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론 고찰
- 4장 1절에서 16절을 중심으로 -
이광호 목사
1. 서론
현대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론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교인들이 태반이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18에서 이 세상 가운데 자신에게 속한 ‘하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1)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무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불러모으시겠다는 의미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들어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죄악에 익숙한 교인들은 종교적 욕망에 얽매여 주님의 교회를 자기 뜻대로 경영하려 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구속받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제각기 자기의 취향에 맞는 교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유혹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단 제한된 속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합리화 될 수는 없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혹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따라 분리되어 경영되는 각각의 형편을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지상 교회들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의 경험적 사고에 천착하는 것은 온당한 자세가 아니다. 도리어 성령의 조명에 의해 끊임없이 문제점을 확인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잘못을 교정하려는 자세가 있을 때 그나마 참된 교회에 접근하려는 본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교회를 과연 참된 교회라 할 수 있는가? 개혁주의, 보수주의를 자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맹이 없는 그러한 주장은 도리어 거짓을 조장할 따름이다. 우리의 고백은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고 있다. 교회라는 형식적 이름을 가지는 것 자체로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의 표지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며 본질적인 것임을 안다. 겉으로 보아 평온하고 세상적 축복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며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면 참 교회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교회인 것이 아니다. 교회의 표지는 기본적으로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 ‘올바른 성례’가 집행되며 신실한 ‘권징사역’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이 참교회의 표지이다.2)
우리는 참교회를 규정짓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셋 중 하나는 제대로 잘 이행하는데 나머지 둘은 잘못하고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가 이에 얼마나 충실한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에 온전히 부합한다면 참된 교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거짓교회일 따름이다.
에베소서에는 교회에 대한 많은 교훈들이 담겨 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교회의 원상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일한 하나의 교회의 실체적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시대의 형편과 참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위해 에베소서의 전체적인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특히 4:1-16을 중심으로 연구에 임하고자 한다.
2. 에베소서에서 발견되는 교회의 원상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의 원상은 어디에 기준하는가?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원상에 대한 개념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엡1:4)과 ‘하나님의 형상’(엡4:24)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서 교회의 원상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창세전의 선택과 예정에 근거(엡1:4,5)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인간들의 신앙심을 통해 세워나가는 종교단체가 아니다. 즉 인간들의 신앙작용이나 종교적 행동에 근거하여 교회가 세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6)”(엡1:3-6)
에베소서 1:3에 기록된 ‘우리’란 바울과 에베소 교회를 포함한 그와 연관된 지상의 모든 교회를 지칭한다. ‘우리’ 즉 ‘교회’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늘의 복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 복은 인간들이 땅 위에서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처음 사람 아담이 지어지기도 전인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자기 자녀들로 예정하셨는데 그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주님의 교회가 결정되어 인간 역사 가운데 내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지구상의 참된 교회의 원상은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안에 선재(先在)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에베소서 1:6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 즉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의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3) 그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신령한 관계를 의미하며, 인간들의 종교적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가신 경륜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의의는 원상의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엡1:6)과 본질적으로 연관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창조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에 뜻에 온전히 순종함을 의미하며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3장 마지막 부분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21;Now unto him that is able to do exceeding abundantly above all that we ask or think, according to the power that worketh in us, Un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throughout all ages, world without end. Amen. Eph.3:20,21,KJV).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구절의 올바른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교회 안에’(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백성 가운데 존재하며 그들을 구속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다. 이는 창세전에 선택받은 자기백성의 전체 무리 곧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그 의미를 발생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로 인해 세워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가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되어 전 역사와 공간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킹 제임스 역의 “Un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throughout all ages, world without end”를 눈여겨보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교회의 원상에 대하여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본문은 에베소서 4:24이다.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찐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1-24).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22절의 “구습을 좇는 옛 사람”과, 24절의 “하나님의 형상”4)이다. 한글 개역성경의 ‘하나님을 따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로 번역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음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의 실제적 능력을 제어 당한 채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덧입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 기능이 마비된 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5) 이는 처음부터 그들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고후4:4, 골1:15, 히1:3)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위에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덧입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문 가운데서 ‘옛 사람을 벗는다’는 표현은 덧입고 있는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공동번역)을 회복하여 입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창세전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6)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이라는 문구에서 말하는 ‘창조된’ 시기는 창세기와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형상은 하나님께서 처음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타락하기 전 아담이 가졌던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 이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덧입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그 옛 사람 곧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래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범죄한 옛 사람 아담의 형상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 형상을 입은 성도들의 모임인 것이다.
사도바울은 교회에 관한 교훈을 주면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의 모임인 교회와 천상에 계시는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실체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며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모든 시대를 통괄(throughout all ages)하는 하나의 우주적 교회(the Church)7)로써 동일한 본질적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주적 교회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개교회는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시대 유행하는 개교회주의란 심각한 문제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교회주의적 교회란 이미 참된 교회에서 떨어진 교회로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라 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예배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달아 이해해야 한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의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음으로써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진 보배로운 그릇과도 같다. 그 영광은 인간들의 종교적 행위와 노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존재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상징적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매 주일 교회 가운데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과 연관된 매우 구체적인 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문제이다. 즉 성경과 성례를 기초로 한 교회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의 존재로 의미를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교회의 형식과 실체(엡4:1-6)
(1) “하나의 단일한 교회”
이 세상에는 원리적으로 하나의 교회만 존재한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의 교회만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들이 조직한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회합이 아니며 공동의 종교의식과 동일한 인간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시고 경륜에 따라 친히 세우신 공동체로써 성령께서 불러 하나되게 하신 주님의 몸이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인식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어온 중요한 개념이다. 초대교회의 익나티우스는 교회가 하나임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그는 최초로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8) 이러한 교회의 하나됨은 교인들 사이에 상호 긍정적인 감정을 갖거나 종교적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교회 가운데 보여주실 때 그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9)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엡4:3)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분할하거나 나눌 권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에 교회의 하나됨을 이야기할 때 지(支;肢)교회를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부분적으로 옳은 생각일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말하면서 지교회나 교단내부 혹은 정치적인 입장에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바는 진리와 고백을 근간으로 하는 우주적인 의미이다. 사도바울은 전체 우주적 교회가 하나의 교회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한다.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우리는 또한 이 가운데서 ‘세례’에 관련된 의미를 관심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세례는 교회가 고백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실제적 삶의 의미와 연관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도의 고백적 반응과 연결되어 교회와 세상과의 경계 즉 담을 확인하는 것이다. 원리적 측면에서 보아 세례는 하나님의 선택과 연관이 되며 성령의 사역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교회 안에 들어온 성도들은 세상에 전혀 있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성찬을 나누게 된다. 따라서 지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세례는 개교회의 영적 판단이기기도 하거니와 전체 우주적 교회의 신령한 사역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세례는 지교회의 소관인 동시에 우주적 교회의 영적 간섭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한 채 자의적인 세례를 베풀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욕망에 의존하여 그리스도를 떠난 배도 행위일 수 밖에 없다.10)
(2)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
교회는 인간들의 인위적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마15:13, 참조) 하나로 모여진 경륜적 공동체이다.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불러모으시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종교적인 인간이나 종교조직이 부름의 주체가 되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할 일이다. 우리 시대에 ‘전도’라는 명분으로 부름의 주체가 마치 인간이나 기독교 조직이 되는 듯이 이해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엡1:4)을 가볍게 생각하는 종교적 포교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장로교회 특히 보수주의 교회들은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백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들의 고백은 사변적이며 거짓주장이라 할 수 밖에 없다.11) 그들은 말로는 칼빈주의를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예를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어느 누구도 성도의 수를 늘이거나 줄이거나 할 수 없이 확정적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12)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은 종교적이며 자의적인 열정을 통해 끊임없이 교인들의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더 구원받게 하는 것이 교회의 도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즉 교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도들의 수를 늘게 할 수도 있고 줄게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신학적 자세가 아님이 분명하다.
사도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엡4:1)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성령께서 부르신 소명의 의미 가운데 존재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부르신 데는 창세전 선택에 근거한 고유한 의도가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무관하게 자기 판단이나 경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도리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권징사역을 통해 상호 권면해야 하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고 요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권면’과 ‘용납’ ‘지킴’에 관련된 요구는 권징사역으로서 교회가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켜나가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성도의 윤리적 삶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세움을 위한 것이다.
(3) 천상에 연결된 교회(엡4:7-10)
지상의 모든 참된 교회는 천상에 굳건히 연결된 교회들이다. 천상의 나라에 연결되지 않은 교회는 거짓 교회이다. 외견상 아무리 훌륭해 보이고 사랑이 많아 보이며 가난한 이웃을 돕는다 할지라도 거짓교회이다. 나아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할지라도 천상과 분리되거나 떨어져 있다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그렇지만 다소 부족해 보이고 변변치 못해 보일지라도 하늘나라에 온전히 연결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아름다운 목청으로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고 가난하여 이웃을 돕지 못하며 때로 갈등이 존재하여 사랑이 다소 부족한 듯 보여도 천상에 잘 연결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천상으로부터 허락된 은혜로서 은사 및 직분과 연관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별 성도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 곧 직분을 통해 천상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즉 교회를 연결하는 끈은 개인의 능력이나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허락하신 다양한 직분인 것이다.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허락하신 신령한 은사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기 취향에 따라 직분을 주고 받거나 행사할 수 없다. 우리시대의 교회가 타락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은사와 직분을 통해 교회가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경험을 배경으로 한 개인의 역량과 성향이 직분을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사악한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모든 교인들은 그럴 수 있는 소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살펴 그런 악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참된 기도가운데 존재해야 한다.
(4) 지상의 교회를 위한 직분적 질서13)(엡4:11-12)
교회의 직분은 역사적 교회를 상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교회들은 앞선 시대의 참된 교회를 상속받아 미래의 성도들에게 상속해 가고 있는 과정에 놓여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상 교회가 세상을 이겨나가는 방편으로 신령한 직분을 허락하셨다. 그 직분은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적 은사로 허락하신 것이다.
교회는 개인에 의해 다스려지거나 경영되는 단체가 아니다. 나아가 특별히 유능한 몇몇 지도자들에게 의존하지도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백성들 가운데 세워진 직분을 통해 상속되며 세워져 간다. 참된 교회는 다양한 직분적 기능이 잘 이행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이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세워져갈 수가 없다.14) 주님께서는 직분자들에게 종교적 통치권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허락하신 봉사적 기능을 통해 이 땅의 교회를 유지하며 세워 가신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사도교회 시대의 직분은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에베소서 4: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과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타나는 직분은 일차적으로 사도시대 교회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사도시대 직분들이 이후 교회시대의 직분의 밑바탕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초대교회에 들어서서는 일정기간 동안 직분들이 명확히 정착되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문서인 Didache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타난다. 초대교회 초기, 즉 속사도시대에는 선지자 직분이 있었으나 서서히 없어졌다.15) 이는 속사도 시대와 사도적 교부들이 존재하던 시대의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부터 목사, 장로, 집사의 교회 세가지 직분적 질서가 나타난다.16) 이는 사도교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교회적 직분이 정착되어 가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직분이 인간들의 종교적 합의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알고 있다. 이 직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즉 그 직분의 정착은 단순한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구속사 가운데 존재하는 주님의 교회를 보호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직분들은,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 즉 그의 몸된 교회를 인도하고 다스리기 위한 특별한 도구인 것이다.17)
(5)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장(엡4:13-16)
① “장성한 자의 모습”(13-14)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장성한 자의 모습으로 자라가야 한다. 이는 신학에서 말하는 역동성 있는 성화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화란 신앙생활의 연륜에 따라 점점 역량을 갖춘 종교인의 모습으로 변모해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더 열성적인 종교인이나 도덕적인 인물이 되어 간다는 말도 아니다. 또한 교회적으로 보아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거나 재정이 풍족해져 가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장성한 자로 성장해 간다는 의미는 죄악으로 가득찬 세속에 대응하는 성숙한 자로 자라가야 할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세속적 가치에 대한 판단능력과 방어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악하다. 사탄의 유혹에 의해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 세상은 그 자체로서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어린 신앙인의 눈으로 보게 되면 세상에도 선한 것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죄악 가운데 태어나 죄에 익숙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이 객관성 없는 미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도 선한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좋게 보이는 그러한 것들이 도리어 성도들을 미혹하는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으므로 정신차려 견제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면 죄악 세상과 분리된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장성한 교회는 세상과 분명히 구분되는 모습을 지닌 교회이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 세상과 다른 몸을 가지고 있음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선포하고 있다. 또한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교회 가운데 지속적으로 선포하며 확증 짓고 있는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들 가운데는 덩치만 큰 미숙아들이 많다. 물론 그 가운데는 단순히 미숙할 뿐 아니라 심각한 질병에 걸린 교회들도 많이 있다. 나아가 이름만 교회일 뿐 실상은 거짓교회들도 많이 있다. 교회의 외형이 화려하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교인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세상과의 분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런 교회는 미숙아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재정이 풍부해 그럴듯한 종교 활동을 하고 소위 선교와 구제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외관상 좋게 보일 따름이며 실상은 매우 위험한 종교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시대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는 그 미숙아들이 스스로 성장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있다. 그들 중에는 미숙할 뿐 아니라 병들어 자기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선교와 구제에 힘을 쏟으며 종교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들 마저 많이 있다. 그들은, 그런 활동을 통해 종교적 만족과 즐거움을 누리는 동안 자신의 몸이 성장을 멈추어 점차 병들어 죽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②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15)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성도들은 그에 붙은 지체이다. 이는 교회가 천상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이자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예외없이 그 머리에 달려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머리에서 분리된 몸체나 지체란 있을 수 없다. 머리의 지시를 거부하는 몸과 지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머리로부터 분리된 몸이라면 그것은 죽은 몸이며, 머리의 온전한 통치를 거부하는 몸이라면 그것은 정상적인 몸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사악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이 마치 교회의 머리인 양 행세하고 있다.18)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해 자신이 머리인 양 행세하는 지도자들이 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의사나 지시를 거부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머리의 의사와 관계없는 자신의 판단을 내세워 마치 머리가 그렇게 지시한 것처럼 성도들을 기만하거나 호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명백한 불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이 구절에서 말하는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은 불법을 행한 자들이다.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많은 종교적 활동을 했지만 그들은 머리의 의사와 지시에 아무런 관계없이 자기 판단대로 종교적 활동을 했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핑계대어 사탄의 능력을 행사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던 자들이다.
문제는 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어리고 순박한 교인들이 그 거짓 지도자들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빗대어 자기 주장을 하는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을 따라 다니며 그것이 마치 주님을 위하는 것인 양 믿으며 미련하고 값없는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 자기를 살찌우는 거짓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에 고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 자기를 살찌우는 자들을 경계함으로써 연약한 형제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사도교회 시대부터 말씀을 팔아먹는 삯군들이 많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고후2:17, 표준새번역).
③ 지체로서 연결된 교회(16)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참된 교회라면,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지(支/肢)교회 내부에서 뿐 아니라 전체 보편교회와 우주적인 교회에서도 공히 적용되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참된 교회들은 하나로 엮어져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다.
이는 조직적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의해 상호 교감되는 유기적 연결을 말한다. 사람의 몸의 한 부위가 병들거나 아프면 전체가 동시에 그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다. 우리는 가정에서 그 원리를 어느정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고통에 빠지게 되면 나머지 가족 역시 그와 동일한 혹은 그 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공동체인 교회에는 그 의미가 본질상 더 민감하게 나타난다. 교회에 속한 한 성도가 문제를 당하게 되면 온 교회가 그와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현실교회에서 그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체로서 연결된 유기적 교회 공동체라 할 수 없으며 이는 죽은 교회나 다름이 없다.
교회는 원칙적으로 개교회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교회는 더 많은 축복을 받고 또 다른 어느 교회는 덜 축복받은 교회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 시대 어떤 교회가 그런 식의 주장을 한다면 주님의 몸에서 떨어져 분리된 거짓 교회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 이상 아니다. 물론 아직 어린 자태를 벗지 못한 경우를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원리상 분명하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 간에는 누가 잘나고 못났다고 하는 세상적 차별 개념이 없다. 오로지 주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말씀과 은혜에 온전히 참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따름이다. 모든 지교회들이 머리인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는 지체들이라면, 어떤 교회도 다른 참된 교회들과 차별화를 시도해서는 안된다. 이는 특히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염두에 새겨 두어야 할 내용이다.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교회라면 어지러운 세파 가운데서 그 몸에 온전히 붙어 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애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과 차별화를 시도함으로써 특별한 모습을 보이려 한다면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위험한 시도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4. 결론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실체가 창세전에 이미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자기형상에 따라 짓기로 작정하신 택한 자기 백성을 예정하고 계셨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에 빠진 자녀들을 경륜 가운데서 주님의 교회로 모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초한다. 아담이 범죄하여 멸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자기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형상을 지닌 ‘자기 백성’(마1:21)을 불러 교회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처음부터 인위적 종교단체가 아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교회 가운데서 인본주의적 종교활동을 장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일 따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창세전부터 작정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기쁨의 대상이다. 사탄이 아담을 통해 파괴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그 영광을 회복하신 것이다. 참된 교회는 인간들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회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지상의 자기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창조와 구속의 의미를 확인해 가야 한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께서 직접 창설하신 단일한 하나의 우주적 교회에 속해 있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는 주님의 교회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주적 교회는 천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전적으로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다. 모든 지교회는 보편교회와 우주적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하며 천상의 보좌와 직접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교회는 세상의 긍정적인 평가와 칭찬에 관계없이 참된 교회라 할수 없다. 시대를 초월하여 천상에 연결된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서 특별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사든 장로든 혹 전체 교회회원들의 집합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와 직분에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그의 뜻에 따라 온전히 세워가는 일에 겸손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에서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흥하여야 하고 다른 모든 이들은 쇠하여야 하는 것이다.19)
우리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에 대한 이해가 절대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런 자들은 자기의 경험에 의해 종교적 회합을 만들어 가기 위해 모든 종교적 열정을 쏟는다. 교회는 인간의 경험이나 열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성도들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어 그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 영원한 영광을 돌리며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자기의 종교적 욕망을 위한 도구로 만드는 오만한 자리에 빠지게 된다.
교회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머리에 붙은 지체이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의 소중함을 깨닫는 가운데 지상의 교회들에 대한 성경적 상호 비판(criticism)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교회를 온전히 세워 나가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지나간 교회들을 거울삼아 성경말씀에 기초한 건전한 비판을 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교회를 건강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배도한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주님께 순종하는 성도들이 우리 가운데 많아지기를 바란다.
- 4장 1절에서 16절을 중심으로 -
이광호 목사
1. 서론
현대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론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교인들이 태반이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18에서 이 세상 가운데 자신에게 속한 ‘하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1)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무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불러모으시겠다는 의미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들어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죄악에 익숙한 교인들은 종교적 욕망에 얽매여 주님의 교회를 자기 뜻대로 경영하려 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구속받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제각기 자기의 취향에 맞는 교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유혹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단 제한된 속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합리화 될 수는 없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혹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따라 분리되어 경영되는 각각의 형편을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지상 교회들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의 경험적 사고에 천착하는 것은 온당한 자세가 아니다. 도리어 성령의 조명에 의해 끊임없이 문제점을 확인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잘못을 교정하려는 자세가 있을 때 그나마 참된 교회에 접근하려는 본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교회를 과연 참된 교회라 할 수 있는가? 개혁주의, 보수주의를 자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맹이 없는 그러한 주장은 도리어 거짓을 조장할 따름이다. 우리의 고백은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고 있다. 교회라는 형식적 이름을 가지는 것 자체로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의 표지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며 본질적인 것임을 안다. 겉으로 보아 평온하고 세상적 축복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며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면 참 교회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교회인 것이 아니다. 교회의 표지는 기본적으로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 ‘올바른 성례’가 집행되며 신실한 ‘권징사역’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이 참교회의 표지이다.2)
우리는 참교회를 규정짓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셋 중 하나는 제대로 잘 이행하는데 나머지 둘은 잘못하고 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가 이에 얼마나 충실한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교회가 이에 온전히 부합한다면 참된 교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거짓교회일 따름이다.
에베소서에는 교회에 대한 많은 교훈들이 담겨 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교회의 원상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일한 하나의 교회의 실체적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시대의 형편과 참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위해 에베소서의 전체적인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특히 4:1-16을 중심으로 연구에 임하고자 한다.
2. 에베소서에서 발견되는 교회의 원상
교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의 원상은 어디에 기준하는가?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원상에 대한 개념을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엡1:4)과 ‘하나님의 형상’(엡4:24)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서 교회의 원상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창세전의 선택과 예정에 근거(엡1:4,5)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인간들의 신앙심을 통해 세워나가는 종교단체가 아니다. 즉 인간들의 신앙작용이나 종교적 행동에 근거하여 교회가 세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6)”(엡1:3-6)
에베소서 1:3에 기록된 ‘우리’란 바울과 에베소 교회를 포함한 그와 연관된 지상의 모든 교회를 지칭한다. ‘우리’ 즉 ‘교회’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늘의 복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 복은 인간들이 땅 위에서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처음 사람 아담이 지어지기도 전인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자기 자녀들로 예정하셨는데 그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주님의 교회가 결정되어 인간 역사 가운데 내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지구상의 참된 교회의 원상은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안에 선재(先在)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에베소서 1:6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 즉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의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3) 그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신령한 관계를 의미하며, 인간들의 종교적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가신 경륜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의의는 원상의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엡1:6)과 본질적으로 연관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창조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에 뜻에 온전히 순종함을 의미하며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3장 마지막 부분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21;Now unto him that is able to do exceeding abundantly above all that we ask or think, according to the power that worketh in us, Un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throughout all ages, world without end. Amen. Eph.3:20,21,KJV).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구절의 올바른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교회 안에’(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백성 가운데 존재하며 그들을 구속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다. 이는 창세전에 선택받은 자기백성의 전체 무리 곧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그 의미를 발생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로 인해 세워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미가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되어 전 역사와 공간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킹 제임스 역의 “Un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throughout all ages, world without end”를 눈여겨보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교회의 원상에 대하여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본문은 에베소서 4:24이다.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찐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1-24).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22절의 “구습을 좇는 옛 사람”과, 24절의 “하나님의 형상”4)이다. 한글 개역성경의 ‘하나님을 따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로 번역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음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의 실제적 능력을 제어 당한 채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덧입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 기능이 마비된 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5) 이는 처음부터 그들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고후4:4, 골1:15, 히1:3)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위에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덧입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문 가운데서 ‘옛 사람을 벗는다’는 표현은 덧입고 있는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공동번역)을 회복하여 입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창세전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6)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이라는 문구에서 말하는 ‘창조된’ 시기는 창세기와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형상은 하나님께서 처음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타락하기 전 아담이 가졌던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 이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덧입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그 옛 사람 곧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래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범죄한 옛 사람 아담의 형상을 벗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 형상을 입은 성도들의 모임인 것이다.
사도바울은 교회에 관한 교훈을 주면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의 모임인 교회와 천상에 계시는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실체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며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모든 시대를 통괄(throughout all ages)하는 하나의 우주적 교회(the Church)7)로써 동일한 본질적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주적 교회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개교회는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시대 유행하는 개교회주의란 심각한 문제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교회주의적 교회란 이미 참된 교회에서 떨어진 교회로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라 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예배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달아 이해해야 한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의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음으로써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진 보배로운 그릇과도 같다. 그 영광은 인간들의 종교적 행위와 노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존재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상징적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매 주일 교회 가운데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과 연관된 매우 구체적인 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문제이다. 즉 성경과 성례를 기초로 한 교회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의 존재로 의미를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교회의 형식과 실체(엡4:1-6)
(1) “하나의 단일한 교회”
이 세상에는 원리적으로 하나의 교회만 존재한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의 교회만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는 인간들이 조직한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회합이 아니며 공동의 종교의식과 동일한 인간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창세전에 예비하시고 경륜에 따라 친히 세우신 공동체로써 성령께서 불러 하나되게 하신 주님의 몸이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인식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어온 중요한 개념이다. 초대교회의 익나티우스는 교회가 하나임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그는 최초로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8) 이러한 교회의 하나됨은 교인들 사이에 상호 긍정적인 감정을 갖거나 종교적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교회 가운데 보여주실 때 그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9)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엡4:3)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분할하거나 나눌 권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에 교회의 하나됨을 이야기할 때 지(支;肢)교회를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부분적으로 옳은 생각일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말하면서 지교회나 교단내부 혹은 정치적인 입장에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바는 진리와 고백을 근간으로 하는 우주적인 의미이다. 사도바울은 전체 우주적 교회가 하나의 교회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한다.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우리는 또한 이 가운데서 ‘세례’에 관련된 의미를 관심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세례는 교회가 고백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실제적 삶의 의미와 연관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도의 고백적 반응과 연결되어 교회와 세상과의 경계 즉 담을 확인하는 것이다. 원리적 측면에서 보아 세례는 하나님의 선택과 연관이 되며 성령의 사역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교회 안에 들어온 성도들은 세상에 전혀 있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성찬을 나누게 된다. 따라서 지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세례는 개교회의 영적 판단이기기도 하거니와 전체 우주적 교회의 신령한 사역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세례는 지교회의 소관인 동시에 우주적 교회의 영적 간섭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한 채 자의적인 세례를 베풀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욕망에 의존하여 그리스도를 떠난 배도 행위일 수 밖에 없다.10)
(2)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
교회는 인간들의 인위적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마15:13, 참조) 하나로 모여진 경륜적 공동체이다.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불러모으시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종교적인 인간이나 종교조직이 부름의 주체가 되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할 일이다. 우리 시대에 ‘전도’라는 명분으로 부름의 주체가 마치 인간이나 기독교 조직이 되는 듯이 이해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엡1:4)을 가볍게 생각하는 종교적 포교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장로교회 특히 보수주의 교회들은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백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들의 고백은 사변적이며 거짓주장이라 할 수 밖에 없다.11) 그들은 말로는 칼빈주의를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예를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어느 누구도 성도의 수를 늘이거나 줄이거나 할 수 없이 확정적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12) 한국의 대다수 교회들은 종교적이며 자의적인 열정을 통해 끊임없이 교인들의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더 구원받게 하는 것이 교회의 도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즉 교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도들의 수를 늘게 할 수도 있고 줄게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신학적 자세가 아님이 분명하다.
사도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엡4:1)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성령께서 부르신 소명의 의미 가운데 존재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부르신 데는 창세전 선택에 근거한 고유한 의도가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무관하게 자기 판단이나 경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도리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권징사역을 통해 상호 권면해야 하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고 요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의미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권면’과 ‘용납’ ‘지킴’에 관련된 요구는 권징사역으로서 교회가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켜나가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성도의 윤리적 삶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세움을 위한 것이다.
(3) 천상에 연결된 교회(엡4:7-10)
지상의 모든 참된 교회는 천상에 굳건히 연결된 교회들이다. 천상의 나라에 연결되지 않은 교회는 거짓 교회이다. 외견상 아무리 훌륭해 보이고 사랑이 많아 보이며 가난한 이웃을 돕는다 할지라도 거짓교회이다. 나아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할지라도 천상과 분리되거나 떨어져 있다면 참된 교회일 수 없다.
그렇지만 다소 부족해 보이고 변변치 못해 보일지라도 하늘나라에 온전히 연결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아름다운 목청으로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고 가난하여 이웃을 돕지 못하며 때로 갈등이 존재하여 사랑이 다소 부족한 듯 보여도 천상에 잘 연결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천상으로부터 허락된 은혜로서 은사 및 직분과 연관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별 성도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 곧 직분을 통해 천상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즉 교회를 연결하는 끈은 개인의 능력이나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허락하신 다양한 직분인 것이다.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허락하신 신령한 은사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기 취향에 따라 직분을 주고 받거나 행사할 수 없다. 우리시대의 교회가 타락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은사와 직분을 통해 교회가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경험을 배경으로 한 개인의 역량과 성향이 직분을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사악한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모든 교인들은 그럴 수 있는 소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살펴 그런 악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참된 기도가운데 존재해야 한다.
(4) 지상의 교회를 위한 직분적 질서13)(엡4:11-12)
교회의 직분은 역사적 교회를 상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교회들은 앞선 시대의 참된 교회를 상속받아 미래의 성도들에게 상속해 가고 있는 과정에 놓여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상 교회가 세상을 이겨나가는 방편으로 신령한 직분을 허락하셨다. 그 직분은 인간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적 은사로 허락하신 것이다.
교회는 개인에 의해 다스려지거나 경영되는 단체가 아니다. 나아가 특별히 유능한 몇몇 지도자들에게 의존하지도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백성들 가운데 세워진 직분을 통해 상속되며 세워져 간다. 참된 교회는 다양한 직분적 기능이 잘 이행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이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세워져갈 수가 없다.14) 주님께서는 직분자들에게 종교적 통치권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허락하신 봉사적 기능을 통해 이 땅의 교회를 유지하며 세워 가신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사도교회 시대의 직분은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에베소서 4: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과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타나는 직분은 일차적으로 사도시대 교회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사도시대 직분들이 이후 교회시대의 직분의 밑바탕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초대교회에 들어서서는 일정기간 동안 직분들이 명확히 정착되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문서인 Didache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들이 나타난다. 초대교회 초기, 즉 속사도시대에는 선지자 직분이 있었으나 서서히 없어졌다.15) 이는 속사도 시대와 사도적 교부들이 존재하던 시대의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부터 목사, 장로, 집사의 교회 세가지 직분적 질서가 나타난다.16) 이는 사도교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교회적 직분이 정착되어 가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직분이 인간들의 종교적 합의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님을 명확히 알고 있다. 이 직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즉 그 직분의 정착은 단순한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구속사 가운데 존재하는 주님의 교회를 보호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직분들은,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 즉 그의 몸된 교회를 인도하고 다스리기 위한 특별한 도구인 것이다.17)
(5)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장(엡4:13-16)
① “장성한 자의 모습”(13-14)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장성한 자의 모습으로 자라가야 한다. 이는 신학에서 말하는 역동성 있는 성화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화란 신앙생활의 연륜에 따라 점점 역량을 갖춘 종교인의 모습으로 변모해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더 열성적인 종교인이나 도덕적인 인물이 되어 간다는 말도 아니다. 또한 교회적으로 보아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거나 재정이 풍족해져 가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장성한 자로 성장해 간다는 의미는 죄악으로 가득찬 세속에 대응하는 성숙한 자로 자라가야 할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세속적 가치에 대한 판단능력과 방어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악하다. 사탄의 유혹에 의해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 세상은 그 자체로서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어린 신앙인의 눈으로 보게 되면 세상에도 선한 것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죄악 가운데 태어나 죄에 익숙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이 객관성 없는 미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도 선한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좋게 보이는 그러한 것들이 도리어 성도들을 미혹하는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으므로 정신차려 견제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면 죄악 세상과 분리된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장성한 교회는 세상과 분명히 구분되는 모습을 지닌 교회이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 세상과 다른 몸을 가지고 있음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선포하고 있다. 또한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교회 가운데 지속적으로 선포하며 확증 짓고 있는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들 가운데는 덩치만 큰 미숙아들이 많다. 물론 그 가운데는 단순히 미숙할 뿐 아니라 심각한 질병에 걸린 교회들도 많이 있다. 나아가 이름만 교회일 뿐 실상은 거짓교회들도 많이 있다. 교회의 외형이 화려하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교인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세상과의 분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런 교회는 미숙아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재정이 풍부해 그럴듯한 종교 활동을 하고 소위 선교와 구제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외관상 좋게 보일 따름이며 실상은 매우 위험한 종교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시대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는 그 미숙아들이 스스로 성장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있다. 그들 중에는 미숙할 뿐 아니라 병들어 자기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선교와 구제에 힘을 쏟으며 종교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들 마저 많이 있다. 그들은, 그런 활동을 통해 종교적 만족과 즐거움을 누리는 동안 자신의 몸이 성장을 멈추어 점차 병들어 죽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②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15)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성도들은 그에 붙은 지체이다. 이는 교회가 천상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이자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예외없이 그 머리에 달려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머리에서 분리된 몸체나 지체란 있을 수 없다. 머리의 지시를 거부하는 몸과 지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머리로부터 분리된 몸이라면 그것은 죽은 몸이며, 머리의 온전한 통치를 거부하는 몸이라면 그것은 정상적인 몸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사악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이 마치 교회의 머리인 양 행세하고 있다.18)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해 자신이 머리인 양 행세하는 지도자들이 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의사나 지시를 거부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들은 머리의 의사와 관계없는 자신의 판단을 내세워 마치 머리가 그렇게 지시한 것처럼 성도들을 기만하거나 호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명백한 불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이 구절에서 말하는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은 불법을 행한 자들이다.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많은 종교적 활동을 했지만 그들은 머리의 의사와 지시에 아무런 관계없이 자기 판단대로 종교적 활동을 했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핑계대어 사탄의 능력을 행사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던 자들이다.
문제는 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어리고 순박한 교인들이 그 거짓 지도자들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빗대어 자기 주장을 하는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을 따라 다니며 그것이 마치 주님을 위하는 것인 양 믿으며 미련하고 값없는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 자기를 살찌우는 거짓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에 고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 자기를 살찌우는 자들을 경계함으로써 연약한 형제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사도교회 시대부터 말씀을 팔아먹는 삯군들이 많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고후2:17, 표준새번역).
③ 지체로서 연결된 교회(16)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참된 교회라면,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지(支/肢)교회 내부에서 뿐 아니라 전체 보편교회와 우주적인 교회에서도 공히 적용되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참된 교회들은 하나로 엮어져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다.
이는 조직적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의해 상호 교감되는 유기적 연결을 말한다. 사람의 몸의 한 부위가 병들거나 아프면 전체가 동시에 그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다. 우리는 가정에서 그 원리를 어느정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고통에 빠지게 되면 나머지 가족 역시 그와 동일한 혹은 그 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 공동체인 교회에는 그 의미가 본질상 더 민감하게 나타난다. 교회에 속한 한 성도가 문제를 당하게 되면 온 교회가 그와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현실교회에서 그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면 지체로서 연결된 유기적 교회 공동체라 할 수 없으며 이는 죽은 교회나 다름이 없다.
교회는 원칙적으로 개교회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교회는 더 많은 축복을 받고 또 다른 어느 교회는 덜 축복받은 교회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 시대 어떤 교회가 그런 식의 주장을 한다면 주님의 몸에서 떨어져 분리된 거짓 교회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 이상 아니다. 물론 아직 어린 자태를 벗지 못한 경우를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원리상 분명하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 간에는 누가 잘나고 못났다고 하는 세상적 차별 개념이 없다. 오로지 주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말씀과 은혜에 온전히 참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따름이다. 모든 지교회들이 머리인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는 지체들이라면, 어떤 교회도 다른 참된 교회들과 차별화를 시도해서는 안된다. 이는 특히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염두에 새겨 두어야 할 내용이다.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교회라면 어지러운 세파 가운데서 그 몸에 온전히 붙어 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애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과 차별화를 시도함으로써 특별한 모습을 보이려 한다면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위험한 시도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4. 결론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실체가 창세전에 이미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자기형상에 따라 짓기로 작정하신 택한 자기 백성을 예정하고 계셨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에 빠진 자녀들을 경륜 가운데서 주님의 교회로 모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초한다. 아담이 범죄하여 멸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자기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형상을 지닌 ‘자기 백성’(마1:21)을 불러 교회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처음부터 인위적 종교단체가 아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교회 가운데서 인본주의적 종교활동을 장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일 따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창세전부터 작정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기쁨의 대상이다. 사탄이 아담을 통해 파괴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그 영광을 회복하신 것이다. 참된 교회는 인간들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회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지상의 자기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창조와 구속의 의미를 확인해 가야 한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께서 직접 창설하신 단일한 하나의 우주적 교회에 속해 있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는 주님의 교회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주적 교회는 천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전적으로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다. 모든 지교회는 보편교회와 우주적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하며 천상의 보좌와 직접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교회는 세상의 긍정적인 평가와 칭찬에 관계없이 참된 교회라 할수 없다. 시대를 초월하여 천상에 연결된 주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서 특별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사든 장로든 혹 전체 교회회원들의 집합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와 직분에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그의 뜻에 따라 온전히 세워가는 일에 겸손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에서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흥하여야 하고 다른 모든 이들은 쇠하여야 하는 것이다.19)
우리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에 대한 이해가 절대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런 자들은 자기의 경험에 의해 종교적 회합을 만들어 가기 위해 모든 종교적 열정을 쏟는다. 교회는 인간의 경험이나 열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성도들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어 그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 영원한 영광을 돌리며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자기의 종교적 욕망을 위한 도구로 만드는 오만한 자리에 빠지게 된다.
교회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머리에 붙은 지체이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의 소중함을 깨닫는 가운데 지상의 교회들에 대한 성경적 상호 비판(criticism)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교회를 온전히 세워 나가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지나간 교회들을 거울삼아 성경말씀에 기초한 건전한 비판을 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교회를 건강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배도한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주님께 순종하는 성도들이 우리 가운데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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