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칼빈주위와 종교
I. 종교 자체에 대한 교의적 대답
첫번째 강연에서 칼빈주의가 기독교의 완성된 모습으로서, 그리고 삶의 체계로서 높고 풍성한 인류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두번째 강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종교 영역에서 칼빈주의가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한다. 매우 빠르게 지어진 미숙련자의 솜씨처럼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칼빈주의의 놀라운 힘의 비밀은 무엇인가? 카이퍼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종교 자체, 교회 생활, 실제 생활의 세 측면으로 나누어 차례로 답한다.
종교는 다음 네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여야 한다.
- 종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 종교는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매개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 종교는 우리 개인 존재와 실존의 일부분에서 작용하고 마는가 아니면 전체에서 작용할 수 있는가?
- 종교는 정상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인 즉 구원론적 특성을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종교에 관한 첫번째 문제에 대하여 현대 종교 철학은 종교의 기원을 하나의 잠재력에 돌리는데, 그것은 사람 안에 존재하는 영혼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움직이는 영적 능력을 추론하게 되고, 더 나아가 포괄적인 개념의 인격신의 존재를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대조를 파악하게 됨과 동시에 자신의 영혼의 고상함에 매료되어 -자기 숭배의 행위로- 비인격적 이상(ideal) 앞에 절을 하고 만다. 이러한 종교는 어떤 다양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위한 종교가 된다.
인간을 위한 종교는 비록 그것이 하나의 신을 숭배하는 모습으로 발전한다 해도 역시 인간의 승리를 목적으로 육성되는 종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종교가 숭배하는 신은 언제나 사람을 돕거나, 국가를 위한 좋은 질서와 안정을 보장하거나, 궁핍한 때 도움과 구원을 제공하거나, 죄의 타락에 맞서 고상한 충동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종교는 궁핍한 때에 번성하며, 번성한 때에 버림받는다. 계몽된 계급은 학문의 진보로 인하여 우주의 압력에서 구제받는다고 느끼자마자 이런 종교를 버린다. (그리고 같은 현상이 고상하고 잘 살고 계몽된 사회 계급에 속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가운데 반복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칼빈주의의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에, 종교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계를 위하여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식없는 전체 피조물에 종교적 표현을 새겨 두셨다. 그러나 온 창조계가 사람 안에 그 절정에 도달하는 것처럼, 종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칼빈이 말했던 '종교의 씨'와 같이, 하나님은 신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통하여 인간을 종교적으로 만드신다. 종교는 오직 찬양과 경배의 감정이지, 불화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의존의 느낌(필요를 외치는 소리)이 아니다. 종교에서 모든 동기의 출발점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 말고 다른 존재를 탐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뜻 말고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 것, 주의 이름의 영광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것, 그것이 모든 참된 종교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하고 간구하며, 마땅히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필요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하여 고백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종교의 근본 개념이다.
하나님의 개별적 선택
그렇다면 종교는 직접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매개적이어야 하는가?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에서 인간 대언자가 필요했고, 기독교 영역에서도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 순교자, 성직자로서 대언자가 등장했다. 루터 역시 이러한 사제적 매개에 대항하였지만, '가르치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중보자 직분과 신비의 청지기를 다시 도입하고 말았다.
칼빈에 의하면, 종교는 피조물의 중재가 전혀 없이 하나님과 인간 마음의 직접적 교통을 실현해야 한다. 그는 사제나 순교자, 천사를 평가절하했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해야 했기에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든 모든 것에 맞서서 거룩한 분노로 전쟁을 벌였다. 물론 타락한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하지만, 그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이어야 하고, 사람이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 확증될 수 있다.
여기에서 사람을 위한 종교와 하나님을 위한 종교를 다시 한번 비교할 수 있겠다. 사람을 돕는 일이 종교의 주된 목적으로 남는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신앙심이 열등한 사람이 더 거룩한 사람의 중보 활동을 구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되고 그러한 종교는 다른 사람의 중보자 노릇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의 요구가 모든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두번째 요점은 개별적 선택의 고백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모든 성직자 중보의 결과가 한결같이 종교를 외형적이게 만들고 사제적 형식으로 종교를 숨막히게 하였지만, 오직 모든 사제적 간섭이 사라지고 영원부터의 하나님의 선택이 내면의 영혼을 하나님께 바로 매이게 하는 곳에서 종교가 이상적으로 실현된다. ('예정'이라는 관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을 나란히 놓을 수 있겠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감독으로서 자신과 교회의 중보 위치를 유지하였다.)
만물을 붙드시는 일반 은총
종교의 목적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은 종교적 필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에 종교를 국한시키게 된다. 그리고 종교의 실현이 성직의 중보자에게 달려 있다면, 그들 자신이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사건에 종교를 국한시키게 된다. 따라서 이런 종교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데, 종교적 기관(organ), 영역, 개인의 집단에서 그런 특징이 발견된다.
이러한 종교에서는 종교적 기관으로서 정당하게 사용되어야 할 인간의 감정, 의지, 지성 가운데 지성을 억제당한다. 종교가 인간 지성의 범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종교가 과학에서 배제되고 종교의 권위가 공적 생활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다. 종교의 영역이 윤리적 생활로 국한되고, 개인적인 은신처로만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종교는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일부 경건한 사람들과 관계 있는 종교가 된다.
마찬가지로 로마교는 종교를 자신의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고, 종교의 영향력을 자신이 봉헌한 삶의 부분에 국한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삶의 봉헌된 부분과 세속적 부분의 경계선을 긋는 이원론적 체계는, 종교를 일상 생활에서 절기로, 번영의 시절에서 위험과 병든 때로, 삶의 충만한 때로부터 다가오는 죽음의 때로 국한시키고 말았다.
칼빈주의는 이 세번째 문제에 대하여서도 역시 단호하다. 칼빈주의는 종교의 전적으로 보편적인 특성과 적용을 옹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따라서 사람은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로 올려놓아야 한다.
칼빈주의는 감정이나 의지에 국한된 종교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의 이성적 의식(사람 안에 있는 로고스)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비추는 사유의 빛을 배제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 때에 변할 수 없는 존재 법칙을 창조된 모든 것에게 주셨다. 칼빈주의는 이에 철저히 순종하여 모든 생활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봉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모든 생활에 임재하신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 서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종교를 단일한 단체나 사람들 가운데 몇몇 집단에 국한시킬 수 없다. 종교는 인류 전체와 관계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 은혜로 선민에게 끼칠 뿐만 아니라 일반 은총으로 모든 인류에게 끼치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종교적 빛과 생명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 교회의 벽 안에는 활짝 열린 창들이 있어서 그 빛이 온 세상에 비친다. 또 여기에는 모든 부패를 억제하는 거룩한 소금이 있어서 모든 방면으로 스며든다.
중생(구원)과 성경적 계시의 필요성
종교 자체에 대한 마지막 네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종교는 인간을 정상적으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으로 봐야하는가? 만약 인간을 비정상적으로 본다면 그 종교는 필연적으로 구원론적 특성을 갖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정상적인 존재로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견해를 갖는다. 이런 종교관은 진화론적 사고에 근거하여 가장 낮은 형식에서 가장 높은 이상으로 나아가는 종교의 발전을 말한다. 종교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진보하여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주의는 불완전한 종교 형식을 창조의 결과로 보지 않고 타락의 결과로 설명한다. 최초의 사람은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에서, 순수하고 참된 종교에 의하여 고취된 상태로 지음받았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이것을 깨닫고 죄 의식을 느끼며 한탄스러운 타락을 이해한다. 이것에 대한 회복은 오직 구원론적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이 결론에 따라 칼빈주의는 참된 실존을 위한 중생의 필요에 대한 근거와 분명한 의식을 위한 계시의 필요에 대한 근거를 발견했다.
하나님이 삶의 굽은 바퀴를 바로잡아 주시는 직접적 행위인 중생에 대하여는 강연 주제에 따라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계시와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는 할 말이 있다. 슈바이처와 같은 사람들은 성경을 오직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형식적 원리라고만 이해하였지만, 칼빈은 성경적 계시의 필요(necessitas S. Scripturae)라고 표현했다. 이 교의는 성경의 지배적인 권위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비평적 분석과 비평적 결과의 성경 적용을 기독교 자체를 버리는 것과 동일하게 보는 이유이다.
타락 전 낙원에는 성경이 없었다. 그리고 장차 영광의 낙원에서도 성경은 없을 것이다. 자연의 빛이 우리에게 직접 말하며 하나님의 내면적 말씀이 우리 마음에 명료하게 울릴 때 성경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죄로 인하여 자연과 우리 마음을 통하여 이처럼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인간에게는 성경의 계시가 전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인간 중보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 빛(태양에 비할 때 인공조명과 같은)을 거룩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비춰주신다.
그러나 사람을 여전히 정상적으로 보는 종교의 입장에서는, 종교가 구원론적일 필요가 없다는 그릇된 가정에 서게 되어 성경의 권위와 맞서게 되고, 결국 성경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 놓인 방해물이 되고 만다.
종교의 네 가지 문제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적절한 교의로 다음과 같이 각각 표현한다.
- 칼빈주의는 종교를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공리주의적 행복주의적 의미로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주권)
- 종교에서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어떤 피조물의 중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께서 내면의 마음에 이루시는 직접적인 역사이다. (선택)
- 종교는 부분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다. (일반 은총)
- 우리의 죄악된 조건에서 종교는 정상적일 수 없고 구원론적이어야 한다. (중생 & 성경적 계시의 필요)
2. 교회의 본질과 목적
이제 교회의 본질, 현현, 목적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교회의 본질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영적 유기체이다. 하지만 현재 그 중심과 행동의 출발점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영적 중심을 지구에 두셨고, 이곳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을 지으셔서 우주를 자신의 영광에 바치도록 하셨다. 이렇게 사람은 우주 한 가운데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서 있다. 비록 죄가 그 계획을 방해했지만, 하나님은 계획을 멈추지 않으시고 아들의 위격으로 자신을 이 세상에 주시어 인류와 우주가 영원한 생명과 새롭게 접촉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중생은 몇몇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유기체를 구원한다(인류라는 나무에서 많은 가지와 잎이 떨어졌지만). 그리하여 이 중생한 인간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몸을 형성하는데, 그리스도가 그 몸의 머리가 되시며 그 몸의 지체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으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유기체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야 우주의 중심에 모습을 드러낸다. 장차 이 '새 예루살렘'은 하늘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올 것이지만, 현재 이 유기체는 이 땅에서 흐릿하게 분간할 수 있는 실루엣과 같을 뿐이다. 따라서 참된 성소는 하늘에 있으며, 그곳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유일한 제사장 그리스도가 계신다.
교회의 이러한 천상적 특성은 중세 교회에서 점점 사라졌다. 성소를 다시 땅으로 내렸고, 제단을 쌓았고, 제단 사역을 위해서 사제의 교직제가 세워졌다. 또 땅에 보이는 제물을 찾게 되었고, 결국 미사라는 피없는 제물을 만들게 되었다. 중세 교회는 본질적으로 세상적인 것이 되었다.
칼빈주의는 원칙적으로 제사장직이나 제단, 성소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우고, 참된 제단과 참된 성소를 볼 수 없도록 만드는 사제주의(sacerdotalism)에 맞서 싸웠다. 그리하여 지상적 제사장을 교직제의 형식으로 보존했던 감독파, 그리고 군주를 최고 감독으로 교회 위에 세웠던 루터파와는 달리 칼빈주의는 교회 봉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절대적으로 동등하다고 선언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표현된 불가시적(보편적) 교회라는 교의는 종교적으로 성별되며 우주론적이고 영구적인 의의에서 파악된다. 땅에서는 기껏해야 한 시대의 성전의 입구에서 한 세대의 신자가 발견될 뿐이고, 이전의 모든 세대는 이 땅을 떠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말그대로 순례자였으며, 성전 입구에서 성소로 바로 들어갔다. (죽은 다음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교회의 본질과 이 땅에 있는 교회의 불완전한 형식 사이의 절대적 대조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양으로 우리의 육신 가운데서 불가시적 교회로 들어가셨으며, 우리의 머리되신 그분과 더불어 그의 주위에, 그 안에 참된 교회, 참되고 본질적인 성소가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교회의 현현
땅에서 나타난 교회의 현현 형식에 관하여서 말하자면, 칼빈은 교회를 신앙을 고백하는 개인 가운데서 발견하였다. 이 개인들이 성경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여 왕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함께 사는 일에 노력하는데, 이것이 바로 땅의 교회이다. 평신도에게 마술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물이나 기관이나 영적 단체는 없다.
참된 하늘에 있는 불가시적 교회는 지상의 교회 안에 모습을 나타낸다. 참된 본질적 교회는 중생한 사람이 지체로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 역시 그리스도께 연합되고 그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땅의 교회는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권징을 행하여 모든 일에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자기 교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통치하신다. 성령으로 각 지체 가운데 역사하시므로, 신자간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섬기고 이끌고 규제하는 사역자만 있을 뿐이다. (장로교의 정치 형식은 이중적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절대 군주제이지만, 실제 교회 정치는 민주적이다. 교회의 권력은 그리스도로부터 회중에게 직접 내려오며, 이 권력은 사역자 안에 집중되며, 이 사역자에 의하여 형제들에게 시행된다. 따라서 모든 신자와 회중은 서로에게 아무런 통치권을 발휘할 수 없고, 교회 회의, 즉 연합을 통해서만 교회 정치가 이루어진다.)
교회가 신자의 회중으로, 즉 신앙을 고백하는 개개인들의 연합으로 나타나고,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의 권력이 회중에게 직접 내려온다면, 역사와 지역 등의 차이로 인하여 다양한 교회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불가시적 교회)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모습(교단)으로 현현되어 가시적 교회(지상 교회)를 비추게 된다. (만일 교회가 신자와 독립된 은혜의 기관 혹은 교직을 맡은 기관이라면, 이 교회는 모든 나라에 퍼져 모든 형식에 있어서 동일한 특징을 갖게 될 것이다. 로마 카톨릭처럼.)
이렇게 교회(교단)의 다양함을 이끌어낸 '신자의 회중'이라는 교회 개념은, 자칫 신자의 자녀(아직 제대로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는 교회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칼빈주의는 신자의 후손과 연결되어 있는 자연적 유대를 끊어버리지 않고, 이 유대를 성별하여 세례로써 교회의 교제에 연합시킨다(유아세례). 그리고 이 자녀들은 스스로 신앙고백을 하거나 불신에 의하여 교회로부터 나뉠 때까지 교회의 교제 안에 유지된다. (이것이 언약 교의이다.)
언약과 교회는 떨어질 수 없다. 언약은 교회를 인류에 매어두고, 하나님은 은혜의 생활과 자연의 생활 간의 연결을 교회 안에서 증명하셨다. 교회 생활은 세대마다 이어지는 인류의 자연적인 유기적 번식과 나란히 전진한다. 이러한 전진은 교회가 단순히 전국민을 포함하는 국가 교회라는 개념 안에 머물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국가에 속하지 않고 세계적이다.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전세계가 교회의 영역이다.
교회의 목적
이제 교회가 땅에 나타난 목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 땅에서도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중생은 선택받은 사람이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확신하게 하는 데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하기 때문에 중생 다음에는 회심(conversion)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여야 한다. 중생한 사람에게서도 불꽃이 빛나지만, 회심한 사람에게서 비로소 타오르는 불이 된다. 회심과 선한 행위로 타오르게 된 불은 이렇게 교회로부터 세상에 비친다. 그렇지만 우리는 구원의 보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회심과 성화를 드러낸다.
또다른 교회의 목적은 성도의 교제와 성례를 통하여 이 작은 불꽃들을 하나로 모아 더욱 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순전한 경배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 예배,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신성함을 보존하고 이를 외부세계에 지속적으로 새겨두기 위한 교회 권징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집사 제도를 통해서 박애(philanthropy)의 봉사를 해야한다. 집사 제도는 구제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마음을 관대하게 하시는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그분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단순히 그리스도께 돌려드리는 것일 뿐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소유가 그분의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져야 한다. 집사는 우리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분의 영광을 가로챌 수 없으며, 그리스도가 아니라 집사와 구제하는 자에게 감사하는 것은 위로자이신 그리스도를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주의에서 교회라는 개념은 앞서 살펴본 종교라는 근본 개념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는 하나의 종교, 하나의 교회를 갖는다. 교회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그 현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이며, 그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
3. 실제 생활에서 맺는 종교의 열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
'칼빈주의의 신앙고백(특히, 성도의 견인과 예정 교리)은 필연적으로 너무 쉬운 양심과 위험천만한 도덕적 방종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실제 생활에서 맺는 종교의 열매로서 칼빈주의를 생각할 때 줄곧 지적되는 것이다. 칼빈주의 교리가 부주의하고 불경건한 생활을 낳고 있다는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하고 간단하게 답한다.
반율법주의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불경건한 탐욕으로 칼빈주의 신앙고백이 남용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칼빈주의적 진지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 영혼으로부터 전능자의 위엄에 놀라고 영원한 사랑의 강력한 능력에 복종하여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할 것을 확신하는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 앞에 떨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규례
성경을 삶의 원리로 강조하는 순간 또다시 율법주의라는 누명을 쓰지만, 율법주의는 율법의 성취로 구원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비하여 칼빈주의는 모든 구원의 공로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속 열매로만 돌린다. 물론 칼빈주의는 모든 윤리적 연구를 시내산의 율법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의 심비에 거룩한 뜻을 심어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참된 요약으로서 시내산의 율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가 하나님의 규례를 믿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삶이 창조에서 실현되기 전에 하나님 안에 먼저 있었다는 확신에 의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된 세계는 필연적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법칙을 갖고 있다. (궁창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땅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우리 몸에 흐르는 피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심장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가 있고, 미학의 영역에서 우리의 상상력에 대한 규례가 있으며, 도덕 영역에서 인간 전체 생활에 대한 엄격한 규례가 있다.)
하지만 칼빈주의는 이것을 '너는 ~해야 한다'는 입법자의 개념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 규례들은 마치 벗어버려야 하는 멍에처럼 강제력에 의해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길 잃은 광야에서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발자취와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숨이 가쁠 때 우리는 사람의 호흡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숨을 고르면서 정상 상태로 회복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는 자연의 법칙이나 일반 도덕 규례, 그리고 좀더 특별한 기독교적 계명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불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도덕적 세계 질서 말고는 다른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양심 안에 종교와 윤리의 두 가지 실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모든 것을 두는 것이다.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는 하나의 현실로서 모든 생활에, 즉 가정에, 사회에, 학문과 예술에, 개인 생활에, 정치 활동에 덧붙여진다. 세상에 대한 '기피'는 재세례파의 표어였다. 오히려 칼빈주의는 이것을 논박하고 부인했다. 두 세계, 즉 나쁜 세계와 좋은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동일한 자아인 것처럼, 저주로 고통받고 타락 이후로 일반 은총에 의하여 보전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어 심판의 공포를 지나 영광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의 동일한 세계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교회에 갇혀서 세상을 그 운명에 내버려 둘 수 없다.
칼빈주의자는 이 세상의 발전을 훨씬 높은 단계로 밀고 올라가되,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올라가며 '좋은 소식'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지탱하려고 한다. 이러한 불굴의 힘으로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 상업과 무역, 수공예와 산업, 농업과 원예, 기술과 학문에까지 새로운 추진력을 갖게 한다.
카드놀이, 극장, 춤
하지만 한 가지 예외를 들고자 한다. 이것은 이 세상의 너무도 신성모독적인 오락으로서 칼빈주의가 금지하는 것인데, 카드놀이, 극장, 춤 이 세 가지이다. 물론 그 자체로 그것들이 악한 것은 아니다. 날카로운 눈과 재빠른 행동과 폭넓은 경험으로 결정되는 놀이는 그 성격이 고상하고, 소설, 연극(약자주-당시 시대상으로는 주로 연극을 염두해 둔 것이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영화도 포함할 수 있겠다.) 등에 필요한 상상력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며, 춤 역시 그 자체로 반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다만 칼빈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에 의지하기보다 기회나 운에 의하여 불신에 빠지고 우연을 갈망하게 만드는 카드 놀이였으며, 관객을 즐겁게 하려고 배우들에게 도덕적 희생을 요구하며 번창하는 극장(연극,영화)이었으며, 쉽게 음란함에 빠지게 만드는 춤이었다. 칼빈주의는 위험한 환희에 빠져서 신앙의 진지함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희생시키는 모든 것을 반대한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도덕 영역의 곧은 길을 발견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도덕이라는 건물의 기초는 점점 흔들리고 있다. 정치가와 법률가는 강자의 권리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정직은 조롱당하며, 범신론자는 예수님과 네로를 같은 자리에 놓으려 하고 있으며, 니체는 그리스도의 복을 인류의 저주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칼빈주의는 세상이 윤리적 철학 이론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양심의 회복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추론에 몰두하지 않고, 우리 영혼을 곧장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면시킨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적 반성과 함께 낮아지며, 경건하고 고상한 도덕적 절제의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요약/편집 : 나쥬니 (www.nazuni.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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