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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구해야 할 성령(눅11:9-13)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

<간절히 구해야 할 성령> 눅11:9-13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당부말씀은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의 직제자 열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칠만한 자리에 서있는가 물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부터도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상실함으로써 사회와 국가에 대한 지도력과 영향력을 잃어왔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자만심, 세계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무사안일주의, 이기심, 세속적 욕심으로 그 마음을 채워가면서 그 영성이 빈곤하여졌고, 이 세상과 별 차이가 없이 되어버림으로써 사회로부터 그 존재이유를 인정받지 못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의 신학적 혼란과 이를 틈탄 이단과 사이비기독교종파들의 확산으로 교회의 공신력은 더욱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곧 이렇게 될 것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에 요구된다는 외침과 경고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디서부터 변해야하고 무엇부터 고쳐야할지를 몰랐거나, 알았다 하드라도 나부터 달라져야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결핍된 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옛 소련을 위시한 동구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냉전시대를 벗어났지만 오히려 그 여파로 크고 작은 지역분쟁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냉전은 사라졌으나 그 이상으로 치열한 무한경쟁의 시대, 전쟁 아닌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진과학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의 패권주의와 그렇지 못한 나라들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은 냉전시대 이상의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자정보교류수단의 숨가쁜 발달과 경쟁은 소수의 첨단정보과학기술을 소유한 집단들이 부를 독점하게 만들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경쟁을 좇아가지 못하거나 날로 새로워지는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국가들과 개인들은 심한 좌절감을 안고 살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많은 편리함을 제공하며 피상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켰을지 몰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갑작스럽게 처하게 된 소외상태 속에서 내면적으로는 삶의 질의 저하를 강요당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삶의 변화를 주도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유전공학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전자조작기술과 생명체복제기술의 발달은 무한하고 무절제한 인간의 욕망과 결합될 때 무분별한 인간생명조작을 낳게되고 그로 인한 인간성과 생명의 존엄성 파괴와 함께 통제불능의 재앙을 온 인류에 초래하게 될 것으로 크게 우려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어떠합니까? 한국사회는 이 모든 오늘날 세계의 세기말적 현상을 고스란히 공유하면서 이에 더하여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을 드러내고있습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남북한의 관계는 우리 정부의 소위 "햇볓정책"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긴장감과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있으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원인도 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분열과 대립상황은 남북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크게는 동서로, 그리고 보다 세부적으로는 각 지역별로 고착되어있습니다. 망국적이라고 하는 지역감정과 지역주의는 선거가 거듭되고 정권이 바뀔수록 더욱 심화될 뿐입니다. 이와 병행하여 극심한 집단이기주의 또한 한국사회가 유기적이고 공생적인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큰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한국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극도의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지상주의가 만연되어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과 쾌락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며 온갖 인륜파괴현상이 빈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경제적인 여건이 호전되면서부터 우리 국민들은 아마도 역사상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도 보여주지 못했던 교만과 허세부리기, 허영과 사치, 낭비와 과소비를 일삼아 왔습니다.


그리고 성공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고, 수단과 방법과 과정에서의 정당성은 중요시하지 않는 풍조에 젖다보니 준법정신과 질서의식이 실종되었으며, 범법행위에 대한 죄의식이 사라지거나 극도로 약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정직한 삶에 대한 냉소주의를 낳았고 한탕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빚었으며 거짓말의 상습화로 이어졌고 결국 우리 사회전반에 불신풍조가 자리잡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갈수록 경박해지고 각박해지며 험악해지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사랑과 신뢰, 화해와 평화, 일치와 공생의 도를 심어야할 사명을 가진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부터 공신력과 감화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공신력과 감화력 상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원인들 중 하나가 무엇보다도 기복주의 신앙 때문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단지 일반교인들의 기복주의 성향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심리를 악용하는 목회자들의 세속적 야망과 이기적 욕심에 더 큰 책임이 있음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가치관의 변화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향전환을 가르치기보다는 교인들의 기복적 심리를 자극하고 이용하는 손쉬운 목회와 급속한 양적 성장을 꾀한 탓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목회철학이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과 교회를 단지 세상적 성공과 출세의 도구와 발판으로 여기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또 이러한 사고는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하고, 세상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이 편법과 부정을 가책 없이 일삼게 만들 뿐 아니라, 믿음을 그런 일들을 자행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호장치로 여기게 만들며,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부정직하고 불법적인 일에 있어 세상보다 오히려 더 앞질러가는 교인들 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인수를 부풀려가며 자랑하고 허세부리는 교회가 세속사회와 무엇이 다릅니까? 교회, 노회, 총회 등에서 연출해내는 돈 뿌리는 선거, 지역패권주의는 우리가 세상사회에서 목격하는 그것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기복주의는 왜곡된 신앙이해의 전형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날의 우리의 잘못되었던 신앙행태를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는 그저 마음으로 후회하거나 단지 입술로 고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며,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식까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던 것, 옛날에 추구하던 것, 세상에서 즐기며 기쁨으로 삼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육을 향하여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지식과 함께 섭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배워서 아는 대로 행하는 실천적 삶입니다. 성경지식이 곧 믿음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바로 서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밖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오늘날 세상의 모든 병리현상과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성령의 역사와 다스림에 거스르고 대항하는 악의 역사이며 육의 소욕을 좇는 결과이기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강하게 역사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국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성령의 임재를 간구해야 할 때입니다. 스스로 새로워지고 바로 서기에는 너무나 허약해진 그리스도인들이고 너무나 무력해진 오늘날의 교회이기에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을 의지하고 그의 명령과 인도를 따르는 것밖에 한국교회가 그 생명력과 존재이유를 유지할 길이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이해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지만, 우리에게 참 믿음을 깨닫게 하시고 갖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조성자이신 성령께서 한국교회에 임하셔서 진리의 바른 이해와 올곧은 삶의 의지를 회복시켜 주시며, 육의 소욕으로부터 돌아서서 성령의 소욕을 좇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배워서 아는 대로 행하는 실천적 삶이라고 했지만,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삶으로 살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삶의 믿음이 되며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우리의 잘못되었던 신앙행태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우리로 참된 회개를 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를 육을 향하여 죽게 하시고 영으로 살리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에 눈뜨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케 하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고 바로 서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치라는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비로소 확신있고 담대하고 능력있는 주님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오시고 그 증거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지도록 우리는 간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는 일을 어떤 위험이나 손해나 오해나 멸시나 외로움이나 고난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라도 변하지 않고 일생 동안 계속할 수 있는 견인의 능력을 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는 온갖 시련과 유혹 앞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임하시고 함께하셔야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그런 삶 속에서도 오히려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세상사람들 같으면 슬퍼할 일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불안해할 일 앞에서 평안을 누리며, 불행하다 여길 형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원망할 일을 두고도 감사할 수 있으며, 탄식할 일을 놓고도 찬송할 수 있게 해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참 믿음은 우리를 거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우리에게서 믿음의 열매, 성결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바울은 갈5:19-23에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하고 있는데 실로 한국인들의 병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치유할 힘이 오직 성령께 있음을 봅니다. 날로 더욱 피폐해 가고 흉포해지는 우리의 심령을 치유받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고맙고 위로가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끝 절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의 기자는 같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마태복음의 기자가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한 것을 누가복음의 기자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로 바꾸어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좋은 것,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 성령이심을 보아야 할 줄 압니다. "구하면 좋은 것을 주신다" 했다고 그저 인간적이고 세상적으로 좋은 것만 한없이 달라고 쉴새 없이 조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것이 어떤 것임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해서 진정 필요한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참 주님의 제자들로 만드시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교회로 하여금 진실로 능력있는 믿음의 공동체로 만드시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고 온 세상을 제자 삼아 가르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그저 나에게 좋은 것, 세상적으로 좋아보이는 것밖에 구할 줄 모르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좋은 것, 그의 의를 위해서 중요한 것,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구하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성령께서 함께해주시기를 늘 기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어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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