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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3-51(예배설교)

by 【고동엽】 2021. 12. 14.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방금 읽은 본문과 제가 지금 읽은 사역, 제가 번역한 사역을 비교하면서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제가, 헬라어 원전과 한글 번역 성경 사이에 시제 번역이 상당히 다릅니다. 제가 번역한 걸 여러분이 비교하면서 보십시오. ‘이튿날 그는 갈릴리로 깊숙이 나가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빌립을 만나신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현재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만나신다, 말씀하신다, 복음서에서 말씀하신다는 대부분이 현재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어로 왔을 때 말씀하신다는 마가복음이나 복음서에서 대부분이 현재시제로 씁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현재시제가 됐을까요?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회중들 가운데 지금도 부활하셔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강력한 경험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도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30년이 지난 그때도, 40년이 지난 그때도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에게 말씀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영원한 현재형을 썼습니다. 예수님이 쓰실 때는, 예수님이 제자를 끌어 모으는 이런 방법에서 ‘만나신다’는 표현도 왜 현재일까요? 예수님이 제자를 만나는 그 과정은 변형이 계속 되고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에, 과거에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빌립 같은 이런 경우는 계속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빌립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빌립을 만나신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현재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1장 44절은 과거형으로 돼 있습니다. ‘빌립은 벳새다 안드레와 베드로의 마을 출신이었습니다’ 일종의 삽입어구입니다. 45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한다.’ 친구가 친구를 전도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는 첫째로 세례요한이 인수인계해준 그룹, 그다음에 예수님이 직관적으로 끌어 모은 그룹, 그다음 예수님의 제자가 끌어 모은 그룹, 세 그룹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그룹은 첫째, 세례요한 선배가 인수인계해준 그룹, 그다음 예수님이 평소에 알고 있던 사람들을 전광석화 같은 권위로 합류시킨 그룹, 그다음 먼저 제자된 자가 데려온 우정전도의 열매, 이때 우정전도의 열매는 형제간도 형제간끼리 전도하는 겁니다. 교회사에서 형제가 형제를 전도하는 사례가 참 많습니다. 다시 한 번 1장 45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한다. 모세가 율법에 썼던바 그리고 예언자들이 썼던 바가 된 그 사람을 우리가 발견했다. 곧 그는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다.’ 예수란 이름은 흔한 이름입니다. 예수란 이름이 왜 흔했냐면, 예수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 똑같은 말입니다. 예수아입니다. 발음이 예수아, 좀 더 구체적으로 하면 여호수아, 예언자 호세아, 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 예수님, 사도행전에 나온 바예수, 다 같은 거예요. 예수는 뜻이 구원동이 이런 뜻입니다. 예수 이름은 구원동이다, 즉 구원을 열망하는 이스라엘 민중들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깊은 사람들이 자기 자녀에게 지은 이름이 예수란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요셉의 아들 예수, 1장 46절입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말은 영원한 진실이 될 필요는 없는 말이죠? 이건 우발적 진술이고 한 번 일어난 진술이죠? 이건 영원한 진술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건 과거시제입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이 말은 과거시제입니다. 한 번 일어난 시제입니다. ‘그때 빌립이 와서 그에게 말한다.’ 다시 현재시제입니다. Come and See. 와서 보라, 이 말은 예수의 인격과 정면으로 부딪혀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1장 37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7-39절에도 특징이 돼 있습니다. 3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어디 계십니까는 직업이 무엇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직업이 무엇입니까, 어디를 근거지로 활동하십니까?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직업을 묻지 말고 내가 어디서 활동하는지, 어디서 활동근거지가 만들어졌는지 보지 말고 나 자신을 주목하라, 와 보라, 와서 보라, 나의 인격과 나의 비전과 나의 꿈과 나의 간절한 기도제목과 맞부딪혀 보아라, 와서 경험해 보아라, 사람을 가서 본다? 굉장한 직관적 경험이면서 총체적 경험입니다. 사람을 탁 보는 것은요. 와 보라는 말은, 기독교의 가장 놀라운 보물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 예수의 영혼 자체입니다. 예수가 빠져버리면 기독교는 거대한 종교 사기집단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라는 알짬이 빠져버린 기독교는 이것과 똑같습니다. 달나라에 아파트를 지을 테니 투자금을 내라고 하는 야바위꾼과 똑같습니다. 달나라에 아파트를 지을 테니, 18홀 짜리 70홀 골프장을 지을 테니, 고요의 바다부터 저 언덕 둔덕까지 멋진 골프장을 지어줄 테니 돈을 내십시오, 그럼 많은 사람들이 달나라에 가서 골프 치는 그 기괴망측한 로맨틱한 꿈 때문에 돈을 낼 텐데, 그런데 나중에 뭐라고 사기를 치겠습니까? 중력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 없는 기독교는 이 사기꾼보다 더 나을 게 하나도 없어요. 왜? 자기가 끌고 가는 교인들이 천국 갈 지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지옥문으로 인도하면서도 천국 문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하는 거짓된 종교지도자들의 역겨움 앞에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분노가 없으면 의로움에 대한 열망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분노 자체가 우리의 생명력을 소진시키는 건 맞습니다. 분노는 좋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무치는 열망과 열정으로 치환되는 분노일 때는 잠정적으로 전략적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나쁜 사람에 관한 기사를 읽거나 나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 우리 마음은 오염돼 버립니다. 나쁜 사람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 마음은 오염돼 버리니까, 나쁜 사람에 대한 분투를 많이 할수록 우리가 악해질 가능성이 실제로 매우 많습니다. 예수를 보고 경험하는 것만이 기독교거든요. 와 보라, 우리가 교회 호객행위를 하는 건 아니죠. 하이타이나 스타킹을 주면서 교회에 끌어들이는 건 아니죠. 이건 전도 아닙니다. 예수의 인격과 직면시키는 것, 대면시키는 것, 하나님의 인자가,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예수의 인격과 대면시키는 게 기독교의 참된 경험이고 이것이 전도죠.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과 대면시키는 전도를, 제가 말했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같은 전도를 우리가 하기에는 너무 영적으로 용량이 약한 겁니다. 우리가 주일에 가향교회 설교 40-50분하죠? 그런데 제가 앉아서 들어보니 굉장히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2시간동안 신령한 말씀을 들어야만 이때 신령한 말씀이란 뜻이 중요합니다. 지루한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감미로움을 잃게 만듭니다. 그러면 안 되죠. 그런데 2시간 동안 하나님께 빨려 들어가는 말씀을 주면 완악한 사람도 바뀌는데, 35-25분 설교하고 목사님 연봉을 실제로 너무 많이 받습니다. 제가 볼 때 담임목사님이 설교 25분하면 연봉 3천만 원 이상 주면 안 됩니다. 그 설교만 가지고, 왜 그럼 일반교회들은 그렇게 하면 됩니까? 성가대가 일단 너무 좋습니다. 엄청 찬양대가 좋기 때문에 설교를 25분해도 우리 50분 설교보다 더 많이 은혜 받았다고 헌금 많이 내고 갑니다. 우리는 성가대도 없고 아무 장치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인격적인 대면만 가지고 해야 하니까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진실 덩어리 자체가 되어야 하는데, 또 그러기에는 비교우위가 약간 있을 뿐이지, 그렇다고 또 사람을 완전히 정신을 잃게 만드는 그런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기에는 우리가 또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한달 간만 만일에 깊은 기도에 몰입하고 온다면, 온전히 기도만 한 달만 한다면 그다음 주는 은혜가 엄청 충만할 겁니다. 영적 감가삼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파워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와 보라는 그런 예수의 인격과 영혼 속에 대면시키는 이런 방법이 요한복음의 전도, 요한복음은 와 보라 전도, 예수의 인격과 대면시키는 전도를 많이 했어요. 문제는 친구가 이 말을 했는데, 도대체 빌립이 무슨 일을 당했기에 이런 일을 하는지 중요합니다. 1장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다’ 이때 만나다는 유레스케이입니다. 이 말은 의도적으로 찾아가다 입니다. meet by chance가 아닙니다. 우연히 만나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다 할 때 찾아가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나가다가 이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알고 있었듯이 빌립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하는데 그래서 갈릴리로 가서 빌립을 찾아갔다는 뜻입니다. 좀 더 문맥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갈릴리 깊숙이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빌립을 찾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는 게 맞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정신이 온전한 분입니다. 지나가다 갑자기 탁 만났는데, 나를 따라 오너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정신이 없는 사람이고 따라가는 사람은 더 정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나다는 유레스코라는 뜻은 찾아가다, 예수가 갈릴리로 간 이유는 빌립을 찾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러면 1장 42절까지의 행동은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1장 28절에 보면, 유다 요단강 예루살렘 근처, 사해근처에서 일어난 겁니다. 사해근처에서 일어난 일이고 1장 43절부터는 갈릴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초창기에 일어났던 1장 19-42절까지는 몽땅 세례요한의 세례현장에서 일어난 겁니다. 이 말은 세례요한의 세례운동이 하루 이틀에 끝난 게 아니라 장기간 세례요한 운동이 베다니에서 일어난 걸 알 수 있고, 예수님 초창기의 제자공동체의 모태는 요단강에서 일어난 걸 알 수 있습니다. 1장 28절 볼까요?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이 시공간의 통일성을 그대로 믿으면 29-42절까지는 결국은 요단강 요한의 세례 주던 곳에서 초창기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형성됐습니다. 안드레를 통해서 만났죠? 안드레가 거기 따라갔겠죠? 안드레가 갈릴리에서 요단강까지 따라 간 것 아닙니까? 100km가 훨씬 넘는 거리를 따라간 거거든요. 200km정도 되는데 따라간 거예요. 갈릴리에서 요단강까지 200km정도 된다고 봐야 해요. 그런데 그 바로 옆에 누가 와 있었어요? 안드레가 다시 그 다음날 누구를 만난 거예요? 베드로를 만났는데, 베드로도 그 자리에 와 있는 거죠. 베드로도 세례 받으러 간 거죠. 예수님의 초창기 제자들은 전부 다 예수님과 함께 세례요한의 세례운동에 동참하고 회개의 세례를 다 받은 사람들이에요. 회개의 세례를 하러 간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 제자가 초기에 형성된 거죠. 요한복음은 참 특이합니다. 예수님의 초창기 제자들이 전부 다 세례요한의 세례동기동문생이라는 겁니다. 전부 다 요단강 침수동기생들이에요. 그런데 빌립부터는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직접 만난 거예요. 예수님이 갈릴리로 온 겁니다. 갈릴리로 와서 빌립을 의도적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빌립은 예수님과 어느 정도 대화를 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빌립에게는 예수님이 긴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걸 보니 예수님과 빌립 사이에는 이것이 최초는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이건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해석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빌립을 알 수 있었을까? 나사렛에 보면 돌이 많습니다. 나사렛에서 6km 북쪽으로 올라가면 헤롯 안티파스 분봉왕의 수도가 있습니다. 세포리스라는 수도가 있는데 거기에는 로마 극장이 있습니다. 가면을 쓴 로마 배우들의 극장이 있어요. 로마 시내에 있는 극장의 branch가 거기 있었어요. 그다음에 마차 경기장이 거기 있었어요. 그다음에 큰 목욕탕이 있었어요. 다시 말해서 로마제국의 작은 축소판이었어요. 뭐가? 예수님 동네에서 6km정도 올라가면 세포리스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서 누가 살았어요? 헤롯 안티파스라고 하는 악독하고도 유능한 지도자 분봉왕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갈릴리 가버나움 벳새다로 오면 그 영토는 헤롯 빌립의 영토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보다 훨씬 더 유약하고 덜 악독한 헤롯 빌립의 영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살던 나사렛에서 6km 북쪽에 있는 세로리스에 근거지를 둔, 즉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버렸던 헤롯 안티파스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갈릴리 깊숙이 들어와서 가버나움에다 베이스캠프를 칩니다. 이 가버나움은 누구의 도시이냐면,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빌립의 국경선입니다. 여기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내려오는데 예수님은 빌립을 일부러 만나러 가는 것은 예수님과 빌립 사이에는 이미 알고 있는 사이라는 전제가 될 때 납득돼요. 그럼 어떻게 알았을까?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모르는 비밀인데, 예수님 초창기 제자들은 아는 사람들 사이였다는 그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초창기 제자 중에서 안드레와 사도요한, 한 사람은 안드레고 한 사람은 사도요한이라고 봐야 합니다. 세례요한을 쫓아다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안드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름이 없는데 그 한 사람의 이름은 요한복음의 저자라고 보통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의 저자와 안드레가 세례요한의 추종자이고, 그다음 안드레가 베드로를 하루 만에 만났으니 베드로도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간 사람이고, 예수님도 세례 받으러 갔으니까 갈릴리에 뜻 있는 모든 청년들은 어디로 갔어요? 요단강으로 다 침수하러 간 거죠. 그 말은 뭡니까? 이들은 뜻이 있고 의지가 매우 맹렬한 너무 너무 중요한 청년들이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일자무식이 아니었어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고조된 사람들이었어요. 그걸 알아야 해요. 예수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고조됐는가를 아는 방법은 오늘 본문에 나와요.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볼 때 제일 마지막에 이스라엘 임금이라고 단숨에 고백한 것은, 베드로에게 안드레가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는 그 고백, 그런 용어 하나하나가 휘발성이 매우 강한 언어에요. 왜? 지금 왕들이 다 있단 말이에요. 분봉왕이 있어요. 로마총독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로마총독도 있고 분봉왕이 있는데, 우리는 왕을 만났다, 우리는 기름 부은 사람을 만났다, 이스라엘 임금을 만났다, 이런 고백들은 결코 공공의 영역에서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런 말들을 주고받는 것은 일종의 underground password 같은 거예요. 예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너무 깊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전부 다 세례요한 운동에 동참했던 사람들이고 심지어 세례요한의 핵심추종자였고, 두 번째로 하루 만나자마자 메시아를 만났다는 말을 할 정도로 예수님에 대한 직간접적 이해가 깊었고, 그다음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빌립이라는 인재를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인재를 찾아가십니다. 만납니다. 그런데 빌립은 친구를 찾아갑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합니다.’ 어쩌고저쩌고,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모세가 율법에서 말했고, 모세가 율법에서 말한 그 사람에 대해서 이미 너무 많은 대화를 주고받은 사이입니다. 이걸 볼 때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 도래에 메시아의 도래에 학수고대하는 점에서 일치된 인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여러분 보십시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이건 신명기 18장 18절이거든요. 그런데 마태복음 11장 2-3절 보면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서 예수님께 전갈,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이 오실 그이가 바로 신명기 18장 18절에 나오는 모세가 율법에 말한 그 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민심을 하나로 묶어서 강력한 영적폭발력과 정치적인 위세를 단숨에 회복할 수 있는 강력한 한 지도자를 400년 동안 목이 빠지게 기다린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400년의 끝에 나사렛 예수가 등장했는데, 그 등장하기 직전에 이스라엘의 생각 있는 청년들의 마음속에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이 너무 강했고, 모세가 말한 그 예언자를 기다리는 그 열망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때마다 직관적으로 알아차린 겁니다. 아마 이 제자들은 너무 감동받았을 겁니다. 황무지가 400년 동안 갈라졌습니다. 여러분, 사하라사막이 왜 사하라 사막이 됐는지 알죠? 원래 사하라사막의 그 모래는 거대한 바위였습니다. 거대한 바위가 수십만 년 동안 일사 태양에 노출되면 모래가 돼 버립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위 같은 신념을 가진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가 영적인 황무지 상태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우리 마음은 썩은 흙처럼 바뀌어버립니다. 견고한 바위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베드로 같은 견고한 심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뜨거운 태양아래서 황무지처럼 비를 경험하지 못하고 아무런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 거대한 바위도 잘게 잘게 부서져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세가 율법에 썼던 그 사람, 예언자들이 말했던, 다시 말해서 구약 성경을 다 꿰뚫어보고 있죠? 모세오경과 예언서가 성문서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뭐죠? 잠언서 욥기 전도서에 비해서 모세오경과 예언서가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뭐죠? 역사의 모순을 종말론적으로 해결할 그 위대한 역사적인 의식을 가르쳐 온,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예언이 많기 때문에, 그런데 그 중에서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시온의 회복에 대해서 가장 많은 예언을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떤 예언자입니까? 이사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예수님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합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말했다. 어떻게 나사렛에서 좋은 것이 나오냐?’ 이때 에크 나사렛 투나타이 티 아가손 에아나이. 여기 에크 나사렛이 먼저 나왔습니다. 나사렛의 비치, 경멸적 용어입니다. 나사렛은 누가 살았느냐면 세포리스를 건축한 석수장이 목수, 석수장이급들, 나사렛 인적구성원을 보면 두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평야의 소작인들, 그다음에 세포리스를 건설했던 토목건축 석수장이들의 집단 거주지입니다. 그게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은 절대로 이스라엘 영적인 미래를 걱정할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왕적인 위엄을 갖고 나라를 걱정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고 전부 다 그때그때 자기 먹고 사는 생계에 속박된 노동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그 말은, 빌립에게 그 말을 들려준 나다나엘은 너무나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간사한 게 없는 겁니다. 나사렛 출신이라고 했는데, 나사렛 요셉의 아들 예수라고 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느냐고 했기 때문에 이건 완전히 단도직입적인, 태남아 수준을 넘어서는 무례남입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무례남이에요. 왜? 나사렛 출신이라고 방금 소개했는데 하는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아마 예수님의 용모가 적어도 외모 면에서는 카리스마가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예수님이 키가 컸거나 얼굴에 위엄이 가득 찼다면 이런 말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반적으로 매우 소박한 외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이가 오십도 안 되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예수님 33세에 그런 말을 들으면 안 되잖아요. 네가 40세도 안 되었는데, 이래야 하는데 예수님이 나이가 들어보였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상대방이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는데 연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퉁명스럽게 나사렛을 경멸적으로 이야기하는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 그놈 참 건방지다가 아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보셨습니다라는 말은 과거시제입니다. ‘그에게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그에게 직접 말한다가 아닙니다. 페리라는 concern입니다. 레게이 아우토하면 여격입니다. He says to him. 이런 뜻인데 그게 아닙니다. He says regarding him, 또는 He says concerning him. 이 페리라는 전치사는 '~에 관하여' 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바로 말한다면 어떻게 쓰이느냐면 레게이 아우토, He says to him,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레 알렉소스 이스라 알레티스 엔 호 도크 돌오스 에크 에신. 이 말이 중요합니다. ‘진실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안에는 간사함이 없도다’ 이런 뜻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에게 직접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아마 빌립이 들었거나 아니면 예수님 혼자 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진실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안에 간사함이 없다’ 다시 말해서 아첨하는 말이 없다, 속이는 말이 없다, 나사렛 출신이라고 소개 받은 자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경멸적으로 그렇게 깔아뭉갠 그에게 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는 진실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A true Israelite 이라고 돼 있는데 아닙니다. truly Israelite 이런 뜻입니다. 알렉소스라고 하는 부사입니다. ‘진실로 그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 안에는 간사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간사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을 즉 정직한 사람, 의로운 사람, 사기성이 없는 사람 이런 뜻입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씀하신다’ 레게이 아우토브 나다나엘, ‘나다나엘이 예수에게 말씀하신다’ 현재시제입니다. 포 덴메 기노스코에이스 ‘언제부터 나를 아십니까?’ 이때 기노스코라는 말 중요합니다. 그노시스티즘, 영지주의 할 때 쓰는 말입니다. 기노스코, 알다, 언제부터 나를 아십니까? 어떤 연유로 나를 아십니까? 이 대답은 맞죠? 그런데 이 말은 ‘당신은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간사함이 없군요.’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그에게 정면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로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안에는 간사함이 없다.’ 라는 말을 듣고 와서 응답합니다. ‘언제부터 나를 아셨습니까?’ 자기가 참 이스라엘사람으로 간사함이 없다는 걸 알아주는 데 대한 기분 좋은 반응입니다. ‘언제부터 나를 알았습니까?’ 여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 다음이 이제 문제입니다. 아무리 이걸 이틀 내내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했는데, 제가 작년에 깨달은 그대로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까지 혹시 작년에 깨달은 것 이상으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바위에 엎드려 12분간 엎드렸는데 안 됩니다. 오늘 심학산에서 기도했는데, 그런데 제가 금요일부터 계속 이 말뜻을 찾아보기 위해서 주석서를 찾아봤는데 제가 깨달은 것 이상 어떤 주석서도 없습니다. 문제는 제가 써야 하는데, 서구인들의 주석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볼 것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외식가들입니다. 대부분이 뜨거움도 없고 열정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들, 하나님 사랑하는 그 마음이 대한민국의 참 자산이 됩니다. 하나님 사랑만이, 돈보다 풍요보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의 총량이 대한민국의 위대한 품격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수록 대한민국은 더 위대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충성심이 많은 사람, 나다나엘 같은 사람이 많은 대한민국은 진짜 세계적으로 강한 나라가 됩니다. 우리 주석서, 우리 한국 청년들이 세계교회사에 대안이 돼야 합니다. 지금 영국도서관, 독일도서관, 프린스턴 도서관을 보면 1760년대부터 1820년대 책이 다 너덜너덜 해져서 다 버립니다. 그런데 그 책은 버리면 안 되는 책입니다. 1700년대 책을 보면 1600년대 사람이 인용이 돼 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직계제자들을 인용한 책이 1700년대 책입니다. 1700년대의 모든 책이 1800년대 책에 나오는데 이 모든 것을 다 버리면 서구가 이루었던 기독교의 모든 흔적들이 다 사라지는데, 이걸 지금 다 버립니다. 그걸 다 우리가 영인본이라도 구해다가 유럽교회사의 이어달리기를 해야 하거든요. 유럽에서 꽃피웠던 기독교 문명보다 더 찬란한 사랑과 희생과 의의 문명이 이 극동 한국에서 꽃피워야 하는데 기독교 입문도 하지 못하고 우리가 천리교처럼 남묘호랑교처럼 이렇게 홍수에 떠밀려갈 위기에 우리가 처한 겁니다. 지금 김삼환 조용기 이 사람이 대표하는 기독교를 가지고선 도저히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상륙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한경직 기독교가 돼야 하고 김교신 기독교가 돼야 합니다. 이현종 이세필의 기독교, 참된 민심에 호소하는, 우리의 전통 종교보다 더 깊은 진리의 깨달음, 진리의 자유함에 도달한 사람들이 나올 때 기독교는 우리 역사 속에 토착화가 되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오정현 목사나 이런 소위 훌륭하다는 유명한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의 정맥을 짚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한국교회의 정맥은 예수에 대한 앎, 예수를 인격적으로 정면으로 대면한 제자들의 수에 달려 있고 그 질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님께 알려진 제자들이 이 공동체, 이 대한민국 교회에 많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Before,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나는 너를 보았다.’ 문제의 핵심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뜻이 무엇인가? 요것이 핵심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그 다음말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됩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불러오라고 한 걸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사람을 찾아나서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형성은 예수님의 의도적인 인선작업을 거쳤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너를 보았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씨 에이 호 히오스 투 데우 씨 바슬루스 에이 투 이스라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이때 인칭대명사가 격 어미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쓰일 때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라는 2인칭 단수대명사가 문장에 따로 쓰일 때는 무슨 뜻이 있어요? 강조의 뜻이 있습니다. you yourself, 이런 뜻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이런 뜻입니다. Not another them,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야말로 씨 에이, As you입니다. 씨 에이 호 히오스, 히오스는 아들입니다. 투 데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또 똑같은 가 쓰였습니다. 가 없어도 에이 오 히오스 하면 에이라는 게 2인칭 남성단수입니다. 2인칭 단수에요. 동사의 격어미로 주어를 대신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주어를 따로 안 썼어요. 동사의 격 어미 안에 그냥 주어가 다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어를 쓸 때는 대단히 강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야말로 참 하나님의 아들이오. 참 이스라엘 임금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여기에 너무 많은 해설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전광석화와 같고 급진적이고 인격적인 교제가 일어나는 과정은 실제로 너무 생략돼 있습니다. 왜 생략돼 있느냐면 옛날 사람들이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글을 썼기 때문에 많은 해설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뭡니까? 제일 중요한 것,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이스라엘 임금이라는 말은 매우 휘발성이 강한 언어로써 그 당시에 공적인 담화에서 함부로 나오면 안 되는 말이에요. 왜? 이미 분봉왕들이 있고, 이미 대제사장이 있고, 이미 총독 빌라도가 있고, 이미 로마 황제가 있고 이스라엘 정치적 질서는 안정돼 있는데,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많은 대리자들이 있는데 그 모든 걸 젖혀놓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이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시편 2편 6절입니다. 다윗계열의 이상왕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다음 이스라엘 임금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의 복종을 얻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 마음의 복종을 유발시키는 분입니다, 당신은 복종을 유발시키는 왕입니다, 나는 당신께 복종하고 싶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복종을 유발하는 존재, 당신은 나에게 복종을 유발하는 존재입니다, 당신은 내 마음을 지금 통치합니다, 내가 참 이스라엘이라면 당신은 나 같은 사람을 통치하는 참 왕이십니다, 그런데 여기 안에 약간의 생략이 있었습니다. 많은 교감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마지막에 결론부만 요약한 겁니다. 때문에 이 부분이 전부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당신은 이스라엘 참 왕입니다. 당신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나를 정의해주셨는데 나 같은 사람의 복종을 유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초창기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가 랍비와 제자들 사이와는 전혀 다르죠? 랍비들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통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랍비들은 많은 인용을 했습니다. 옛날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고 누구는 말했고, 계속 끊임없는 인용과 각주를 붙이는 분이 스승이었고 랍비였고, 예수님은 각주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은 자기가 각주입니다. 아멘 아멘 레고, 이 말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각주 없다, 각주 필요 없다, 내 말의 권위는 나에게서 나온다, 내 말의 권위는 나로부터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에 아멘 아멘 레고입니다. 각주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초창기 제자들 사이는 단순히 랍비와 제자들 사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당신을 보았다고 했기 때문에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 이제 당신은 이보다 더 큰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이제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천사가 위로 올라갔다가 인자 위로 내려갔다가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게 나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미가서 4장 4절과 스가랴 3장 10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평화로운 시대입니다. 메시아가 올 때 열왕기상 4장 25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화시대가 오면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이런 뜻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안전히 거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전부 다 자기 먹거리를 가지고 자기 살림살이를 꾸려가면서 메시아의 통치의 혜택을 누린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메시아의 통치를 희망하면서 바이블을 읽고 있는 그런 상황, 또는 많은 후대의 랍비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일부러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메시아를 대망하면서 성경을 묵상하거나 아니면 메시아의 통치, 미가 4 4절과 스가랴 3 10절 시대를 기다리면서 메시아가 올 때 모두 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평안히 지내는 그런 상황을 꿈꾸며 앉아 있는 묵상하는 모습, 그 메시아의 열망태도를 보면서 나는 너를 알았다, 메시아의 열망태도에 고조돼 있는 너를 보았다, 이런 뜻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이 말은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면서 간절하게 메시아를 앙망하는 너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그러니까 자기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 마음을 알아주니까 당신은 임금이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이건 작년에 깨달은 건데 이번에 새로 깨달은 게 아닙니다. 불행히도, 이걸 새로 깨달아야 하는데, 혹시 여러분이 새로 깨달으면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완전히 해명은 안 됐지만 오늘 발견은 이정도 하겠습니다. 인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요한복음에서 13번 나오거든요. 1장 51절에 인자, 인자라는 말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가지고 지상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자가 인자입니다.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가지고 고난을 겪어가면서 하나님의 통치 거점,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사람이 인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건 구약성경 어디를 방불케 해요? 구약성경 두 군데를 방불케 합니다. 누구의 사닥다리 위에 천사가 왔다갔다 했죠? 야곱, 또 하나는? 다니엘 7장 13절과 창세기 28장을 방불케 하니까, 북 이스라엘 왕국, 갈릴리 사람들은 야곱을 가장 큰 자로 믿었거든요. 그러니까 야곱보다 큰 자, 이런 뜻입니다. ‘네가 야곱보다 더 큰 자를 보리라’ 그러면 천사가 왜 오르락내리락 해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을 돕는 천사들의 오르락내리락 입니다. 천사들의 오르락내리락은 개인기 아닙니다. 예수님의 개인기 아니에요. 절대복종을 도와주는 천군천사들의 도움을 받는 자, 하나님의 천군천사들이 왜 인자에게 오르락내리락 해요? 십자가의 굴욕적 죽음까지도 묵묵히 감수하도록 신적 격려를 일삼는 천군천사들이, 이 말은 무엇이죠? 우리에게도 우리가 우리의 복종을 도와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천군천사급 선배들과 동료들이 오르락내리락 해주고 우리의 복종을 유발시키고 우리의 복종을 심화시키고 우리의 복종을 완성시키는 천군천사급 동역자의 격려가 필요한 존재라는 뜻이죠. 결론 맺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십자가의 굴욕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땀방울 한 땀 한 땀 순종을 하기 위해서 천군천사의 격려가 필요했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신적격려가 필요했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천군천사의 격려어린 메시지가 필요하고 천군천사가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신령한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오늘 바로 이 강단이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굴욕과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돕는 신령한 위로를 일삼는 천군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현장이 오늘 이 강단이 돼야 하고 주일예배가 돼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야만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 뜻을 완성할 수 있어요. 예수님도 신적격려가 매 순간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 파송한 말씀, 천군천사들이 우리는 뭐죠? 완성된 말씀이 천군천사입니다. 우리는 천군천사가 안 나옵니다. 성경이 완성됐기 때문에, 혹시 나올 수 있어도 성경을 따로 넘지는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뭐죠? 66권의 완성된 두루마리 성경말씀이 천군천사가 됩니다. 66권의 말씀이 우리를 오르락내리락 할 때, 우리의 그 한 땀 한 땀 순종을 도와줄 때 우리는 천군천사가 우리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며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무엇이죠? 성경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열립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을 일깨워주고 깨우쳐주는 성경말씀이 열릴 때 나에게 하늘이 열린 것이다, 하늘이 열려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신령한 메시지를 공급받는 한 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볼 때 굉장히 역동적이고 순식간에 일어난 인격적 결속감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도 오늘날도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여 그의 제자가 되는 제자들이 일어나게 해주시고, 예수님에게도 신적격려가 필요했듯이 저희에게도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66권 말씀이 열려서 하늘이 열린 것과 같이 방불한 역동적 말씀사역이 계시사역이 일어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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