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신칼빈주의 운동이 사회에 미친 영향 / 이정석 (풀러신학교 교수)

by 【고동엽】 2021. 11. 7.
신칼빈주의 운동이 사회에 미친 영향
이정석 (풀러 신학교 교수)

http://jsrhee.hihome.com/Neocalvinism.htm


신칼빈주의 운동이 사회에 미친 영향


총신대보, 2001년 11월호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교수)

세계 역사는 운동(movement)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열정적인 주창자를 중심으로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사회적 변화를 시도하였으며, 운동에는 성공한 운동과 실패한 운동이 있으나 모두 역사를 형성하는데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대개 생각에서 그치지만, 운동가들은 그것을 실천에 옮겨 자기 세계의 변화를 추구하며 동지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형성한다. 운동이란 변화의 역학으로서, 기독교의 발전도 헌신적이고 용감한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한 운동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운동가들에 의해 개신교회가 발생하였으며,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이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발전시켰다. 현대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여러 운동들이 작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신칼빈주의 운동은 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칼빈주의 운동의 발생 배경

기독교가 바울의 선교운동과 로마제국의 기독교 국교화로 인해 유럽을 복음화한 이래, 서구는 천여년동안 기독교 사회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중세의 신중심적 신앙문화를 대치하기 위한 인간주의(Humanism) 운동이 확산되었으며, 급기야 본격적인 계몽주의(Enlightenment) 운동이 전개되었다. 계몽주의는 18세기 볼테르의 주도 하에 유럽의 비기독교화를 추구하였고 프랑스혁명의 성공으로 사상적 차원을 넘어 정치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기독교의 몰락을 재촉하였으며, 이러한 세속화(secularization) 운동은 19세기에 들어서 불신의 자유를 확보하고 다윈의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의 과학적 공격이 크게 확산됨으로서 유럽 기독교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네델란드는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인 유일한 유럽 국가로서 남부 프랑스와 북부 독일로부터 밀려 들어오는 계몽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프랑스혁명과 같은 계몽주의의 승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반혁명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830년 네델란드 내각 서기인 Groen van Prinsterer 의원에 의해 형성된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이라는 정치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Abraham Kuyper(1837-1920)가 1872년 이 정당의 기관지인 De Standaard지의 편집장이 되고 이어 1874년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급기야 1901년에는 이 정당이 다수당으로서 정권을 장악하면서 네델란드의 국무총리가 됨으로서 이 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여 신칼빈주의를 주창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반혁명당의 사상적 모체가 된 Reveil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레베일운동이란 화란어로 부흥운동 혹은 각성운동을 의미하며,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유럽에서 일어난 각성운동의 일환으로서 네델란드에서는 William Bilderdijk과 Isaac da Costa에 의해 출범하여 반혁명당을 창당한 Groen van Prinsterer와 Hendrik P. Scholte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스콜테가 레이든대학교를 중심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여 카이퍼도 거기서 공부하며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소위 ‘스콜테 클럽’의 구성원들이 개혁교회의 정치원리에 역행하여 정부가 교회를 중앙집권화하고 간섭하자 이에 반발하여 1834년부터 국가교회를 탈퇴하자는 Secession 운동에도 영향을 받은 카이퍼는 후에 이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국가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가 신칼빈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 교단은 1854년 캄펜에 교단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

카이퍼가 주창한 신칼빈주의(Neo-Calvinism)는 고전적인 칼빈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첫째로, 신칼빈주의는 칼빈주의 원리를 교리와 신학의 한계를 넘어서 생활의 전 영역으로 확대 적용하자는 운동이다. 고전적 칼빈주의는 도르트회의에서 결정된 칼빈주의 5대교리를 중심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반기독교적 계몽주의 운동에 직면한 개혁교회는 계몽주의가 단순히 종교와 신학의 범위를 넘어 모든 영역에서 전면적 공격을 감행함에 따라 칼빈주의 원리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적용하는 새로운 칼빈주의 체계를 필요로 하였다. 카이퍼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신칼빈주의를 개발하였다. 본래 칼빈은 인문학의 영향으로 신학 이외에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의 사상, 특히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이 카이퍼의 시대에 종합적으로 개발되었다. 카이퍼는 반기독교적 계몽주의 운동에 대항하여 정치에는 정치로, 경제에는 경제로, 세계관에는 세계관으로, 인생관에는 인생관으로, 학문에는 학문으로, 교육에는 교육으로, 예술에는 예술로, 문화에는 문화로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게 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신칼빈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로, 신칼빈주의는 칼빈주의를 개신교회 전체로 확대하자는 운동이다. 카이퍼는 루터의 사상이나 웨슬리의 사상은 종교와 신학의 영역에 제한될 뿐이며, 오로지 칼빈주의만이 생활의 전 영역을 지도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확신하여 칼빈주의를 ‘개신교의 완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종합적 칼빈주의는 신칼빈주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후에 <칼빈주의 강연>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프린스톤 강연에서, ‘내 강연의 주된 목표는 칼빈주의가 단지 교리적이고 교회적인 운동만을 가리킨다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교파적 또는 신학적 개념이 아닌 과학적 개념으로 칼빈주의를 규정하면서 16세기 기독교 사상이 낳은 최고의 개발형태라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계몽주의의 반기독교운동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 체계로서 유럽의 세속화와 교회의 몰락을 막을 수 있는 이상적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신칼빈주의 운동의 본질

비록 이 운동의 원리는 칼빈에게서 왔지만, 그 강조점과 적용에 있어서 아브라함 카이퍼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신칼빈주의는 카이퍼주의(Kuyperianism)라고도 불린다. 이 운동의 중심사상은 신의 절대주권이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고 다스리기 때문에 결코 반신적 세력의 활동을 허용할 수 없다는 확신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수호하고 실현해야 될 책임이 있으며, 그 영역은 종교에 그치지 않고 세계와 정신의 모든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카이퍼는 “우리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다”고 외쳤다. 이 말은 바르멘 선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고 다른 주인에게 속하여 그분을 통한 칭의와 성화가 필요하지 않은 영역이 우리의 삶에 존재한다는 그릇된 교리를 거부한다‘고 응답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불신자가 많은 세상에서 모든 영역을 신적 주권이 임재하는 기독교적 세계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불신자와 신자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카이퍼는 칼빈의 일반 은총(common grace) 이론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선택받은 자에게 제한적으로 부여하는 특별 은총이지만, 한편 하나님은 신앙과 관계없이 모든 인류에게 일반 은총을 베푼다. 따라서, 신자는 불신자와 함께 신의 뜻에 맞는 건전한 정치와 경제 생활, 그리고 문화와 사회생활을 공유할 수 있으며, 일반 은총적 차원에서 신의 주권이 실현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공유적 본질로서 신의 형상(imago Dei) 이론이 강조되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였지만 신의 창조적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칼빈의 긍정적 인간관에 근거하여 인간의 보편적 합리성과 도덕성이 수용되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는 원칙 하에, 불신자가 발견한 진리도 공유할 수 있다.

물론, 카이퍼가 불신자와 신자의 완전 공유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특별 은총의 영역에서는 대립(antithesis)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였다. 계몽주의 사상과 기독교 사상은 공존할 수 없는 대립관계에 있으며, 그 전제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와 같이 카이퍼가 공존 가능성과 불가능성, 일반 은총과 대립 이론을 함께 주장함으로서,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 혼란과 분열이 일어났다. 일반 은총론을 중심 원리로 이해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불신자와 대화하였으나, 대립 이론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신자와 불신자가 전제의 차이로 만날 수 없다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를 주장하였다. 후자는 소수로서 Cornelius Van Til과 H. Evan Runner가 대표적이며, 신칼빈주의는 대개 전자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문화 개혁을 주장하는 일반은총론자를 가리킨다.

네델란드의 신칼빈주의 운동

이 운동은 네델란드에서 발생하였으며 지대한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아브라함 카이퍼 자신이 이 운동을 실천하여 네델란드 사회를 반기독교적 계몽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지키고 나아가 기독교문화를 실현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정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목사의 신분으로서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반혁명당 당수로서 네델란드의 국무총리가 되어 정치 영역에 반기독교 세력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신의 뜻에 맞는 정치를 추구하였다. 또한, 언론 영역에 있어서도 두 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서 45년 이상 봉직하면서 대중을 계몽하였다. 그 결과, 그는 200권이 넘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도 신칼빈주의 운동이 힘차게 계속되도록 만든 것은 자유대학교의 설립이었다. 그는 사회의 변화가 대학의 변화에 의존한다는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1880년 암스테르담에 자유대학교를 설립하여 사회의 모든 영역을 지키고 복음화할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현대 개혁파 조직신학의 태두이며 일반은총론의 대가인 Herman Bavinck와 G. C. Berkouwer로 대표되는 신학자들은 사회참여를 위한 신학적 기반을, Herman Dooyeweerd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철학적 논리를 제공하였고, 모든 분야의 교수들은 자기 분야에서 어떻게 계몽주의의 영향을 거부하며 신의 주권을 임하게 할 수 있을가를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자유대학교의 교수나 졸업생뿐 아니라 이 운동의 취지에 동조하는 많은 지성인들이 참여함으로서 네델란드에 널리 확산되어 오늘날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반 영역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의 신칼빈주의 운동

19세기 네델란드에 흉년이 거듭되면서 미국 이민이 급증하였는데, 국가로부터 신앙적 핍박을 받던 분리교회 교인들이 그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들이 네델란드에서 신칼빈주의 운동에 참여한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을 통하여 이 운동이 미국에 이식되었다. 그들은 주로 미시간에 정착하여 기독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를 형성하였으며, 1876년에 그랜드 래피스에 설립한 칼빈대학과 신학교가 미국 신칼빈주의 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다. 칼빈대학은 4천여명의 학생을 가진 인문대학으로서 네델란드에서 자유대학교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신앙과 학문의 결합(integration)을 추구하는 기독교학문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기독교대학들의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Alvin Palntinga, Nicholas Wolterstorff, George M. Marsden교수는 미국 지성계의 정상이 되었으며, 수많은 졸업생들이 유능한 학자가 되어 미국 전역에서 기독교학문을 확산하는 교수들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 운동은 기독교대학을 중시하여 미국과 카나다에 도르트대학, 트리니티 기독교대학, 킹스대학, 리딤머대학, 기독교학문연구원(ICS) 등 많은 기독교 고등교육기관들을 설립하여 신칼빈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개혁파 고등교육기관 연합회(ARIHE)를 결성하였다. 나아가, 이와 같은 기독교대학운동에 영향을 받은 세계의 대학지도자들이 최근에 기독교 고등교육 진흥 세계 연합회(IAPCHE)를 결성하였는데, 30여국에서 참여하여 신칼빈주의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이 운동은 교육을 중시하여 수많은 기독교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 세계관과 인생관을 확립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신칼빈주의 운동은 화란계 교회의 범위를 넘어서 크게 확대되었다. 20세기 중엽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근본주의를 대치하는 복음주의(Evangelicalism)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사회참여와 기독교지성의 모델로 신칼빈주의가 채용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운동의 신학적 중심지인 풀러신학교가 신칼빈주의에 영향을 받은 Carl F. H. Henry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 후에도 James Daane과 Lewis Smedes와 같은 신칼빈주의 지도자들이 영향력 있는 교수가 되었고, 칼빈대학의 Richard J. Mouw가 총장에 취임함으로서 이 운동이 복음주의의 사상과 방법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외에도, 칼 헨리가 창간한 Christianity Today지와 IVF가 이 운동을 확산하는 기관이 되었으며, 화란계 어드만출판사와 Reformed Journal은 신칼빈주의 운동의 중심적 언론출판기관이다. 특히, 하바드와 프린스톤이 세속화됨에 따라 휘튼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100여개 기독교대학들이 신앙과 학문의 결합모델을 칼빈대학과 자유대학교에서 발견함으로서 신칼빈주의 운동은 21세기에도 크게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같이 칼빈대학뿐 아니라 수많은 기독교대학에서 신칼빈주의 운동에 감동받고 인생관을 확립한 졸업생들이 미국사회의 각계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면서 반기독교적 학문을 비판하고 학문의 복음화와 그를 통한 사회 변혁을 위해 힘쓰고 있다.

한국의 신칼빈주의 운동

네델란드의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1972년 귀국한 손봉호박사에 의해 한국에서 신칼빈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카이퍼와 같은 열정과 설득력으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위해 지난 30년동안 외길을 걸어왔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창설하고 앞장 서 전개함으로서 일반 은총에 근거하여 윤리적인 한국 사회의 건설과 기독교 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정치 참여와 사회 계몽을 통하여 신의 뜻이 실현되는 한국 사회를 도모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많은 후진들을 양성하여 신칼빈주의 운동이 21세기에도 계속되도록 만들었다. 1970년대 총신대에서 기독교철학 강의를 통하여 많은 참여자들을 일으켰는데, 특히 문화운동과 세계관 운동에 앞장선 신국원교수와 이승구교수가 대표적이다. 또한 대학원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교학문연구회를 조직하여 신앙과 학문의 결합을 지도하였으며, 여기서 수 많은 신칼빈주의적 학자들이 배출되어 전국 대학들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간사들과 열정적인 회원들도 자연히 신칼빈주의 정신과 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 외에, 미국에 유학하여 기독교학문에 영향받은 소장 학자들이 귀국한 후 신칼빈주의 모델의 진정한 기독교대학 설립을 추진하는 모임을 결성하였으며, 자기가 속한 대학에서 선교적 열정으로 기독교학문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IVF를 비롯한 대학생 선교단체들과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신칼빈주의 운동에 영향 받았다. 비록 한국에서는 신칼빈주의라는 이름이 자주 사용되지 않지만, 많은 기독교 지성인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자는 운동에 참여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 영역에서 선교적 사명을 실천하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