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자칭 구원자로 등장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은 세계적인 종교의 창시자로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예수님을 이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타의 모방을 불허하는 독특한 면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C . S 에스 루이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그의 일생을 두고 우리는 그를 위대한 도덕군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대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해야 한다. 적당한 도덕군자라는 말은 예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가 말한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반대로 미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을 그의 말씀대로 다 믿든지 아니면 전부 부정해야지 중간노선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단지 성인, 도덕군자, 기독교의 창시자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보편적이고 평범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우리들도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생각에 대한 자기 수정이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선입견은 인간의 생각이요 자기 주관이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소유하고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예수님은 누구인가?
1)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은 친히 자기를 가리켜 “내가 하나님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인간과 만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그대로 인정하든지 거부하든지 해야지 어물쩡하게 도덕군자 중의 하나라는 말로 대치해서는 안됩니다.
2)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이단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부정하는 교단이 이단입니다. 여호와 증인이 그렇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사람임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영지주의가 그러했습니다.
3)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없는 몸으로 오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의 몸을 빌어 오셨습니다. 오시는 과정이 그러했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예수님은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왕이십니다. 그는 구원을 목적으로 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왜 보내셨을까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될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 가운데는 구원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을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육체를 입고 있으면 사실 많은 점들이 불편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배고픔과 굶주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2.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참사람으로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을까요?
1)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자기 몸으로 우리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직접 사람에게 사형을 구형하거나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손을 빌려 사형언도를 내리게 했고 십자가 처형을 받게 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십자가형을 받지 않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모반자, 노예, 악질적인 자에게 가해지는 방법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일주일을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악담하고 저주합니다. 그 말을 듣기 싫어서 혀를 깨물어 죽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벌레, 파리 떼가 달려듭니다. 그래서 질식해서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빨리 죽지도 않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는 죽음이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 죽음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죽음을 요구하셨을까요?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은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다 지옥에 가서 인간이 당하게 될 고난을 상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그분이 죄인의 죄를 담당하시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돼지우리에서 돼지들과 함께 살라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무죄한 자가 사형을 언도받았다면 형집행 이전에 홧병으로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습니다.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불신자가 지옥에 떨어져 외치게 되는 탄식소리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버림받는 곳입니다. 그 고통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대신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옥은 태양이 없는 지구와 같은 곳입니다. 버림받은 곳입니다. 평생토록 영원토록 원망하며 부르짖는 곳입니다.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하셨습니다. 해가 어두워져 그를 가리워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는 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대신 드렸습니다. 양과 염소, 소, 비들기를 죄 지은 사람이 데리고 성전으로 옵니다. 그는 제사장과 더불어 끌고온 짐승에게 안수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짐승의 머리 위에 안수함으로 자신의 죄를 전가시켰습니다. “이 짐승을 받으시고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단 옆에 가서 목을 잘라 죽이고 단 위에 그 피를 뿌렸습니다. 사람 대신에 짐승이 대신 죄를 지고 죽은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방법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양의 구실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시청각 교육이 됩니다. 구약의 제사의 방법은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 제사는 일시적인 제사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 인류가 한번에 구원얻는 완전한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양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 머리에 손을 얹고 전가시켰습니다. 우리는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기도하면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시고 믿는 자들을 용서하십니다. 내가 한 일은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사망을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지옥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지옥의 영원한 삶을 6시간 속에 축소시킨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저주를 예수님이 감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잔인하셔서 잔인한 죽음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죽지 않으면 안될 만큼 인간의 죄가 큰 것입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피를 흘려야 죄사함을 얻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공식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죄는 생명에서 사람들을 끊어지게 했습니다. 영적으로 죽게 했고, 육체의 죽음을 가져왔고, 영원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대등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짐승으로는 불완전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인류의 죄를 씻기로 하나님은 작정하신 것입니다.
죄인의 피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죄없는 의인만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말할 때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면 안됩니다.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을 부정하면 이단 중의 이단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십자가를 놓고 쇼를 통해 인간을 우롱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진실한 죽음입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 천년전의 이야기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아담은 수천 년 전에 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가 잘못함으로 인류가 같이 망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대표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 죽음의 효력이 나에게 미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5)”
우리라는 말 대신에 나라는 말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여인은 동네 가운데서 돌멩이로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엄청난 죄를 여인은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하나님의 아들이 용서했다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면 가슴에 용서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발견하고 죄용서를 선언하는 음성을 들을 때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실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찔리고 상한 마음이 치료될 때 육신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구원얻은 자에게 하나님은 이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인간은 누구나 나를 사랑할만한 존재를 가지지 못한 외로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사랑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의 사랑이라도 그 사랑 속에는 미움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족할 수 없고 언제나 고독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나에게 손가락 하나 잘라 준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만족했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의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조건적이요 이기적이요 본성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강물처럼 사랑이 밀려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의의 태양이 빛나게 됩니다. 하늘의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옆의 사람을 용서하고 넘치는 사랑으로 그를 덮어줄 수 있습니다.
3.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죽습니까? 죽음이 예수님을 안고 몸부림쳤지만 그는 하나님이시기에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무식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뚜렷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부활을 믿고 안 믿고의 차이입니다. 신자는 부활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사람을 설득함으로 믿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부활은 나름대로 과학적 증거가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도 증인 몇 명이 나타나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았고, 많은 여인들이 보았고, 500여 형제가 일시에 보았습니다. 너무나 뚜렷한 사실로 나타나자 대제사장들은 돈으로 무덤을 지키던 자들을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선전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그들이 돈까지 주더라는 말까지 실토했습니다.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사건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 복음서마다 약간이 차이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천사가 한 명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두 사람이 있었고 무덤에서 돌이 굴려졌다고 나오고, 요한복음은 그것을 보았다고 나옵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도 복음서마다 달리 나오고, 그들의 보고도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예수님이 무덤 안에 안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판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떤 사건에 대하여 두 그룹의 증인들이 있는데 한 그룹은 사건에 대하여 똑같이 말하고 한 그룹은 약간씩 다른데 핵심은 같다고 했을 때 어떤 쪽을 채택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약간씩 틀린 쪽을 택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다 똑같으면 그것은 시전에 입을 맞추고 모의한 것이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에 린드 호스트 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는 검찰총장을 지내고 법무부장관과 캠브리지 대학 총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법관으로서 증거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증거에는 진짜 증거와 가짜 증거가 있는데 내가 보는 경우에 있어서 예수 부활은 완전한 사실이다. 그것은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 증거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벤허를 쓴 사람은 윌리스 장군입니다. 그는 전역한 뒤에 예수라는 사람에게 수억의 기독교인들이 속고 사는 것이 불쌍해 보여 허구성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잉거솔이라는 사람과 유럽의 여러 도서관들을 뒤져 산더미처럼 자료들을 쌓아놓고 모순점을 찾아내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한장 두장 읽으면서 그는 진실을 거짓으로 말할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후에 쓴 작품이 벤허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 16:19)”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①첫째는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②둘째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③세째는 영원한 나라를 주셨습니다. ④네째는 성령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신앙과 불신앙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진리는 둘일 수 없고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만 제시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보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 그것을 보고 자꾸 가짜라고 말하면 기분 나쁩니다.
사람들이 진짜 구원자되신 예수님을 자꾸 가짜라 말하면 안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 외에 또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짜 종교 구원이 없는 종교를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말하면 제일 싫어하십니다.
이제 당신은 예수님을 어떻게 인정하시겠습니까? 도덕군자, 성인이라고 말하려면 차라리 사기꾼이라고 말하십시오. 아니라면 말씀대로 믿으십시오. 그가 하나님이라고, 그만이 구원자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당신의 삶을 맡기십시오. 오늘 당신은 중대한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C . S 에스 루이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그의 일생을 두고 우리는 그를 위대한 도덕군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대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해야 한다. 적당한 도덕군자라는 말은 예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가 말한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반대로 미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을 그의 말씀대로 다 믿든지 아니면 전부 부정해야지 중간노선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단지 성인, 도덕군자, 기독교의 창시자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보편적이고 평범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우리들도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생각에 대한 자기 수정이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선입견은 인간의 생각이요 자기 주관이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소유하고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예수님은 누구인가?
1)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은 친히 자기를 가리켜 “내가 하나님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인간과 만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그대로 인정하든지 거부하든지 해야지 어물쩡하게 도덕군자 중의 하나라는 말로 대치해서는 안됩니다.
2)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이단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부정하는 교단이 이단입니다. 여호와 증인이 그렇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사람임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영지주의가 그러했습니다.
3)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없는 몸으로 오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의 몸을 빌어 오셨습니다. 오시는 과정이 그러했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예수님은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왕이십니다. 그는 구원을 목적으로 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왜 보내셨을까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될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 가운데는 구원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을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육체를 입고 있으면 사실 많은 점들이 불편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배고픔과 굶주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2.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참사람으로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을까요?
1)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자기 몸으로 우리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직접 사람에게 사형을 구형하거나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손을 빌려 사형언도를 내리게 했고 십자가 처형을 받게 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십자가형을 받지 않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모반자, 노예, 악질적인 자에게 가해지는 방법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일주일을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악담하고 저주합니다. 그 말을 듣기 싫어서 혀를 깨물어 죽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벌레, 파리 떼가 달려듭니다. 그래서 질식해서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빨리 죽지도 않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는 죽음이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 죽음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죽음을 요구하셨을까요?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은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떠나 마음대로 살다 지옥에 가서 인간이 당하게 될 고난을 상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그분이 죄인의 죄를 담당하시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돼지우리에서 돼지들과 함께 살라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무죄한 자가 사형을 언도받았다면 형집행 이전에 홧병으로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습니다.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불신자가 지옥에 떨어져 외치게 되는 탄식소리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버림받는 곳입니다. 그 고통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대신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옥은 태양이 없는 지구와 같은 곳입니다. 버림받은 곳입니다. 평생토록 영원토록 원망하며 부르짖는 곳입니다.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하셨습니다. 해가 어두워져 그를 가리워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는 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대신 드렸습니다. 양과 염소, 소, 비들기를 죄 지은 사람이 데리고 성전으로 옵니다. 그는 제사장과 더불어 끌고온 짐승에게 안수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짐승의 머리 위에 안수함으로 자신의 죄를 전가시켰습니다. “이 짐승을 받으시고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단 옆에 가서 목을 잘라 죽이고 단 위에 그 피를 뿌렸습니다. 사람 대신에 짐승이 대신 죄를 지고 죽은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 방법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양의 구실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시청각 교육이 됩니다. 구약의 제사의 방법은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 제사는 일시적인 제사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 인류가 한번에 구원얻는 완전한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양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 머리에 손을 얹고 전가시켰습니다. 우리는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기도하면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시고 믿는 자들을 용서하십니다. 내가 한 일은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사망을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지옥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지옥의 영원한 삶을 6시간 속에 축소시킨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저주를 예수님이 감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잔인하셔서 잔인한 죽음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죽지 않으면 안될 만큼 인간의 죄가 큰 것입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피를 흘려야 죄사함을 얻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공식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죄는 생명에서 사람들을 끊어지게 했습니다. 영적으로 죽게 했고, 육체의 죽음을 가져왔고, 영원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대등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짐승으로는 불완전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인류의 죄를 씻기로 하나님은 작정하신 것입니다.
죄인의 피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죄없는 의인만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말할 때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면 안됩니다.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을 부정하면 이단 중의 이단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십자가를 놓고 쇼를 통해 인간을 우롱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진실한 죽음입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 천년전의 이야기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아담은 수천 년 전에 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가 잘못함으로 인류가 같이 망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대표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 죽음의 효력이 나에게 미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5)”
우리라는 말 대신에 나라는 말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여인은 동네 가운데서 돌멩이로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엄청난 죄를 여인은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하나님의 아들이 용서했다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면 가슴에 용서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발견하고 죄용서를 선언하는 음성을 들을 때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실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찔리고 상한 마음이 치료될 때 육신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구원얻은 자에게 하나님은 이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인간은 누구나 나를 사랑할만한 존재를 가지지 못한 외로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사랑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의 사랑이라도 그 사랑 속에는 미움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족할 수 없고 언제나 고독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나에게 손가락 하나 잘라 준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만족했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의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조건적이요 이기적이요 본성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강물처럼 사랑이 밀려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의의 태양이 빛나게 됩니다. 하늘의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옆의 사람을 용서하고 넘치는 사랑으로 그를 덮어줄 수 있습니다.
3.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부활이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죽습니까? 죽음이 예수님을 안고 몸부림쳤지만 그는 하나님이시기에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무식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뚜렷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부활을 믿고 안 믿고의 차이입니다. 신자는 부활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사람을 설득함으로 믿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부활은 나름대로 과학적 증거가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도 증인 몇 명이 나타나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았고, 많은 여인들이 보았고, 500여 형제가 일시에 보았습니다. 너무나 뚜렷한 사실로 나타나자 대제사장들은 돈으로 무덤을 지키던 자들을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선전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그들이 돈까지 주더라는 말까지 실토했습니다.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사건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 복음서마다 약간이 차이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천사가 한 명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두 사람이 있었고 무덤에서 돌이 굴려졌다고 나오고, 요한복음은 그것을 보았다고 나옵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도 복음서마다 달리 나오고, 그들의 보고도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예수님이 무덤 안에 안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판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떤 사건에 대하여 두 그룹의 증인들이 있는데 한 그룹은 사건에 대하여 똑같이 말하고 한 그룹은 약간씩 다른데 핵심은 같다고 했을 때 어떤 쪽을 채택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약간씩 틀린 쪽을 택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다 똑같으면 그것은 시전에 입을 맞추고 모의한 것이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에 린드 호스트 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는 검찰총장을 지내고 법무부장관과 캠브리지 대학 총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법관으로서 증거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증거에는 진짜 증거와 가짜 증거가 있는데 내가 보는 경우에 있어서 예수 부활은 완전한 사실이다. 그것은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 증거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벤허를 쓴 사람은 윌리스 장군입니다. 그는 전역한 뒤에 예수라는 사람에게 수억의 기독교인들이 속고 사는 것이 불쌍해 보여 허구성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잉거솔이라는 사람과 유럽의 여러 도서관들을 뒤져 산더미처럼 자료들을 쌓아놓고 모순점을 찾아내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한장 두장 읽으면서 그는 진실을 거짓으로 말할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후에 쓴 작품이 벤허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 16:19)”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①첫째는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②둘째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③세째는 영원한 나라를 주셨습니다. ④네째는 성령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신앙과 불신앙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진리는 둘일 수 없고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만 제시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보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 그것을 보고 자꾸 가짜라고 말하면 기분 나쁩니다.
사람들이 진짜 구원자되신 예수님을 자꾸 가짜라 말하면 안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 외에 또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짜 종교 구원이 없는 종교를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말하면 제일 싫어하십니다.
이제 당신은 예수님을 어떻게 인정하시겠습니까? 도덕군자, 성인이라고 말하려면 차라리 사기꾼이라고 말하십시오. 아니라면 말씀대로 믿으십시오. 그가 하나님이라고, 그만이 구원자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당신의 삶을 맡기십시오. 오늘 당신은 중대한 선택을 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