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자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죽음은 역사의 막다른 골목입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심각한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에 대하여 무관심하여 쾌락주의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든 세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죽음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이 카운트 다운을 하는 상황의 긴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개인의 종말과, 만물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죽음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사람들은 무관심한 것 같지 않으면서도 무관심하기에 죽어가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 재림, 종말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이런 말들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을 광신자, 저질적인 신앙인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롯의 사위들은 심판에 관한 말씀을 들었을 때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처럼 우리가 주의해서 들어야 할 말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반응들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교회에서도 죽음, 죄, 심판 등에 관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거부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런 설교자를 시대 감각이 뒤쳐진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그들이 듣기 좋은 설교만을 한다면 인류의 마지막 등불마저 꺼져가는 것입니다.
캠브리지 대학의 C.S 루이스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재림과 종말을 말하는 것은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마땅한 미덕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이유는 종말과 미래에 대한 설교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은 다음 세대와 그 이후 세대를 많이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내일에 대한 꿈이 없는 사람은 현실적인 쾌락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도피주의로 시간을 허비해 버립니다. 여러분, 현실을 진지하게 살고 싶습니까? 내일에 대한 사건에 대하여 깊게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종말의 위기가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지 않는 우리들의 자세가 위기입니다.
마지막이 비극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결코 그것을 비극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은 준비하지 않는 나 자신입니다.
1.개인의 죽음과 심판은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불신자들에게는 앞으로 육신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이라는 두 가지 죽음이 남아 있습니다. 육신의 죽음, 누구나 이것은 인정합니다. 육신의 죽음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세는 시편에 홍수로 쓸어간다고 표현했습니다.
“주께서 저희가 홍수처럼 쓸어가나이다 저희는 잠깐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시 90:5)”
저는 처음에 이 말이 이해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보고서의 자료를 보니까 이 지구상에 하루에 120만 명이 사망을 합니다. 매초에 30명입니다. 인천보다 큰 도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홍수가 나도 하루에 120만 명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게 홍수처럼 쓸어가 버립니다. 질병이 아무리 대단해도 하루에 120만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태풍이 아무리 거세어도 120만을 하루에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홍수처럼 그렇게 많은 인원을 쓸어가는 것입니다. 그 홍수의 물결에 언제 내가 휩쓸려갈지 모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어리석은 태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준비하지 않고 살다가 죽음이 가까이 와서 준비하려는 막연한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전도하면 “저는 지금 바쁘거든요. 그러니 이번 일은 끝내고 나서, 늙어서, 죽기 5분 전이면 충분합니다” 하고 만용을 부립니다. 불쌍한 인생입니다. 누가 죽음을 예측하겠습니까? 죽음은 얼마나 덧없이 찾아옵니까? 인생이 무엇입니까? 종말을 준비한 분이라면 갑자기 쓰러져도 괜찮겠습니다만 불신자가 그 경우를 당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죽음을 막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치명적인 과오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 말을 부정할 권위를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론할 자격자가 있습니까? 권위를 가지지도 못하면서 준비하지 않고 부정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2.역사의 종말은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종말에는 개인의 종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가 임박한 종말로 인하여 고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카운트 다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관하여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너무 안 믿으니까 세상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3장에서 25장까지 말씀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37년 뒤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하셨습니다. 그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그 환난과 핍박을 이기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계종말과 우주멸망은 이 세상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둘을 같이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티도 장군에 의하여 완전히 함락되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통곡하셨습니다.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가르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잡아먹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어 있던 3년 반 동안에 있었던 일입니다. 세상 종말에 대한 계시로서 예루살렘 멸망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듯이 이 세상도 반드시 종말의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종말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도덕적 타락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말세가 되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망국의 징조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 가지를 빼고 나면 나 자신에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불변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 세 가지 우상에 빠져 자기를 찌르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남을 찌르고, 남에게 찔려 고통을 당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옆의 사람도 찔러 같이 고통을 당하게 합니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타락할 뿐만 아니라 남도 타락시킵니다. 이 세 가지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때가 말세입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시대를 만나고 있습니다.
2)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홍수처럼 교회로 밀려오고 밀려가지만 그들 대부분이 위선적인 크리스챤들이다. 맹목적인 교인들이다. 그 가운데 중생 받은 지극히 작은 수에 불과하다.”
불안하기에 교회를 찾아오지만 자기가 만든 기준 안에서 좋은 말만 해주는 목사를 좋아하고, 그 기준 안에서 전해주는 말씀만 좋아하지 자신들의 아픈 곳을 찌르는 목사나, 설교나, 교회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바른 소리를 하면 미련한 자로 취급해 버립니다. 홍수처럼 밀려와 홍수처럼 밀려갈 때 등장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박태선, 문선명, 이장림 등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나타난 이단들입니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들의 귀에 알맞는 메세지로 낚아챕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목사와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다르게 가르칩니다. “야! 신비롭다. 새로운 해석이다” 해서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3)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97%가 자기 말로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스컴과 정보 이동이 빨라지고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됩니다.
4)세계 파멸의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유엔 헌장에 보면 “우리들은 다음 세대를 전쟁으로부터 구출할 것을 결심하면서 유엔을 조직한다”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유엔을 지금 와서는 믿을 수 없습니다. 미치광이가 발작하면 불 속에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이 또 나타난다면 누가 그를 막을 것입니까?
3.세상의 심판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예수님은 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기록이 318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 1/20에 해당합니다. 예수 재림과 종말은 함께 합니다.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면 예수님이 재림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의 종말입니다.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양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이 없으신 분입니다. 바로 잠시 잠간 후에 그가 오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 가운데 오실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가 오시는 날 인류는 양분될 것입니다. 찬양소리에 휩싸여 환영하는 무리와 공포에 싸여 통곡하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과 지옥 백성이 나뉠 것입니다.
만일 부인이 신자고 남편이 불신자라면 남편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그날에는 하나는 가고 하나는 남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안 믿는 남편을 인하여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말을 준비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단지 무로 끝나는 종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기만에 빠진 바보입니다. 자신의 몽롱한 꿈에서 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4.여기에서 구원받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를 건지실 구원자로 믿어야 합니다.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사 고통받고 죽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천국으로 믿는 자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 누구를 붙들겠습니까?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실 왕이십니다. 영원한 나라의 왕입니다. 쾌락에 입맞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을 자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세상과 하늘나라 중에서 어느 곳을 선택할 것입니까? 지금 선택하여야 합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가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나뉘어 질 때 강아지는 자기 주인을 따라가게 됩니다. 우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예수를 지금 이 시간에 선택하여야 합니다.
5.우리는 세상 유행대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의 때는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엄청난 비가 주야로 쏟아지는 데도 시원하게 잘 쏟아진다고 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쾌락에 빠지고, 물질에 빠지고, 세속주의에 빠지면 운명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우매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먹고 사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세속에 빠지면 문제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이 시대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6.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 12:35)”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술취하고 방탕한다는 말은 잠들어 있는 어두움의 밤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불법적인 관계를 청산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사람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세상 종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불현듯 뜻하지 않게 올 것입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어 덴버라는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덴버에는 폴 헨리라는 6살짜리 소년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대통령을 만나 악수 한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고, 마침 아이젠하워가 덴버에 도착하자 비서관들이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대통령은 예고 없이 그 소년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날 따라 폴 헨리의 아버지는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왔을 때 그는 잠옷 바람으로 대통령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빨리 그 소식을 듣고 일어나 준비하고 있었더라면 그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바로 그 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종말과 재림의 때에 우리가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는 비극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에게 우울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낙관론입니다. 여러분, 바다에 나가 수평선을 바라본 일이 있습니까? 역사의 지평선을 바라보면 캄캄한 구름이 가득 깔려 있습니다. 비어있는 곳이 없습니다. 역사도,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될 것에 대한 내일의 비젼이 없다면 인생을 살 의미가 없습니다. 재림이 없다면 공산세계에서 어렵게 반세기를 넘기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이 언제 빛을 보게 될 것입니까? 누가 그들을 구원할 것입니까? L.A에서 한인 목회를 하고 계시는 임동선 목사님이 중국에 갔을 때 교포 할머니가 그 목사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물었답니다. “목사님, 예수님은 언제 오시나요?” 주님이 오시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이어가는 유일한 기대였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국민적 도덕 가치 기준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를 기다리며 고통을 참는 의로운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없다면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자식들과 더불어 고통의 세월을 무엇으로 참고 견디겠습니까?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세상 축복을 다 놓쳐버린 사람들은 누구를 바라보며 이 세월을 견디겠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은 낙관론입니다. 재림이 있기에 억울함 속에서도 참고 견딥니다. 마음의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웃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아름다운 미래가 없다면 누가 왕입니까? 마음대로 돈을 탕진하며 사는 쾌락주의자가 왕이 될 것입니까? 주님의 심판이 없다면 왜 육신적인 욕망들을 참습니까? 마음대로 해야지. 예수 믿는 이것만이 우리의 해답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이 두려운 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죽는 날도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이 와도 무섭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예수님을 통해서 끌어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에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구름타고 주님 오시는 날 그를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날에 가족이 나뉘는 비극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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