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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신학적 강조점 /김재성교수

by 【고동엽】 2021. 11. 7.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신학적 강조점


김재성/합동신학교 대학원대학 조직신학 교수


1.서론
이 글에서는 칼빈의 설교에 담긴 몇 가지 신학적인 기초를 재발견하여 제시하고자 한다.‘칼빈의 설교론’ 에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검토하여 보므로 오늘의 설교에 교훈을 얻고자 한다.


칼빈은 매우 뛰어난 종교개혁 신학자요, 성경강해 설교가요, 성경신학적인 변증가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설교 목록은 약 2050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 구약 571편과 신약 397편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그는 교회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성경 자체를 차례로 강해해 나갔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된 성경 원문만 강단에 들고 올라가서 중요한 단어와 문법과 뜻을 순서대로 플이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시의 중심에 있는 ‘쌩 삐에르 대성당’ 에서 1538년부터 매 주일 아침 9시와 오후3시에 규칙적으로 설교하였고, 주 중에도 월. 수. 금 저녁에 설교하였다. 칼빈의 설교문을 낭송하면 그의 설교의 길이를 대략 추측할 수 있는데, 약 한 시간에서 한시간 삼십 분에 이른다.


청중들의 대부분은 신앙적인 박해로 프랑스에서 피난온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칼빈은 난민교회의 목회자로서 동족을 위한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목회하였다. 칼빈은 설교 원고를 직접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설교 준비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설교를 외우고 강단에 올라갔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속기사들이 받아적은 것이다. 신학생들에게 강의했던 성경강해 역시 직접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속기사가 받아적은 것을 교정하여 출판한 것이다.


이렇게 출중하고 명석한 설교자요 성경강해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칼빈이 당대 최고의 학자들 문하에서 수학받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 원어와 라틴어라는 학문적인 언어를 익혔기에 원전과 더불어 엄청난 분량의 고전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2.성경에 충실한 설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말씀의 주인이시다. 칼빈은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성경을 충실하게 풀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은 어떤 유능한 말쟁이의 능변에 따라 그 권위가 올라가거나 저하될 수 없고, 교회의 선포에 의존해서 좌지우지 될 수 없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설교자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되, 오직 하나님의 메시지만을 충실히 대변하여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런 근거는 바로 확고한 성경관에서 나왔다.


칼빈의 설교에 들어 있는 신학적 기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관이다. 그의 이러한 설교에서의 성경 중심주의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물론 자신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얻은 결론이라고 본다. 그러나 배경을 즘더 들여다보면, 그가 가장 존경하던 설교자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크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칼빈이 가장 존경했던 설교자들은 안디옥교회의 감독이었던 존 크리소스톰(347-407)과 칼타고의 감독 어거스틴(354-430)이 었다.


크리 소스톰은 캅바도기아 신학을 세운 탁월한 설교자로 매우 뛰어난 전개로 인해서 당대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은총의 신학자로 손꼽히는 설교자이자 역사가요, 기독교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설교자로서 늘 자신의 부족함을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설교자가 청중을 확신시키려면 지혜로와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그 지혜는 오직 하나심의 말씀에서만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성경을 읽은 만큼에 비례해서 보다 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확인되듯이,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으며 깊은 신학적인 영향을 입은 신학자는 어거스틴 이었다. 따라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영향으로 인해서 철저히 성경에만 충실한 지혜로운 설교자가 되었다고 본다.

3.하나님의 메시지로서의 설교
설교자가 자신이 먼저 설교할 본문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칼빈은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만 선포되어진다면,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역설하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설교자가 성경 이외에 어떤 직접적인 메시지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메시지가 원래 주어진 대로 충실하게 청중들에게 전달되느냐의 여부라고 보았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관하여, 인간에 관하여, 그리고 세상에 관하여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에게,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에게 계시하셨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주어진 메시지이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모두 직접적인 계시의 수납자 위치에 있었으나 신약성경의 ‘마가’과 더불어 계시는 종결되어졌다. 그 후로는 첫 번째 계시의 수납자들로부터 받은 단지 제 2차적인 수납자들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처음에 주어졌던 것처럼, 신실하게 이해되고 전수되게 하려면 설교를 통해 순수한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해야 한다. 물론 성경이 일차적인 하니님의 메시지요, 설교가 이차적인 것이지만, 설교가 하나님의 메시지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온 ‘메시지’ 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복음’ 혹은 ‘바른교리’ (목회서신 특히 디모데전후서에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설교를 성경과 동등하게 높이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절대적이고 주권적이며, 동시에 이차적이요, 부차적이며, 종속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설교에 맞추어질 필요가 전혀없고, 반대로 설교가 성경에 일치해야만 한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하나님의 메시지요, 적어도 성경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칼빈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설교를 혼돈하는 것은 아니다. 설교란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거나 무기력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의 경우, 후대의 선지자들로부터 펄씬 후일의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되어질 때까지 전혀 약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나 모든 가르침은 성경 본문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어야 하며, 오직 본문만을 자세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만일 본문에다가 설교자 자신이 무엇을 더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설교는 타락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을법 속에서도, 선지자들 속에서도, 그리고 복음 속에도 완전한 가르침을 주셨다.


오늘날 21세기를 바라보는 설교자들이 무엇을 더하거나 뺄 것이 있는가? 문화와 시대와 풍습이 달라진 세상에 전달한다고 할 때에 과연 무엇을 중시하는가? 칼빈의 설교속에는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다가 보이려는 현학적인 노력은 없다. 단순히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보다 더 광범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 각자가 보다 잘 교훈 받도록 함에 있다.


목회자는 강단에서 전달하는 것이 과연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반문해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목회자의 개인적인 의도를 포괄적으로 담아서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포장하는 것 인지를 반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점에 대해 즘 더 강력하고 확실하게, 그리고 보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그의 디모데전서에 대한 22번째의 설교이다(본문은 딤전 3:2, 제목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사도 바울은 여기서 어떤 사람이(감독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서 잘한다는 행진을 해야 한다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똑똑한점을 드러냄으로 모든 사람들이 ‘과연 말 잘하는군! 학식이 많군! 굉장한 마음을가졌군' 하는 것은 모두다 본문의 요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 한 사람이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는것이 사람으로부터 멀리 높이 있으므로 뛰어나게 보이라는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사람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며, 유한한 인간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칼빈전집 53권 266쪽 15-30행).

목회자들이 설교에 임하면서 명심해야 할 사실을 간단히 요약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과 설교와의 관계는 본질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과의 차이처럼 다르다. 그러나 참된 설교는 성경과 똑같이 하나님의 메시지로서 동일하게 역사하며 효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4.성령의 감동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워필드 박사는 칼빈이야말로 ‘성령의 신학자’ 라고 하였다. 칼빈은 모든 기독교 신자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와 간섭을 역설하였다. 특히 「기독교 강요」의 핵심 가운데 이를 담아 표현하였으니, ‘성령은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끈(bond)’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제외한 설교는 사람의 말잔치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 메시지를 설교자자신뿐만 아니라 청중들에게 그의 청중들의 언어와 개념으로 전달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있으니, 그것은 설교자의 지식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화와 조명. 그리고 효과적인 간섭과 역사하심이다.


칼빈은 성령님의 능력만이 설교로 하여금 효과를 나타나게 하신다고 보았다. 설교자가 성경을 풀어서 전달할 때 간과해서 안되는 중요한 신학적인 기초는 ‘어떤 능력으로 전달하는가’ 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씀하는 바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칼빈은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청중들에게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그들 스스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듣는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자문해보라고강조한다. 만일 설교자의 가르침이 성경에 충실하다면, 이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은 정확하게 하나님 교훈이 그의 교훈으로 남아 있는 까닭에 그 교훈의 전달자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 전달되어지는 실상은 생동하는 상상력이나 언어의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연결된 효력이 나타나도록 큰 능력을 주신다. 말씀과 함께 성령이 역사한다는 신학적인 기초에 대해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매우 세심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체로는 힘이 없어서, 여기에다가 어떤 다른 첨가된 권능을 필요로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버리게 된다. 즉 성경이 무엇인가 부족해서 그것을 전달할 때 성령의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효과적인 청중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이 필요한 쪽은 듣는 자들이다. 성경이 처음 전달되어진 의도에 따라 충실하게만 증거된다면, 교회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하나님 자신의 선포이다. 따라서 말씀 선포의 행위는 곧 바로 하나님의 행동,즉 하나님 자신의 권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선포자의 능변술이나 웅변 기교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직 성령님의 감화로 인해서 메시지가 전달되게 하시는 것이다.


설교자의 말이 단순한 소리에 불과하거나 어떤 효과도 얻지 못한 채 공중에서 죽어버리는 경우들에 대해서 칼빈이 자주 말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 말들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설교자 자신의 이념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귄능에 대한 지적을 들어보자. 히브리서 4장 12절의 주석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좌우의 날션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에 대한 칼빈의 확고한 설명을 들어보자. 칼빈은 말씀을 의미하는 ‘quaestio’라는 단어를 풀이하면서, 사도가 말씀의 권능에 대해서 이러한 운동력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권능으로 역사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쓸이 살았고 운동력 있게 역사하는 것은 오직 특별하게 믿는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칼빈전집 55권 49쪽 37-39행).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없다. 반면에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그들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겸손히 인식하게 하므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로 피하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 깊은 곳을 궤뚫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칼빈전집 55권 41-44쪽).
말씀은 결코 헛되이 선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요16:8) 성령이 오시면 그가 세상을 확신시켜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복음의 선포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수행하신다(칼빈전집 55권 50족29-30행).


칼빈은 계속해서 히브리서 4장 12절의 운동력 있는 말씀(quaestio)의 권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선언으로 끝맺고 있다. 비록 모든 인간을 향해 항상 권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말씀은 확실하게, 그자체 안에 그 권능을 가지고 있다.”(칼빈전집 55권 50쪽32-33행)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효력을 수반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에 대하게 될 때 성경의 기록자들에게 계시된 동일한 메시지가 설교하는 교회에 바르게 전달되어지진다. 처음에 메시지를 주면서 의도했던 바를 모든 세대에 걸쳐서 성취되게 하실 것을성령님만이 계속해서 보장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이, 특별한 의미에서, 권능이 함께 한다고 말할 때는 설교된 말씀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았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그 청중들에게 그 권능을 항상 나타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권능을 갖고 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 주석에서 칼빈은 이 문제의 다른 측면을 강조한 바있다.

“바울은 성령의 사역자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은혜와 권능이 그의 설교에 함께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원하였던 바로, 그의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목청에서 성령도 나오게 되어질 것이라는 바람이었다. 즉 그가 의미한 바는 오직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역자들에게 복을 주셔서, 이로 인하여 복음의 미리 증거된 바를 수행케 하신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르침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권능을 연결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가르침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자들이다. 우리가 성령을 붙잡거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마음들을 조명하시어 심령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을 전적으로 재창조하시기 때문이다" (칼빈전집 50권 40쪽 34-47행).

성경이나 복음이나 설교에 대해 언급한 것들 가운데 취사 선택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을 존재론적인 개념으로 함께 묶으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이를 정지 상태의 두 형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행동이요, 하나님의 목소리로 말씀하는 것으로, 우리가 ‘거룩한 책’ 이라고 부르는 바, 이는 단지 많은 저술가들의 모음집이 아니다.

5.예수 그리스도에게 들으라
칼빈의 설교에 담긴 또 다른 중요한 신학적인 기초의 하나는 설교란 그리스도에게 듣는다는 확신이다. 모든 설교란 그리스도의 사신(便臣)으로서 행해진다는 인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설교란 그리스도 자신에게 듣는다는 신념이 확고하였다. 칼빈이 자주 사용한 명칭들을 볼 때 이런 신학적인 기초가 분명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교회의 ‘유일한 선생’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설교란 예수그리스도에게 가르침 받는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야 한다(「기독교 강요」 제4권 8장1절).

“‘그에게 들으라’ 라는 말은 변화산에서 하나넘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말로서, 그분의 일치된 교사되심에 대한 확정이요.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하신 명령으로, 오직 그분에 대해서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니, 성육신하신 말씀으로나 율법에서나 선지자들로나 사도들로든지 신 ․ 구약성경에서 가르쳐진 분으로써, 그분은 하나님의 지혜이다"(「기독교 강요」 제4권 8장 4-8절).

고린도후서 5장20절에 보면,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사신’(使臣, ambassador)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라는 말씀의 표현을 매우중요시했다.

"칼빈은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감히 하나님을 대신해서 가나안에서 정복할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던가를 상기시킨다. 그 토지들이 모세 자신의 소유여서 나눠 주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표현을 이상하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꾼들은 이와 같이, 조들이 말할 때에 어느 것도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 자신들에게 주어진 과제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왕의 사신(使狂)이 되면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때까지는 완전한 권한을 가지며, 사신에게는 소위 왕의 이름을 차용할 특권이 주어진다. 칼빈은 설교자들이 바로 이러한 사신의 역할을 하고있다고 보았다. 특히 성례를 거행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사명을 다해야 하며,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매우 유익한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전히 넓은 안목을 갖고 있으니… 왜 우리들의 모든 오점들을 다 씻어버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깨끗하여 질 수 있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새 옷을 입어. 그의 일꾼이 되어질 수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되어짐을 의미하며,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우리에게 세례를 준 유한한 어떤 인간속에 모든것이 달려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그를 한 인간으로 생각해서, 그 개인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전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도록하셨기 때문에, 세례란 비록 사람의 손으로 시행되어진다 하더라도, 이런 권세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성만찬에 대해서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계시며,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어 주신다고 선포하셨다. 진정 물과 피로써 우리에게 그런 축복의 참여자가 되도록 하신분이 어디 있는가? 진정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성만찬은 공허한 좌절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에,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중에도 똑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목사들은 어두워진 자들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 사로잡힌 자들을 구해주기 위해서,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그 심령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고 하셨다. 정말인가? 이런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만 속한 일들이었다‥‥죄를 용서하는 일은 오직 그분께만 속한 일이고, 심령을 거듭나게 하는 일도 오직 그분에게만 속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이런 모든 자격들을 자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지정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그들로부터 자신이 떠나있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하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자신의 손으로, 또한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보여 주신다" (칼빈 전집 26권 66쪽 8행- 67쪽 7행).

하나님의 종들이 선포할 때에 그들은 단지 한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릴 지나가는 소리로 외쳐대는 것이 아니다. 그 성과는 설교와 함께 담보되어 있다. 우리의 구원이란 바로 그 설교의 한계까지만 세워지게 된다. 죄악의 제거가 날마다 공허하게 선포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설교는 우리에게 확신토록 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배운 바를 신실하게 증거하는 목사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임무를 부여받았으므로 사신이 라는 점을 추호도 의심할 수 없으며. 또한 설교자의 메시지는 보내신 분의 뜻이요 마음이다. 설교자는 이 메시지의 특성에 따른 사신일 뿐이다.

6.제자됨의 도리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을 졸업한 후에 세미나 또는 연장 교육 강좌에 참석하여 자신을 다시금 새롭게 충전하려고 노력한다. 이때에 새롭게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돌아가면서 목사는 일생 동안 배워야 한다는 말의 중요성을 서로 나누곤 한다. 그러나 설교에 임할 때에 한국의 목회자들은 종종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고정관념)에 젖어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칼빈의 자세는 도리어 그 반대이다. 설교에 임하는 사람은 제자요, 학생이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지혜나 지식을 전달하려고 하며, 남을 깨우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큰 오해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도 잘 가르치라고 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에서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didaktikon)라고 했고, 디모데전서 4장 6-7절에는 “믿음의 말씀과 네가 들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didaskalia)고 했다. 디모데전서 4장 13절에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didaskalia)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 (didaskalia)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항상 남을 가르치려고만 한다면 이는 매우 난감한 일에 처하고 만다. 학생된 자세를 강조하는 칼빈의 설명을 들어보자.

“한 사람의 설교자는 하나님의 학교인 성경 속에서 주님에게 배우는 자에 불과하다 . 설교자나 교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한사람의 제자’ 가 되어야만 한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는 먼저 한분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자라야만 한다. 그는 먼저 지배하시는 스승의 학교 안에 있어야만 한다. 성경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는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만’ 한다. 그는 을법과 선지자와 사도들의 샘물로부터 자신의 모든 가르침을 찾아내야 한다. 그가 이런 일을 아주 잘 이행하였을 때에, 다른 사람에게 설교할 수 있는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자신이 배운 것만을 전해야한다. 그것이야말로 ‘순수한말씀’ 에서 찾아내어진. '순수한 가르침' 이 될 것이다. 정반대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세속적인 지식' 이 아니요, 자신의 머리에서 고안해낸 개념이 아니어야만 하고, 자신의 환상이나 공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칼빈전집 53권 142쪽).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주목할 만한 단어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즉 설교에서 칼빈은 ‘하나넘의 학교 (schola Dei. l'escole de Di-eu)라는 표현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학교요,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를 하기 위해서였다.


중세와 16세기의 상황에서 '학교' 라는 단어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학교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나, 이때는 주로 대학교를 의미하였다. 물론 학교란 소수의 귀족만이 다닐 수 있었고, 대단히 엘리트 중심의 교육이 펼쳐졌다. 따라서 선생(magister)은 가르칠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예능과목 이외의 교수가 되려면 박사(doctor)학위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학교에서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선생이요, 스승이다. 그분만이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지위를 자신과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적용하였다. “왜 우리가설교를 들으려고 와야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함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지배하시는 스승으로 가지려 함이다" (신 1: 17설교에서, 칼빈전집 25권 647쪽 17-21행).


만일 설교자가 하나님의 학교에서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서 가르치려 한다거나, 세상의 어느 학교나 단체에서 배운 것을 제멋대로 전달하려 한다면 거짓 교사임에 틀림없다.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행동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여 회중으로 하여금 그분과 연합하게 되어진다. 강단은 하나님의 보좌로서 여기로부터 우리들의 영혼을 통치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학교란 성경 안에 있는 하니님이 가르치시는 학교를 말한다. 설교자는 먼저 자신이 배운 바를 청중들에게 전달한다. 거의 대부분이 직접적이다. 언어는 계시의 언어가 되어지고, 함축적으로 구속의 언어가 된다. 하나님께서 사회를 보시며, 강단은 그의 보좌요, 그분께서 중앙에 좌정하신다. 마치 보여질 수 있다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있는 모형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분께 연결되어 있다.

7.결론
이 글에서 필자는 칼빈의 설교론이라고 말할수 있는 내용들을 검토하여 보았다. 흔히 칼빈 신학의 핵심 주제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ity of God)이라든가, '인간의 전적 타락 (Man's corruption of Sin), 또는 '예정'(Predestination)등 널리 거론되어 온 부분은 생략하였다. 그가 선포한것은 이런 몇 가지 단순한 주제만으로 압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는 칼빈의 설교에 담긴 신학적인 기초가 무엇이었으며, 그의 설교론에는 어떤 신학이 스며 있던가를 밝혀보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제네바에서 칼빈의 설교에 의해 선포된 것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만족케 하셨다는 진리였다. 이 단순한 메시지들이 선포되어질 당대에는 엄청난 효력과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하나님은 그냥 단순하게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선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메시지를 통해서 칼빈은 그 시대에 대한 경고와 반성과 결단을 촉구하였기 때문이다. 칼빈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제네바 시의 베드로 대성당, 라 마델레인 성당. 그리고 성 제라비스 성당 안에서 은혜로우신 계시의 언어로 나타나시고 역사하셨다.


우리가 살펴본 바 칼빈의 설교에 임하는 확고한 신학의 기초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오늘도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친히 가르치시고 통치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시고. 자신을 제시하신다. 설교자는 그의 왕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순종하고 믿으며 자극을 받는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거부하면서 어둠 속에 머무른다. 설교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면면으로, 모두 다 하나님의 행하심 속에서 나온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설교에 대한 이해를 일관성 있게 지켜 나갔고, 제네바의 질서와 도덕적 발전으로 열매를 맺었다. 에른스트 트뢸취의 말처럼, 이 지상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발전된 성취를 이룬 도시가 바로 칼빈 당대의 스위스 제네바였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속하시고자 그의 설교를 통해서 만물을 회복시키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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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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