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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강연(3) - III. 칼빈주의와 정치 / 아브라함 카이퍼 (Dr. Abraham Kuyper)

by 【고동엽】 2021. 11. 7.

III. 칼빈주의와 정치
1. 국가에 나타나는 주권


'칼빈주의와 종교'라는 긴 터널을 지나서 이제 그의 세번째 강연으로 들어간다. 이 세번째 강연에서 다루게 될 국가(혹은 정치)의 영역은 인간 생활의 세속적 영역으로는 첫번째이다. 카이퍼가 첫 강연에서부터 칼빈주의를 '삶의 체계'로 내세우면서 강조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걸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종교적인 면에서의 칼빈주의만을 말할 때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 생활의 한쪽으로 치우치게 이해하고마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가 오직 교회적, 교의적 운동을 대변할 뿐이라는 비역사적 주장을 참지 못한다.


카이퍼는 정치 발달에 미친 칼빈주의의 영향력을 보이기 위해 다시 근본 원리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그 근본원리는 바로 '(가시적이거나 불가시적인)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주권'은 1)국가, 2)사회, 3)교회에 나타나는 주권으로 인류에게 부여되는 근본적인 주권이다.




그 가운데 먼저 국가라고 규정되는 정치 영역에 나타난 주권을 살펴본다.


우리는 국가를 형성하려는 충동이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출생'이라는 과정을 통해 전체 인류와 유기적으로 연합하도록 하신 것에 기인한다. 우리는 모두 한 인류이고, 한 피를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 전체는 하나의 유기적 공통체를 이루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땅은 대륙으로 나누어지고, 대륙은 또다시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져 여러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인류의 유기적 통일성을 깨뜨린 것은 죄였다. 죄가 인류를 서로 다른 구역으로 나누었다. 죄의 세력이 아직 이 땅에 남아있는 한, 하나의 국가를 이루겠다는 제국주의적 발상도 헛되며 무정부주의도 망상에 불과하다.


죄가 없었다면 국가도 없었을 것이다. 죄없는 세상에서는 커다란 유기적 공동체가 있을지언정, 인간들에게 필요한 법령이라든가 통제, 규율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 제도는 이를테면 부러진 다리에 필요한 목발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국가 형성, 행정관의 권력, 질서를 강제하는 모든 기계적 수단 등은 언제나 자연스럽지 못하다.


우리의 본성은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권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권력을 더욱 더 남용하게 되고 폭동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이 권위와 자유간의 전쟁이었으며, 권위가 독재로 변질될 때 사람들이 갖는 자유를 향한 내면적 갈망은 권위를 제어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칼빈주의는 이 양립된 개념들 즉, 국가의 본성과 권위에 대한 개념과 자유를 변호하는 권리와 의무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에 대한 칼빈주의의 판단기준은 '하나님이 죄 때문에 행정관을 세우셨다'는 명제이다.
국가 생활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숨어있다. '수많은 국가'라는 어두운 면은 우리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기계적 통치 가운데 오히려 죄악이 독재적 야심을 부추길 수 있다. 반면에 타락한 인류에게 '정부나 지배 권위가 없는' 밝은 면은 하나님께서 홍수 가운데 심판하셨던 것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칼빈주의는 이 두 가지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칼빈주의는 국가와 행정관 제도를 하나님께서 주신 보조 수단으로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국가 권력에 숨어있는 위험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주의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많은 민족과 나라로 나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이 두려움을 억제하고 이 혼란에 질서를 회복시키고 바깥으로부터 오는 강제력이 인류 사회를 하나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신다. 이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연역에 의해 다시 한번 강조되는 칼빈주의의 두번째 정치적 명제는, '이 땅에서 정부의 모든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다. 사람의 아들에게 낮게 절함으로써 스스로 추하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께 순복하면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행정관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창조 때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영광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서 생명과 사망의 권세를 받았다. 모든 정치적 권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리고, 그런 이유로 인하여 정의는 거룩한 성격을 갖는다.




칼빈은 군주제, 귀족제 등의 제도 역시 실현 가능한 정부 형태로 인정하였지만, 국민이 자기 행정관을 뽑는 공화정(민주제)을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봤다. 기존의 규칙이 사라진 곳에서 보통 투표가 석권하고 있다. 최고의 권위가 무질서한 곳은 승계권 결정의 결여나 혁명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그 대표자로 하여금 최고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물론 칼빈은 한 민족과 국가에 가장 바람직한 조건(민주제)을 수여하지 않으실 주권적 권세도 또한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과 같은 신정이 아닌) 모든 세상에 타당하고 유효한 칼빈주의의 정치적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만이 국가의 운명에 관하여 주권적 권리를 갖고 계시며 어떤 피조물이라도 이런 권리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나라들을 만드셨고 그 전능한 능력으로 그들을 보존하며 그 규례로 그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 죄는 정치 영역에서 하나님의 친정을 파괴했다. 그러므로 권위의 행사는 통치의 목적상 기계적 치료책으로 사람에게 입혀졌다.
  • 이 권위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엄위로부터 그에게 내려오는 권위에 의하지 않고는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동료 인간에 대한 권세를 결코 갖지 못한다.

칼빈주의의 신앙고백과 정반대의 두 가지 정치이론이 있는데, 하나는 프랑스의 '국민주권설'이고, 또다른 하나는 독일의 '국가주권설'이다. 국민주권설은 프랑스 혁명에서 선포되었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칼빈주의 세계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들의 사상과 비교가 된다. 실로 프랑스 혁명은 스페인과 맞섰던 네덜란드 혁명이나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 이 세 가지 칼빈주의적(?) 혁명들은 기도하는 입술과 하나님의 도움을 믿는 신뢰로 이루어졌지만, 프랑스 혁명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대했다.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다"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빈 보좌에 인간이 앉았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고, 모든 권력이 인간에게서 나온다. 사람은 개인에게서 국민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옮겨지고, 그 안에서 모든 주권의 가장 깊은 원천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국민주권이며, 무신론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더 비참해지는데, 하나님을 대적하여 건방지게 주먹을 쥐었지만, 결국 '사회 계약'이라는 미명하에 동료 사람 앞에 굽신거리게 되는 꼴이란... (칼빈주의 영역에서는 무릎은 하나님께 꿇지만, 머리는 인간 앞에 자랑스럽게 쳐든다!)


국가주권설은 한 마디로 독일 철학적 범신론의 산물이다. 국민주권설에서처럼 국민을 집합체로 보지 않고 유기체로 올바르게 보기는 하였지만, 이 유기체는 국가라는 신비한 존재의 의지를 작용할 뿐이라고 이해하였다. 끊임없이 발달하는 이 국가의 의지는 다향한 형식으로 자신을 구현하며 심지어는 스스로 계시하고 자신의 주권을 주장한다. 이 국가는 자기 위에 아무도 없어서 사실상 하나님이 된다.




칼빈주의는 무신론적 국민주권설과 범신론적 국가주권설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 가운데 모든 권위의 원천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유기적 사회의 자연스러운 고리와 행정관의 권위가 부가하는 기계적 매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 차이는 하나님의 주권의 요구를 인정하도록 하기 때문에 권위에 복종하기가 쉽다. 또 그 차이는 현존하는 법률을 넘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권세의 원천을 보게 하기 때문에 법률의 불의성에 쉬지 않고 항거하도록 해 준다.




2. 사회 영역에서의 주권


칼빈주의에서는 국가와 별개로 존재하며 국가의 우월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신만의 권위를 갖는 가족, 사업, 과학, 예술 등을 모두 사회적 영역이라고 이해한다. 이 사회를 응집체로 파악하지 않고 각각의 독립적 특성을 존중할 때, 우리는 국가와 사회의 대립을 말할 수 있다. 이 대립은 국가가 이 사회 영역의 우위에 있지 않으며 함부로 이 영역을 침입할 수 없음을 뜻한다.


사회는 유기적이며, 국가는 기계적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 영역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유지된다. 사회 영역의 이런 특징은 인간 활동이 '자연을 다스리는' 창조의 규례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형성되는 것이다. 반면에 국가는 창조의 규례로부터 유기적으로 자라난 권위가 아니라 죄로 인해 왜곡된 인간 생활을 위한 단순한 치료책에 불과하다.


국가의 주된 특성은 생명과 사망의 권리이다. 우리는 사도의 증거에 따라 행정관이 갖는 '칼'의 삼중적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데, 범죄자들에게 신체적 형벌을 가하는 '정의의 칼', 원수에 맞서서 국가의 존립을 방어하는 '전쟁의 칼', 그리고 모든 강제적인 내란을 제압하는 '질서의 칼'이 그것이다. 이 권위는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지만, 이러한 기계적인 통합력은 항상 유기적인 사회 영역과 충돌이 생긴다. 왜냐하면 국가는 이 권위를 가지고 사회 생활을 굴복시키고 기계적으로 그것을 조정하려고 하는 반면에, 사회는 이 권위를 떨쳐버리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 두 영역간의 갈등을 위해 칼빈주의가 취했던 입장은 '입헌 정부'였다. 국가의 권위 못지않게 하나님께서 창조의 규례에 따라 사회 역역에 심어 놓으신 주권 또한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회 영역들의 독립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행정관이 아닌 법에 의한 규제를 요구한 것이다. 입헌적 공법이 로마 카톨릭이나 루터교 국가가 아닌 칼빈주의 국가에서 발전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거한다. 요컨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에게 내려올 때 국가와 사회 두 영역으로 나뉜다는 사상에 의한 것이다.




유기적인 사회적 권위는 각각의 영역에서 천재, 대가, 거장 등의 주권적 능력으로 나타난다. 학문 영역에서는 천재들이 그 시대를 지배하며 학파를 형성한다. 예술 영역에서는 대가들이 그 권위를 발휘하여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모든 자를 다스린다. 인격의 주권적 능력은 모든 개인 생활에서 자신의 영역을 다스린다. 대학은 학문적 지배권을 발휘하며, 예술원은 예술의 힘을 소유하고, 길드는 기술적 지배력을 발휘하고, 노동 조합은 노동을 지배한다. 또한 가정 영역에서는 혼인, 교육, 소유 등에 대한 권리가 자생한다. 그리고 생활의 필요에 따른 지역 단위의 생존 영역이 형성된다.


이 모든 사회 영역에서의 주권은 국가의 수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부가하신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이 영역들에 대하여 법률을 강요할 수 없고 각 영역이 내재하고 있는 법칙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로서 나온 주권이라고 할 때, 국가는 숲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나무 중에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국가에게는 이 자율적인 영역에 대하여 강제할 수 있는 세 가지 권리와 의무를 소유한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영역간의 충돌을 막고 서로 존중하도록 강제하는 것, 개인과 약한 자를 나머지 사람의 남용된 권력에서 보호하는 것, 모든 사람이 국가를 유지하도록 개인적, 재정적 부담을 담당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은 행정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법에 달려있다. 법이 각자의 권리를 표시하고, 국가의 권력 남용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국가의 주권과 사회 영역의 주권이 협력할 수 있는 출발점이 생긴다.


이러한 협력 과정에서 정부과 마주앉을 대의기관이 발생하기도 하고,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참정권이 주장되기도 한다. 이 방법은 물론 권리와 자유를 위한 개인적 저항보다 선호할 수 있는 통합적 방어책이기도 하다. 아무튼 어떤 형식이나 방법으로든지 모든 계급과 지위에서, 모든 집단과 영역에서... 건전한 민주주의적 의미의 법률 제정과 정부에 대한 합법적이고 질서정연한 영향력을 보장하는 것은 칼빈주의의 계획이었다.




요컨대 칼빈주의는 국가가 전능하다는 이론에 대하여, 현존하는 법률 이상의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념에 대하여, 입헌적 권리를 군주의 호의로 인한 결과만으로 인정하려는 교만에 대하여 항거하였다. 왜냐하면 이 범신론적 국가 주권이론들은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죽이고 사회 영역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영역을 침범하거나 그러한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를 위한 투쟁은 각자의 영역에서 개인의 의무가 된다.




3. 종교 문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


'종교 문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라는 문제에는 어려운 난점이 있다. 오히려 그 난점은 종교 문제에서 정부의 간섭을 요구하였던 칼빈과 그 시대의 몇 가지 사건(세르베투스의 화형과 같은)에 기인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점들로 인하여 칼빈주의가 종교의 자유를 핍박해온 것처럼 비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주의의 입장은 전혀 다른 것이다. '자유로운 국가 안의 자유로운 교회'...


이러한 역사적 불편함을 해소하게 위하여 한가지 원칙을 제시할 수 있다.

- "하나의 새로운 체계는 기존 체계와의 공통점에서 인식되지 않고 다른 점에서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이나 초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요구했던 온갖 우상숭배와 거짓종교를 근절하는 정부의 의무는 칼빈주의의 발견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교 황제들로부터 당했던 종교적 핍박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던 것이고, 로마교회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 황제가 옹호했던 것이다. 루터와 칼빈의 시대에는 그런 체계가 참된 것이라는 보편적 확신이 있었다.


역사는 세르베투스의 사형 집행과 같은 사건을 잘못으로 책망하고, 그것을 무조건 반대한다. 칼빈주의자가 이러한 역사적 입장을 갖는 것은, 그것을 칼빈주의의 독특한 특성으로서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체계의 치명적인 부작용으로서 반대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교회의 통일성에 따라 정부의 간섭을 요구했던 것이 결코 칼빈주의의 특징이 아니라는 점은 역사적으로 이미 증거되었다. 루터교 국가에서는 여전히 루터교가 국가 교회로 남아있고, 로마 가톨릭을 표방하는 나라는 로마교가 국가 교회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러한 나라에서는 개혁주의자들이 호된 대우를 받았다. 반대로 칼빈주의의 숨결이 닿은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의 나라에서는 자유 교회들이 발전되었고, 그런 나라에서는 유대인이나 루터교도나 로마교도들도 자유롭게 그 신앙을 간직할 수 있었다.


칼빈주의가 가시적 교회의 모든 절대적 특성을 거부하는 이유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칼빈 역시 가시적 통일성은 포기하였다. "기독교 진리에서 삼중적인 이탈이 존재한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나은 사소한 이탈과 온화한 징계로 회복해야 할 온건한 이탈과 엄중하게 처벌해야 할 명백한 불경건이다."


로마에서 시행되었던 핍박의 체계는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동일하게 여겼던 것에 의해서 지상에 하나의 교회만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생겨났다. 칼빈은 이런 위험한 노선에서 떠났다. 그는 비록 여전히 진리의 고백과 절대 진리를 동일시하였지만, 칼빈주의는 개인의 확신이 참된 가운데서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 교회에 대한 국가의 주권


"자유로운 국가 안의 자유로운 교회"라는 기초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향한, 교회를 향한, 개인을 향한 행정관의 영적인 의무를 살표보자.


먼저, 행정관은 하나님을 자신에게 권력을 주시는 최고 통치자로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백성을 다스려야 하며, 하나님의 위엄을 모욕하는 모든 의도를 억제해야 하며, 그에 근거하여 법을 제정해야 한다.


따라서 행정관은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통치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공의과 그분의 뜻에 대한 지식을 일상생활과 그 말씀에서 탐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신성 모독에 대하여 행정관은 그것을 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또 그러해야할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신성 모독은 그 의도가 명백할 때 규정될 수 있는 것으로, 그 처벌 대상은 종교적 위법이나 불경건한 감정이 아니라 국가와 통치자가 근거로 삼는 공법의 기초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이거나 투표에 의한 입헌적 공화국이거나, 원칙적인 문제는 정부가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지 교회의 부속물로나 그 제자로서 어떤 교회의 결정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 영역은 속되지 않으며, 그 영역에서 역시 하나님께 대한 독립적 의무가 유지되어야 한다.


교회와 국가는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진다. 하지만 국가 영역에서는 오직 권위를 부여받은 개인들의 양심을 통해서만 그것이 실현된다.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원칙에 따라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이것은 공적 사업에 있어서 기독교적 원칙을 적용하려는 권세 가진 자들의 주관적 확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




두번째로 가시적(제도적) 교회를 향한 정부의 의무는, 각 교회(교단)들에 대하여 개별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교회들의 개별 영역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미 앞서 칼빈주의가 가시적 교회의 형식적 통일성을 거부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정부가 모든 교단의 복잡함을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현현으로 보고 그 판단을 보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정부가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해야 한다는 그릇된 개념의 중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부에게 진리를 판단하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모든 행정관의 판단이 교회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루터파는 '동일 지역의 동일 종교'를 주장한다.)
국가에서 교회의 위상은 정부의 승인에 의하여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주어졌다. 교회는 하나님께로서 진리와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로서 자신의 특성을 결정하고 자신의 신앙고백을 진리의 신앙고백으로 선언하는 것은 교회의 특권이지 국가의 특권이 아니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들의 반대를 받으면, 그 교회는 영적 사회적 무기를 가지고 이 교회들에 맞서 신령한 전쟁을 싸워야 한다. 이러한 싸움에 정부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정부는 육신의 검을 가지고 있지 영적인 문제를 결정하는 성령의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자유로운 국가 안의 자유로운 교회"만이 칼빈주의 관점이다. 국가의 주권과 교회의 주권은 서로 나란히 존재하며 서로 제한한다.




개인의 신앙에 관한 정부의 의무는, 개인적 영역에서 갖는 주권적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를 말할 때, 양심을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양심은 결코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고 언제나 계속 전능하신 하나님께 종속된다. 이러한 양심이 바로 각 사람의 개인적 영역의 주권이다. 양심의 자유는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성숙했을 때에만 표출되는 것으로, 양심의 광장에서 억압 받기 보다 감옥살이를 하고 심지어 생명을 희생하고마는 그런 차원의 것이다.


정부는 이에 대하여 이중 의무를 갖는다. 하나는 교회로 하여금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자신(국가) 또한 주권적 양심에 양보하는 것이다.


교회의 주권은 자유로운 인격의 주권에서 자연스러운 한계가 발견된다. 교회가 자신의 영역에서 추방해야 할 구성원을 용납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심에 따라 떠나야만 하는 교회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교회가 이 원칙을 침해하여 주권의 한계를 넘으려 할 때, 정부는 모든 시민을 보호하는 권리 주장를 존중하여 교회에 양심의 자유를 요구해야 한다.


이런 양심의 자유에서 나오는 언론의 자유, 예배의 자유, 사상의 자유 역시 정부는 존중해야 한다. 정부는 사람을 다스리기 위하여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윤리적 힘을 존중해야 한다. 양심에 상처를 입은 시민으로 구성된 국가는 국가적 힘이 손상된다.
프랑스 혁명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다수와 동의해야 하는 시민적 자유를 얻었고, 칼빈주의에서는 자신의 마음의 확신과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양심의 자유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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