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칼빈주위와 학문
1. 학문에 대한 사랑
네번째 강연에서는 칼빈주의와 학문의 연관에 집중하고자 한다. 한 강연에서 이 무거운 주제를 모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네 가지 요점만 고찰하려고 한다.
- 칼빈주의는 학문에 대한 사랑을 장려했다.
- 칼빈주의는 학문을 제 영역에 회복시켰다.
- 칼빈주의는 학문을 자연스럽지 못한 속박에서 건져주었다.
- 칼빈주의는 학문적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했다.
학문의 정의
먼저 왜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장려하지 않을 수 없는지 보여야 하는데, 칼빈주의의 '예정 교의'를 학문의 계발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로 지적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러나 오해를 막기 위하여 우선 '학문'이 뜻하는 바를 설명해 보겠다.
여기서 말하는 학문은 전체 인간의 학문을 말하는 것이지, 특별히 단순한 경험론을 완전한 학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경험에 의하여 지각한 구체적 현상에서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현상의 전체 배열을 지배하는 사상에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개별 학문이 된다. 또 이 개별 학문, 즉 몇몇 학문의 주제는 하나의 항목으로 모이고 이론이나 가설을 통하여 하나의 원리의 지배하에 놓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온갖 결과들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엮어내면서 인간의 학문을 이룬다.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
그렇다면 이러한 학문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칼빈주의적 신념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확보되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이 점을 이해하려면, 개인적 '예정'에서 일반적 '작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정에 대한 신념은 하나님의 작정이 우리 개인 생활 속으로 침투한 것이다. 예정 교의는 하나님의 뜻의 통일성과 그 활동의 확실성에 대하여 이생과 내생에 기꺼이 처신하겠다는 우리의 고백이다.
이 (개인적) 고백을 하나님의 작정에서 보면, 모든 사물 즉 전체 우주의 존재와 과정이 하나의 법칙과 질서에 순종하며 자연과 역사에 그 계획을 이행하는 (하나님의) 굳은 의지가 있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에 하나의 전포괄적 통일성이라는 개념을 심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를 수용하도록 만든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안정성과 질서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주는 마구 던져 쌓여진 돌무더기가 아니라 엄밀하게 일관된 방식으로 세워져 있는 기념 건물이다. 이 관점을 버리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식으로 일이 발생할지, 모든 세계는 언제나 불확실해진다. 그리고 변덕과 우연에 관심을 갖게 되며,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고, 상호 연관도 없고 발전도 연속성도 없다. 이런 조건에서 학문은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 생활에 대한 연구는 모호하고 불확실해지며,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어진다. 역사는 사라진다.
만물의 통일성, 안정성, 질서
우리 시대에 이루어진 학문의 발전은 칼빈주의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작정의 통일성과 안정성을 옹호한다. 인간 생활에 나타나는 견고한 사물의 질서는 거의 수학적인 증명으로 입증되고 있다. 학문은 우연과 변덕의 제물이 될 수 없다. 학문 전체의 발전은 굳건한 질서에 따라 하나의 고정된 계획을 지향하며, 하나의 원리에서 존재하고 발전하는 우주를 가정한다.
칼빈주의적 신념은 모든 존재하는 사물을 고정된 규례, 즉 하나님 안에 하나의 최고 의지에 종속시킨다. 또, 모든 존재하는 사물의 원인을 이미 수립되어 있는 계획으로 향하게 한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사물이 전체 창조와 전체 역사의 한 유기적 프로그램을 형성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에서 자연법의 토대와 기원을 찾듯이, 모든 도덕법과 영적 법칙의 확고한 토대와 기원 역시 하나님의 작정에서 발견한다. 영적 법칙과 자연법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존재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전포괄적인 계획의 완성을 성취하며, 그를 위하여 하나의 높은 질서를 함께 형성한다.
사물의 통일성과 안정성과 질서를 개인적으로는 예정으로 믿으며, 우주적으로는 하나님의 작정의 경륜으로 믿는 것이 칼빈주의적 신념이다. 이 믿음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힘있게 그 사랑을 장려할 수밖에 없다. 이 통일성과 안정성과 질서에 대한 깊은 확신이 없이는 학문은 단순한 추측을 넘어설 수 없다. 오직 우주의 유기적 상호 연관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 학문이 구체적 현상에 대한 경험적 탐구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상승하며, 일반적인 것에서 그것을 규정하는 법칙으로 상승하며, 그 법칙에서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로 상승할 수 있다. 모든 고등 학문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자료는 이러한 믿음에서만 손에 쥘 수 있다.
하나님의 작정의 경륜에 대한 확신
칼빈주의는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전체 생활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통일성과 안정성과 질서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굳건한 고집을 포기하지 않았다.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통찰의 통일성, 지식의 확고함, 질서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명백한 필요 때문에 지식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났다.
하나님의 작정의 경륜에 대한 확신을 무디게 만들던 반(半)펠라기우스주의와 맞설 당시, 그 시대의 일반 서민들에게 새겨져 있던 세계관과 인생관의 통일성이야말로 우연과 변덕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학문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구원 = 전체 우주의 회복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장려했다는 첫번째 요점을 떠나, 칼빈주의가 학문을 제 영역에 회복시켰다는 것을 고찰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는 영적인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 우주론을 회복시켰다. 십자가에서 창조로 돌아가도록 장려하는 그 일반적인 원리와 일반 은총 교의를 살펴보자.
자연과 은혜를 분열시키는 이원론
모든 사람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구원론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구원'의 문제는, 영원의 빛을 보지 못하고 내세와는 상관 없이 이 땅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 그래서 이 두 요소가 죄인과 성인,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 지상적 생활과 천상적 생활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그들의 상호 연관을 보지 못하고 서로를 왜곡하는 위험이 있다. 고백컨대 (중세의) 기독교 세계는 이 오류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중생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은 자연과 은혜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이원론적 개념은 천상적 사물을 너무 집중적으로 명상하므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하여 마땅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영원한 것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 때문에 현세적 의무를 이루지 못했고, 영혼만 보살폈기 때문에 몸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했다. 이 편협되고 부조화스러운 개념은 결국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신비적으로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구주로만 인식되고 그분의 우주론적 의의는 사라졌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하지만 이 이원론은 성경이 결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만물을 만드시고 사람의 생명이신 영원하신 말씀(요1:1-4;요일1:1-2)"이라고 했고, 바울도 "만물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지음을 받고 존재한다(롬11:36)"고 증거한다. 또 바울은 구속 사역의 목적이 각 죄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의 구속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사물이 유기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라고 증거한다(엡1:10;골1:20). 그리스도는 땅의 중생만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주의 새롭게 됨도 말씀하시고(마19:28), 바울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8:19)"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요한이 밧모 섬에서 들은 찬송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 모든 존귀와 찬송과 감사를 돌리는 것이었다. 요한계시록은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성경에 예시되어 있는 미래의 최종적 산물은 구원받은 영혼들의 영적 존재뿐만 아니라 전체 우주의 회복이다. 그 때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중요성에 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엄위를 계시하신 창조계는 그분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 것이다. 비록 죄로 인해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길이 열리고 회복에 관한 훨씬 더 영광스러운 계시에 합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복은 처음 창조된 것의 구원이며, 계속 구원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직은 영원히 찬송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중보직도 결국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광채가 아무리 장엄하다 해도, 결국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실 것이다. 이로써 칼빈주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현세적인 것에 대한 무시와 우주적인 사물에 대한 평가 절하를 단번에 종식시킨다. 우주적 생활은 영원한 것을 희생시켜 그 가치를 회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계시로서 그분의 능력으로 그 가치를 회복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 : 성경 + 자연
칼빈주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을 아는 두 방도, 즉 '성경'과 '자연'을 말하는 사실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칼빈은 많은 신학자들의 경향과는 달리 자연을 단순히 부속되는 항목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안경에 비유하여 이 안경으로 우리가 자연의 책에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다시 해독할 수 있게 한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자연에 전념하는 자가 헛되고 어리석은 일들을 추구하면서 그 능력을 허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모든 두려운 우려가 사라졌다. 반대로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의 관심이 자연과 창조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파악했다.
인본주의가 이 세상의 생활로 영원한 것을 대신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모든 칼빈주의자는 인본주의자에 반대했다. 그러나 인본주의자가 세속 생활을 적절히 인정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만큼, 칼빈주의자는 그의 동맹이었다.
3. 죄를 억제하는 일반 은총
이제 "일반 은총" 교의를 살펴보자. 이는 먼저 제시했던 일반적 원리의 결과이지만, 그 결과는 그 일반적 원리를 '죄'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서 생겼다.
죄는 우리에게 해결될 수 없는 수수께끼를 던진다. 만일 죄를 하나님께 대적하여 영원한 저주에 이르는 것으로 본다면, 죄인을 "선한 일이라고는 전혀 할 수 없고 죄만 지을 수밖에 없는" 자로 보게 되고, 필연적으로 모든 불신자와 중생하지 못한 자는 마치 불의하고 불쾌한 사람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 전혀 다르다. 오히려 불신 세계는 많은 점에서 뛰어나다.
그래서 사실 죄로 인한 "전적 부패"라는 교의가 언제나 우리의 경험과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런 경험에서 출발하면 우리의 기독교적 신앙고백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인간 본성을 선한 것으로,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생이 전혀 불필요한 것이 된다.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불신자의 덕을 '찬란한 악덕'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어떤 이는 신자의 죄를 옛 아담에게 돌림으로써 책임을 모면하려고 한다.
로마는 "순수한 자연적인 것(pura naturalia)"이라는 유명한 교리로 좀더 나은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로마주의자들은 삶의 두 영역이 존재하는데, 지상적인 것(순전히 인간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인간적인 것보다 높은)이 있다고 가르쳤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담은 하나님에 의하여 두 영역에 대한 준비를 잘 갖추었다. 타락으로 천상적인 것은 잃었지만, 지상 생활을 위한 자연적 능력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이렇게 타락한 사람이 자연적인 생활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러한 인간론 위에 로마 가톨릭이 서 있다.
로마의 체계에는 두 가지가 잘못되었다. 하나는 성경적 '죄' 개념이 빠져 있고, 또 하나는 그 죄의 개념이 도달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평가 절하로 인한 오류이다. 이것은 그릇된 '이원론'이다.
그 교의에 따르면 성직자는 독신으로 지상적 유대를 끊고 평신도보다 좀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또 지상적 소유를 버리고 자신의 의지를 희생하는 수도사는 윤리적으로 볼 때 성직자보다 좀더 높은 위치에 선다. 더 나아가서, 기둥을 오르며 모든 지상적인 것과 단절된 주상 고행자나 지하 동굴에서 틀어박히는 좀더 조용한 고행자는 최고의 완전에 도달한다.
교회가 찬성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것은 모두 저급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 입장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지상적 사물의 영역을 연구하도록 권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천상적 영역에 속하는 연구와 명상 외에는 이상(ideal)의 성소를 방어하던 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전적 타락 & 일반 은총
칼빈주의는 이런 개념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였다. 한편으로는 "전적 타락"이라는 죄 개념으로, 또 한편으로는는 "일반 은총" 교의로 타락한 사람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설명했다.
억제되지 않고 구속되지 않은 죄는 그대로 두면 곧 홍수 이전 시대에 보였던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 생활이 완전한 타락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 완전히 전멸하지 않도록 죄를 붙드셨는데, 이것이 '일반 은총'이다. 하나님은 이로써 개인의 생활과 전체 인류의 생활과 자연의 생활에 개입하셨다.
하지만 죄의 핵심은 이 은혜로 죽지 않으며, 이 은혜는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야생 짐승을 길들이듯이, 하나님은 '일반 은총'으로 사람 안에서 죄의 활동을 억제하되, 부분적으로는 그 세력을 부수심으로써, 부분적으로는 사람의 악한 영을 길들이심으로써, 그의 나라와 가정을 교화시키심으로써 억제하신다. 그래서 중생하지 못한 죄인도 사랑스럽고 힘이 넘치는 많은 것으로 매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죄의 본성은 여전히 해롭다.
악에서 선을 내시는 하나님
악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그것을 그다지 심각하게 부패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 '일반 은총'으로 불로 번지지 않도록 막으시는 하나님께 그 덕을 돌린다. '일반 은총'은 거친 물결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나룻배를 이끄는 고리줄과 같다. 하나님은 이처럼 악을 억제하신다. 악에서 선을 내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칼빈주의자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비난하는 일에 결코 게으르지 않지만, 우리를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살게 하시고 개인적으로 두려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 찬송하며 감사한다. 그리고 인류에게 감추어져 있는 모든 재능을 드러나게 하시고, 일상적인 절차에 따라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키시며, 지상 교회가 발디딜 자리를 확보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창조 질서에 새겨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탐구
하지만 이 고백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삶에 대하여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도 하나님께 속하며 이 둘에서 '최고의 경영자와 건축가'의 걸작을 탐구해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칼빈주의자는 잠시라도 다른 학문을 저급하다고 여기면서 불신자에게 맡기고는 신학과 명상에만 전념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작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모든 지적 능력을 다하여 천상적인 사물뿐만 아니라 지상적인 사물을 연구한다.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 산업의 생산물에서, 인류의 생활에서, 사회학과 인류의 역사에서 창조 질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보도록 부르심을 안다.
인류의 역사는 중앙에 십자가를 두고 진행하는 일관된 과정임이 분명하다. 이 과정은 모든 국가가 나름대로의 사명을 가지고 진행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 대한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주위의 자연 생활이나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이 탐구할 만한 대상이 되어, 그로써 가시적 현상과 불가시적 작용으로 나타나는 전체 우주의 영광에 새로운 빛이 비치게 할 것이다.
물론 이 노선을 따르는 철저한 학문적 지식의 과정이 종종 교만에 이르며,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가장 심오한 탐구자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으로 여기고, 세상 일에 대한 찬란한 깨달음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일반 은총' 교의 덕분이다.
4. 학문의 본질적인 자유
이제 세번째로 칼빈주의가 학문의 본질적인 자유를 어떤 식으로 발전시켰는지 살펴보자.
자유와 진정한 학문과의 관계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와 우리의 관계와 같다. 물고기가 참으로 자유롭게 살고 번성하려면 온전히 물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처럼 모든 학문은 자신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고유한 방법이 요구하는 바를 엄격하게 지킬 때에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학문의 자유는 방종이나 무법에 있지 않고 모든 부자연스러운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그 속박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학문에 꼭 필요한 원칙에 뿌리를 박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에는 국립 대학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학문이 '학자의 공화국(respublica litterarum)'을 만들었다고 흔히들 생각했는데, 그에 대한 자유의 침해는 국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영역(교회)에서 왔다.
공화제적 조직체제의 도입
수세기 동안 인간 생활에는 두 가지 지배적인 권력이 있었는데, 곧 교회와 국가였다. 몸과 영혼의 이분법이 이런 인생관에 반영된 것으로, 교회는 영혼이고 국가는 몸이었다. 제3의 권력은 없었다. 교회 권력은 교황에게, 국가 권력은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 이원론이 갈등을 일으켜 좀더 높은 통일성이 요구되었을 때 교황과 황제는 대권을 두고 격렬하게 부딪히곤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로 제3의 권력으로 학문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13세기 말, 학문은 대학 생활로 그 모습을 드러냈고 교황과 황제에 독립된 존재를 주장했다.
대학의 공화제적 특성은 모든 군주제적 열망의 배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는 그 제3의 권력의 성장을 경계하고, 대학을 자신의 통치 아래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모든 일을 시도했다. 그 당시 모든 대학이 확고한 태도를 취했다면 학문의 자유는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쟁에 밀려난 약한 대학들은 교황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강한 대학도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여기서 근본악이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학문은 독립적 특성을 포기했다.
우리의 의식을 통해 우주에 대한 지적인 내용을 수용하고 반성하는 학문의 영역이 교회와 전혀 다른 영역을 형성한다는 사실이 간과되었다. 종교개혁은 이 악을 억제했으며, 칼빈주의는 그 악을 정복해 버렸다. 칼빈주의는 교회 안에서 군주제적 위계제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공화제적이며 연방적인 조직을 도입했다. 그리하여 대학을 다스리는 영적인 교회라는 머리는 사라졌다.
루터교도들에게 그 (대학을 다스리는) 가시적 머리는 땅의 통치자였다. 그들은 이 통치자를 '제1주교'로 존경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를 다른 영역으로 구분했던 칼빈주의의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들의 체계에서 박사 학위 증서는 여론이나 교회의 동의, 교회의 규례로부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기관의 학문적 특성에서 의미를 가졌다.
교회는 특별 은총의 영역으로
대학에 대한 교황의 보호와는 상관없이 교회는 또다른 압력을 학문에 가했다. 교회는 혁신자들이 표현한 의견과 출판한 저술 때문에 그들을 괴롭히고 비난하고 핍박했다. 로마는 교회 안에서 옳은 것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말의 자유를 반대했다. 오직 (교회가 인정하는) 진리만이 사회에서 자신을 선전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학문의 자유를 해쳤다. 교회 관할권이 해결할 수 없는 학문적 문제는 시민 법정의 판단에 맡겨졌다. 갈등으로 움츠러든 사람은 침묵을 지키거나 상황에 순응했다. 그리고 반대에 맞섰던 사람은 날개가 잘린 채로 벌을 받았다. 그가 잘린 날개로 날아보려고 하면 목이 비틀어진다. 아주 대담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결국 종교 재판과 단두대를 만나고 말았다.
자유로운 탐구의 권리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알 수 있고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이미 모두 알려져 있고, 그것도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고 굳게 믿었던 그 당시 교회는 학문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원리인 '삶을 위한 투쟁'도 몰랐다.
칼빈주의는 일반 은총의 영역을 발견함으로써 이런 해로운 입장을 버렸다. 칼빈주의는 교회가 특별 은총의 영역으로 돌아가야 하며, '일반 은총'의 넓고 자유로운 영역이 교회의 통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결과로, 형법의 형벌은 점점 사문화한 법률로 축소되었다.
창조 명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믿음의 확실성'
또 하나, 학문이 융성하기 위하여 대중의 마음이 자유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교회는 삶의 유일한 목적을 그 공로를 통해 하늘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사람들은 교회가 이 주된 목적과 일치한다고 인정하는 만큼만 세상에서 향유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무도 지상적 실존에 대한 연구에 공감을 갖거나 헌신할 수가 없었다. 영원한 구원을 열망하는 일 말고, 지상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주에 관하여 웅대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은 납득될 수 없었다. 칼빈주의는, 지상의 삶이란 하늘의 복된 상태를 공로로 얻도록 정해져 있다는 모든 생각을 가장 절대적인 의미에서 뿌리째 잘라버렸다.
모든 참된 칼빈주의자에게 이 복된 상태는 '중생'에서 자라며 '성도의 견인'에 의하여 보증된다. 이 '믿음의 확실성'을 근거로, 칼빈주의는 기독교 세계에게 창조 명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 가운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순례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지만, 칼빈주의는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가는 길에서 지상의 중요한 일을 행해야 하는 순례자가 되었다.
인간은 이 무한한 전체 영역에서 일해야 했다. 칼빈주의는 열정과 정력을 갖고 이 노동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땅의 모든 것은 사람에게 종속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땅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고, 대양과 자연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 자연의 속성과 법칙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문을 권장하기를 꺼리는 백성이 새롭고 활기 넘치는 힘으로 자유의 느낌을 향유하도록 학문에 박차를 가했다.
5. 두 학문 체계의 갈등과 대립
마지막으로, 칼빈주의는 학문적 원리의 갈등에 신속한 해결책을 제공했다.
자유로운 탐구는 충돌에 이르고, 그 결과로 학파와 사조가 생긴다. 낙관주의 vs 비관주의, 칸트학파 vs 헤겔학파, 결정론자 vs 도덕론자, ... 모든 곳에서 대립하는 이러한 논쟁이 그 원리들의 상이성 때문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부수적인 갈등들은 모든 나라에서 지성을 격렬하게 혼란시키고 있는 원리의 갈등에 완전히 가려진다. 이 원리의 갈등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신앙고백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이신론과 범신론과 자연주의 안에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사람들과의 강력한 갈등이다.
모든 학문은 신앙을 전제한다
이 갈등은 신앙과 학문의 갈등이 아니다. 그런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학문은 어느 정도 신앙에서 출발하지만, 반대로 학문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거나 미신이다. 참되고 진정한 신앙은 그렇지 않다. 모든 학문은 신앙을 전제한다. 특별히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원리에서 신앙을 전제한다. 이는 학문적 탐구에 필요한 모든 공리가 우리의 자의식과 더불어 주어져 있음을 뜻한다.
반면에 모든 신앙은 발언하려는 충동을 내적으로 갖고 있다. 이를 위하여 신앙은 말과 용어와 표현을 필요로 하고, 이 말들은 사상의 구현이 되어야 한다. 이 사상들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황과 함께 상호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이 우리의 의식에 빛을 비추자마자 학문과 논증의 필요가 생겨난다.
따라서 갈등은 신앙과 학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존재하는 우주가 정상적 상태인가 비정상적 상태인가 하는 주장 사이에 존재한다. 만일 우주가 정상이라면, 우주는 잠재력에서 이상(ideal)으로 가는 영원한 진화의 의미로 움직인다. 그러나 우주가 비정상이라면, 과거에 혼란이 일어났고 그 목적의 최종적 달성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중생적 능력뿐이다. 이 대립은 학문의 영역에서 사유하는 두 가지 지성을 전투 대형으로 나눈다.
정상론자 vs 비정상론자
정상론자들은 자연적 자료 이외에는 의존하지 않으려 하며, 모든 현상에서 동일한 해석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들은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추론을 파괴하거나 제어하려는 모든 시도를 반대한다. 그들도 형식적 의미에서 신앙을 존중하지만, 신앙이 인간의 일반적 자료와 조화를 이루는 한에서나 그렇다. 특별히 기적은 존재하지 않으며, 냉혹한 방식으로 지배하는 자연법만 존재한다. 죄는 없고 저급한 도덕적 입장에서 고등한 도덕적 입장으로 진화가 있다. 그들이 아무튼 성경을 허용한다면, 인간의 작품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모두 잘라내는 조건에서 허용한다.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를 인정하지만,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인간적 발달에서 생긴 산물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한 신 또는 최고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가지론에 따라 가시적 우주 뒤에 숨어있거나, 범신론적으로 모든 사물 속에 숨어 있거나, 인간 지성의 이상적 반영으로 간주되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창조 개념을 거부하며, 진화만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에 비정상론자는 상대적 진화를 공정하게 판단하지만 무한한 진화를 반대하여 원초적 창조를 고수한다. 그들은 인간을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되어 있는 유일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인간을 독립적 종으로 본다. 그들은 죄를 우리의 원래 본성의 파괴로, 따라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거역으로 본다. 그 때문에 그들은 기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을 회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주장한다. 중생의 기적, 성경의 기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적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중생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이상적 규범을 계속 발견한다.
두 학문 체계의 대립
이 두 가지 학문적 체계가 각자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서로 대립한다. 이 두 학문은 모두 인간 지식의 전체 영역을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최고 존재에 관한 제안을 자신의 세계관을 위한 출발점으로 갖는다.
정상론자와 비정상론자의 이 두 가지 학문 체계는 서로를 인정하는 상대적인 대립자가 아니다. 그것들은 전체 영역에서 서로 다투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주장을 전체 체계 위에 세우려는 노력을 단념할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자신의 출발점을 신실하게 믿지 않는 것이며, 진지한 전사가 아니다.
성경의 가능성을 자신의 체계에 아주 작게라고 갖고 있는 정상론자는 이중적인 학자이며 학자의 이름을 상실한다. 반면에 창조를 진화로 변형시키며, 중생과 그리스도와 성경을 인간적 원인의 결과로 설명하려고 하는 비정상론자 역시 이중적이며 비학문적인 사람으로 우리의 대열에서 추방해야 한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 기원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우리는 둘 중 하나만을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선택하든 모든 것에 있어서 일관성 있게 해야 한다.
세계를 정복한 정상론자의 세계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비정상론자는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서 발언해왔지만 도전을 별로 받지 않았다. 물론 모든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비웃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1,000년 동안 학문적으로 이러한 보편적 확신에 반대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 르네상스는 불신앙의 경향을 은근히 장려했고, 인문주의는 그리스 로마의 이상을 향한 열정을 창출했으며, 중세 말엽 정상론자의 반대가 시작되었지만 그 후 수세기 동안에도 전통적인 학문 체계의 기초를 손대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에 반대의 의견이 중앙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새로운 철학은 최초로 일반적인 수준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원리를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것으로 선언했다. 비정상론자를 반대하는 데 일치하는 다양한 철학적 체계로 서서히 발전되고, 점차 법학, 의학, 자연과학, 역사학의 영역에서 무한한 정상적 과정이라는 새로운 가설을 그들 학문 탐구의 출발점으로 도입했다. 결국 정상론자의 세계관이 주도적 중심에서 세계를 정복했다.
신학자들은 변증학적으로 자신의 명분을 옹호하려 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신학 체계의 왜곡을 가져왔다. 특히 독일의 유능한 신학자들은 이 (정상론적) 철학 체계 가운데 하나를 기독교를 지지하는 버팀목으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이와 같이 철학과 신학의 혼합에서 생긴 첫번째 결과는 소위 '화해의 신학(mediating theology)'이었다. 이 신학은 신학적인 부분에서 좀더 빈곤해지고, 철학적인 부분에서 점점 풍요해져서 마침내 현대신학을 발생시켰다. 그리스도가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셨다고 하고, 성경을 저술 모음으로 바꾸고, ...
6. 학문의 원리적 갈등에 대한 해결
칼빈주의는 학문의 원리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소한 충돌에 골몰하지 않고 곧바로 인간 의식으로 돌아간다.
모든 학자는 자신의 의식으로서 이 인간 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의식은 사물의 비정상적 특성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죄의식이 매우 강하고 힘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약하거나 전혀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의 확실성이 중생의 결과로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의 증거가 크게 울려 퍼지고, 다른 사람은 그 증거를 전혀 듣지 못했다고 선언한다. 죄의식, 신앙의 확실성, 성령의 증거, 이 세 가지는 모든 칼빈주의자의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정상론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는 자기의 의식을 강요하려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식이 자신의 의식과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식과 다른 사람의 의식이 실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 순간, 사물의 정상적 조건은 허물어진다.
반대로 칼빈주의자는 자신의 의식이 정상론자 안에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칼빈이 주장하듯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semen religionis)'가 있고, '하나님에 대한 느낌(sensus divintatis)'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칼빈의 체계가 믿는 사람의 인간 의식과 믿지 않는 사람의 인간 의식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으며,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신앙의 확실성을 가질 수 없으며, 성령의 증거가 없는 사람은 성경을 믿을 수 없다. (참조.요3:3;고전2:14)
두 종류 의식의 차이점
이렇듯 의식의 단절을 모르는 정상론자(비중생자)가 있고, 단절과 변화에 대한 경험을 갖는 비정상론자(중생자)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식을 원초적 진리로 삼는다. 그리고 모든 학자는 학문을 이 의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논리적 결론은 일치할 수 없다. (중생과는 상관없이) 정직한 학자는 전체 우주에 대한 학문적 건물을 자신의 의식에 주어진 근본적 자료와 조화를 이루도록 세워야 할 의무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적 해결책에서 학문은 평가절하되거나 무시되지 않으며, 전체와 모든 부분으로서 우주를 위하여 요구된다. 정상론자의 학문과 비정상론자의 학문의 차이는 탐구의 상이한 결과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 의식의 차이점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학문의 부작용
자유로운 학문은 이 두 종류의 인간 의식의 공격을 막는 거점이다. 정상론자는 우리의 의식이 자신의 의식과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에서 믿고 바라는 그밖의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말하며, 자기 기만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상론자가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잘 구축된 학문을 세울 수 있는 자유를 공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권리와 자유 역시 보호하려고 한다.
그런데 시대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오래 전에는 모든 대학에서 비정상론의 입장을 모든 학문의 공리로 보았다. 오히려 소수의 정상론자는 교수직을 얻기가 어려웠고,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정상론자들은 상황을 주도하여 모든 영향력을 통제하고 더 많은 교수직을 차지하고 있다. 그 결과 비정상론자는 공적 위치에서 내쫓기고 있다.
전에는 우리가 그들을 문밖으로 내쫓았는데, 이제는 그들이 우리를 거리로 내몰고 앙갚음을 하고 있다. 그래서 최후 소송에까지 승리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와 힘이 훨씬 높은 수준에서 기독교 학자에게 있는지가 문제가 된다.
정상론자들에 맞선 기독교 학자들
정상론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우리 보기에 거룩한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일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학자는 이 싸움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학문적 양심을 위하여 낙담의 불평을 하거나, 신비적 감정을 붙들거나, 비신앙고백적 활동을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원리에 따라 사유하고, 이 원리의 노선에서 모든 학문적 탐구를 새롭게 하며, 자신의 힘있는 연구를 학계가 받아주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겠다는 강렬한 자극제를 얻어야 한다.
우리가 반대자에게 세속 학문을 맡겨도 아무런 위험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신학을 건지려고만 한다면, 우리의 전술은 어리석은 타조의 전술이 될 것이다. 집이 온통 불타고 있는데 윗층만 건져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모든 학문은 원리의 대립과 다소간 연관되고 따라서 원리의 대립에 틀림없이 개입한다. 기독교 학자가 현실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으로 안전을 조금씩 추구할 때,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서 안전한 방패를 발견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현실을 자신의 학문에서도 통합되어야 할 사실로 기록해야 한다.
학문의 자유는 결국 진리를 승리로 이끈다
그런데 지금의 많은 대학은 학문이 하나의 동질적 인간 의식에서만 발전하며 학문과 능력만이 전문 교수직을 차지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아무도 원리의 근본적 차이 때문에 두 노선의 대학이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상론자와 비정상론자의 범세계적 갈등이 불거질수록 대학 생활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칼빈주의의 요구에 따라 교회와 국가가 자신의 권위를 대학 생활에서 제거하면, 이 학문 영역에서 대립 원리의 지지자들이 평화롭게 분리되어 정직한 진보와 상호이해가 보장될 것이다. 역사는 이러한 분리가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증거하는데, 로마 제국의 '하나의 국가'라는 이념이 몰락했을 때 유럽의 숨어있는 정치력이 발전하였으며, 로마 제국의 몰락 후 유럽의 '하나의 세계 교회'라는 이념이 추방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좀더 높은 발전으로 나아가는 길은 열렸다.
학문의 피상적 통일성은 오래지 않아 깨지고, 학문은 분열될 것이다. 다양한 학문 영역이 일어날 것이며, 다양한 대학이 번창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학문에서 체계를, 교훈에서 일관성을, 교육에서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원칙에 엄격하게 매여있는 한 모든 부자연스러운 속박에서 벗어날 힘을 갖는다. 칼빈주의가 우리에게 열어준 학문의 자유는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인데, 첫째로 모든 주도적 가치관이 자신의 원리로부터 학문의 추수를 거둘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보장함으로써 그리할 것이며, 둘째로 자신의 결론에 힘을 실어주는 원리를 감추려 하는 학자들에게 학문의 이름을 주지 않으려 함으로써 그리할 것이다.
요약/편집 : 나쥬니 (www.nazuni.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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