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복음 2장은 쉽게 읽어서 감동이 오기 보다는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장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전체의 맥락 안에서 요한복음 2장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하지 않으면 요한복음 2장이 도대체 무얼 전하려고 하는지, 메시지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겁니다. ‘사흘째 되던 날’ 이건 요한복음 1장 43절 이하에 나오는 그 사건과 겸하여 사흘째, 이때 사흘째를 첫날부터 계산해서 세었다면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만, 1장 43절 이하에 나오는 그 사건을 기점으로 말한다면 이 날이 첫날부터 일곱째 날이 됩니다. 우리는 저자의 의도가 1장부터 2장 11절 사이에 일련의 날짜를 서수적으로 기록한 것을 볼 때, 서수적 구성 안에서 즉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등 숫자로 날짜를 헤아리도록 의도한 것을 볼 때 모종의 메시지가 들어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장 14절을 보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데 약간 도움이 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1장 14절을 우리가 다 외워야 하기 때문에 암송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광이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이 영광이라는 것은 원래 성전의 지성소 안에 머물던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영광이 신구약 중간시기에서는 에스겔 11장을 끝으로, 세퀴나가 성전을 떠났습니다. 성전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이 없는 백성,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언제요? B.C 586년부터 예수님 때까지,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로 갔다고 생각했느냐면 바벨론 포로들의 신학에 의하면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 영광이 온 겁니다. 성전의 영광이 어디로 갔어요?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지 않고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신학의 무게중심, 지리적 무게 중심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었죠?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인적 구성, 지리적 연속성의 차원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무대는 가나안 땅이었죠? 바벨론 포로들은 그 숫자가 훨씬 적었죠. 그런데 그 영광이 떠나서 영광이 에스겔 8-11장을 보면 영광이 떠나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지성소에 있다가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성전 동편 문을 떠나서 성전의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떠납니다. 그런데 이 떠난 성전의 영광이 어디에 가 있느냐? 에스겔 1장에 하나님이 불전차 보좌를 타고 에스겔 공동체에 와 있단 말이에요. 에스겔 포로 공동체에 와 있어요. 그러니까 성전이 어디 가 있는 거예요? 바벨론 포로 가운데, 그래서 바벨론 땅에 있던 포로들이 하나님의 친백성 대접을 받은 거죠? 그런데 이 바벨론 포로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제2의 성전을 다시 지었을 때, 바벨론 포로들이 다시 성전을 지어서 완성해서, 다시 바벨론 귀환 포로들이 왔을 때 다시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들어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여호와의 영광이 언제 떠났느냐면 BC 164년, 마카베오 독립전쟁 때 성전이 무참히 파괴됐습니다. 성전이 무참히 파괴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현존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이 있다면 성전이 무참히 파괴되지 않죠. 성전을 또 떠난 겁니다. 그래서 B.C.2세기부터는 이제 여호와의 떠난 영광을 다시 매개하여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 carry on, 가져 올 여호와의 영광을 다시 운반할, 여호와의 영광을 다시 귀환하도록 할 매개자를 메시아다 이렇게 주장한 거예요. 여호와의 영광을 다시 매개할 자가 메시아가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매개할 자 메시아는 제사장적 인물에서 나오겠죠? 성전의 대제사장적 인물이 여호와의 영광을 가져오지 않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 여호와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파괴된 성전을 회복할 대제사장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오래 전 나단 예언자부터 이사야 호세아 예언자까지 길게는 600년 짧게는 400년 동안 지속돼 왔던 메시아의 영광, 즉 메시아가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는 이 두 가지 믿음이 있었단 말이에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가 여호와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 11장에 나옵니다. 그다음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을 회복할 대제사장적 인물이 여호와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는 많이 기록돼 있지 않고 그 당시 대중들이 신구약 중간 시기에 유대백성들, 유대군중들 사이에 퍼져 있던 하나의 메시아 군중사상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갔다고 주장했어요.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간 증거는 예언자가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예언자가 일어나지 않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했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을 가르쳤던 랍비들입니다. 랍비가 성경을 가르치면서 한 번도 자기를 예언자적인 임재의식, 예언자적인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명한 랍비가 힐렐, 샴마이, 가말리엘, 요한 벤 자카이 이런 많은 유명한 스승이 있었어요. 그 유명한 스승들은 말투가 한 번도 하나님의 영이 자기에게 임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런 정말 대담할 정도의 도발적인 하나님 주권의식이 없었어요. 그들은 대개 옛날 사람들이 한 말을 끊임없이 인용했어요. 공자 왈, 맹자 왈, 계속 묵자 왈, 하면서 계속 자 자를 하니까, 사람이 하도 들어서 저게 누가 한 말인지도 잊어버릴 만큼 너무 많은 인용의 사슬들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차 자료를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본인 자신이 1차 자료입니다. 예수님은 논문을 쓰시는데 각주를 달지 않으십니다. 그냥 바로 쓰십니다. 내가 말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항상 분명한 개인기를 보여주셨어요. 내가 말한다, 하면서 사람을 일으키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이런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각주가 필요 없는 신기원의 독특한 종류의 선생, 랍비입니다. 보통 랍비들과는 다릅니다. 랍비들은 길고 긴 전승과 역사 속에 누적된 고명한 학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인용함, 이것이 서기관의 가르침, 랍비들의 가르침,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직접 받아서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직접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투 중에서 제일 독특한 것은 아멘 아멘 이라는 것을 앞에 한 것입니다. 신약신학자 요하킴 예레미야tm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대 예수님 당시에 많은 랍비들은 아멘을 쓰는데 맨 마지막에 썼다, 문미에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문두에 두 번씩 섰습니다. 아멘 아멘 레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말한다, 이 말은 예수님의 강력한 임재의식을 말합니다. 요한은 하나님 영광의 철수역사, 하나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을 떠났는데 그 영광이 돌아온다는 그런 신구약 중간사 200년 동안 계속된, 즉 제2성전이 마카베오 독립전쟁으로 파괴되고 나서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어딘가로 철수했다고 느껴졌던, 그런 여호와의 영광이 누군가에 의해서 매개될 텐데, 그 여호와의 영광을 이 세상에 끌고 오는 것은 바벨론 포로들도 아니고 제2성전도 아니고 메시아만이 여호와의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매개할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을 전제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그 영광이 바로 그렇게 200년간 목마르게 기다리던 영광, 즉 이스라엘 백성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영광, 그래서 2장 19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자기를 뭐라고 했습니까? 2장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1절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렇게 자기 육체를 성전과 동일시하는 사람, 이것은 도저히 유대종교 전통에서는 너무 돌출적 발언인데다가 도발적 발언이고 신성 모독적 발언입니다. 자기 육체를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으로 고취시키지 않으면 정신이 나간 겁니다. 자기 육체와 성전이 동일시된다는 것은 영으로 계속 고취 받아서 용감하게 말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린 사람의 말입니다. 이것은 유대종교의 역사상, 세계종교의 역사상 자기 육체를 하나님과 인간의 매개, 만남이 이뤄지는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세계종교 역사상 유래가 없습니다. 어떤 이단교주도 이런 말을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의 수위자체가 인간의 상상력을 계속 극한으로 늘려갑니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22절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은 언제부터 기록됐겠어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하신 말들, 좋은 말들 다 적어놓고 이게 성경이 되겠다, 성경 좀 기록하자, 필기해놓고 했던 걸 모은 게 아니라 예수님 쏟아놓은 말씀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이 말씀을 기억하고, 복음서라는 이 기록이 예수님 말씀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as much as they could remember, 기억한 것만큼만 기록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야기가 많이 공백이 있습니다. 너무 너무 도발적이죠? 그래서 예수의 육체 안에 영광이 나타났다는 이 주장은 신구약 중간시대에 가장 중대한 신학적 문제였던 여호와의 영광은 어디로 갔나? 여호와의 영광은 누가 매개하여, 여호와의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복귀시킬 분은 누구인가? 이런 많은 통속적인 민중들 사이에 있던 오랜 신학적 질문, 랍비들 사이에 있던 많은 논쟁이 됐던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뭐냐? 요한복음 1장 14절이 답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때 그 영광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2장 핵심사건은 예수님 육신 안에 감추었던 영광을, 예수님 안에 감추었던 그 비밀을, 장막으로 비밀을 영광을 감추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육신의 장막을 투과하고 뚫고 나오는 겁니다. 오늘 첫 표적이란 말은, 요한복음에 7개의 표적이 나오거든요. 그 7개의 표적 중에 첫 표적이 이 표적입니다. 요한복음은 앞으로 7개의 표적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성전된 예수의 육체 안에 머물던 영광의 진정한 정체를 보여주는 사건이 앞으로 7개가 나와요. 첫 번째 사건이에요. 그런데 그 첫 번째 사건이 결혼식장에서 있었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사건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표적이란 말은 이겁니다. 세메이아, 세메이온 이거든요. 세메이온은 표적이거든요. 이것이 가리키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사건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궁극적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 표적이니까,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사건보다 더 중요한 걸 봐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표적이니까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그 사건에 매몰되면 표적을 보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그건 as too as CH4 ~~, 이렇게 일종의 분자식이 바뀌는 화학적 변화를 본 겁니다. 여기는 화학적 변화를 보지 말고 예수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예수란 존재가 단순한 miracle maker 가 아니라 예수가 포도주를 공급하는 자임을 보여주고, 예수의 옆구리에서 포도주가 계속 쏟아져 나올 것을 보여주고,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 사건은 자기 죽음을 통해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는 그 사건을 앞으로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표적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기나이 라는, ‘여자여’라는 말이 제일 해석의 핵심입니다. 마리아가 갔더니 ‘여자여’라고 부른 이 사건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에요.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른 사건은 십자가상에서 한 번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요한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우는 마리아를 보면서, 메테르 메테르,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기나이 기나이’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입니다.’ 사도요한이 마지막에 어머니를 모셨거든요. 사도요한이 마리아를 모신 거예요. 그때 ‘여자여’라는 말을 한 거예요. 오늘 해석의 중대한 초점은 ‘여자여’ 라는 말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표현, 이 두 가지만 풀면 오늘 상당히 해명이 됐다고 봐요. 우리가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무엇입니까? 결혼식장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식장에 곤경을 해결해주신 민원해결사건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언자들이 하던 일입니다. 우리가 보통 예언자들 하면 불을 뿜는 걸 상상하는데, 예언자들은 불을 뿜지 않고 대개 생활밀착형 민원해결형 성직자, 즉 항상 찾아가는 능동민원행정의 달인입니다. 제사장은 정복을 입고 있고 항상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쭉 하나님 뜻을 알려줬습니다. 제사장은 찾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 뜻을 알려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사장은 이동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사무실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자기가 돌아다니면서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로 예언자가 많이 한 것은 국을 끓이다가 독이 퍼진 국에 독을 해소해준 사건, 그다음에 나무를 자르다가 도끼가 호수에 빠졌을 때 그 도끼자루를 올라오게 해 준 사건, 예를 들어서 전구를 가는데 감전이 일어났다하면 가서 고쳐주는 사건, 그다음에 차가 가는데 타이어가 펑크났다하면 가서 고쳐주고 이런 전부 다 생활밀착형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불을 뿜는 게 아니라 매우 민중친화적이고 생활밀착적입니다. 지금 예언자적인 일종의 생활밀착형 민원사례를 해결해 준 겁니다. 간단한 사건이거든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건데, 물을 포도주를 바꿨을 때 붉은 피처럼 바뀌었습니까? 백포도주 상태로 남았겠습니까? 만일에 물이 포도주로 바뀌면서 색소가 빨갛게 바뀌면 결혼식 분위기가 어떻게 됐겠습니까? 엉망이 됐겠죠? 뭐야 이거, 하면서 신랑신부는 누가 이랬어? 하면서 갑자기 등록 특허 냅시다, 이렇게 했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물로 된 포도주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은 물인데 마시는 순간 포도주가 됩니다. 그래서 이게 성만찬의 그림입니다. 이게 가톨릭 성만찬의 교리입니다. 포도주를 마시는 순간 피가 된다는 겁니다. 왜?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이 물로 된 포도주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물로 된 포도주가 사람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한 가운데 바뀐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혼식 분위기를 하나도 흐트리지 않고 완전히 문제를 해결하시고 유유히 사라지십니다. 멋진 분입니다. 인간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분인데, 예수님이 약간 나대기를 좋아한 분이셨다면 어땠을까요? 음, 보시오, 하면서 빨간 포도주를 들면서 자 축배를 듭시다, 이렇게 했을 텐데 예수님은 전혀 나대기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라 자기를 은닉하시고 자기를 겸손하게 감추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신랑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시고 자기는 유유히 사라지셨습니다. 이 비밀은 디카이어노스, 종들은 servant, 둘로이가 아닙니다. 종들은 둘로이가 아니고 섬기는 사람들, 디카이어노스, 집사님들입니다. 디아코노스입니다. 집사들이기 때문에 이 결혼식을 하는 이 집은 종과 노예가 있는 집이 아니라 서로 동일한 자원봉사자들이 결혼을 돕는 일종의 비교적 서민결혼식입니다. 두 세통 드는 돌 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으니까 180갤런의 포도주가 있습니다. 우리 차 아반떼가 기름을 넣으면 48갤런을 집어넣습니다. 48리터를 집어넣어요. 갤런과 리터의 단위가 비슷하죠. 180이니까 차 다섯 대 정도의 기름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만큼, 그러니까 손님이 꽤 많이 왔다는 말이죠? 결론은 뭐에요?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위해서, 이집은 어떤 집입니까? 이집은 바리새인이에요? 비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이죠. 왜?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물이 180갤런이 있습니다. 전부 다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집인데, 예수님 동네 나사렛과 가나까지는 한 8km 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가봤습니다. 가나라고 추정되는 곳을 가봤는데 별로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8km정도입니다. 그 가나의 바리새인 집에서 결혼식이 열렸는데, 문제는 예수님 어머니가 먼저 가 있었습니다. 예수 어머니가 먼저 등장한 걸 볼 때 예수님의 언니 또는 여동생 살로메의 즉 예수님 어머니의 sister, 자매의 집안, 쉽게 말해 예수님 이종사촌 결혼식이라고 보면 돼요. 예수님 이종사촌 결혼식인데 예수님만 초청된 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 여섯 명도 다 초청된 것을 볼 때 이들은 서로 알고 지낸 사이인 걸 알 수 있어요. 옛날에는 결혼식 초청이 지금보다 더 까다로웠습니다. 진짜 실명제로만 초청했거든요. 예수님이 그의 제자 여섯 명과 같이 초청된 걸 볼 때,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등장한 이 나다나엘 고향이 갈릴리 가나입니다. 나다나엘이 제일 마지막에 언급됐죠? 그 나다나엘 고향인 그 가나에서 결혼식이 열렸으니 나다나엘과 가나 사람은 알겠죠? 나다나엘과 빌립이 아니까 나다나엘 사람이 어울렸겠죠? 빌립과 안드레가 알죠? 결국은 뭡니까? 사슬로 엮어진 친구들 사이죠. 그런데 예수님 어머니는 예수님까지 초청했는데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을 초청했겠죠. 그래서 여섯 명이 다 초청된 거죠. 어쨌든 포도주가 일찍 떨어졌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샌들이 쓴 주석에 보면 왜 포도주가 떨어진 지를 추측한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주석이 나오는데 어쨌든 예수님과 제자들이 포도주를 많이 마셨음을 예상할 수 있죠? 어머니가 포도주 떨어진 걸 가장 많이 안 걸 볼 때, 어머니는 단순히 초청받은 자가 아니라 이 연회의 일종의 책임자였다, 그걸 알 수 있죠. 외사총괄부장정도 돼요. 예수님은 모든 내빈을 총괄하는 거예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헬라어 표현에 보면, 포도주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없다, 포도주가 없다, 그렇게 되는 걸 보니 포도주가 굉장히 결혼식에서 중요하다는 걸 알 수가 있고 포도주가 떨어진 게 중대한 위기임을 강조한 겁니다. 마리아가 먼저 포도주가 없다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예수님께 말했는데, 문제는 이 포도주가 없다는 말은 사실의 보고가 아니라 예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일종의 요구였습니다.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곤경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 아들에게 요청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마리아가 아들에게 요청한 게 아니라 주되신 하나님 아들에게 요청하는 개념으로 봤기 때문에 예수님이 답변을 ‘여자여’ 한 겁니다. 이건 맏아들 요청하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수완에 기대했다면 아들에게 요청한 거니까 예수님이 어머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자여’라고 대답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신적영광의 개입을 요청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답변을 ‘여자여’라고 한 이유는 마리아가 요청하는 그 자세가 엄마와 아들의 혈연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의 요청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답변한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이 예수님에게 무엇으로 보였느냐면 물로 씻는 청결강박종교인 유대교를, 물로 씻는데, 모든 종교는 청결강박성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종교에는 깨끗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모든 종교에는 다 깨끗해지고 싶은, 실제로 깨끗함이 종교의 한 목표입니다. 스님들도 보면 낭랑한, 그 스님들 다 이야기 들어보면 결국 깨끗해지라는 겁니다. 스님들 좋은 목소리로 하는 걸 쭉쭉 들어보면, 나머지 모든 종교도 청결에 대한 끊임없는 사모가 있습니다. 결국 유대교는 무엇입니까? 모든 종교는 무엇입니까? 물 항아리로 인간을 씻으려고 합니다. 이게 유대교입니다. 유대교, 예수님은 지금 뭐라고 이걸 들었느냐면 물로 씻어내는 유대교적 경직된 분위기, 즉 결혼식은 결혼식인데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것 같은 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 예수님은 이것에 대해 예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으로 해석을 해버린 겁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장 쉽게 말해서 포도주가 없다는 말을 작은 해프닝에 대한 보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가 없다는 이 말을 마리아가 어떤 맥락에서 한 걸로 들어버렸느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야만 해결될 수 있는 성령의 세례를 줄 그때를 지금 예수님은 요청한 것으로 해석한 겁니다. 실제로 여기 굉장히 비약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때라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릴 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마리아가 포도주가 없다는 그 말을 너무 깊게 해석했습니다. 포도주가 없다는 그 말을 유대종교, 혼인예식 축제의 기분을 망쳐버리는 포도주 중단사태와 같은 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교착상태, 혼인잔치의 기쁨을 표출하기도 너무 힘이 달리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청결 강박종교, 율법종교, 양심을 억누르는 종교, 이런 결혼식이 파탄 난 분위기 같은 이런 유대교적 상황을, 또는 인류의 모든 종교적 곤경을 돌파할 복음의 새 포도주를 달라는 요구로 들은 겁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여자여’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 말은 정확하게 십자가를 정조준 한 겁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야만 예수님의 보혈로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십자가로 찔렀을 때 물과 피를 쏟아진다는 그 물과 피를 바로 성령이라고 해요. 성령을 굉장히 사실적 언어로써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포도주, 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마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성령을 마셨다는 말이 나와요. 그다음 요한1서 5장 5-8절에 보면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할 때 물과 성령과 피가 다 같은 겁니다. 물과 성령, 피 똑같은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언약의 새 포도주를 달라고 요청으로 말로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언약의 새 포도주는 지금 뽑을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때가 이르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언약의 새 포도주를 누가복음 22장 20절에서 포도주를 보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는 그 때가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성만찬을 베풀 때가 아직 임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지금 성만찬과 같은 상태가 오게 해 달라, 즉 포도주가 없으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언약적 결속감이 와해돼서 율법강박종교, 청결강박종교, 깨끗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이 파장 난 분위기 같은 이 상태를 대 반전 시켜서 희락이 가득차고 기쁨이 가득차고 하나님 앞에 자발적 순종의 능력이 충천해지는 그런 상태를 요청하니까 그때가 임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은 해석을 잘못하면 정말 무미건조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장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정말 단어 하나, 이미지 하나, 메타포 하나를 면밀하게 검토해야만 해석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이 쓴 주석서는 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면밀하게 읽어야만 예수님의 이런 언어 하나하나가 갖는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거거든요. 제가 다음 주에 한 번 더 이걸 복습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혹시나 이걸 이해 안 된다면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게 이해 안 될 가능성이 많아요. 처음 들었으면 이해 안 됩니다. 한 열 번 이상 들으면, 제 아내는 이걸 이해합니다. 지금 대부분이 이걸 이해 못 할 거예요. 못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지금은 설교시간이니까, 지금 알아야 할 것은 ‘여자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두 구절이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이런 해석을 해야만 요한복음 2장은 해석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이걸 아주 plain 수준에서 평범하게 예언자의 생활밀착형 민원해결사건 정도로 끝나지 않고 너무 깊은 의미부여를 했어요. 예수님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을 갑자기 너무 깊이 해석해버린다는 거예요. 마리아가 너무 좋아서 그냥, 예수님 곧 돌아가실 것 같아서 다시는 못 본다고 생각하고 예수님 없으면 이 향유도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향유를 깨서 온 머리에 칠갑을 하고 다리를 씻는 이런 돌발적 행동을 하니까, 여성의 놀라운 결단력입니다. 사랑하는 임이 없으니까 끝났다 싶어서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 하는 향유를, 7개월 월급짜리 향유를 깨서 예수님 발에다가 바르고 머리에다 샴푸를 합니다. 너무나 돌발적으로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났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하나요? 그런 사랑의 강렬한 표현을 내 장례식 때 부을 향유를 미리 부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너무 또 해석을 해서 넘어가십니다. 예수님의 특징은 유려하고 깊게 해석하는 겁니다. 앞으로 여러분 나중에 천국에 가서 여러분이 하는 행동을 너무 깊게 해석하실 때 놀라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포도주가 없다는 그 상황을 사실로 보지 않고 기도로 보았고, 그런데 문제는 사태의 진실을 정직하게 알아야만 변화가 일어나거든요. 진짜 희락의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신앙생활의 동력이 없다고 정직하게 고백을 해야만 하거든요. 마리아처럼 포도주가 없다고 해야 하거든요. 정직한 사실의 분석과 기도가 터질 때 신적개입이 오는 거거든요. 그런데 마리아 같은 이 정직성, 사태의 본질을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분석하여 사태를 알리는 것, 기도의 언어로 그걸 치환시키는 것, 이건 너무 공동체에서 중요한 거거든요. 절대 거짓이 있어선 안 되거든요. 자발성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희락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걸 우리가 먼저 고백을 해야 합니다. 포도주가 없다, 그때는 혈육의 어머니가 한 요청이 아니라 피조물의 대표로써 마리아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여자여’ 이 말은 존칭입니다. 기나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제가 십자가에 보혈을 흘려서 새 언약의 피를 줄줄 흘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말을 하자마자,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대화의 수준이란 것이 너무나 깊습니다. 마리아가 합니다. 퉁명스러운 거절로 듣지 않고 마리아는 종들에게, 집사님들에게 가서, 집사님들 그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만 하십시오,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대화라는 것은 우리 보통 사람들 수준을 넘습니다. 거절을 거절로 듣지 않고, 다시 말해서 민원해결을 해달라는 간단한 요청을 신적개입을 요청하는 말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깊은 교감이 있어서, 그래서 이 부분은 가톨릭이 너무 좋아하는 마리아 중보사상의 핵심입니다. 마리아 중보론의 핵심이 요한복음 2장입니다. 가톨릭이 너무 좋아해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마리아가 하는 말이, 그러면 예수님 당신은 나에게 거절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내가 했던 요청을 이미 접수했습니다, 하면서 하는 말이, ‘집사님들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행하십시오’, 하자마자 예수님께서 집사님들에게 말합니다. ‘저기 물을 가득 채우십시오’ 물을 가득 채우란 말은 물을 다 썼다, 왜? 손님이 너무 많이 와서 물이 없어요. 물을 가득 채우라고 했더니 집사님들이 물을 또 가득 채웠습니다. 디카이오 토노스, 다 채웠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 때는 오지 않았지만 생활밀착형 민원해결형 예언자 사역을 합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식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한 나의 개입은 허락하겠습니다, 라는 뜻으로 물로 된 포도주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예수님은 너무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너무 예수님은 배려심이 많은 인물, 진짜 매력 있는 인물, 우리 예수님은 배려심의 달인입니다. 이걸 연회장에 갖다 주라는 말, 예수님은 그 사태를 정확하게 주장하는 연회장의 체면을 살려주는 겁니다. 이렇게 할 수 있거든요. 이 포도주를 떠서 그냥 널리 제공하여라, 아무한테나 가져다주라는 게 아니라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는 것은 연회장이 이 사태를 총괄적으로 하여, 그런데 연회장에 가져다주라고 하면 누가 영광을 받습니까? 누가? 신랑입니다. 연회장은 어디서 가져온 지도 몰랐죠. 연회장은 동선이 길었기 때문에 그 많은 물로 된 포도주가 어디서 온 지도 모르고, 원래 정결예식을 위해서 있던 그 물통에서 포도주를 떠오는 장면을 못 봤기 때문에 어디서 온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집사님들은 알았습니다. 이 말은 무엇이죠? 아주 평범한 교훈입니다. 마리아처럼 포도주가 없다는 자발성과 희락의 실천능력이 없는, 즉 하나님의 희락에 빠진 도취감과 계약적 결속감이 모자라 신앙생활의 동력을 잃었다는 보고를 한 후에 물이라도 일단 가득 채워놓고 예수님의 다음 말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말씀의 역사를 앙망하는 집사님들 같은 겸손함, 집사님들과 같은 그런 순전한 마음들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일종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극적개입, 종말론적 개입 이전에, 우리 예수님은 생활밀착적인 곤경을 해결해주시는 너무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너무 좋으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맛보아 아셔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포도주가 없다고 할 때 우리 결핍을 채우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여러분의 결핍,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했습니다. 그렇죠? 포도주가 없다는 이 결핍감의 보고와 요청, 물 두 세 통 드는 여섯 항아리에 맹물이라도 가득 채우라 ,맹물이라도 가득 채울진대 그 물이 어느 순간에 포도주로 바뀌어서 희락과 자발성과 실천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는 신앙생활의 동력이 크게 증가하여 내가 혼인잔치에 참여한 것 같은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줄 믿습니다. 먼저 포도주가 없습니다, 라는 고백, 사실 보고, 요청, 그다음에 물이 두세 통 드는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서, 그다음 Next step, Next action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쳐다 봄, 이것이 바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참 장본인 집사님들이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디카이 코노스, 집사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포도주가 없다는 마리아의 고백, 정통 문제의식, 우리 교회에서 뭐가 없다고 결핍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대우해야 합니다. 목사님들이 불평하는 사람들을 대우해야 합니다. 절대로 목사님들이 불평분자라고 낙인을 찍으면 안 되고, 목사님 설교 너무 졸립니다, 70%가 다 조네요, 이런 말 해줘야 합니다. 목사님 설교 내용은 없는데 계속 길어지는 경향이 있네요, 이렇게 말 해줘야 합니다. 목사님 요즘 자발성이 없습니다, 동력이 뭔가 빠진 것 같습니다, 이런 결핍을 고백하고 그걸 해줘야 그런 언어가 소통을 유발하는 것이지, 거짓과 외식과 덮어놓고 가는 이런 비정적인 언어는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소통 못 합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포도주가 없다, 희락과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진 파탄 난 혼인잔치 같은 그런 신앙생활 말고, 그런 교회생활 말고, 도취된 것처럼, 윌리엄 블레이커가 말했다고 하죠. 윌리엄 블레이커가 영국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 갈 때마다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는 흑맥주 한 잔씩 돌린다면 누가 교회를 가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따뜻한 흑맥주를 통하여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온기를 있게 만드는 거룩한 양조장입니다. 교회는 예수님 옆구리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붉은 보혈의 향기가 가득 찬 곳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포도주가 없다는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파탄 난, 우리의 희락이 끊어진, 우리의 자발성이 결핍된 신앙생활 현장에 개입하도록 요청하는 사실보고를 드리게 하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 두세 통 드는 항아리에 아무 변화도 없는 맹물로 가득 채우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묵묵히 순종하여 마침내 변화를 경험하는 저희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우리 한국교회와 제 개인적인 삶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에게 희락의 새 포도주를, 거룩한 새 포도주를 공급해주셔서 강한 자발성과 강력한 결속감이 가득 찬 신앙생활하게 도와주소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흑맥주로 우리 마음을 채워주셔서 우리가 도취된 듯이 살아가게 해주시고 봉사하게 해주시고 희생하게 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저희가 희락이 많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성이 마멸되어 가면서 거친 노동의 현장에서 우리 소득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이 세상에서 존엄성을 확인하며 자기가 이 세상에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일터를 허락해주셔서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게 해주시고 이웃 사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민에게 동등한 기회를 허락하여 주소서. 우리 가향에서 새로운 직장을 모색하는 형제자매들 있사오니 쉬는 듯한 휴지한 듯한 멈춘 듯한 그 걸음에서도 여전히 동력이 있게 하시고 앙망하는 힘이 솟구치게 하여 주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무한히 교통하심이 포도주가 떨어져서 자발성이 끊어져서 희락이 끊어져서 강한 결속감이 끊어져서 영적냉담기로 치닫고 있는 많은 교우들과 그 단계를 거쳐서 이미 극복하는 단계에 있는 교우들 위에 우리 가향의 지체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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