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자가 되십시오
골로새서 3장 15-17절
< 감사하며 사십시오 >
요새 치열한 경쟁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교회도 많이 힘듭니다. 시골 교회들은 고사 직전입니다. 큰 교회들은 더 커지고 작은 교회들은 더 작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는 큰 교회의 성공 모델들이 많으니까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처럼 교회성장은 안 되는데 목회자들은 계속 많아지니까 목회자들의 삶은 더 각박해지고, 각종 희한한 전도방법들도 많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은 조용기 목사님 사진을 교회입구에 걸어놓았습니다. 그것도 앞으로 자기 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할 것으로 믿고 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들을 쓰는 것을 보면 그만큼 전도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전도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대개 힘들어졌습니다. 옛날처럼 쉽게 성공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지금은 성공하려면 통찰력 있는 지혜가 필요하고 정신없이 뛰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각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각박해질수록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고, 기쁨과 풍요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먼저 안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할 때는 끝내주게 일하고, 쉴 때는 끝내주게 쉬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영혼에 기쁨과 풍요가 넘치게 하려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살면서 두 가지 말을 잘하십시오. 하나는 “미안하다!”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고맙다!”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 내가 못해주어서 미안하다!”라는 말과 “그 동안 당신이 잘해주어서 고맙다!”는 말들은 가장 위대한 천국 언어입니다. 그런 감사가 넘치는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각박한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가끔 불평할 일이 생깁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불평할 일이 생깁니다. 그래도 감사거리를 찾아보면 감사할 것이 월등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한두 가지 불평거리 때문에 감사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환경이 힘들어도 감사하면 그 심령에는 천국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불평하면 그 심령은 불행에 휩싸이게 됩니다. 결국 어떤 심령을 가지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됩니다.
옛날에 한 성문 곁에 지혜로운 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성에서 온 한 청년이 와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여기 살기 좋습니까? 살기 좋으면 이곳에 정착해 살려고 합니다.” 그때 노인이 물었습니다. “자네! 전에 살던 곳은 살기 괜찮았는가?” “네. 괜찮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노인이 말합니다. “이곳도 살기 괜찮은 곳이네.”
얼마 후에 다른 청년이 와서 묻습니다. “할아버지! 여기 살기 좋습니까?” 노인이 역시 묻습니다. “자네가 전에 살던 곳은 어땠는가? 살기가 괜찮았는가?”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그곳은 아주 지옥 같은 곳이었죠.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 말을 듣고 노인이 말했습니다. “이곳도 아주 지옥 같은 곳이네.”
환경보다 자신의 반응과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더 이 세상은 다 그저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갈립니다. 그처럼 행복은 환경이 결정하지 않고 감사하는 믿음과 태도가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가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 감사하는 삶에 필요한 것 >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바탕으로 감사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4가지를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음에 평강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은 평강과 감사는 함께 간다는 말씀입니다. 언젠 평강이 생깁니까?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일전에 인터넷에 이런 기도문이 올라왔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가 얼마나 바쁜지 아시지요? 그래서 저는 주님을 잊어도 주님은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얼마나 얌체 같은 기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기도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면 심령에 평강이 넘칠 것이고, 말과 표정과 태도도 달라질 것입니다.
링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얼굴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의 말과 얼굴 표정만 봐도 누가 믿음이 있고, 누가 감사하는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넉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단기간에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면 금방 실망합니다. 전도나 기도도 한두 번 해 보다 안 되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일도 쉽게 되지 않습니다. 쉽게 되는 일은 그만큼 쉽게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처럼 눈에 보이는 환경을 바라보고 쉽게 속단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평강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 구절은 말씀과 감사 찬양을 강조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말씀과 찬양이 넘칠 때는 언제입니까? 바로 예배할 때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최고로 감사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부모에게 제일 큰 효도는 무엇입니까? 선물과 용돈을 드리고, 식사를 사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효도는 자주 찾아뵙고 같이 있어 드리는 것입니다. 가끔 찾아와서 아양 떨고 잔소리하는 딸보다는 맘에 안 들어도 같이 사는 며느리가 진짜입니다. 어떤 자녀는 형편이 어려워서 부모님에게 많은 것을 못해 드립니다. 그래도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는 자녀가 진짜 효도하는 자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자체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많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예배할 때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견고해지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살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왜 이 사람과 살게 되었나? 내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나? 내가 이런 가정으로 시집을 왔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보내시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자신의 고난에 대해 나중에 형제들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구하려고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질 때 분노와 한은 사라지고 감사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3. 항상 주님 중심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말씀은 항상 주님 중심적으로 살아야 감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지 못합니까?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 문제가 없는데 자꾸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비교의식에서 비롯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이 가진 어떤 것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가진 어떤 것이 없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고,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면 우리는 현재의 여건에서 얼마든지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공부를 너무 못해서 수학을 빼고는 다 과락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 그를 공장으로 보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아이를 믿고 “네가 잘하는 것을 해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위대한 학자가 됩니다.
무엇이든지 다 잘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만 잘 던져도 영웅이 되는 시대입니다. ‘어떤 것’이 없으면 내가 가진 ‘다른 것’으로 다르게 살면 됩니다. 다르기 때문에 값이 크게 나가는 것이지 같으면 값이 크게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조건이 아닌 최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위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대부분 세상적인 어떤 것이 없었지만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기에 위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흑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에 말콤 엑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장 소원은 백인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려는 그는 별의별 행동을 다 했습니다. 비누로 피부를 박박 문지르기도 하고 흰 스킨 로숀을 마구 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도 물들여 보았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백인에게 한을 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생각을 바꿨습니다. “나는 백인이 될 수 없다. 나는 흑인으로 존재해야 한다.” 결국 흑인의 아름다움을 되찾는 운동을 벌이면서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바로 “Black is beautiful(흑인은 아름답다).”는 운동입니다. 그처럼 자기 존재를 인정하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니까 그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 독특한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면 됩니다. 하나님은 주인공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충분히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불행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오해입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자기의 소중한 가치를 너무 모르는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남다른 우리에 대한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환경이 조금 어려워도 하나님이 기대하는 대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최선을 다하면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4. 사랑하고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성공에 대한 개념부터 수정해야 합니다. 성공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내가 기여하는 것이 진짜 성공입니다. 성공이란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성공은 일을 이루면서도 가치도 있고, 사람들을 긍정적인 방법으로 돕는데 유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신이 없는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닙니다. 헌신이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고, 성공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품인생이고, 또 하나는 상품인생입니다. 작품인생은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반면에 상품인생은 잠시 사람의 구미를 당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가 떨어지고 금방 싫증납니다.
어떤 분이 상품처럼 사는 여성을 나이별로 공에 비유했습니다. 10대에는 축구공입니다. 11명 정도 되는 많은 남자들이 따라다닙니다. 20대에는 농구공입니다. 따라 다니는 남자들이 11명에서 5명 정도로 줄어듭니다. 30대에는 골프공입니다. 따라 다니는 남자가 한 명 정도 있으면 다행입니다. 40대에는 탁구공입니다. 서로 남에게 미루려고 합니다. 50대에는 피구공입니다. 서로 피하려고 합니다.
상품인생은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지만 작품인생은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값이 올라갑니다. 상품인생과 작품인생의 차이가 어디에서 생깁니까? 헌신을 아는 사람인가에 따라 차이가 생깁니다. 사랑하고 헌신하면 어떤 경우에도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교회생활도 교회로부터 무엇을 얻을 생각을 하면 100% 실패하지만 항상 드릴 생각을 하며 교회생활을 하면 100% 성공합니다.
살다 보면 실망할 일이 많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실망할 일을 만났을 때 그 일보다 훨씬 더 실망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실망할 일을 만나도 별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생깁니까? 역시 ‘헌신’에서 생깁니다. 헌신하며 살면 아무리 실망스러운 일을 만나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그것을 계기로 더욱 헌신을 다짐합니다.
얼마 전에 한 목사님이 이런 영문 메일을 받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남편이 죽으면서 제게 980만 달러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 유산으로 선교하고 싶습니다. 좋은 계획이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모니카.” 대략 그런 메일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목사님 부부는 흥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비전을 담은 답장을 성실하게 썼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나중에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고 식사 한 번 살 테니까 번역해 달라!”고 해서 저는 영문도 모르고 곧 답장편지를 번역해 주었습니다. 그 편지에서 목사님은 자신이 그 돈을 기부하면 선교센터를 세우고, 선교센터를 그 죽은 남편의 이름을 따라 건립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편지를 보낸 후 목사님은 교인들과 함께 특별기도회를 열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기 메일이었습니다. 사기 치는 사람들은 그런 메일을 무작위로 대량으로 보냅니다. 저도 그런 메일을 지금까지 수백 통 받았습니다. 그런 전후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었으면 저도 그 편지를 번역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사기 메일을 보내는 일이 바로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헌신이 없이 큰 열매를 주겠다고 영혼을 유혹합니다. 성도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란 헌신이 없이 열매를 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큰 은혜를 넘치게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생각하며 더욱 헌신해야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은혜도 진짜 은혜가 됩니다.
며칠 전에 박성현 선수가 양궁에서 아깝게 금메달을 놓쳤습니다. 그때 박 선수가 별로 실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메달의 소중함을 알라고 금메달을 못 따게 된 것 같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때로 우리 앞에 실망스런 일을 두십니다. 그때 실망하지 않고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 모습을 통해서 더욱 영광 받으시고, 더욱 복된 자리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십시오 >
영국의 한 마을에 구두 수선을 하는 윌리엄 캐리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주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헌신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친 헌신으로 그는 25세에 목사가 되고, 1792년 31세에 인도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후, 그는 감격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계속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인도에 도착한지 1년 만에 그는 총명한 눈을 가진 5살짜리 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내는 그 충격으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내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7년 동안 한 사람도 주님의 제자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에게 인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부어 주셨습니다.
1812년, 인도에 온지 정확히 20년 만에 그는 인도 사람을 위한 벵갈어 성경번역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선교부에서 종이와 잉크와 인쇄기를 보내 주어 성경인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찍는 인쇄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그는 감격하며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인쇄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그 시간에 캐리 선교사는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얼마 후, 전도하러 나갔다 돌아온 그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인쇄공의 실수로 화재가 나서 그의 20년 수고가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그때 그가 번역한 원본,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었던 벵갈어 문법책과 사전이 다 타버렸습니다. 처음 그 장면을 목격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님이 그의 마음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곧 그는 조용히 잿더미 위로 걸어가서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20년 수고를 거두어 가셨지만 그래도 저의 믿음은 거두어가지 않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불안에 떨던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용기를 잃지 맙시다. 이 일은 우리를 전진시키는 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더욱 훌륭한 벵갈어 성경을 이전보다 빠르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 편에 섰습니다. 때로 걸림돌이 있어도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나가면 걸림돌은 반드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눈에 보이는 환경이 참담해도 우리의 헌신은 반드시 열매 맺는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사랑하고, 더욱 헌신하고, 더욱 감사하십시오.
참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차원 더 나가야 합니다. 존재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것은 너무 수동적인 삶입니다. 진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 행복은 헌신이 있습니다.
성도의 행복도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내 안에 성령이 있어서 환상을 보고 계시가 임한다.”는 것에 있기보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랑하고 헌신하며 산다!”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환상을 보아도 헌신이 없으면 그 영혼이 얼마나 공허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자기 존재의식은 작은 행복은 주고, 작은 감사를 줍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한 존재의식은 큰 행복을 주고 큰 감사를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시선을 얼마나 교회에 돌리고,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돌리느냐에 따라 믿음의 진실성과 성숙성이 나타나고, 또한 믿음의 순수성과 건강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 더욱 감사하며 사십시오.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행복과 기쁨으로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단어는 바로 감사라는 단어입니다. 감사하면 행복해지고 곧 축복도 따라오게 됩니다. 기복주의는 기도는 있으나 감사가 없고 축복은 바라지만 희생은 없습니다. 반면에 감사신앙은 최고로 헌신하고, 최고로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는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런 감사 신앙으로 무장해서 더욱 축복받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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