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새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행 3:14-2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새 삶을 사는 놀라운 복을 여러분이 다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 말씀에 “ 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하고 분하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복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 믿고도 지금까지 진정한 새 삶을 살지 못하였다면 지난 세월이 너무나 억울한 것입니다. 또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라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새롭게 살 수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일으킨 일로 인하여 몰려든 많은 무리 앞에서 세 가지 요지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첫째, 기적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둘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려내셔서 영화롭게 하셨다! 셋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너희들이 죽였으니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 거민들의 죄를 사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하고 기도하신 것을 응답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짓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인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저들도 하나님 용서해 주셔야 된다고 기도하셨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으로 베드로를 통하여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키시고 몰려든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너희들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빨리 회개하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예루살렘 거민들이 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17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18절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나 모르고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이라고 해서 죄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죽이고 어찌 잘 살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오늘 우리는 베드로 설교에서 어떤 죄이든지 회개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새 삶을 살기 원한다면 회개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회개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인지. 그러니 오늘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들을 때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회개에 대한 도전을 해오고 계시는데 우리가 정말 새 삶을 살기 원한다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에 대한 말씀은 그 전에도 여러 번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 죄를 지었다고 생각되거나 또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회개하여야 하겠구나.' 생각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기도원에 가서 열심히 회개하고, 깨닫지 못한 것까지 깨우쳐 달라고 기도하며 회개하려는 이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회개하였더니 정말 문제가 해결되고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간증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게 회개하였는데도 자신의 삶에 전혀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언제까지 회개해야 하며 어디까지 회개해야 하는 것이냐고 물어 오는 일들이 있습니다. 회개의 능력이 그처럼 강하다면 왜 회개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가. 답은 하나입니다. 회개하면 새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도 회개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데도 하나님이 풀어주시기 않는 것이 아니고 내가 회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회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7절에서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에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꾸짖습니다.
세례 요한이 왜 회개하러 나오는 이들을 꾸짖는 것입니까? 세례 요한의 눈에 사람들이 회개하는 동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벌 안 받으려고 회개하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로를 피해보려고 그런 계산으로 나오는 이들을 세례 요한이 꾸짖습니다. 이것은 독사의 자식들이나 하는 행위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누가 너희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회개는 내가 벌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내가 회개하면 벌을 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회개는 벌을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매맞을 짓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벌을 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정말 회개를 한 것입니다. “내가 회개했으니 빨리 용서해 주세요. 내가 회개했으니 빨리 이 벌이 떠나가게 해주세요.” 하는 사람은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 요한은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볼까 하는 잔 머리를 굴리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는 것은 첫째, 앞으로 죄짓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는 것이고 둘째, 전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정당한 벌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벌을 안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벌을 달게 받겠다는 것이어야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 다음의 처분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세상에서 회개하면 용서입니까? 구속입니까? 검찰에서 죄를 자백하면 용서받는다고 생각해서 자백을 합니까? 그러면야 무슨 밤새워가면서 조사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자백함과 동시에 용서 받는다면 검찰청에 들어오자 마자 자기가 죄인임을 시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죄를 시인하는 것은 결코 용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죄를 고백하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쇠고랑을 차고 구속됩니다.
가장 회개 같은 회개를 하고도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샀던 경우가 민수기 14장 39-4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라고 명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아니하고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향하여 "전염병을 내려서 몰사시키겠다."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그 백성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을 즉시 다 죽이지는 않고 자기 명대로 살게 하겠지만 그 대신 광야에서 살다가 광야에서 죽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였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제서야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았습니다. 밤새도록 대표들이 모여 의논을 했고, 다음 날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가나안 땅으로 출발해서 이미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외쳤습니다.
40절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그렇게 회개했던 것입니다. 슬퍼하고 죄를 자복하고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돌이켰으니 그야말로 참 회개를 잘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회개하는 행위로써 하나님을 더욱 노엽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말렉인, 가나안인들에 의해서 다 멸망했습니다.
41절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왜 이런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이 사람들의 이 회개의 목적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한 회개의 목적은 진정한 죄에 대한 애통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구나! 하나님을 거역하였구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죽는다니 그것만은 안돼. 죄는 지었지만 벌은 받지 않으면 좋겠어! 벌 안 받으려면 회개하면 된다니 나 회개합니다." 이런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회개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도 새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무슨 문제만 있거나 병들었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회개하고 회개 기도하세요. 회개하면 다 됩니다." 했는데. 이런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회개를 벌 안 받고 고통을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였다고 새롭게 해달라고 요구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직 회개만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풀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 회개가 무슨 공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면 십자가의 은혜가 임합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회개는 아무런 변화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플로이드맥클랑 목사님은 딸 미샤가 거짓말하는 습관을 고쳐 보려고 애를 썼답니다. 야단도 쳐보고 달래도 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잘못했다는 말은 그 때 뿐이었고 거짓말은 갈수록 더 심해졌습니다. 결국 하나님, 저는 도무지 딸 아이를 고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더디게 배웁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미샤와 함께 산책하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집에서 얼미쯤 걸어왔을 때, 멈춰 서서 무릎을 꿇고는 미샤의 눈을 마주 보았습니다. 아주 부드럽게 미샤야, 나는 너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단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내 뺨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 아빠가 자기 딸을 믿지 못한다는 건 아빠에겐 아주 슬픈 일이야. 우리는 어쩌면 좋지? 미샤는 아빠의 눈물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빠 엄마가 때리기도 하고 호되게 꾸짖는 것은 보았지만 그 일 때문에 우는 것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딸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방과 후에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내와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미샤가 걸어오더니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아빠가 다시 나를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하고 딸 아이는 아빠의 팔을 감싸 안고는 울먹였습니다. 거짓말을 했노라고 용서를 구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때 비로소 미샤가 참으로 회개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미샤의 거짓말하는 버릇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거짓말을 했노라고 용서를 구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때 비로소 미샤가 참으로 회개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미샤의 거짓말하는 버릇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매 맞는 것이 두려워서 하는 회개는 아직도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 진정으로 자기 죄를 깨닫고 애통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가 진정 회개한 증거 중 하나는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는 것, 이것이 가장 두려운 죄 값입니다. 회개란 바로 자기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죄가 드러남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고통도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24절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나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주려 죽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런 탕자인 둘째를 위하여 아버지는 동네 잔치를 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면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자신도 회개하면 이런 일이 있을까 기대하지만 돌아온 탕자가 정말 이런 잔치를 원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잔치 자리가 편하겠습니까? 소 잡고 풍유를 울려서 동네 잔치를 벌렸으니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오늘 무슨 날이냐? 회갑 날이냐? 혼인 잔칫날이냐?" 물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잔치에 모여온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종일 "저 놈 아버지 재산 다 말아먹은 그 둘째 아들인데, 아버지가 받아주었어."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들여다보고 "맞기는 맞네. 살이 다 빠져서 그렇지 둘째가 맞기는 맞소." 그러니 얼마나 미안하고 얼마나 죄송하겠습니까?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바늘 방석 같았을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출간한 책으로 인하여 하루 아침에 유명인이 된 기분입니다. 책을 잘 보았다. 고 책이 많이 팔린다. 고 여기저기서 와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르십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어떤 이들은 유목사, 유명해졌네. 유목사 축복받았네. 합니다. 심지어 한턱 내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심정은 잔치 자리에 앉은 탕자의 심정입니다. 책을 읽어 보셨다면 알겠지만 온통 제 부끄러운 고백 뿐입니다. 부흥회에 가서도 제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책으로 제자훈련 교재로 나왔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부끄러움을 당해야 할지 저로서는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축복이라 보시니 정말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의인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죄인 대접 받으시는 분 계십니까? 여러분은 저를 죄인 취급하십니까? 의인 취급합니다. 죄인인데 말입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 목사님이라고 하지, 교회에서 만나서 인사를 할 때 어느 누가 여러분을 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저 죄인을 좀 봐.” 그런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다 의인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어찌 의인 대접이 가당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탕자에게 하신 것처럼. 그러니 더 미안합니다. 의인 대접, 오직 예수님의 보혈 때문입니다.
의인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면 안됩니다. 사실은 더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용서받은 의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새 날을 주시고 오히려 복을 주셔서 잔치 날이 되면 더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죄짓고 죄에 대해서 잘 고백하지 않습니다. 숨기려고 합니다. 아직 회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탕자가 잔치를 통하여 철저히 깨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부끄러워도 숨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탕자는 할 수만 있었다면 아마 뒷방으로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잔치 자리에 앉아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얼굴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 잔치는 탕자의 자아가 죽는 잔치입니다. "내가 회개했으니 고운 옷 주십시오." 탕자는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음 속으로 뇌아린 말이 있습니다.
19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차라리 저에게 품꾼으로 취급해 주소서.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소서."
이렇게 회개하니 그에게 아버지의 은혜가 임하였는데, 그렇다고 그의 죄가 감추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은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죄인이었음을 무슨 비밀이 드러난 것처럼 여기며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에 자신의 은밀했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거짓말했던 죄, 도적질했던 죄도 그렇지만 음란과 간음의 죄에 대하여 들을 때는 민망할 정도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해 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엄청난 죄악을 고백한 것 같아도 아직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 의에 대한 회개가 터져 나와야 진짜입니다. 이 죄는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이유는 죄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왜 깨지고 교회가 분열이 됩니까? 자기 의때문입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서 사사 시대 사람들의 문제를 한 마디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고 지적했습니다.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성경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우리가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부부 싸움, 교회 분열, 모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주장하니까 싸우게 되는 겁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상상도 못한 자기 죄를 토해 놓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제이고 지도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였지, 정작 자기가 죽을 죄인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했던 자기 죄가 얼마나 큰지 비로서 그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알았고 은혜를 받았다면 내 속에 있는 진짜 죄가 다 터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터뜨려놓는 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죄를 감추지 않습니다. 이미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일을 나에게 말한 사람을 보라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입으로 나의 행한 일 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남이 수근거리며 하던 말이었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으로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조차 드러내게 만든 것일까요? 한마디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은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아내와 딸에게 고백한 뒤 최소한 두 달 동안 거실 소파에서 자야 했습니다. 그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자신으로부터 사실을 들은 아내 힐러리 여사가 마치 복부를 강타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성추문 사건으로 클린턴은 그를 지지해 준 민주당으로부터, 자신과 함께 일한 고어 부통령으로부터 얼마나 왕따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한 순간의 쾌락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원에서 그의 탄핵이 가결되었을 때 미국의 현직 대통령인 빌클린턴은 4500명이나 되는 많은 목사님들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남을 용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내가 전 세계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원이 나를 탄핵했습니다. 처음에는 괴로웠습니다만은 오히려 그 탄핵으로 인해서 그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철저히 무너지지 않았다면 100% 진지하게 반응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숨길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바로 그 때에 내가 해야할 일을 하는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마 클린턴처럼 공개 회개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는 자기 죄를 드러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비로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하였을 때, 매를 들면 당장 매 안맞으려고 잘못하였다고 소리치며 회개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매맞는 것을 피해 보려는 회개인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을 때는 이런 회개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실한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가 새 삶을 시작하는 문입니다.
매 안맞으려고 하는 계산된 회개, 벌 받을까 두려워하는 회개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달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회개, 죄 자체를 애통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2009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새 삶을 살도록 계획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진짜 회개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벌 받을까봐 하는 회개, 어린 아이들은 그렇게도 합니다. 부모가 매라도 들면 잘못했다고 소리 지르면서 외칩니다. 매 맞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어린 아이때는 그랬지만 이제는 그런 회개를 회개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 죄 때문에 맞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매를 피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새 삶을 살 수 있는 복을 주십니다.
이제 같이 기도하십시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오히려 “하나님, 나는 맞을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나가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숨기고 감추려고 하지 마시고 진짜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 성령이여 강림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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