도 이런 흉악한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올 줄을 내가 안다.' 거짓 선지자들은 교회 밖에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생깁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일컬어서 나쁜 나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가 나쁘다는 말은 나무의 질이 근본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근본이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중생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요, 입만 요란하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요, 자기 유익을 위해서 제 맘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가끔 이들이 엄청난 사역을 하는 것을 봅니다. 큰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됩니다. 능력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칩니다. 많은 권능을 행합니다.


이런 잘못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님이 벌써 22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주여주여' 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큰 교회를 목회해서 성공했다는 말 듣는데, 실제로는 전부 거짓 선지자들이요, 이리떼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말세가 되면 더 많아지고 더 기세를 올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근본이 잘못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히 나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지 않습니까? 질이 안 좋은 나무에 질이 좋은 열매 맺히는 것 보셨습니까? 그러면 나쁜 열매가 무엇입니까? 순종 안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나쁜 열매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여, 주여'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주여' 소리를 하루에 얼마나 자주 합니까? 자다가도 '주여, 주여.' 할 정도이고 안 믿는 사람이 보면 청승맞은 것처럼 늘 '주여, 주여'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주여'라는 말은 '왕이시여, 하나님이시여'라는 뜻입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하나님, 나의 왕으로 모십니다. 당신께 절대 충성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명령하십시오.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내 생명도 아끼지 않고 드리겠습니다.' 하는 신하의 맹세가 '주여'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나깨나 '주여, 주여' 했지만 실제로는 순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이 많은 사람입니까? 입으로는 충성을 맹세해놓고는 충성을 하지 않는 겁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이 나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후 100년경에 교회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면서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견디다 못해 한데 모여서 도대체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 구별하기 위해 지침서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소위 그 유명한 '디다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침서를 보면, 거짓 선지자를 골라내는 가이드라인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니라.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니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리고 이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만 행하지 않고 자기만 나쁜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착한 성도들을 유인합니다. 좁은 문 곁에 서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걸어가려는 사람들을 유인해서 넒은 길로 쳐 넣습니다. 이게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넓은 길입니까? '주여, 주여' 하면서 제 맘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넒은 길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신앙생활하고 편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순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이 좁은 길입니까? 순종하고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 값을 지불하려는 각오를 하고 좁은 길을 들어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좁은 문 옆에 서서 그런 길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유혹해내어 그들의 김을 빼고 그들을 오염시켜서 넓은 길로 쳐 넣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하는 짓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거짓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사람들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지 아니하는 안전지대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는 절대 구원 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순종하는 자가 구원 받는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두가 순종을 철저하게 강조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이런 말씀에다가 물을 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권위에 도전해서 제 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물 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거짓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지도자들이 있고, 소위 그런 중진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 잘 믿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을 탄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온유한 자는 목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하는 말씀에 대해 '조금만 약한 것처럼 보이면 짓밟아 버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온유하게 살 수 있나? 그저 성경은 항상 좋은 말씀만 해. 그러나 세상은 세상대로 살아야지. 자동차 접촉사고만 내도 큰 소리치는 사람이 이기는 세상인데 온유해 가지고 어떻게 사나? 그러니 적당히 듣고 새기면 돼.' 하는 것이 물 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원수 사랑하라는 말은 귀가 아프도록 듣지만 정말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 기독교의 이상론이지. 그것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 들이면 사는 것보다 죽는 쪽이 더 행복할 지도 몰라.' 이런 식으로 적당히 들으라고 하는 말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물 타는 사람들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땅에 쌓아놓지 말라. 하늘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면 '성경은 항상 그런 말씀을 하지만 또 성경 다른 곳에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서 날마다 누리고 먹고 마시고 기뻐하라는 말씀도 있던데. 그러니 성경의 어느 한 곳에만 너무 신경 쓰고 볼 필요가 없이 골고루 봐야 돼.' 라면서 그저 손에 들어오는 대로 자기 배를 위해 살고, 즐기면서 인생을 재미있게 보내는 데다 모든 정욕을 다 쏟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순종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무관심하고 관심이 있어도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물 타는 사람들입니다.


'믿으면 구원은 얻는다고 그랬어.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는다고 그랬어. 그런데 무얼 자꾸 순종하라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선행을 이야기 하면 오히려 그것은 복음의 정신을 해치는 거야. 복음과 충돌하는 말이니까. 그러므로 순종에 대해서 너무 그렇게 주장하지 마.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순종할 사람이 천하에 어디에 있어? 그것은 좀더 거룩하게 살라는 취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과도하게 신경 쓰지 말고 믿기만 하면 돼.'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물 타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다 거짓 선지자들의 부류에 속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 주변을 잘 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가르치는 지도자들로부터 여러분이 영향을 받지 않았나요? 그런 생각을 하고 세상을 살면서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하고 여러분이 짝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밤낮없이 기도한다며 성경을 끼고 교회를 드나들면서, 열심히 '주여, 주여' 하지만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집안에서 냄새 피우고 교회 안에서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 그 인격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못하면서도 잘 믿는 것처럼 스스로 교만해 있는 사람들, 이 모두가 거짓 선지자들이 될 확률이 대단히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 정말 무서운 해를 받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오염되어 닮아갈 위험이 대단히 높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에 물을 타서 기독교의 진리를 값싼 복음으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을 우리는 조심해야 됩니다. 그들의 영향권에서 우리가 놀아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믿는 대로 순종하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갑자기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믿음과 순종의 관계를 좀더 철저하게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 이것은 나무와 열매의 관계와 같다고 하십니다. 좋은 나무이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참 믿음은 반드시 순종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불변의 법칙입니다. 봄에 과수원에 가서 한참 파릇파릇한 잎이 날 때 그 잎을 보고, 혹은 꽃이 필 때 그것을 쳐다보고, '야, 이 사과나무 참 질이 좋은 사과 나무구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무얼 보고 그렇게 장담합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나무의 모양이 보기에 탐스럽게 생겨도, 꽃이 봉우리 봉우리마다 아름답게 피어도 그것을 가지고 질이 좋은 사과나무인지, 질이 나쁜 사과나무인지 모릅니다. 결국은 가을에 가서 탐스럽게 익은 사과를 하나 따서 먹어보고 '와! 당도가 대단하구나! 이것 정말 질 좋은 사과나무구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영적이고 내면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봐서는 모릅니다. 이 사람의 믿음이 좋은 믿음인지, 참 믿음인지, 거짓 믿음인지 얼른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려면 얼마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느냐를 보아야 합니다. 순종하는 삶을 보는 것은 실제적이요, 외적이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는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의 믿음이 진짜다.' 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좋은 과실이 열리는 나무를 보고 좋은 나무라고 하듯이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의 믿음을 보고 좋은 믿음, 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잘못 믿는 사람입니다. 순종합니까? 바로 믿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16장 26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시는 목적이 분명히 모든 민족으로 믿게 하고 순종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도록 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순종케 하기 위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순종은 떼 놓으면 안됩니다.


야고보서를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노라,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 믿음이 능히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또 2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또 26절에 더 우리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과 행함의 절대적인 관계, 이것을 얼마나 명료하게 말씀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야고보서의 이런 말씀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로마서의 말씀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충돌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충돌이 아니고 조화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씀과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야고보서의 말씀은 충돌이 아니라 보완이요, 조화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산 믿음이라고 강조를 많이 합니다. 야고보가 지금 무엇을 행하라고 하는지 1장부터 마지막까지 읽으면서 리스트를 만들어 보십시오. 무슨 대단한 것을 행하라고 할 것 같이 생각되는데, 막상 야고보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으면서 보면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사람은 자기 혀를 재갈 먹여야 하느니라.'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일 줄 몰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상처주고, 가끔 거짓말도 잘 하고, 가는 곳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생활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혀를 재갈 먹이지 못하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면서 자기는 예수 믿는다고 떠들고 '주여, 주여' 한다면, 뒷집의 강아지도 웃을 일이 아닙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믿음도 실천을 못하면서 그 믿음을 믿음이라고 하겠어요?


고아나 과부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안 믿는 사람도 빠듯한 생활이지만 그들을 도우려고 하는 판국인데,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얼굴을 싹 돌립니까? 그래 놓고 믿는다고 하면, 그 믿음을 믿음이라고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또 야고보는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합니다. 믿는다면 세속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도 뭐가 이상한 것입니까? 우리가 다 세상에 나가서 사회생활을 하면, 온통 세상의 구정물이 우리를 덮치고, 무서운 탁류가 흘러내려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하고, 저같이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뒤에 따라오는 목사들이 고생할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합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라나는 사람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여, 주여' 하면서도 딸이 시집가서 고생하면 "얘, 그만 살아. 요새 세상에 무얼 그렇게 힘들게 사니? 아직 젊을 때 이혼하면 또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어. 내가 그것 위해 기도할게. 그만 살아." 만약에 이런 식이라면 나도 모르게 세속으로 생각이 끌려 가는 것입니다. 자, 이런 사람을 놓고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세상에 물들어가면서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믿음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야고보는 또 말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말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아마 그랬나 봅니다. 교회 안에 아주 값비싼 보석으로 줄줄 달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을 보면, 제일 앞의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허리를 굽실굽실하면서 안내를 하고, 반면에 냄새가 나고, 남루한 옷을 입고 나오는 사람을 보면 저 뒤로 인도해서, 기둥 뒤에 어쩌다 한자리 남아 있으면 거기 앉으라고 했었나 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교회 안에서 그런 식으로 사람을 차별한다면 그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까? 산 믿음입니까?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입니까? 저는 야고보가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해서 행하는 일이 굉장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야고보서를 다 읽어보니 결국 그런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정도도 실천을 못하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순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이면에는 믿음과 순종 사이를 이간시키는 복병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면서 정답만 알면 제대로 배운 것처럼 간주해버리는 교회 문화에 젖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나의 생활에 얼마만큼 적용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아니하는 교회 문화에 오랫동안 젖어 왔습니다. 정답만 알면 그 사람은 바로 믿는 사람이고, 바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해주는 교회 문화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문화입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얻은 진리의 정보는 삶으로 그대로 이어져, 같이 동행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아,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정보인데,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그 정보가 틀린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 사실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 그것은 벌써 순종이 따르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은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것은 트로이 성을 함락시킨 목마와 같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복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국의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에 대해 감탄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참 낯부끄러운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별히 데니스 레인과 같은 사람은 10여년 동안 우리 한국을 드나들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국 교회의 장점이 두 가지 있다. 뜨거운 기도와 헌신이다. 그것은 내가 인정해준다. 그러나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면서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비어있다.' 얼마나 낯부끄러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이 말을 바꾸면 순종이 빠져있는 신앙생활에 열을 올린다는 말입니다. 이게 한국교회라는 것입니다. 순종이 빠져있는 신앙생활에 열을 올린다면 이런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순종 안 하는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얼마나 들으실까요?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헌신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이사야서 1장을 돌아가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존재로 보시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있어서 순종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무언가를 우리가 믿는다면 그 믿음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습니까? 믿으면 그 믿음이 진짜 사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무엇이 따라가야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라 그 말입니다.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 행동에서는 전혀 그 믿음의 어떤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의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는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위대한 신학자 본 회퍼는 "믿는 자는 순종하며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산상수훈을 주시면서 순종할 것을 다짐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닮을 수가 있다니! 나같이 하루살이와 같고, 하나님 앞에 원수 된 존재가 예수님을 닮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과 딸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한가지 알아두십시오. 믿음으로만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믿음과 순종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제 맘대로 욕정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그는 예수를 닮을 수 없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모습으로 닮아갑니다. 이것은 엄청난 영광이요, 특권입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멍청하고 바보같이 보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믿음과 순종을 통해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이 길이야 말로 마지막에 영생이 있는 길이요, 영원토록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축복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주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순종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만이 아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진짜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황폐화됩니까? 왜 침체됩니까? 왜 기쁨이 없습니까? 평안이 없습니까? 기도를 안 해서입니까? 물론 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순종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게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부터 아는 참 아름다운 자매입니다. 그는 믿음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믿음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가정에 정말 화해하기 어렵고, 마음을 열기 어려운 식구가 있었습니다. 수 십년 동안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원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수 십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이 자매는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며칠 전에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요즘 몇 달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큰 물결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의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살 정도로 정말 행복합니다. 그래서 제가 '야, 이거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읽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용서하는 마음 속에 그 동안 미워하던 그분에 대해 잊고 살았던 감사를 생각하도록 하셨고, 그분을 위해 가슴 찢어질 듯한 애틋한 사랑으로 축복 기도를 하도록 주님의 손길에 그저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미워하던 분을 용서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오히려 그분 때문에 감사하게 되고, 축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너무 감사하고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하니 사랑해봤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라고 하니 용서해봤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너무나 놀라운 은혜가 그에게 임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합니다. '언젠가 목사님이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랑이 얼마나 강합니까?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사랑은 서로 위로하는 것, 사랑은 서로 용서하는 것, 사랑은 서로 인내하는 것, 사랑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하신 설교 말씀을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요. 이렇게 잘 배워 제 생활 속에 기쁨과 감격을 주신 목사님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를 드리고 싶었고요, 부끄럽지만 이 변화된 마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순종했더니 은혜의 파도가 그 마음에 밀려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느끼지 못하던 감사가 꽃이 피고, 기쁨이 샘처럼 솟고, 그 영혼이 힘을 얻어서 하늘을 향해 날개를 치듯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너무도 비참하게 만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오히려 우리는 훨씬 더 편한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그 길은 너무나 험하고 너무나 많은 손해를 보는, 다시 말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가 몽땅 무너뜨리고 주저 앉는 신앙생활일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좁은 길처럼 힘들어 보여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의 파도가 우리 안에 밀려들어 우리를 새사람으로 행복한 신앙생활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알아두십시오. 신앙생활의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갈림길은 순종에 있습니다. 행동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꼭 기억하십시오. 순종은 믿음만큼 중요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산상수훈의 마지막 결론이요, 예수님의 엄숙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꼭 기억하고, 이 말씀대로 우리 모두가 사는 행복한 주의 제가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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