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n>칼빈 신학의 기본구도
김재성 교수(전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하면서 오늘의 신앙인으로서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세속화와 각종 재해로 인해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너무나 많은 손상을 입고 있다. 루터의 신학은 구원론의 핵심인 십자가의 신앙으로 돌아가게 했고, 또한 독신주의를 극복하고 결혼과 가정을 회복시켰다. 칼빈의 신학은 성경적 교리체계를 정립하여 교회를 회복시켰고, 고해성사의 허구를 밝혀주었으며, 성만찬의 의미를 역동적으로 살려냈다.
신학이란 매우 소중한 신앙의 기본지침을 성경에서 파악하여 체계화 한 것이다. 사도 바울 이후로 최고의 신학자로 추앙을 받고 있으면서, 초대교부 시대의 신학을 총 정리한 어거스틴은 마치 백사장에서 몇 개의 조약돌을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였다. 참으로, 신학의 세계와 신학의 범위는 광범위한 것이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배움을 게을리 할 수 없다.
마틴 루터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신학의 갱신과 변혁이 초래되었고, 오늘까지 그러한 정신이 계승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신학의 기본 골격을 세우기 위해서 특히 기독교 진리를 가장 체계적으로 잘 요약한 신학자로 손꼽히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종합적으로 간략히 요약하여 보고자 한다.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신학을 접하면서, 비로소 기독교가 주장하는 진리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늠하게 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신학의 출발점에서는 칼빈에 의해서 체계화된 신학을 이해하는 것이 큰 도움을 준다. 사실 지난 오백여 년 동안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과 신자들은 크리스챤으로서 본질적으로 알아야 할 교리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칼빈으로부터 많은 것을 깨닫고 터득하게 되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기본 체계가 무엇이며, 학문적으로 잘 정리된 신학적 진술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은 ‘경건과 학문’이 잘 조화되어 있다. 신학이란 신앙의 밑그림으로서 작용하는 것일진대, 신앙이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실질적이며, 통합된 인식을 갖게 도움을 준다. 칼빈의 기본적인 신학을 담고 있는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그의 사상의 기초적인 안목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서 우선 큰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세 가지 핵심 사항을 간추려 보고자 한다.
1. 참된 지식이란 무엇이냐?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이중적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
칼빈은 매우 독특하게 인간이 가진 참된 지식이란 무엇이냐를 설명하면서 그의 신학적 기초를 설정하였다. 필자가 후에 칼빈을 연구하면서 더욱 더 잘 알게 된 것이지만, 이것은 바로 그가 성경자체에서 파악한 진리에 대한 진술 방법이었다. 참된 지혜에 관한 논지를 펴면서 첫 줄에서 다음과 같이 칼빈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가운데서, 가장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그러나 아주 깊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것에서부터 다른 것이 나왔는지 명백히 구분하는 일이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그 누구도 먼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지 아니하고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Institutes, I.i.1.)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명상과 인식을 가져야만 하고, 그분으로부터 내려오는 지식으로 인간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우리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바르다고 주장하며, 지혜롭고 건전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런 자긍심과 긍지를 속에다 품고 있는 한 자신을 바르게 분석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체 평가를 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누구도 자신의 의로움과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정당하게 인간을 평가하고 알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인간 밖에서 인간을 설명하는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로부터 오는 지식에 근거하여 인간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을 판다하는 절대적 기준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인간의 부정함, 어리석음, 잔꾀를 부리는 것, 부정부패를 알게 되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칼빈의 결속된 체계라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먼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들여다보아야 하고, 인간을 알려면 그의 창조주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역사적으로 볼 때에 과연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칼빈이 얻어왔을까는 매우 흥미로운 추적이 될 것이다. 아마도 어거스틴에게서 배워 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며, 내 영혼에 대해서도 알기를 원합니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고 토로하였다 (Soliloquies, I.ii.7.)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기술할 때에 어거스틴을 많이 참고한 것이 틀림이 없지만, 첫 문장과 비슷한 진술은 에라스무스, 쯔빙글리의 글에도 들어있다. 어쨌든 이런 구조는 매우 기본적인 신학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칼빈이 함축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너무나 선명하고 광범위하다.
(1) 인간의 지식은 총체적이다
칼빈은 앞에서 인간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지식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고,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지식은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들 두 가지 지식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적이다. 우리는 그 중에 한가지만을 가지고서는 총체적으로 전부를 이해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가 부패한 가운데 있으면 다른 나머지 부분도 역시 타락한 상태로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리한 사람들만 터득하는 원리가 아니라, 인식 (cognition) 혹은 실존적 이해 (existential apprehension)라고 풀이되어진다.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인정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창조주로서 하나님과 구속주로서의 하나님, ‘이중적’으로 되어 있는 선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제적이며 실천적 지혜이다
우리의 믿음은 머리로 이해되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순종하면서 얻는 지식이요, 신뢰하므로 갖게 되는 지식이다.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적이요, 실제적인 지식으로 인간의 마음에 남게 되어진다. 인간이 자신을 아는 지식을 파헤칠 때에 바로 그 자신과 뗄레야 뗄 수 없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접근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로 있느냐는 식의 의문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탐구를 하려는 것 (curious inquires)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지식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게으르고도 무익한 지식일 뿐이다. (Institutes, I.v.9; I.x.2, I.ii.2).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지식은 우리를 위해서 계시는 분으로서 아는 것이요,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접근과 관점을 가지고 이 지식을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되어질 때 결국 성경적인 교리를 얻게 되는 데, 인생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우리들이 마땅히 드릴 예배와 우리들의 충성(allegiance)에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오직 예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르게 가질 수 있다 (Institutes, I.ii.1). 예배야 말로 인간이 동물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I.iv.3). 물론 인간이 이성을 가진 점이 동물과 다른 점이라고 칼빈이 주장한 적도 있다 (II.ii.12, 17).
내가 이해하기로는,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단순히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분이 저기에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어떤 혜택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가를 확고히 파악하는 것이며, 또한 합당하게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과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어떤 유익들이 있는가 등을 아는 것이다. 진정코, 합당하게 말하거니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곳에는 참된 종교나 경건도 없는 것이다. (Institutes, I.ii.1)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과 ‘혜택’을 주며,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것에 따라야만 비로소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3)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다
칼빈의 시대에 널리 알려진 기독교 지식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르는 스콜라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계시와 이성을 분리시키는 데서 근본적으로 출발하였다. 철학적인 수학을 통해서 이성을 따로 공부하고 배운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계시라는 것을 배우게 되니, 각각 따로 따로 지식체계가 세워져 있다는 기본 전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 생각하는 기능, 이성이 있는데 이것을 차분히 들여다 보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이성도 계시의 일부분이요, 자연만물 속에서도 계시가 들어있다.
칼빈은 이성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있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마음 속에, 그리고 참으로 자연적인 본성에 의해서, 우리는 신에 대한 인식이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억을 항상 새롭게 하여 주시며, 지속해서 새로운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시고 계신다 (Institutes, I.iii.1)
그 다음에 눈을 열어서 이 세상을 보자. 모든 사람들은 세상 자연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는 계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편 19편 1절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다윗은 노래하였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행복에 접근하는 데서 제외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종교의 씨앗을 인간의 마음 속에다 심어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셨고 날마다 우주의 모든 창조물들 속에서도 자신을 날마다 드러내 보여주신다. 그 결과로 인간은 눈을 뜨면 하나님을 보아야만 되도록 강요당하고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물론, 그분의 본질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분의 신적인 성격은 모든 인간의 이해력에서 훨씬 초월하여 있으시다. 그러나, 그분의 개별적인 역사하심들에 의해서 자신의 영광의 표시들을 실수 없이 새겨놓으시며, 이는 매우 분명하고 또한 탁월하여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도 무지해서 몰랐다는 변명을 할 수 없도록 하신다. (Institutes, I.v.1)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요, 증거를 대려고 힘든 노력을 기울여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으며, 고도의 학문도 아니다. 반면에 스콜라신학자 아퀴나스와는 달리, 칼빈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만물이 모두 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분명히 계시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로마서 1장 18절로부터 25절까지를 근거로 하여서 풀이한 것이다. 따라서 어려운 생각을 하는 철학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너무 게으르고, 너무나 바쁘고, 너무나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더 사악하다는 것이다.
2. 자연적 이성과 죄의 영향
칼빈의 신학체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강조 가운데 하나는 인간에 대한 성경적 분석이다. 결국 정확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실천적 지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1) 이성의 무능력과 일반 종교의 허구성
그런데,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결코 경건하지도 않으며 진실하지도 않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계시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런 체험과 경험을 무시해 버리거나, 무지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 백 명 중에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불행은 죄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나, 결국 아무도 하나님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무신론자들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Instittues, I.iii.3). 간혹 자신들은 신의 존재를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거의 다 종교성을 갖고 있고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들이 가진 종교가 거짓 종교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제공해 주신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추측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하나님을 상상해 버린다 (Institutes, I.iv.1) 그래서 사람들은 우상 혹은 미신을 숭배하게 되고 만다. 심지어는 전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해버리는 데까지 나가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2) 죄의 영향
인간의 죄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생각과 합당한 판단을 모두 다 흐려놓았다. 칼빈은 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들은 마치 캄캄한 밤에 운동장에 서성이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헤매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주위에서 비쳐지는 조명을 통해서 비쳐진 것만을 알게 될 뿐이다. 빛이 있는 것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어두움 속에서 비쳐지는 빛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만일 빛이 사라져 버린다면, 길도 찾아낼 수 없고,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파괴하여 버린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대로 즉시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만들며,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하나님을 멋대로 꾸며놓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히 보여서 알려져 있기에 자연적으로 태어나서 본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왜곡하고 있다.
죄의 영향으로 혼란과 혼돈 속에 빠져있다. 칼빈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혼돈속에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미로에 빠져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엄청난 잡신들의 무리 속으로 던져지는 것과 같으며, 그 동안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헛되이 고안해서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라고 발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Institutes, I.v.12) 종교적인 원리가 혼돈을 일으키고 있는데도, 인간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신들에게 예배하는 혼란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인간은 죄의 영향 하에서 희망이 없어져 버렸다.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조명을 숱하게 켜 놓으시고, 매일같이 보여주고 계시는 데도 인간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무시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고, 창조주의 솜씨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작은 불빛 가지고만 좋아하기 때문에 바른 길로 접어들지 못하고 있다 (Institutes, I.vi.14).을 근거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동이 빛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살아간 이후에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 안에 주어진 계시를 무디어지게 만든 자신들의 허물과 실수임을 인정하고 말 것이다. 자연계시는 우리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도록 하는데 효과를 발휘할 것이지만, 죄로 인하여서 타락한 까닭에 거듭나기 전 까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
3. 성경과 성령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과 창조와 섭리 등 모든 진리를 가르침 받을 수 있다. 성경을 떠나서 다른 어디에서도 바르게 볼 수 있는 ‘안경’ 역할을 하는 지침서를 발견할 수 없다. 성경이 우리의 눈을 교정해 주기 때문에, 자연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깨닫게 된다. 자연과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지금도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사람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영적인 생명력이 죄악으로 인해서 부패하였기에 효과를 나타내지 못한다. 그래서 기록된 계시로서 사람의 문자를 통해서 계시된 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우리 마음에 혼란되게 산재해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종합하여 우리의 무지를 분해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서, 교회를 가르치고자 하는 성경이 없이는 인간은 하나님과 인류 구원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다. 성경은 또한 안경과 같이 사물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도록 우리의 영적인 시력을 보충해주고 교정도 해주는 역할을 한다. 성경에 기록된 바에 의지해서 인간은 우주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 속에 반영된 하나님의 형상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성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듣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아니다.
(1) 성경은 성령의 감동만이 증거이다
성경을 과학적인 자료를 통해서 입증하려고 하지 말라. 성경은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자들의 탐구대상이지만, 그 학자들에 의해서 진리라는 증거를 얻은 책이 아니다. 성경 안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경이 영감되어졌다는 합리적인 근거를 대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성령의 증거가 모든 이성적 증거보다 월등하다고 답변하련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증거하기에 적합한 것과 같이,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도 역시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인하여서 인을 쳐주기 이전에는 그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서 받아들여지지가 않기 때문이다.(Institutes, I.vii.4)
(2) 성령의 도움으로 성경을 이해한다
성령은 성경에서 가르쳐진 진리들을 믿는 자들에게 확신하게 (convinces)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그 의미와 내용을 조명하여 (illumines) 주신다. 성경을 다른 외적 근거를 사용해서 입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불신자들과 논쟁할 필요가 없다. 물론 다른 증거들을 동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 확신의 증거물이 될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감동을 주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성령의 위치와 사역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위대한 신학체계를 새롭게 설정하였다. 그동안 교황, 교회, 성직자들이 장악하던 신비로운 역할을 성령이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구원의 적용을 교회에서 성직자들에 의해서 실시되는 ‘성례’중심으로 묶어놓았던 것을 다시 성령의 사역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3) 성경은 성령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성령은 성경없이 말씀하지 않는다(No Bible without the Spirit, No Spirit without the Bible)
성경의 확실성과 성령의 살아있는 역동성이 함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I.ix.3)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 입각하여야 하고, 또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야 한다. 보혜사 성령의 역할과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요한복음 14장 26절과 15장 26절에서 철저하게 설명하신 바와 같이 메시야 중심적으로 되어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증거하는 이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따로 가진 것이 아니다. 성령의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맺는 말
오늘의 시대는 신학의 부재, 혹은 신학의 위기라고 까지 말할 정도로 교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고, 신학자들이 애써서 저술한 책들은 인기가 없다. 모든 사람이 듣기 쉽고, 달콤한 이야기 중심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좋아한다. 심지어 교회에서 마저도 세상적인 성공담을 듣기 원하고, 재미있는 유희를 더 좋아한다. 딱딱하고 소화하기 힘든 주제들은 전혀 들으려 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신학의 빈곤과 무지로 인해서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바른 원리를 놓치는 경우를 많이 보게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와 기도를 드리게 된다. 사람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될 때에, 모든 헛된 야망을 버리고 더욱 주님만 의지하게 된다. 인간의 죄성과 그 영향을 바르게 파악하게 될 때에 비로소 진리의 근거가 되는 성경을 의존하게 된다. 지금도 계시의 역사를 하고 계신 성령님의 증거에 따라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출처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글쓴이 : 하늘형상 원글보기
김재성 교수(전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하면서 오늘의 신앙인으로서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세속화와 각종 재해로 인해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너무나 많은 손상을 입고 있다. 루터의 신학은 구원론의 핵심인 십자가의 신앙으로 돌아가게 했고, 또한 독신주의를 극복하고 결혼과 가정을 회복시켰다. 칼빈의 신학은 성경적 교리체계를 정립하여 교회를 회복시켰고, 고해성사의 허구를 밝혀주었으며, 성만찬의 의미를 역동적으로 살려냈다.
신학이란 매우 소중한 신앙의 기본지침을 성경에서 파악하여 체계화 한 것이다. 사도 바울 이후로 최고의 신학자로 추앙을 받고 있으면서, 초대교부 시대의 신학을 총 정리한 어거스틴은 마치 백사장에서 몇 개의 조약돌을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였다. 참으로, 신학의 세계와 신학의 범위는 광범위한 것이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배움을 게을리 할 수 없다.
마틴 루터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신학의 갱신과 변혁이 초래되었고, 오늘까지 그러한 정신이 계승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신학의 기본 골격을 세우기 위해서 특히 기독교 진리를 가장 체계적으로 잘 요약한 신학자로 손꼽히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종합적으로 간략히 요약하여 보고자 한다.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신학을 접하면서, 비로소 기독교가 주장하는 진리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늠하게 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신학의 출발점에서는 칼빈에 의해서 체계화된 신학을 이해하는 것이 큰 도움을 준다. 사실 지난 오백여 년 동안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과 신자들은 크리스챤으로서 본질적으로 알아야 할 교리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칼빈으로부터 많은 것을 깨닫고 터득하게 되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기본 체계가 무엇이며, 학문적으로 잘 정리된 신학적 진술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은 ‘경건과 학문’이 잘 조화되어 있다. 신학이란 신앙의 밑그림으로서 작용하는 것일진대, 신앙이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실질적이며, 통합된 인식을 갖게 도움을 준다. 칼빈의 기본적인 신학을 담고 있는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그의 사상의 기초적인 안목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서 우선 큰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세 가지 핵심 사항을 간추려 보고자 한다.
1. 참된 지식이란 무엇이냐?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이중적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
칼빈은 매우 독특하게 인간이 가진 참된 지식이란 무엇이냐를 설명하면서 그의 신학적 기초를 설정하였다. 필자가 후에 칼빈을 연구하면서 더욱 더 잘 알게 된 것이지만, 이것은 바로 그가 성경자체에서 파악한 진리에 대한 진술 방법이었다. 참된 지혜에 관한 논지를 펴면서 첫 줄에서 다음과 같이 칼빈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가운데서, 가장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그러나 아주 깊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것에서부터 다른 것이 나왔는지 명백히 구분하는 일이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그 누구도 먼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지 아니하고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Institutes, I.i.1.)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명상과 인식을 가져야만 하고, 그분으로부터 내려오는 지식으로 인간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우리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바르다고 주장하며, 지혜롭고 건전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런 자긍심과 긍지를 속에다 품고 있는 한 자신을 바르게 분석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체 평가를 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누구도 자신의 의로움과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정당하게 인간을 평가하고 알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인간 밖에서 인간을 설명하는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로부터 오는 지식에 근거하여 인간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을 판다하는 절대적 기준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인간의 부정함, 어리석음, 잔꾀를 부리는 것, 부정부패를 알게 되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칼빈의 결속된 체계라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먼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들여다보아야 하고, 인간을 알려면 그의 창조주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역사적으로 볼 때에 과연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칼빈이 얻어왔을까는 매우 흥미로운 추적이 될 것이다. 아마도 어거스틴에게서 배워 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며, 내 영혼에 대해서도 알기를 원합니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고 토로하였다 (Soliloquies, I.ii.7.)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기술할 때에 어거스틴을 많이 참고한 것이 틀림이 없지만, 첫 문장과 비슷한 진술은 에라스무스, 쯔빙글리의 글에도 들어있다. 어쨌든 이런 구조는 매우 기본적인 신학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칼빈이 함축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너무나 선명하고 광범위하다.
(1) 인간의 지식은 총체적이다
칼빈은 앞에서 인간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지식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고,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지식은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들 두 가지 지식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적이다. 우리는 그 중에 한가지만을 가지고서는 총체적으로 전부를 이해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가 부패한 가운데 있으면 다른 나머지 부분도 역시 타락한 상태로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리한 사람들만 터득하는 원리가 아니라, 인식 (cognition) 혹은 실존적 이해 (existential apprehension)라고 풀이되어진다.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인정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창조주로서 하나님과 구속주로서의 하나님, ‘이중적’으로 되어 있는 선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제적이며 실천적 지혜이다
우리의 믿음은 머리로 이해되는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순종하면서 얻는 지식이요, 신뢰하므로 갖게 되는 지식이다.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적이요, 실제적인 지식으로 인간의 마음에 남게 되어진다. 인간이 자신을 아는 지식을 파헤칠 때에 바로 그 자신과 뗄레야 뗄 수 없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접근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로 있느냐는 식의 의문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탐구를 하려는 것 (curious inquires)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지식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게으르고도 무익한 지식일 뿐이다. (Institutes, I.v.9; I.x.2, I.ii.2).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지식은 우리를 위해서 계시는 분으로서 아는 것이요,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접근과 관점을 가지고 이 지식을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되어질 때 결국 성경적인 교리를 얻게 되는 데, 인생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우리들이 마땅히 드릴 예배와 우리들의 충성(allegiance)에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오직 예배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르게 가질 수 있다 (Institutes, I.ii.1). 예배야 말로 인간이 동물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I.iv.3). 물론 인간이 이성을 가진 점이 동물과 다른 점이라고 칼빈이 주장한 적도 있다 (II.ii.12, 17).
내가 이해하기로는,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단순히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분이 저기에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어떤 혜택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가를 확고히 파악하는 것이며, 또한 합당하게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과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어떤 유익들이 있는가 등을 아는 것이다. 진정코, 합당하게 말하거니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곳에는 참된 종교나 경건도 없는 것이다. (Institutes, I.ii.1)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과 ‘혜택’을 주며,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것에 따라야만 비로소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3)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다
칼빈의 시대에 널리 알려진 기독교 지식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르는 스콜라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계시와 이성을 분리시키는 데서 근본적으로 출발하였다. 철학적인 수학을 통해서 이성을 따로 공부하고 배운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계시라는 것을 배우게 되니, 각각 따로 따로 지식체계가 세워져 있다는 기본 전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 생각하는 기능, 이성이 있는데 이것을 차분히 들여다 보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이성도 계시의 일부분이요, 자연만물 속에서도 계시가 들어있다.
칼빈은 이성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있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마음 속에, 그리고 참으로 자연적인 본성에 의해서, 우리는 신에 대한 인식이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억을 항상 새롭게 하여 주시며, 지속해서 새로운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시고 계신다 (Institutes, I.iii.1)
그 다음에 눈을 열어서 이 세상을 보자. 모든 사람들은 세상 자연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는 계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편 19편 1절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다윗은 노래하였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행복에 접근하는 데서 제외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종교의 씨앗을 인간의 마음 속에다 심어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셨고 날마다 우주의 모든 창조물들 속에서도 자신을 날마다 드러내 보여주신다. 그 결과로 인간은 눈을 뜨면 하나님을 보아야만 되도록 강요당하고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물론, 그분의 본질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분의 신적인 성격은 모든 인간의 이해력에서 훨씬 초월하여 있으시다. 그러나, 그분의 개별적인 역사하심들에 의해서 자신의 영광의 표시들을 실수 없이 새겨놓으시며, 이는 매우 분명하고 또한 탁월하여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도 무지해서 몰랐다는 변명을 할 수 없도록 하신다. (Institutes, I.v.1)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요, 증거를 대려고 힘든 노력을 기울여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으며, 고도의 학문도 아니다. 반면에 스콜라신학자 아퀴나스와는 달리, 칼빈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만물이 모두 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분명히 계시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로마서 1장 18절로부터 25절까지를 근거로 하여서 풀이한 것이다. 따라서 어려운 생각을 하는 철학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너무 게으르고, 너무나 바쁘고, 너무나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더 사악하다는 것이다.
2. 자연적 이성과 죄의 영향
칼빈의 신학체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강조 가운데 하나는 인간에 대한 성경적 분석이다. 결국 정확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실천적 지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1) 이성의 무능력과 일반 종교의 허구성
그런데,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결코 경건하지도 않으며 진실하지도 않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계시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런 체험과 경험을 무시해 버리거나, 무지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 백 명 중에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불행은 죄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나, 결국 아무도 하나님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무신론자들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Instittues, I.iii.3). 간혹 자신들은 신의 존재를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거의 다 종교성을 갖고 있고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들이 가진 종교가 거짓 종교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제공해 주신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추측에 근거하여 제멋대로 하나님을 상상해 버린다 (Institutes, I.iv.1) 그래서 사람들은 우상 혹은 미신을 숭배하게 되고 만다. 심지어는 전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해버리는 데까지 나가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2) 죄의 영향
인간의 죄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생각과 합당한 판단을 모두 다 흐려놓았다. 칼빈은 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들은 마치 캄캄한 밤에 운동장에 서성이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헤매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주위에서 비쳐지는 조명을 통해서 비쳐진 것만을 알게 될 뿐이다. 빛이 있는 것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어두움 속에서 비쳐지는 빛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만일 빛이 사라져 버린다면, 길도 찾아낼 수 없고,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파괴하여 버린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대로 즉시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만들며,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하나님을 멋대로 꾸며놓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히 보여서 알려져 있기에 자연적으로 태어나서 본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왜곡하고 있다.
죄의 영향으로 혼란과 혼돈 속에 빠져있다. 칼빈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혼돈속에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미로에 빠져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엄청난 잡신들의 무리 속으로 던져지는 것과 같으며, 그 동안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헛되이 고안해서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라고 발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Institutes, I.v.12) 종교적인 원리가 혼돈을 일으키고 있는데도, 인간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신들에게 예배하는 혼란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인간은 죄의 영향 하에서 희망이 없어져 버렸다.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조명을 숱하게 켜 놓으시고, 매일같이 보여주고 계시는 데도 인간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무시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고, 창조주의 솜씨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작은 불빛 가지고만 좋아하기 때문에 바른 길로 접어들지 못하고 있다 (Institutes, I.vi.14).을 근거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동이 빛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살아간 이후에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 안에 주어진 계시를 무디어지게 만든 자신들의 허물과 실수임을 인정하고 말 것이다. 자연계시는 우리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도록 하는데 효과를 발휘할 것이지만, 죄로 인하여서 타락한 까닭에 거듭나기 전 까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
3. 성경과 성령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과 창조와 섭리 등 모든 진리를 가르침 받을 수 있다. 성경을 떠나서 다른 어디에서도 바르게 볼 수 있는 ‘안경’ 역할을 하는 지침서를 발견할 수 없다. 성경이 우리의 눈을 교정해 주기 때문에, 자연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깨닫게 된다. 자연과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지금도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사람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영적인 생명력이 죄악으로 인해서 부패하였기에 효과를 나타내지 못한다. 그래서 기록된 계시로서 사람의 문자를 통해서 계시된 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우리 마음에 혼란되게 산재해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종합하여 우리의 무지를 분해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서, 교회를 가르치고자 하는 성경이 없이는 인간은 하나님과 인류 구원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다. 성경은 또한 안경과 같이 사물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도록 우리의 영적인 시력을 보충해주고 교정도 해주는 역할을 한다. 성경에 기록된 바에 의지해서 인간은 우주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인간 속에 반영된 하나님의 형상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성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듣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아니다.
(1) 성경은 성령의 감동만이 증거이다
성경을 과학적인 자료를 통해서 입증하려고 하지 말라. 성경은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자들의 탐구대상이지만, 그 학자들에 의해서 진리라는 증거를 얻은 책이 아니다. 성경 안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경이 영감되어졌다는 합리적인 근거를 대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성령의 증거가 모든 이성적 증거보다 월등하다고 답변하련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증거하기에 적합한 것과 같이,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도 역시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인하여서 인을 쳐주기 이전에는 그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서 받아들여지지가 않기 때문이다.(Institutes, I.vii.4)
(2) 성령의 도움으로 성경을 이해한다
성령은 성경에서 가르쳐진 진리들을 믿는 자들에게 확신하게 (convinces)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그 의미와 내용을 조명하여 (illumines) 주신다. 성경을 다른 외적 근거를 사용해서 입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불신자들과 논쟁할 필요가 없다. 물론 다른 증거들을 동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 확신의 증거물이 될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감동을 주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성령의 위치와 사역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위대한 신학체계를 새롭게 설정하였다. 그동안 교황, 교회, 성직자들이 장악하던 신비로운 역할을 성령이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구원의 적용을 교회에서 성직자들에 의해서 실시되는 ‘성례’중심으로 묶어놓았던 것을 다시 성령의 사역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3) 성경은 성령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성령은 성경없이 말씀하지 않는다(No Bible without the Spirit, No Spirit without the Bible)
성경의 확실성과 성령의 살아있는 역동성이 함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I.ix.3)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 입각하여야 하고, 또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야 한다. 보혜사 성령의 역할과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요한복음 14장 26절과 15장 26절에서 철저하게 설명하신 바와 같이 메시야 중심적으로 되어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증거하는 이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따로 가진 것이 아니다. 성령의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맺는 말
오늘의 시대는 신학의 부재, 혹은 신학의 위기라고 까지 말할 정도로 교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고, 신학자들이 애써서 저술한 책들은 인기가 없다. 모든 사람이 듣기 쉽고, 달콤한 이야기 중심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좋아한다. 심지어 교회에서 마저도 세상적인 성공담을 듣기 원하고, 재미있는 유희를 더 좋아한다. 딱딱하고 소화하기 힘든 주제들은 전혀 들으려 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신학의 빈곤과 무지로 인해서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바른 원리를 놓치는 경우를 많이 보게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와 기도를 드리게 된다. 사람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될 때에, 모든 헛된 야망을 버리고 더욱 주님만 의지하게 된다. 인간의 죄성과 그 영향을 바르게 파악하게 될 때에 비로소 진리의 근거가 되는 성경을 의존하게 된다. 지금도 계시의 역사를 하고 계신 성령님의 증거에 따라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출처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글쓴이 : 하늘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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