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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 엡 1:3

by 【고동엽】 2021. 12. 23.

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 에베소서 1장 3절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사랑의교회 주변에 있는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오는 큰 부흥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사랑의교회 때문에 예수 믿었습니다. 사랑의교회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두 손 들어 환호하고 자랑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민 가운데 교회를 시작하고, 5년 후인 1983년도부터 대각성전도집회를 열었습니다. 지난 19년 동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 복음을 들은 태신자 수는 30,000명을 웃돕니다. 그 가운데 17,000여명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겠다고 일어서며 카드를 제출하는 등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아름답고 귀한 일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10명 중 4명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만일 사랑의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무관심하다든지, 믿는 성도들만의 교회를 꿈꾼다면 이미 그 교회는 존재가치를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그리고는 한평생 복음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도 사도들과 지상교회를 향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28:19, 막 16:5).

 

그러므로 교회가 크다고 해서 전도에 무관심합니까? 그렇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당장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영원한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안 믿는 영혼들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애절한 연민의 정이 마음에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병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이 탄식하는 심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생명인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윌로우크릭교회라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미국 교회 중 가장 세계적으로 알려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으로는 우리 교회보다는 좀더 오래됐지만, 규모상으로는 우리 교회 정도의 대형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특징은 지금까지 28년 동안 믿지 않는 이웃들을 전도해서 오늘의 교회를 이뤘다는 점으로, 아주 능력 있고 열정적인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실은 약 4,000석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약 4,500~5,000명이 앉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미국 목사님들은 한 주에 두 번 이상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교회처럼 사람이 많아 5부까지 예배를 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무조건 예배당으로 들어와 예배를 드려야 하므로 비디오실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따라서 4,000석 되는 예배당이 모자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고민 끝에 얼마 전 그 교회의 하이벨스 목사님은 옆에 있는 땅에 7,000석 교회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기공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마침 그 자리에 남가주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도 참석을 했었는데,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만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교회를 우리가 수천 억불을 들여서 짓기로 했는데, 이를 통해 우리 지역에 아직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고, 그들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하면서 그 목사님이 눈시울을 적시더라는 것입니다.

 

수천억 불에 이르는 막대한 돈을 투자하더라도 한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 지역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방황하는 심령들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거듭나며 새 삶을 시작하는 능력이 나타날 수만 있다면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참 필요한 자세입니다. 그만큼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우선해야 됩니다.

 

이제 대각성전도집회를 약 1달 반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이 기간은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확신한다면 아직도 구원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빚진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몇 가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좋아야 합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안 좋은 것을 어떻게 남에게 권할 수 있습니까?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어도 내 입에 맞고 좋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식당을 소개하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믿고 발견한 이 예수가 너무나 좋아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나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돈에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만큼 수전노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자 구원 받았다는 것이 너무나 좋아 돈에서 마음이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있는 돈을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막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희한한 일이 교회 안에 일어났습니다. 돈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돈에서 마음이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보고 싶어서 날마다 모이는가 하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행복한 모습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지켜보았습니다. 어제의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부터 그들의 표정, 말, 삶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한마디로 너무나 행복한 사람들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는 말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칭송을 받았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 하루하루 지겨워서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보이더니, 예수 믿고 나서 저렇게 밝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네. 뭐가 있기는 있나 봐.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좋은가?" 하고 말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도 한번 믿어봅시다." 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만 하면 "그래요. 한번 믿어볼게요. 당신처럼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나도 믿어볼게요." 하고 교회로 들어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표정은 밝아야 합니다.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행복해야 합니다. 조금 가난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질병으로 고생을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보다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우리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의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나가는 모든 성도들의 표정이 마치 천국에 들어갔다가 나가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길 건너편 술집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술 먹고 기분 좋아하는 우리보다 더 행복해 보이네."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을 그들이 귀담아 듣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구원의 축복을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해 하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자기가 3년 동안 애써서 개척한 에베소 교인들을 마음에 두고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회를 얻어 그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 앉아서 펜을 들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가 얼마나 기가 막힌 복인가를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송하리로다.' 이 말은 '하나님이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좋은 복을 우리에게 주시다니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말한 후 이 복들이 어떤 복인지를 단순에 써 내려간 것입니다. 가슴에서 샘이 터져 나오듯 너무 흥분해서 정신없이 써내려 갔습니다. 그래서 3절부터 14절까지 한 문장으로 썼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번역 성경에서는 알기 쉽게 몇 절로 나뉘어 있지만 원문에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너무 흥분해서 막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복을 '하늘에 속한 복이요. 신령한 복이요.'이라는 두 마디 말로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하늘에 속한 복이란 말 그대로 땅의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땅에 살면서 얼마 동안 손에 쥐고 누리는 복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구원 받은 백성만 누릴 수 있는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이 얼마나 기가 막힌 지 성경에 보면 짤막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을 따라 산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하얀 옷을 입은 천사처럼 그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나라에 있어야 될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내려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하늘이 잠깐 제자들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늘의 문이 잠깐 열린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하늘의 그 황홀한 장면을 잠깐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있었습니다. "주님, 여기가 좋습니다. 내려가지 맙시다. 오두막을 짓고 살아도 여기가 좋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주님이 이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원 받았다'는 말은 '하늘에 속한 복을 얻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신령한 복'이란 말 그대로 육적인 복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 말씀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신령한 몸' 하면 우리는 육의 몸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으로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건강, 장수, 쾌락, 성공과 같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명성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 몸을 입고 영원히 즐길 수 있는 복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대해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에서 좀더 세밀하게 3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신분과 죄 사함 받는 축복, 마지막으로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누릴 기업의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이 이것을 써 내려가면서 흥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잠시 바울을 지키는 간수의 입장에 서 봅시다. 로마 감옥에서는 죄수들에게 간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죄질이 나쁜 죄수에게는 간수를 1:1로 붙여놓는다고 합니다. 또 죄수의 손에 쇠고랑을 채우고, 그 쇠고랑을 간수가 차서 감금하는 방식이 당시 로마 감옥의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바울을 그렇게 까지 감금하진 않았다 해도 그를 감시한 간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속으로 '불쌍한 사람, 어쩌다가 저 꼴이 되서 감옥에 들어왔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운명을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평생 그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재판 받은 후 사형장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실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인데, 오히려 펜을 들고 '찬송하리로다.'라고 편지를 쓰는 그의 표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쩌면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그 눈에 눈물이 흘렀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글을 쓰다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하나님,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큰 소리로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를 간수가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무엇이 저 사람으로 하여금 저렇게 행복하게 만들까? 무엇이 저 사람의 얼굴을 평안하게 만들까? 나에게 없는 것이 어떻게 저 사람에게 있을까?' 이런 이유로 바울 곁에 접근했던 감옥의 간수들이 예수를 믿고 많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행복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안 믿는 사람에게 예수를 이야기할 때 그들의 마음을 끌 수 있습니다. 너무나 좋은 것이 예수 믿는 것 아닙니까? 구원 받은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겠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은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 좋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교인들은 핍박으로 인해 마치 북한에 있는 성도들처럼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가족과도 흩어진 채 갑바도기아 같은 곳에서 토굴을 파고 들어가 살면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전서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기뻐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찾아와 도리어 질문하곤 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기뻐합니까? 당신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만큼 그들은 달랐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이런 큰 기쁨과 감격이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평생의 꿈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복을 받아서 건강하고, 장수하고, 부자가 되고, 자녀들이 번성하며, 명예와 권력을 누리게 되는 축복을 소유하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구약 전체를 보면 모든 초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 요르단, 이스라엘, 시리아가 있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가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 있습니까? 그 땅에 들어가서 장수하고 건강하고 재산과 복을 누리기 위해 예수 잘 믿는 사람 있습니까? 떡 반죽이 복을 받고, 광주리가 복을 받고, 들판에 나가도 복을 받고, 집에 들어와도 복을 받는 등 그 땅에 들어가서 누릴 모든 복을 다 얻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내용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 다시 말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하나의 예비적인 시청각교육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건강하기 위해서 예수 믿고, 오래 살고 싶어서 신앙생활을 잘 한다면 어이없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건강하고 싶으면 안 믿는 사람들 세계에 가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 장수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수백만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던 스탈린도 74세까지 살았습니다. 알다시피 김일성이나 모택동도 80세 이상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1호라 할 수 있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도 88세까지 살았습니다. 20세기 지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반 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많은 젊은이들을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버틀란드 럿셀도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또한 히틀러에게 매료되어 나치 정권을 미화시키는 영화를 제작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혹했던 여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역시 금년에 100세입니다. 지금도 건강한 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일찍 세상을 떠나야 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오래 살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고 거드름을 피우며 사는 재벌들에게 배우는 것이 낫습니다.

 

요즘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어느 부부를 아실 것입니다. 남편은 변호사요, 아내는 의사인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부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버는지 우리는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부부가 한달 수입을 70만원으로 신고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금을 포탈하여 돈을 모아서는 재건축 아파트 17채를 전부 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전세를 얻으려는 돈 없는 서민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올려서 착취하고 자기의 호주머니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책임이나 이웃을 배려하는 양심, 자손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책임이 있어야 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돈을 모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돈을 모으려면 그런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니면서 항상 생각은 세상적인 것, 육적인 것을 가있어서 건강하고, 장수하고, 돈 벌고, 자식 잘 되는 것만 기도한다면 하나님도 머리가 아플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받는 복을 겨냥하여 기독교를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 100년 동안 기독교에 큰 해를 끼친 지성인 중 한 사람인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말이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는 소원성취다."라면서 빈정거렸습니다. 또한 "기독교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고안해 낸 하나의 환상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이렇게 천박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그런 사례가 많습니다. 외국에서 발표한 의학연구 결과에 의하면, 교회를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신앙에 따라 일관성 있고 경건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훨씬 잘 산다고 합니다. 그들의 자손들도 잘 됩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가 그것입니다. 그는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요, 목사요, 부흥사였습니다. 그의 부인 사라는 자녀를 11명이나 키웠는데, 이로써 자손들이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00여년 지난 1900년도에 학자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손들을 분석하여 놀라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의 후손 1,400명 가운데 대학총장이 13명, 교수가 65명, 변호사가 100명, 판사가 30명, 의사가 66명, 부통령, 지사 등의 고급 공무원이 80명이나 되어 총 30%가 넘는 사람들이 사회와 국가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경건한 가정의 자녀들과 후손들은 잘 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해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잘 믿으면 건강의 축복도 받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치고 알코올 중독자가 있습니까? 믿음 생활을 잘 하는 사람치고 날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골초를 봤습니까? 믿음 좋은 사람치고 마약에 손대는 사람을 봤습니까? 믿음 좋은 사람치고 여자들 뒤를 따라다니며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건강이 좋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를 보면 동맥경화증으로 죽을 수 있는 확률을 비교해 보면 안 믿는 사람이 10명 죽을 때, 믿는 사람은 6명 죽는다고 합니다. 폐기종으로 죽을 수 있는 확률은 안 믿는 사람이 10명 죽을 때, 우리는 약 5명 죽는다고 합니다. 또한 간경화로 죽을 수 있는 확률은 안 믿는 사람이 10명 죽을 때, 우리는 2, 3명 죽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건강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잘 믿으면 결혼생활도 훨씬 행복합니다. 어떤 여론조사에서 "만일 당신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살고 있는 남편 또는 아내와 다시 결혼하겠는가?"라고 질문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결혼하겠다고 대답한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이 2배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믿는 사람의 가정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적인 것, 세상적인 것도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정말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짜 복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복을 성경에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육적인 복들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복들입니다. 어쩌다가 받을 수 있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약속한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바울이 너무나 좋서 소리쳤던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얻은 구원입니다. 이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에 속한 육적인 복을 우리에게 약속하시지 않았을까요? 한마디로 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을 들어서 세상적이고 육적인 복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폭로하셨습니다.

 

알다시피 솔로몬은 이 지구상에 태어난 사람 중 가장 부귀영화를 많이 누린 사람입니다. 모든 지혜자들을 능가하는 뛰어난 지혜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스스로 한번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고 고백합니다. "내 눈으로 보아 좋은 것은 다 내가 소유하리라. 내 마음에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 해보리라. 그래서 무엇이 인생의 즐거움인지, 무엇이 인생의 쾌락인지 내가 알아보리라." 그리고는 자기가 마음에 원하는 것은 다 했습니다. 심지어 아내도 300명, 후궁까지 합하면 1,000명의 이르는 미인들을 거느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1) 바람을 한번 잡아 보려 하십시오. 잡는 순간 빠져나가 버립니다. 순간적인 쾌락, 명성, 부요, 모든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다 지나고 보니 마치 바람 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상당히 지혜로운 것 같았는데, 사실은 조금 어리석습니다. 경험하기 전에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다 해 놓고 나서 알았다고 합니다. 사실 다 해보고 나서 그 헛됨을 알게 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을 보면 인생이, 또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복들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가치한 것인가를 깨닫기가 너무 어려운 것을 봅니다. 10대와 20대에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며 인생을 삽니다. 30대, 40대가 되면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경력을 쌓고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데만 급급합니다. 50대가 되어서도 굽이쳐 흘러가는 세월의 급류소리를 듣지 못한 채 그 때를 넘겨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60대가 넘어갑니다. 머리에 흰 서리가 앉고 얼굴에 주름이 패이고 뱃살이 두터워지고 숨이 가빠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하는 말이 자꾸 튀어 나오는 그 때가 되면 비로소 '아, 인생이라는 것이 별거 아니구나.'를 깨닫는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그 후에야 깨닫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늦게 깨달았든 빨리 깨달았든 간에 인생의 진면목, 곧 세상에 있는 육적인 것의 실체를 보기 시작하면 허무함이 가슴을 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아주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성공적인 인물로 모든 것을 다 손에 쥐고 누려본 사람입니다. 1961년 7월 2일 주일 아침, 그는 아이다 호에 있는 자택 로비에 앉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좋아하는 말, '무로부터 무에 이르는 짧은 날의 여행이 주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평소 그가 사용하던 총을 들고 나와 탄환을 놓고는 개머리판을 바닥에 고이고, 총구를 입안에 넣어 방아쇠를 당겨버렸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손에 쥐고 누렸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인생의 끝을 낼 정도로 지루해서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저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로 묵상하다가, 또는 조용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구원을 값없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절로 소리가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너무나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나도 모르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감격이 막 치밀어 오릅니다. 돈이나 명예, 오래 사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어떤 세상의 것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이 구원,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주셨다는 것만 생각하면 그저 황홀해집니다.

 

우리가 이런 감격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야 얼굴이 달라지고 세상 사람보다 행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 믿으세요." 하는 말 한 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감격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 감격을 가지고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복이기에 저는 사도 바울처럼 자주 기도합니다. 17절 이하에 바울이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좀더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이여, 나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이 주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이여, 하나님나라에서 우리가 누릴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가를 좀 더 가까이 가서 볼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이여,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가를 좀 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는 이 좋은 복을 주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것입니다. 더 가까이 가서 그 복을 들여다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것만큼 더 행복한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무한 세상의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영원한 것을 향해 남은 생을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무한 것에 매달려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내가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려면 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은혜를 내 마음에 간직해야 됩니다. 이런 복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당당하게 나아가서 "예수 믿으세요." 하고 말할 수 있는 내면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한 주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감사합니다. 아무리 쌓고 즐기고 과시를 해도 결국은 바람을 잡는 것 같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오히려 약속하지 않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새 몸으로 누릴 수 있는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귀한 복을 우리가 지금 손에 쥐고 있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마음에 이 귀한 축복을 간직하고 세상을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옵소서. 이 복이 얼마나 놀랍고 황홀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옵소서. 우리의 감정을 풀어주시옵소서. 우리의 어두운 눈을 주님께서 밝혀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행복한 얼굴로 우리 주변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이번 대각성전도집회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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