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니느웨 입니까?/ 요나1:1-2, 4:5-11
매일 매일 세상을 살면서 우리 하나님 생각을 몇 번이나 하십니까? 여러분 마음에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간직하고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합니까? 아마 여러 번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주로 어떤 이미지입니까?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랑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입니다. 저에게도 그렇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있는 말씀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시죠.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참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너를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를 볼 때마다 누구 누구야 이름을 불러주시며 기뻐하시는 하나님, 생각만 해도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좋아합니다.
찬양 가사 중에서도 특별히 자비로우신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고 끝까지 내 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하면 그 하나님의 품에 얼굴 파묻고 안기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요나서는 이처럼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너무나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특별한 대우를 하시는 것도 아니요, 니니웨 사람이라고 해서 천대하는 것도 아니고, 악하다고 밀어내고, 선하다고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리지 아니하고 무조건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무한한 자비를 가지고 우리를 감싸주시고 자기 품에 안으시는 하나님을 이 요나서가 보여줍니다. 동시에 영원한 자비를 갖고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을 인간이 얼마나 오해하기 쉬운가 하는 것도 이 요나서가 또 중요한 교훈으로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요나를 찾아가셨습니다. 너는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라.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쳐서 외치라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이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앗수르는 세계 역사를 주름잡던 대국입니다. 요나에게 지금 앗수르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대단히 악하기 때문에 내가 가만히 둘 수가 없다. 너는 그곳에 가서 먼저 경고를 해라. 회개하라고 외쳐라. 다행히 회개하면 내가 그 성을 구원해 줄 것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그 성을 멸할 수 밖에 없다. 너는 가서 외쳐라.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을 들은 요나는 기겁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혼란에 빠져 버렸습니다. 마음이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나가 속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신명기 7장 6절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만민 중에서 내가 너를 나의 선민으로 삼았다. 그 다음에 또 굉장한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만 사랑한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니느웨입니까? 왜 앗수르 사람입니까? 요나가 생각할 때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만 사랑한다고 해 놓고 왜 갑자기 니느웨란 말인가? '저 남자가 나 하나만 사랑하는 줄 알고 약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랑하는 여자가 또 있더라.' 그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여자가 안 되어봐서 모르지만 기분이 묘할 것입니다. 아마 잠을 못잘 겁니다. 비슷한 감정을 요나가 지금 느끼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이러나?'
더욱이 앗수르 사람들은 굉장히 잔인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장 2절에도 그 악독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훔서 3장 1절에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놓고 피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가 흐르는 성, 무죄한 자의 피가 밤낮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궤휼이 심하고 늑탈이 심하고 강포가 가득한 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잔인하고 악한 니느웨 사람들을 하나님이 왜 불쌍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발굴된 옛 페르시아의 기념비를 보면 이런 글들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전쟁을 해서 정복을 하면 정복 당한 성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잡아 입을 강제로 벌려서 혀를 뽑았다고 합니다.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땅에 네 개의 말뚝을 박아 놓고는 사지를 짝 펴서 거기에 매어 놓고 비수를 가지고 살점을 뜯어 냈다고 합니다. 정말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포악하고 잔혹한 백성이었습니다. 이런 백성을 하나님이 염려하시고 불쌍히 여겨서 망하지 않도록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요나에게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앗수르 사람, 니느웨 사람이라면 망해야 마땅하다고 요나는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가만히 생각하니 염려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4장 1절을 한번 봅시다.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하라고 외치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뀌었습니다. 요나를 불러서 '니느웨 사람들 보았느냐? 자기 죄를 회개하고 내 이름을 부르고 있지 않느냐? 내가 이제 멸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4장 1절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심히 싫어했습니다. 정말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났습니다. 노하여 하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런 분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할 때 하나님이 이런 분인 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안 가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걱정이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런 족속들, 저런 인간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해.'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데, 자기가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을 듣고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두 말 하지 않으시고 마음을 바꾸고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 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요나는 더 혼란을 겪었고 또 빨리 그 명령에 순종하지를 못했습니다.
생각다 못해 도망 가다가 결국 코가 꿰어서 다시 니느웨로 돌아와 성을 돌아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 후에 하나님이 이 성을 멸하신다고 하셨느니라.' 그런데 한 사람이 외치는 이 말에 온 성 사람들의 마음이 가랑잎 흔들리듯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왕으로부터 다 회개가 시작됐습니다. 요나가 다니면서 이렇게 외칠 때 요나의 마음은 어떠했다고 상상합니까? 입으로는 회개하라. 살고 싶으면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속으로는 '이 놈들, 망해라. 망해. 회개하지 마라. 회개하지 마라.' 하고 돌아다녔을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자기의 크기에 맞추어서 축소시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온 우주의 모든 죄인,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잔인한 사람들이라도 다 품으시고 용서해 주시는 자비인데 요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마음을 자기의 마음과 맞추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손을 좀 봐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손을 보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즉, 특별 교육을 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나서, 니느웨 사람들이 비록 회개는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또 마음을 바꾸어 이 성을 멸하실 지도 모르기 때문에 구경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성 동쪽의 조그마한 언덕 위에다 나무를 얽어서 초막을 지어 놓고는 그 자리에 앉아서 성을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앗수르가 있던 지금의 이라크 지역은 사막성 기후입니다. 낮이면 이글이글 타는 햇살이 사람을 반쯤 죽여 놓습니다. 게다가 요나는 대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대머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요나는 도망 가다가 큰 물고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3일을 살다 나왔잖습니까? 그 뜨거운 위장 속에서 3일을 견뎠으니 털이라는 털은 몸에서 다 빠졌을 것입니다. 닭을 잡을 때 뜨거운 물에다 푹 잠갔다가 빼 내면 털이 금방 쑥쑥 다 빠집니다. 그것처럼 요나는 아마 고기 배 속에서 익어 털이 완전히 다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머리가 완전히 대머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대머리가 되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습니다. 무엇인가를 쓰고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손을 좀 봐 주기로 작정하시고 일부러 뜨거운 볕을 그 머리에 쏘이셨습니다. 그러자 너무나 고통스러워 합니다. 저녁이 되어서 하나님이 박 넝쿨 하나를 그 초막 옆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적적으로 빨리 자랐는지 하룻밤 사이에 그 초막을 완전히 덮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박 넝쿨이 초막을 다 덮고 있었습니다. 햇살이 안 들어 오니 시원하지 않았겠습니까? 어찌나 좋았든지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하나님께서 벌레를 보내셔서 박 넝쿨을 씹어 먹게 만들었습니다. 밤 사이에 박 넝쿨이 노랗게 말라 버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박 넝쿨이 다 말랐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하나님, 죽여 주시오, 죽여 주시오.' 요나서에 나타나는 그의 성격을 보면 날마다 죽는다고 소리 하는 선지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비위가 상하면 죽는다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도 죽는다는 소리를 잘 하는 사람은 다 요나의 후예들입니다.
성을 내면서 죽고 싶다고 하는 요나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4장 10절, 11절입니다. '요나야, 네가 너 박 넝쿨을 키운다고 수고한 것이 있느냐? 네가 키우느라고 거름을 주는 고생을 한 일이 있느냐? 하룻밤에 자연스럽게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그렇게 아끼고 정을 주느냐? 그것이 말랐다고 그렇게 네 마음이 아프냐? 네 마음이 그렇다면, 내 마음을 좀 이해해 다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 다시 말하면 앞 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 애만 해도 12만 명이요, 거기에다가 육축까지 많이 있느니라. 내가 이 성을 불쌍히 여기고 아끼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너는 박넝쿨 하나를 놓고도 그렇게 애가 타서 못 견디는데 나는 이 성에 있는 수십만 명의 영혼을 놓고 애가 안 타겠느냐? 그대로 두면 망하겠는데, 내가 가만히 둘 수가 없는 악인들인데, 그들을 어떻게 망하게 내가 내버려 두겠느냐? 그래서 내가 너를 보내려고 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이 놈아?.' 틀림없이 호통을 맞았을 것입니다. 요나서는 자기가 썼기 때문에 호통 맞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 썼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위대하십니다. 정말 자비하십니다. 긍휼이 무궁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 사람도 소중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오늘 예배 드리는 우리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밖에서 니느웨 사람처럼 온갖 악한 짓을 다 하고, 온갖 더러운 짓을 하면서 그 속에서 썩어 가는 저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소중한 존재로 받아 주십니다. 이것이 요나서가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이 놀랍고 무궁한 자비는 신약 성경에 와서 요한복음 3장16절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 한 가지가 나옵니다.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 속에는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성공한 자, 성공하지 못한 자의 차별이 없습니다. 피부색을 가지고 하나님이 구별하시지 않습니다. 모두를 똑같이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자비요,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떠한 조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자비는 온 우주를 가득히 채우고도 남는 풍성한 자비입니다. 요나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 자비 앞에는 못 나올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 못 믿을 사람이 없고, 용서 받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자비 앞에서는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다 똑같이 사랑 받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 밑바닥에 요나의 심보를 늘 숨기고 있습니다. 좀 더 악한 사람, 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선하지 못한 사람, 속으로 이렇게 구별하면서 전도할 때도 골라 잡아 전도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정말 저것은 안 되겠어. 저런 인간이 인간이야?' 하고 욕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예 복음을 전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저는 몇 년 전에 발견 했습니다. 지존파를 기억하십니까? 인간 되기를 포기한 악당들이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잡히고 나서 우리 교회 집사들님이 저에게 오셔서 '지존파를 전도하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허락해 주시고 교회에서도 협조를 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그때 문득 내 마음에 고개를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지존파에게 전도를 해? 꼭 그래야 되나? 그런 악한 인간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 돼?'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스쳐 지나가는데, 그 짧은 순간의 생각이었지만 얼마나 강렬했던지 저를 흔들었습니다.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전도하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집사님들을 내보내 버렸습니다. 목사의 마음도 이렇습니다. 요나의 심보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니느웨 사람인가? 하필이면 니느웨 사람을? 뭐가 답답해서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불쌍히 여기느냐?' 이런 마음이 저에게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된 요나의 마음, 요나의 심보를 고쳐야 비로소 하나님의 자비를 이 세상에 마음껏 증거하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달라스 윌라드라고 하는 남가주 대학의 교수가 계십니다. 참 은혜스러운 책을 여러 권 쓰신 아주 탁월한 작가입니다. 이 분이 8복을 이야기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외모가 눈에 거슬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악취가 나는 자 복이 있나니, 몸이 뒤 틀린 자 복이 있나니, 보기 흉한 자 복이 있나니, 기형인 자 복이 있나니, 비만증에 걸린 자 복이 있나니, 난쟁이 복이 있나니, 헛소리 하는 자 복이 있나니, 대머리가 복이 있나니, 뚱보가 복이 있나니, 늙은이는 복이 있나니, 모두가 예수의 잔치에서 요란한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니라.' 하나님 앞에는 사람 구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윌라드가 지금 예를 든 이 사람들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조금만 눈높이를 낮추고 사회의 그늘 진 곳들을 찾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극빈자가 있습니다. 사기꾼이 있습니다. 미혼모가 있습니다. 성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에이즈 감염자, 동성 연애자, 말기 암 환자, 전과자, 파산 당한 자, 날마다 짖어 대는 개를 키우면서 이웃 사람들을 괴롭히는 아파트 주민, 그리고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해 가지고 고약한 술 냄새를 피우면서 잠에 곯아 떨어진 비행기 안에서의 바로 옆 좌석의 승객, 이런 사람들, 도대체 쳐다 보기도 싫고 마음을 주기도 싫고 말을 건네기도 싫은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오늘의 니느웨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불러서 시킬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서 '너는 가서 그 사람들이 망하지 않도록 해야 되지 않겠니? 예수의 복음을 전해라. 나 하나님이 그를 사랑한다고 말 좀 전해 주어라.'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각하게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폐기처분 당하기 직전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하기도 하고 인간 대우를 해 주지 않을 때도 너무나 많은 이들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신앙이 좋아서 주일이면 교회에 모여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찬양하는 사람들을 VIP로 대우할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는 목사, 교역자를 VIP로 대우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면,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읽으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VIP로 대우해야 될 고객은 따로 있습니다.
여러분이 읽어 보았는지 모르지만 '1분 관리자' 라고 하는 책을 써서 갑작스럽게 유명해진 캔 블랜차드 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만든 신조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역삼각형 피라미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업에 관한 이야기지만 인터넷 혁명이 일어나기 전, 정보 사회가 오기 전에는 기업이라는 것이 뻔했습니다. 삼각형을 피라미드처럼 앉혀 놓은 것 같은 구도 속에서 사업을 했습니다. 그러면 앵글의 제일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경영자 아니면 사장입니다. 그 사람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밑바닥은 고객입니다. 따라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경영자입니다. 고객은 그렇게 신경을 안 써도 됐습니다. '회사에서 그런 대로 다른 회사와 경쟁에서 뒤 떨어지지 아니할 제품만 만들어 내면 고객은 언제든지 와서 사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업이 성공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삼각형을 뒤집어라.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워라.' 이것이 역삼각형 피라미드라는 겁니다. 그러면 종래에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장이나 경영자는 전부다 밑바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제일 아래로 내려옵니다. 평소에, 이전에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던 고객들이 제일 중요한 VIP 자리를 차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업이 살려면 고객이 왕이어야 합니다. 고객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기업이 되지 아니하면, 봉사하는 사장 경영인이 되지 아니하면, 오늘날 기업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다 아는 상식이 되어 버렸지 않습니까?
역삼각형 피라미드를 오늘날 교회는 적용할 가치가 없을까요? 저는 적용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교회의 중요한 사람은 목사가 아닙니다. 믿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밑으로 내려와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VIP 고객은 누구입니까? 교회 밖에서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제 마음대로 살고 있는 저 포악한 사람들, 잔인한 사람들, 거짓말쟁이들,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들, 그야말로 심각하게 망가진 사람들, 불량품들,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VIP 고객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엄청나게 사랑하면서 오늘도 그들을 잊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왜 우리가 지금 대각성 전도집회를 앞에 두고 한 사람이 한 가정을 구원하자고 하는 119 운동을 펼치고 매주마다 여러분들에게 광고하면서 태신자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또 교회에다가 등록시키라고 합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출석 2만 명을 넘으면 더 이상 안 될 겁니다. 지금 거의 다 차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간이 좁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인데 무엇 하려고 또 전도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쑥덕쑥덕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인간적인 논리로 이야기를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성령이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의 소리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전도하자고 하는 목사를 여러분이 어디에서 보셨습니까? 교회를 부흥 시키기 위해 전도하자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잃은 양들이 교회 밖에 너무 많기 때문에 전도하자고 그랬지, 교회에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전도하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너무 자비하셔서 밤낮 잊지 못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영혼들이 너무나 교회 밖에 많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해야 된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공간이 없어서 우리가 전도한 사람을 수용할 수 없으면 전도 받은 그 사람이 나갈 수 있는 이웃의 좋은 교회들 찾아서 맡기면 됩니다. 얼마든지 맡길 데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공간 좁다고 전도 안 해도 됩니까?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끼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그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우리 한국 교회는 110년 전에 복음을 처음 받을 때 우리의 모습이 어때 했는지 잊어 버리면 안 됩니다. 세계를 흔들고 있던 강대국에서 온 선교사들 눈에는 그 당시의 우리의 모습은 정말로 짐승보다 조금 나을 정도 밖에 안 되었습니다. 부패한 귀족들이나 사람처럼 행세했지, 부패한 폭정 밑에서 신음하는 일반 민중들은 정말로 비참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1890년대에 세워진 이화학당이 있습니다. 이화여대의 전신입니다. 그 이화 학당을 처음 시작한 분이 메리 스크랜톤 선교사였습니다. 눈물 나게 가난하고 그러면서도 남자들 밑에 짓눌려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개, 돼지처럼 취급을 받던 이 땅의 여성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하고, 소망을 갖게 하고,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고, 나중에는 이 사회 지도자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문을 연 것이 이화학당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을 모집하려고 보니 학생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기록을 보았는데 참 한심하더군요. 그래서 강제로 학생들을 끌어 들였는데 그들 대부분이 집에서 기르자니 가난해서 굶겨 죽일 것 같고, 부잣집에라도 팔려고 하니 나이가 어려서 사갈 사람이 없는 그런 계집애들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호혈자가 만연해서 수구문 밖에 버려진 병든 소녀들을 받아 들였어요. 그러므로 모두가 어찌할 수 없어서 학생이 된 신분들입니다. 1899년도 6명의 이화여대생이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너무나 초라한 소녀들이었습니다.
알렌 선교사가 세운 광혜원이라고 하는 우리 나라의 첫 서양식 병원이 있었습니다.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료비를 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자 치료비 대신에 가지고 오는 것들이 달걀 몇 개, 꿩 한 마리, 혹은 바가지 싸온 음식, 아니면 돼지를 한 마리 등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환자들의 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존경 받을 건덕지가 무엇이 있습니까? 무슨 대단한 데가 있습니까? 너무나 몰골이 보잘 것 없는 천한 존재들이 아닙니까? 이런 존재들이 복음을 듣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 보기에는 그렇게 가난하고 그렇게 천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소중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을 한반도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 덕분에 우리 조상들이 복음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할렐루야!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천했을 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구원 받도록 하신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를 보십시오. 벌써부터 배가 불렀습니다. 너무나 교만해졌습니다. 너무나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신분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전도를 해도 내 신분하고 걸 맞는 사람들만 찾아 다니는 교만한 인간들이 다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참으로 심각하게 망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애정도 없고, 기도할 마음도 없습니다. 강남에 있는 교회, 사랑의교회가 언제부터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우리 마음에 있는 요나의 심보를 우리는 주님 앞에 내어 놓고 회개해야 합니다.
비록 전설이지만 우리는 거의 사실로 믿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핍박을 견디지 못해서 로마를 빠져 나올 때 예수님이 그를 만났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의 양 떼들을 위해서 그리로 가느니라.' 베드로가 그 말을 듣고는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따라 로마로 들어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오늘 사랑의교회, 오늘 한국 교회 소위 부유층들이 많이 산다고 하는 강남에 세워진 교회에 주님이 계신다고 하면 그리고 우리가 그를 볼 수가 있다고 한다면 주님이 지금 어디 계실 것 같습니까? 제 생각에는 지금 현관문을 열고 나가고 계신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따라 가면서 주님의 옷 자락을 붙들고 한번 물어 봅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주님은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너희들이 무시하고 멸시하고 찾아가지 아니하는 이웃, 저 불쌍한 영혼, 니느웨 사람들을 내가 찾아 가노라.' 틀림없이 그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하나님을 우리 크기로 축소 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품은 너무 넓어서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죄인들, 어떤 흉악한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다 받으시고도 얼마든지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누가 구원 받았습니까? 내가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구원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예수 안에서 복을 누리고 삽니다. 이것을 잊어 버리지 맙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자비를 마음에 담고 나가서 이제 다른 사람을 대하면 벌써 그들이 내 눈에 다르게 비칩니다. 소중한 존재로 비칩니다. 비록 알코올 중독자라 할지라도 비록 미혼모라고 할지라도 비록 극빈자라고 할지라도, 머리가 둔해서 계속 대학에 낙방하고 이제는 폐인 되다시피 돌아 다니는 젊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면 그들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로 우리 눈에 비치게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소중한 존재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바로 마음에 영접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기만 하면 지금까지 입고 있던 모든 누더기를 다 벗어 버리고 하나님이 입혀 주신 영광스러운 의의 옷을 입고 춤을 출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앞날이 활짝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천하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악하다고 피하지 마십시오. 또 세상에서 너무 잘났다고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만큼 자비하십니다. 이 자비를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나야. 일어나서 가라. 그리고 니느웨에 가서 전하라.' 오늘도 우리 보고 '일어나라. 그리고 너희의 니느웨, 나가면 얼마든지 있다. 그들에게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복음을 들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고 이 좋으신 하나님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 이루었다 하시고 / 요19:16-30 / (0) | 2021.12.23 |
---|---|
한 영혼의 소중함 /마 18:10~14 (0) | 2021.12.23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 수 14:6-12 (0) | 2021.12.23 |
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 엡 1:3 (0) | 2021.12.23 |
기회를 놓치기 쉬운 사람들 / 눅 17:26~37 (0) | 2021.12.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