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혼의 소중함 / 마태복음 18:10~14
지금처럼 한 사람의 인격이 도매급 취급을 당하는 시대가 과거에도 더러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점점 인간을 경시하는 풍조가 이 시대에 만연되는 듯한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어느 조사에서 응답자의 9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위기라는 말을 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인간 경시풍조는 인간 존엄 사상이 상당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영역에 대해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이런 저런 분석을 내놓는 것을 봅니다.
한 예로 '왜 사람들이 이 모양이 되어갈까?'에 대해서 인터넷 상에서 즐기는 온라인 게임의 영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리니지'(lineage)라는 게임이 있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PK'라는 게임 기술이 있습니다. 이것은 'Player Killing'의 약자로, 게임 속에서 상대측 가상 전사를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런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연히 사람을 물건 취급하듯이 다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난 아이들의 입에선 자기도 모르게 "사람 죽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하는 말이 튀어나오곤 합니다. 이렇게 무작정 사람을 죽이는데 재미를 붙인 세대가 점점 이 사회에 늘어나고 이런 자녀들과 젊은이들의 영향을 받아 기성세대까지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가 보면, 자연히 인간성을 상실할 수 밖에 없고 인격 하나 하나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둔감한 세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인터넷 게임만이 모든 원인은 아닐 것입니다. 좁은 땅에 폭발할 정도로 높은 인구 밀도, 또 도시화 현상의 가속화 때문에 사람이 귀하지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발에 걸리는 것이 사람 아닙니까? 뭐든지 흔하면 천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자연히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못하는 경향으로 자꾸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학교나 공공시설에 가보면 분실물 신고 센터라는 곳이 있습니다. 습득한 분실물을 맡기고, 또 분실물을 찾기 위해 조회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분실물 신고 센터를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찾아가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관된 물건 중에는 값이 꽤 나가는 것도 있는데, 안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또 사면 될 텐데, 뭘 귀찮게 찾으러 가냐는 것입니다. 부모 역시 다시 사주면 되지, 굳이 그것을 찾아오라고 아이들을 채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흔하게 보고 천하게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물건에 대한 가치관이 결국은 사람을 대하는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 죽었다. 열 사람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놀라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인간을 경시하고 인격을 무시하는 사상에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뉴욕에 가면 인형병원이 있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어린 자녀에게 인형을 사줍니다. 아이들이 그 인형을 가지고 놀다 보면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목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 고장난 인형을 아이에게 들려서 인형병원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네가 가서 고쳐와라." 그러면 아이는 그것을 들고 가서 "선생님, 고쳐주세요." 하고 맡기고는, 나중에 고쳐오면 "야, 우리 인형이 이제 건강해졌다." 하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고치는 값이 사는 값보다 더 들기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고장난 인형을 아이에게 들려서 병원으로 보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물건 하나라도 아껴라. 귀하게 써라. 소중하게 다루어라.' 하는 가치관을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인형은 인격을 표현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인형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가짐이 나중에 커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자리잡는 것입니다. 만일 인형이 조금 고장 났다고 해서 발로 밟거나 집어 던지는 습관을 키웠다면 나중에 한두 사람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교육이 없습니다. 인격을 중시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점점 희박해집니다.
게다가 교회를 다니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까지도 사람을 보는 태도에 변화가 있지는 않은가, 세상 사람들처럼 인격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지니는 가치는 절대로 양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질로 따져야 합니다. 하나라도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한 인격, 한 생명을 질로써 보아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그것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헤아릴 때도 '몇 명이냐? 얼마냐? 얼마나 크냐?'라는 양적인 것만 따지려 들지 한명의 중요성에 눈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각성전도집회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등한히 여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되새겨보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태신자가 몇 명이냐?' 이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대각성전도집회를 통해서 결신하는 사람이 전체 몇 명이냐?' 하고 숫자를 따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양이 없는 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거기에만 마음을 쓰다 보면 한 영혼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오늘 저녁부터 대각성 전도집회에 임해야 되겠습니다.
일본 작가 중에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작가가 있습니다. 제가 홋카이도(北海道)에 들렸을 때 그분의 기념관을 미처 방문하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아직도 일본 사람들에게 굉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작가가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라고 하는 작가입니다. '길은 여기에', '빙점'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쓴 분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간증적인 작품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는가를 밑바닥에 깔면서 작품을 그려나갑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작품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약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자연히 인정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생기데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쓴 책이 일본만해도 수백만 권이나 팔렸고, 우리나라에도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을 읽는 사람마다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마음에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엄청난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우라 아야꼬를 전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그가 어떤 환경에서 예수님을 만났는지 아십니까? 당시 미우라 아야꼬는 폐병 환자였습니다.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서 매일매일 각혈을 하며 투병해야만 하는 수용소 안에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찾아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했습니다. 각혈을 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을 확률이 큰 초라한 여자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겉으로 볼 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동정하고 지나가면 끝인, 그저 한번 쳐다보고 눈물을 흘려주면 그것으로 끝인 존재, 죽으면 더 이상 찾아갈 필요도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를 찾아온 청년은 그 여인을 어떻게 보았는지, 각혈을 하면서 파리하게 말라있는 그녀를 붙들고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믿으면 당신은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라며 전도했습니다. 아마 그 청년은 이 여인이 나중에 일본 열도를 후끈하게 데울 수 있는 엄청난 작가가 되리라는 가능성을 못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여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수백 명이 나가서 전도하는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했지 않습니까? 이만큼 한 사람의 가치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합적으로 묶어 '세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이 세상은 전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안에 '나'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통합적인 용어 속에 전부 묶어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조금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라는 개인은 그 전체 속에 묻혀버리고 드러나지 않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했지? 그러면 나 하나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크게 보십니다. 넓게 보십니다. 모든 것을 다 보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신서를 통해서, 특별히 사도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을 위해 독생자가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가면 하나님의 아들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을 자기자신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인류를 귀히 보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귀히 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나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는 나 하나가 세상이요, 세상은 바로 나 하나다.'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는 개인이 절대 실종당 할 수가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세상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처럼 나 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하나님꼐서 한 생명에 대해 웅변적으로 교훈하고 계십니다. 일단 중요한 일에는 어린아이를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너는 저만큼 가 있어. 너는 여기에 끼여들지마.' 하고 옆으로 제쳐놓은 어린아이를, 예수님께서 가운데 세우시고 교훈하시는 말씀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아주 중요한 2가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한 명의 이 어린 소자, 이 어린아이를 자기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자기자신이 바로 어린 아이라는 말입니다. 5절을 보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영접한다는 말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어린아이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참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제대로 인격적 대우를 하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 대우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확대해서 예수님께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세상 인류는 두 부류로 갈린다고 말씀합니다. 이 가운데서 예수 믿지 않고 나오신 분이 있다면 잘 들으십시오. 이 세상에 종말이 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때 인류가 두 부류로 갈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부류를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양, 왼쪽에 있는 사람은 염소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상하게 양은 하나님 앞에 참 사랑 받는 짐승으로, 염소는 어디서 잘못 보였는지 항상 악역을 담당하는 짐승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염소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 예수님께 먹을 것 드렸죠? 입을 것도 갖다 드리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옥에 갇혔을 때 우리가 찾아가서 뵙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이 언제 나에게 옷을 주었는지, 먹을 것을 주었는지, 찾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이 묻습니다. "아이고, 왜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바로 옆에 있는 어린 소자, 어린 아이 하나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바로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과 같으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오른쪽에 있는 양에 해당하는 성도들이 찾아와서 "예수님, 우리는 세상에 있을 동안 주님께 옷 한 벌 갖다 드린 일도 없고, 먹을 것 하나 갖다 드린 적도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너희들은 진짜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가져 왔고, 입지 못할 때 너희들이 입을 것을 가져다 주었느니라.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가 찾아 왔지 않느냐?" 그들이 묻습니다. "아이고, 언제 우리가 그랬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 곁에 있는 이웃, 어린 소자가 목말라 할 때 마실 것을 준 것이 나에게 준 것이니라. 또 그에게 먹을 것 준 것이 나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이니라. 내가 다 기억하고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40절과 45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어린 소자 하나를 자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어린 소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면 바로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됩니다. 어린 소자 하나를 영접하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린 소자 하나를 멸시하면 예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흔히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 생명 하나 하나가 예수님 자신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만큼 깊이 인식하고 사람을 대합니까? 우리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가 살고 있던 당시, 유대나라 사람들이 다니던 교회에는 좋지 못한 풍습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을 너무 차별대우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기 위해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 안내하는 분들이 뒤에 섰다가 화려한 옷에 값나가는 반지를 끼고 요란하게 치장한 사람들이 들어오면 허리가 90도 되도록 인사하면서 안내를 합니다. 가장 좋은 자리나 앞자리, 또는 특별한 분이 오시면 앉히는 자리로 안내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옷을 남루하게 입고 냄새가 나고 어느 모로 보나 배운데도 없는 무식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예배 드리려고 교회에 들어오면 대우가 다릅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이리 오세요."하고 데리고 가서는 저 뒤에 자리가 있으면 앉으라고 말합니다. 만일 자리가 없으면 '여기 서서 예배 드리시지요.' 하고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이런 풍토가 교회 안에 만연했습니다.
이것을 놓고 야고보는 아주 엄하게 꾸짖습니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약2:9)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하찮은 그 한 인간,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영접하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무시하면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죄가 안되겠습니까? 이만큼 예수님은 어린 소자 하나, 한 생명 하나 하나를 자기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 여름, 잠깐 일본에 들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일본 동경에서 개업하시 일본인 의사 한 분이 저에게 홋카이도에 있는 별장을 쓰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1주일 정도 홋카이도에 갔습니다. 참 좋은 별장이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를 동안 주일이 끼어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거기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푸라노(富良野) 메노나이트 소망교회 목사님이 제게 설교 부탁했습니다. 홋카이도에 푸라노라는 도시는 약 2만 명이 살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천주교 1개와 신교 2개를 합해서 3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주일이 되어 통역할 선교사 사모님을 모시고 예배에 참석했는데 큰 일본 신사 바로 앞에 아담하게 지어진 교회였습니다. '그래도 이 교회에 꽤 모이겠구나!' 하고 들어갔더니 예배실이라고 해야 불과 10평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강대상이 따로 없고 설교자고 성도고 가릴 것 없이 전부 의자에 둘러앉아 예배를 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마침 의자가 12~13개 정도 놓여 있었습니다. '아, 오늘 참석하는 예배는 아마 10명 정도 밖에 안되나 보다.' 생각하고는, 제가 제일 먼저 갔기 때문에 저와 통역하실 분이 앉았습니다. 조금 후에 그 교회 목사님 내외분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미국에 유학도 갔다 오신 아주 유능한 분이셨는데, 70가까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옆에 그 지역에 와서 40년 가량 선교하다가 세상을 떠나신 미국 선교사 부인이 방문차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교인들이 하나, 둘 들어오는데 한 4, 50대 부인 몇 분과 남자 두 분, 그리고 나중에 30대 여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피아노는 있는데, 피아노 칠 사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던 40대 중년 부인이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피아노를 칠 줄 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피아노 옆에 가서 앉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불과 10명 내외로 모인 가운데 예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제가 그 예배를 드리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예배다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치 우리 교회가 처음 시작했을 때 첫 예배에 10명 내외가 둘러 앉아서 예배를 드렸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 때 생각도 났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작은 규모로 둘러 앉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눈에 그대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제 눈에 가득차게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을 가득하게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제 통역을 맡은 선교사 부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 오늘 놀랬어요. 왜냐하면 목사님은 수만 명이 되는 큰 교회 담임 목사님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작은 규모의 예배를 어떻게 인도하실까?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설교도 한 10분이나 5분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목사님 그렇게 안 하셔서 제가 참 놀랐습니다." 그 날 예배는 얼마나 은혜스러운 예배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주셔서 설교할 말이 샘처럼 계속, 계속 스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보면서 설교하는데, 그 가운데 30대 부인이 한 분 있었습니다. 아이 둘을 장난감이 있는 방에 들어놓고는 예배를 드리다가, 오래 못되어 엄마 곁으로 오자 아이들을 안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처음에는 새로운 강사가 오자 호기심 에 10, 15분 동안은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아이 하나를 앉고는 계속 졸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설교 끝날 때까지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앉고 있는 부인을 보면서 얼마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가뜩이나 교인이 귀한 일본인데 30대 부인이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졸까? 아이도 맡길 때가 없어서 데리고 나와 예배 드리겠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리고는 제 앞에 있는 부인 하나가 천하로 여겨졌습니다. '비록 조느라 말씀을 듣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전한다.' 그 부인만 쳐다보고 계속 설교했습니다. 아마 4, 50분 동안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이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수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를 수십 년 동안 목회를 해왔지만 아직도 제 마음이 병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한 분 한 분을 제가 알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름도 잘 모르고, 한번 만나도 도장이 찍히지 않습니다. 두 번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저는 한 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한편으론 병든 목회를 하고 있진 않나 하는 우려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푸라노에 있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알게 됐습니다. 아직 제 마음에 병이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이름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의 얼굴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놓고 설교하지, 수만 명을 상대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분이 중요합니다. 한 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만약 이 정신을 잃어버렸다면 저는 삯꾼이지, 목사는 아닙니다. 우리가 대각성전도집회를 앞에 놓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에도 이런 자세를 다시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명의 어린 소자를 교회와 동일시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에 관한 비유를 한 가지 드셨습니다. 양 100마리를 가지고 목축업을 하는 주인이 있는데, 해가 져서 양들을 세어보니 99마리는 우리로 돌아왔는데 한 마리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 하고 고심을 하다가 99마리를 우리 속에 안전하게 넣어놓고는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저녁도 먹지 않고 지팡이를 들고는 험한 산을 향해서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를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99마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십니까?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99마리 양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교회에 와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99마리의 양입니다. 교회입니다. 그러면 한 마리 양은 무엇입니까? 아직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고 교회 밖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99마리로 만족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험한 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눈에는 한 생명이 교회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한 영혼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가 한 영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얼마나 값진 존재로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번 대각성전도집회 때 우리가 전도하려고 하는 태신자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닌가요? 청소하러 다니는 분이 아닌가요? 병들어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전도하기가 쉬워서 접근을 했는데, 따지고 보니 아무 신분도 없고, 특별히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래서 은근히 마음으로 멸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죄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보잘 것 없는 한 생명을 자기 교회와 동일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우리 모두와 똑같이 본다는 말입니다.
20세기에 성자라고 흔히 불리 우는 테레사 수녀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극빈자, 병자, 고아, 죽어가는 사람, 노인들을 불러서 모아놓고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을 당시, 그의 사업은 전세계적으로 펴졌습니다. 126개국에 600여 곳 이상 되는 사랑의 집을 만들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적인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굉장히 탁월한 어떤 CEO의 경영방법을 가지고 움직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는 것은 도무지 화두가 되지 않고, 큰 기업체를 움직이는 사고를 가지고 그런 일을 했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분의 말을 읽으면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래야 되지 않을까요? 전도를 해도 그래야 되지 않을까요? 태신자를 찾아 갈 때 우리 마음도 그래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깊이 돌이켜보면서 반성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테레사의 말입니다.
"나의 임무가 대중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한 개인을 돌보고 있습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거둘 줄을 모릅니다. 단 한 사람...당신도 내가 하듯 그렇게 한번 시작해보세요. 나는 단 한 사람만 인도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42,000명이 넘는 사람을 인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바다의 물 한 방울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물 한 방울을 보태지 않는다면 바다는 물 한 방울이 모자랄 것입니다. 당신 자신, 당신의 가정, 당신이 다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하나, 하나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부터 몇 일 동안 몇 명을 전도하느냐 보다 누구를 전도하느냐에 눈을 집중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썩는 밀알이 되도록 합시다. 그 한 생명을 얻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얻는 것입니다. 그 한 생명을 얻으면 우리는 교회를 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린 소자를 자기와 동일시하시고, 교회를 자기와 동일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다루면서 이번 대각성전도집회에 임하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에 임하셔서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잔치가 이 가운데서 연일 연야 계속될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을, 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을 전도하려고 하는 욕심을 부리다가 나도 모르게 한 영혼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기 쉬웠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의 위치를 제자리로 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내 곁에 있는 저 보잘 것 없는 한 생명, 그저 날마다 스쳐 지나가면서 잘 주목도 하지 않는 저 한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 배웠사오니 이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소자 하나가 주님 자신입니다. 소자 하나가 교회입니다. 주님. 그러므로 이번 대각성전도집회 때 많은 사람을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가 한 영혼의 중요성을 놓쳐버리지 않도록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천하를 구원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심령 심령이 주님을 만나 주안에서 새생명을 얻는 잔치가 이번 기회에 연일 연야 계속될 수 있도록 축복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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