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종식
제임스 패커, 청교도 사상 p.169-204
1. 복음의 회복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종식”은 보편적 구속 교리가 비성경적이고 복음을 훼손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설계된 논쟁적 저술이다. 오웬의 논문은 복음의 회복에 대한 우리의 노력을 도와줄 것이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의 실패와 그 원인
오늘날의 복음주의가 혼란과 불안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의 근원은 우리가 성경적 복음에 대한 파악력을 상실함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 세기동안 복음을 대용품에 헐값으로 팔아왔다. 이 대용품은 사소한 점에 있어서 상당히 유사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이 새로운 복음은 깊은 경외심과 회개, 겸손과 예배정신 교회의 관심을 갖는 심령의 인간을 만들지 못했다. 왜 그럴까?
새 복음은 그 관심이 인간에게 있다.
이는 이 새로운 복음이 사람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옛 복음도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는 부수적인 것이었고 옛 복음은 본질적으로 긍휼과 심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포였으며 인간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라는 부르심이었다.
관심의 변화는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관심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로 이어졌다. 왜냐하면 새 복음은 ‘편리성’에 의해 성경의 메시지를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선천적인 신앙 불능, 하나님의 선택과 같은 주제들은 죄인들을 절망에 빠지게 한다는 이유로 설교되지 않는다. 전체의 진리로 가장하는 반쪽 자리의 진리는 완전한 비진리가 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나 회개하고 믿는 자를 받아들이시는 일반적인 의향으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성부와 성자께서는 우리가 허락할 때까지 우리의 마음 문 앞에서 무기력하게 기다리시고 계신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진정한 성경적 복음을 회복하여 설교를 성경적 복음과 일치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그리고 구속에 대한 오웬의 논문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이 점이다.
2.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누군가 말한다. “오웬이 하고자하는 바는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강조점중 하나인 제한속죄를 변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복음을 회복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칼빈주의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칼빈주의가 무엇인가를 밝힘으로 이 질문의 편견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주의와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강조점에 대한 역사ㆍ신학적인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칼빈주의 5대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의 다섯 가지 이의의 항변서에 대한 답변일 뿐이다.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강조점’은 17세기 초의 ‘벨기에의 반(半)펠라기안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다섯 가지 항의에 대한 칼빈주의의 답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신학은 첫째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의지 혹은 책임과 양립할 수 없으며 둘째로 능력은 의무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로부터 이들은 두 가지 추론을 이끌어 내었는데 첫째 성경이 믿음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인간의 행동으로 간주하므로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기인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행사된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이 믿음을,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의 의무로 간주하므로 믿는 능력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경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1) 부분적 타락 (2) 조건적 선택 (3) 보편 속죄 (4) 가항적 은혜 (5) 타락 가능성
이에 도르트 종교회의는 1618년 이 신학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위해 소집되었고 ‘칼빈주의의 다섯가지 강조점들’은 그 신학에 반대하는 주장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강조점은 매우 다른 원리 즉 ‘구원이 주님께 속한다.’는 성격적 원리에 따르며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reservation of the saint)
성경의 복음에 대한 두 해석은 분명히 반대 입장에 서있다. 하나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선언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는 믿음을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로 간주하는 반면 하나는 구원에 대한 인간의 기여로 간주한다.
칼빈주의 5대교리와 칼빈주의는 동등하지 않다.
하지만 이 다섯 가지 강조점을 칼빈주의와 동등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첫째로 칼빈주의는 이 다섯가지 강조점보다 훨씬 광대하다. 이는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시간에서 유래한 세계관이며, 성경의 시각에서 관찰되는 성경 신학이다. 다섯가지 강조점은 단지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에 있어 주권적임을 단언하지만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있어 주권적이심을 단언한다.
둘째로 다섯가지 강조점은 칼빈주의의 구원론을 부정적이며 논쟁적인 형태로 제시하는 반면에 칼빈주의는 본질적으로 해석적이며 목회적이며 건설적이다.
셋째로 칼빈주의의 구원론을 다섯 개의 주장형태로 설명하는 이 행동 자체는 이 주제에 대한 칼빈주의의 본질적인 특성을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 다섯가지 주장은 따로따로 진술되었으나 사실상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칼빈주의 구원론의 강조점은 단 한가지 즉,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로 인한 사망으로부터 영광의 생명으로 인도하심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행하신다는 것이다.
넷째로 다섯 가지 주장의 문구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구원론 간의 깊은 차이를 애매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이 문구에서 강조는 형용사에 주어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에 대한 논쟁이 단지 형용사에 관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선택이 ‘조건적’인지 ‘무조건적’인지, 속죄가 ‘제한적’인지 ‘보편적’인지) 하지만 실제의 문제는 적절한 형용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명사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1) 하나님의 선택 활동을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자녀의 신분과 영광으로 받아들이려는 결심으로 정의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믿게 하시겠다고 결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선택을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어떤 사람이 죄에서 구원 받고 영광으로 인도되고 그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구속되고 성령의 효과적인 소명에 의해 믿음을 부여 받도록 선택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나는 나의 선택을 나의 믿음의 덕택으로 돌린다.’라고 말하는 반면 칼빈주의자들은 ‘나는 나의 믿음을 나의 선택의 덕택으로 돌린다.’라고 말한다.
(2) 그리스도의 구속역사를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믿는 것을 조건으로 열망하시는 용서를 베푸시는 길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을 제거하심으로 정의한다.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의 믿음을 행사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뿐 그 이상 이룬 것이 없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구속을 그리스도께서 특정한 죄인을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견디신 것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 죄인이 화목되고, 죄책이 사라지며, 생명의 권리가 보장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단지 ‘갈보리가 없었다면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갈보리에서 나의 구원을 얻으셨다.’고 말할 것이다.
(3) 성령의 내적 은사의 선물을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도덕적 권고’ 즉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주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는 당연히 누구든지 믿음의 응답을 할 것이라는 보증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이 은사를 단지 하나님의 인간 안에서 조명하시는 역사일 뿐만 아니라 중생케 하시는 역사이시기도 하다고 정의한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구속, 소명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주장이 성경의 의미의 핵심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적 의미의 선택, 구속, 소명에 대한 주장은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으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를 위해서도 죽으신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는 아무도 고무시키시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자체는 비성경적이며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다섯가지 강조점의 문구가 불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문구자체가 칼빈주의가 알미니안 주의의 부분적 수정이라는 인상을 더한다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자연스럽고’ 편견이 없고 순수한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이고 칼빈주의는 성경을 본문 자체가 나타내지 않는 조직적 구조로 억지로 주물러 만들어낸 사상으로 분명한 의미를 왜곡하고 균형을 망치는 논리학의 소산이라는 가설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알미니안주의는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며 영혼의 지배자’라는 인간의 타락한 생각에 의해 성경을 왜곡시킨다는 면에 있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 성경을 인간이 생각해야하는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칼빈주의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를 자랑하는 보편교회의 신앙고백의 일부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의 성취가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무력한 소원에 불과하다고 얼버무리지 않는다. 이들은 성경이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을 수도 있는 자들을 위한 구원의 가능성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된 백성을 위한 구원을 얻으신 것이다.
사실 이 구원론을 칼빈주의라 부르는 것은 여러 세기의 편견이 만들어낸 ‘불쾌한 명칭’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는 칼빈과 도르트 신학자들의 특색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와 보편적 기독교 신앙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3. 속죄의 범위
오웬은 제한 속죄뿐 아니라 복음을 변호하였다.
사실 오웬이 원한 것은 속죄의 범위를 변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역사에 어떤 목표와 성취를 돌리는가?’ 이것이 오웬이 밝히기 원하는 것이었다.
보편 속죄에 대한 오웬의 평가
오웬은 네 권의 책을 통해 보편적 속죄에 대한 복음적 평가를 제시하였다. 보편 속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1)하나님의 사랑을 무기력한 소원으로 축소시키고, 2) 구원의 은혜 섭리를 신적 실책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또한 3) 그리스도를 헛되이 죽은 것이 되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싸구려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보편 속죄는 4)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나의 영원한 구원의 충분한 근거라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믿음에 격려를 더하여주기는커녕 성경적 보장의 근거를 파괴한다.
이와 같이 이 견해는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대속에 돌리는 영광을 빼앗고, 성경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명백하게 말하는 곳에 자기 구원이라는 반성경적 원리를 도입한다. 또한 보편 속죄는 구원의 능력을 상실하였고 우리 스스로 자신을 구하라고 버려둔다.
그러나 반대로 오웬이 제시하는 교리는 성경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모든 소망과 보장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4. 현재와 궁극적 구원
역사적 칼빈주의가 복음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수단이다.
우리의 질문자는 ‘당신이 말하는 복음의 회복은 우리 모두가 칼빈주의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가?’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칼빈주의자로 칭하는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성경적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복음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 칼빈주의가 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알미니안주의적 보편 속죄로 인해 복음의 영광이 훼손되었다.
우리는 앞에서 현대 복음주의가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십자가는 우리를 속량하기에 부족한 보상물이 되었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에 부족한 구주한 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도움 없이는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무기력한 애정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믿음을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해 필요로 하는 인간의 도움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믿음과 불신앙이 책임져야할 행동이라면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알미니안주의적 관념에 붙잡혀있다. 그 결과 구원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하나님께 드려야할 영광을 빼앗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앎으로 얻을 수 있는 많은 위로를 빼앗는다.
그리고 우리의 그릇된 선입견은 우리가 의도하는 바의 정반대를 말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찬미하기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선언한다. 그 다음에 보편구원설을 피하기 위해 무엇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설명해야한다. 즉 실제로 우리를 구원시키는 요소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다.
우리는 칼빈주의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속죄를 제한시켰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하고자 의도된 모든 자를 구원한다고 단언하는 반면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들 중 누구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 그들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위해 이를 하찮은 일로 만들기까지 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고 손상시켰다.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가 보잘것없는 경건과 겸손 그리고 자기 신뢰를 낳고, 참된 회개의 열매가 그처럼 부족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웬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복음을 가르쳐줄 것이다.
우리가 오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는 우리에게 성경적인 복음을 가르쳐줄 것이다.
첫째로 그는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하시는 주권의 구주 앞에 경배하고 그가 위하여 죽으신 모든 자가 영광에 이른다는 것을 확실하게 한 대속의 죽으심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게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그의 말을 듣는다면 오웬은 우리가 자유롭게 성경적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들 각각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이야기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이 모두 무오하게 구원을 받을 것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사실을 선포하는 일이다.
(1)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 행할 수 있는 것이 없다.
(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한 완전한 구주이시다.
(3) 성부와 성자께서는 자신의 죄임 됨을 알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를 아무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4)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믿음을 의무 사항으로 만드셨다. 복음을 듣는 모든 자는 복음의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영혼을 의뢰함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속죄를 통해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는 모든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기꺼이 구원하실 수 있다.
즉 다른 말로 설교자의 과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하는 것은 설교자의 말할 것도 아니며 듣는 자의 질문 사항도 아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 개념을 정리하여 설명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오웬의 옛 복음이 새 복음 못지않게 풍성하고 넉넉한 구원의 제안을 담고 있다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옛 복음은 충분한 믿음의 근거들과 믿음에 대한 설득력 있는 동기를 제시한다. 또한 옛 복음은 그리스도를 인간의 불신앙에 의해 좌절되는 헛되이 애쓰는 구주로 나타내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는 감상적인 호소를 멋대로 하지 않는다. 옛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새 복음의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인간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옛 복음의 초청은 보편적이다.
그러면 옛 복음의 설교자가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초청함에 있어 억압적이거나 제한적일까? 그렇지 않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인간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창조주께서 그들의 얼마를 구원하기 위해 택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거룩하신 창조주의 아들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당하시고 지옥을 경험하셨다는 것과 거룩한 창조주께서 자신의 보좌에서 복음의 말씀으로 불경건한 자들을 딱하게 생각하시고 연민의 초청의 형태로 회개와 믿음을 명하신다는 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러므로 옛 복음의 설교자 새 복음의 설교자보다 더 많이 그리스도를 제안할 수 있는 입장에 서있다. 왜냐하면 죄인들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의 필연적인 본성으로 생각하는 새 복음의 설교자들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주권적이며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하는 옛 복음의 설교자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고 제안하는 것이 더 놀라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주 그리스도, 전능의 왕께서 계속적으로 범죄한 인간들을 부르시는 관대한 초청일 것이다. 이 초청은 보편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초청들을 죄인들에게 전하신다. 여기에 속죄의 범위에 대한 의문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달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조건없이 죄인들을 자신에게로 초청하신다는 것이다.
옛 복음은 새 복음이 상실한 가치를 보호한다.
둘째로 옛 복음은 새 복음이 상실한 가치를 보호한다. 새 복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한 다음에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의 실현은 인간에게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이 입장은 두 가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첫째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의 의미를 오해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능자의 주권적 초청이 연약한 인물의 무력한 희망과 애처로운 간청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부정하고, 우리를 우리 자신의 운명의 주인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창조주와 인간의 신앙관계를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 복음은 매우 다르게 말하며 다른 경향을 갖고 있다. 옛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함에 있어 중생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옛 복음은 그리스도를 회심의 창시자이며 제 1원인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옛 복음은 설교자가 ‘그리스도를 결정하라.’는 현대의 어구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 어구는 어떤 사람을 선출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즉 후보자는 선거에 나서는 것 외에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투표는 투표자의 독자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행동을 말한다. 또한 이 어구는 그리스도께 나아감에 있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애매하게 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옛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옛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그리스도를 죄인을 위해 죽으신 분으로 아는 것이며, 모든 자기 신뢰를 버리고 영서와 평안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성령에 의해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자신의 타고난 하나님께 대한 적의와 반항을 그리스도의 뜻에 대해 감사함으로 복종하는 영으로 바꾸는 것이다.
“만일 나에게 이 이들을 행할 능력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하는가.”라는 더욱 발전된 질문에 옛 복음은 이렇게 답한다. 네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께 의뢰하고 그리스도께 부르짖으라. 네 죄와 완악함과 불신앙을 고백하라. 그리고 그의 긍휼을 의지하라. 네 안에서 참된 회개와 확고한 믿음을 이룰 새 심령을 주실 것을 그리스도께 청하라. 그리고 이 일에 절대 빗나가지 않도록 청하고, 철저히 돌이키고 신뢰하기 위해 은혜를 기도로 구하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네게 다가오시기를 기대하며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라.
오웬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옛 복음이다. 즉 믿음과 구원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안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복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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