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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정수 제9장 스코틀랜드 신학의 정수

by 【고동엽】 2021. 11. 30.
개혁신학의 정수 제9장 스코틀랜드 신학의 정수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종교 개혁의 연속선상에서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이 중요하게 다루었던 주제는 예정과 섭리에 대한 강조, 그리스도 대속 교리, 성례, 믿음의 확신, 장로교회 제도의 확립이었다. 개혁신학의 발전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사상은 요한 낙스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주로 칼빈과 유럽의 종교 개혁자들과 교류하여 얻은 것들이었다. (요한네스 마르키우스, 에세니우스, 레오나르두스 리에세니우스)


‘하나님의 나팔수’ : 낙스와 스코틀랜드
낙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1505년 출생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전기 작가들은 1514년 혹은 1515년 출생을 제기하고 있다. 1531년 신부로 서품을 받고 1545년 역사적인 사건에 관련하면서 알려졌다. 그때까지 낙스는 심정적으로 개신교를 동조하고 있었던 이스트 로티언 지역의 귀족 자녀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이 무렵 초기 종교개혁자이자 지도자인 조지 위사트와 가까워졌다. 패트릭 해밀톤의 순료로 개혁 신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어느날 존 루흐는 설교를 하다가 낙스의 이름을 부르면서 ‘교회 성도들의 이름으로 부탁하노니, 양떼를 맡아달라’고 선한하였고, 그후 이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간주한 일생동안 목사직에 충성을 다하였다.
1553년 메리 여왕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박해를 피하라는 권유에 따라서 그는 유럽대륙으로 건너갔다. 이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에 필요한 것을 접하게 된다. 1555년과 1556년 사이 몇 개월 동안 여왕의 화해의 제스처로 인해 고향에 잠시 머물렀고, 1559년 낙스는 완전히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오백명이 부는 트럼펫이 계속해서 귀에 울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력을 단 한 시간 내에 집어넣을 수 있는 ‘하나님의 나팔수’로 인정받았다.
낙스의 신학 사상을 ‘제1치리서’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잘 담겨 있다. 낙스가 칼빈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 중에 하난가 , 하나님의 말슴을 철저히 따르는 정신이었다. 낙스는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ㄴ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를 극복하고 노력하였고, 거룩한 성만찬 가운데의 은총의 선물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낙스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연합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치리서’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보살핌과 배려를 강조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전통확립
낙스 이후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정통식학은 멜빌에 이어서 조지 부태넉과 낙스의 사위이자 베자의 절친한 친구인 웰쉬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통일성을 유지하였고, 동일한 구원론적 강조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청교도 공동체에 속한 경건한 평신도들과 여성도들에게는 내적으로 성숙한 인격함양을 도모하고, 외적으로는 세상을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이들 옛 스코틀랜드 전통주의 시대에도 1) 지속적으로 종교 개혁의 성경관을 유지했고, 2) 칼빈주의적 성례관을 지켰으며, 3)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 관심을 갖고 노력하였으며, 4) 예정론과 언약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고 5) 교회와 국가의 관계 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638년 ‘국가 언약’이라는 결실을 맺기까지 매우 훌륭한 개혁 신앙을 확립하였다.
낙스의 신학을 계승한 여러학자들은 확고한 구원론과 교회론을 공통적인 기반으로 신학적 토대를 유지하였다. 칭의와 믿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 앤드류 멜빌 : ‘스코틀랜드의 사자’, ‘제2치리서’, 교회의 독립성과 인권 옹호 사상
- 존 크레익 : 삼위 일체 사역을 강조,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임을 강조
- 존 데이빗슨 :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확신
- 로버트 브루스 : 커닝햄은 ‘성례의 관한 설교로는 최고’라고 극찬
- 알렉산더 핸더슨 : 스코틀랜드인의 정신적 지주
- 로버트 룰록 : 스코틀랜드가 낳은 가장 탁월한 신학자,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의 개념을 정립
- 데이빗 칼더우드 : 장로교 지도자이자 교회사가, 개혁주의 예배와 교회론 옹호
- 로버트 보이드 :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균형을 유지한 탁월한 저술
- 존 카메론 : 베자의 ‘타락전 선택설’과 ‘알미니안들의 은총과 자유의지설’ 거부, 자기만의 중도노선 설정 (아미로의 ‘가설적 보편주의’와 ‘보편속죄론’을 배웠기 때문)
- 제임스 프라서 : 카메론주의자들의 믿음의 조건설을 즉시 반박
- 휴 빈닝 :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반율법주의자들을 비판,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통을 강조
- 존 포르베스 : 서구 신학사 정리,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속죄와의 연결을 핵심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구원하는 모든 혜택에 참여한다는 칼빈의 신학을 계승


‘엄숙동맹과 언약’ : 언약 신앙에서 나온 민주주의
스코틀랜드 칼빈주의자들의 위대한 성취는 국왕을 비롯한 국가 구성원 전체를 하나님과 언약에 가담하게 하고, 엄숙한 맹세를 통해서 신앙적 사회를 이룩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시민 주권 의식을 싹트게 했고, 인류 역사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의식을 일깨우는 공헌을 한다.
17세기 중엽의 스코틀랜드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이름만을 영화롭게 하고 싶은 소망을 정치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내고 정립하고 싶어하였다. 상하 단일 구조화된 감독 제도의 부활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던 스코틀랜드 언약자들은 1643년 그들의 신앙과 삶에 관한 원리를 제공할 중요한 문서를 국회에서 통과시킨다. 그것이 바로 ‘엄숙동맹과 언약’이라는 문서이다. 왕권의 제한적 행사를 인정하되,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교회를 세우고, 신앙적인 자유를 희망하면서 자신들의 확신에 대한 신실함을 엄숙하게 맹세한다는 문서이다.


‘국가 언약’에서 표출된 언약 사상의 계승
‘엄숙동맹과 언약’이라는 문서는 스코틀랜드에서 1638년에 제정된 ‘국가 언약’의 사상적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 언약’은 모든 부류의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엄숙히 서약하는 신앙적인 공통 연대를 의미한다. 찰스 1세가 무력으로 제압하여 통일된 교회의 체제와 기도서를 성공회 단일 체제로 구축하려던 무리한 욕심에 대하여 1638년 이를 반대하는 폭력 저항이 일어났고, ‘국가 언약’ 혹은 ‘국민 언약’이라는 문서를 채택하게 되었다.


성경적 기초
언약의 성경적 기초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 관계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의 언약이다. 그런 관점에서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 혹은 국가 전체적으로 주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로 각오를 하고 맹세를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한다면, 그 특별한 언약의 내용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왕이시다. ‘엄숙동맹’과 언약‘에서 교회가 그 집행 구조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건전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만 한다. 언약 사상가들은 국가 차원에서 행해지는 모든 인간의 행동들도 하나님과 말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오늘날은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나, 17세기 스코틀랜드 언약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국가가 중립적이라는 생각은 무신론적인 주장이었다. 교회와 국가는 구별된 기관이지만, 모두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교회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과 예배와 권징을 담당하는 기관이고, 국가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재판과 처벌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교회 정치 형태를 하나로 묶는 데는 실패하였다. (회중교회, 장로회 교회) 비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세세한 부분까지 결정하는 최상의 것을 얻어내지 못했을지라도, 이들 대표단들은 두 가지 면에서 만족감을 표하였다. 첫째, 회의가 시작된 초반에는 통일을 기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그런 목표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들이 적어도 자신들과 같은 비전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언약 사상가들의 제일가는 목표는 영국과 아일앤드에 교회 정치와 권징 제도를 정착시키는 일이었다.


여섯 부분으로 구성됨
첫째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교회가 하나로 통일됨을 추구하며, 교회 체제와 권징과 예배에 대해서 개혁된 종교로 보전해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둘째는 거짓된 종교를 무너뜨릴 것과 교황 제도의 멸절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셋째는 다양한 소명을 위한 다짐으로써, 군주와의화의 개인 시민의 권한을 인정하되, 특히 참된 종교의 보전과 보호를 하는 데 군주에게 충성할 것을 밝혔다. 넷째는 이 언약에 반대하여 소란스러운 분열을 획책하는 모든 자에게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개혁에 반대하는 모든 자에게 대항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섯째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연합을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여섯째는 언약을 다짐하는 모든 사람은 앞에서 설명한 국가적 언약의 성취라는 한 목표를 위해서 상호 협조해 나갈 것을 서약하였다.
이 엄숙한 언약의 서약서에서 강조된 의무 사항들을 종합하면 결국 모든 민족이 대표자를 통해서 신앙과 믿음의 서약을 다짐하는 것이다. ‘언약’은 죄가 되지 않은 한 결코 파기할 수 없다. ‘언약’은 우리가 성경에 입각하여 살기로 작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말은 성경을 거스르는 삶을 살지 않도록 자신들을 묶어 놓는 것이다.


정치적 대결과 신앙적 투쟁
의회파 군대와 찰스 1세의 군인들 사이에 벌어진 시민 전쟁은 1642년 8월부터 지속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로버트 베일리 목사는 “영국은 시민 동맹을 원했으나, 우리들은 종교적인 언약을 원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1643년 11월 14일 스코틀랜드 대표들은 영국이 교회 개혁을 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사항을 발표하였다. 첫째, 성경만이 기준이다. 둘째, 목사, 교사(박사), 장로, 집사, 네 가지 직분만을 인정한다. 셋째, 교회 행정은 목사, 박사, 장로로만 구성한다. 넷째, 교회의 법정은 당회, 노회 대회, 총회, 네 단계로 구성한다. 1644년 2월 5일, 영국과 웨일즈에서 모든 사람이 ‘엄숙동맹과 언약’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이 시대의 초대 과제는 교회가 정부로부터 자율권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17세기 언약자들
17세기 초엽, 위대한 칼빈주의자들의 개혁 사상과 사회정치 사사잉 응집되어 있으며, 신앙적인 결의를 담고 있는 ‘엄숙동맹과 언약’을 작성한 네 사람의 신학자들의 지도력과 헌신이야 말로 스코틀랜드 칼빈주의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 핸더슨 : ‘1638년 국가 언약서’ 기초를 만듦, 행동하고 자문하는 행동파
- 새뮤얼 러더포드 : ‘위대한 브레드워딘’이라 불림, ‘알미니안주의 검토’를 저술, ‘타락 전 선택설’, ‘법이 왕이다’ 발표,
- 길레스피 : 교회의 예식에 관한 논쟁, ‘준비된 토론자’, 교회의 자유권을 옹호하는 저술,
- 로버트 베일리 : 장로교회 체제를 옹호, 훗날 그를 따른 사람은 국가 교회 체제를 거부했기 때문에 ‘브라운주의자들’이라고도 불림.
- 데이빗 딕슨 : ‘구원 얻는 지식의 요약’(언약 사상에 입각하여 목회적 적용), ‘거룩한 치료학’(죄와 구원의 문제), 딕슨의 언약 신학은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의 언약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고, 코케이우스의 ‘언약의 교리’는 대륙의 언약 사상을 총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제임스 덜함 : ‘찬송집’, ‘십계명 해설집’
- 조지 허치슨 : 딕슨의 자리를 물려받음, 단순한 에배 형식을 채택하는 일에 앞장 섬,
- 제임스 퍼거슨 : 언약 신앙을 가진 선배들이 보여 준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확신
- 제임스 우드 : 독립 교회를 옹호하고 장로교회 체제에 대항
- 로버트 브레어 : 온건한 화해자
- 리빙스턴 : 대각성을 체험
- 윌리엄 구츠리 ; 탁월한 저술활동, 17세기 실천신학의 보고


교훈들
하나님을 섬기되 종교 개혁 정신에 입각하여 언약 정신을 매우 강조하던 스코틀랜드 청교도의 황금시대를 격렬하게 지키던 시대가 지나가고 난 다음 두 세대는 박해와 혼돈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박해 시대가 다시 찾아온 1662년에서 1688년 사이에, 그리고 윌리엄 명예 혁명이 타결되고 정권과 교회와의 대타협이 정착되면서, 안타깝게도 지난날 엄격하게 지키고자 맹세하던 이 언약의 내용들은 거의 다 잊혀지고 만다. 오늘날 영국에서나 스코틀랜드에서나 ‘엄숙동맹과 언약’ 사상은 그 의미가 매우 퇴색되었다. 몇 차례 개혁 장로 교단의 분열과 신학적인 논쟁이 있은 후로는 더욱더 약화일로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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