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정통신학자들
<16-17세기>
1. J. Calvin(1509~1564)
- 1536~1559 <기독교강요>: 1권)신론, 2권)기독론, 3권)성령론, 4권)교회론
- 1537 <기독교신앙안내>, 1542 <제네바교회문답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성경전체를 주석했다.
- 칼빈의 신학사상은 모든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어거스틴의 사상을 재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동신조(사도신경)의 기초 위에 있는 어거스틴의 신앙과 신학사상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했다. 단,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의 유일무오, 예정, 하나님의 섭리, 인간의 타락, 신앙칭의, 구원의 단계, 교회제도 등은 칼빈만의 독특한 교리들이다.
2. T. Beza(1519~1605)
- 제네바아카데미 초대원장이자 칼빈의 후계자로서 칼빈 이후 40년간 제네바의 정통신앙의 입장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했고 칼빈의 사상을 체계화하는데 기여했다.
- 1570 <신앙고백>, 1575 <기독교의문답서>외 100여 편의 저술 및 논문(예정론도표)
3. J. Knox(1513~1572)
-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540년에 목사 안수 받음. 칼빈을 만나기 전부터 개혁주의적 신앙과 사상을 견지함. 1554년~1567년까지 스위스로 망명생활.
- 1555년 제네바에서 피난민교회를 담임하면서 칼빈을 만나 제네바아카데미에서 수학.
- 1560년 스코틀랜드의회가 낙스와 윌로크 등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승인하고 낙스가 세운 개혁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함. 이후 스코틀랜드는 로마카톨릭주의를 버리고 프로테스탄트주의를 국교로 정함.
- 1561년 <권징서>에서 교회회의의 단계적 구성과 교회의 직제를 규정하여 장로교회의 기틀을 쌓았다.
4. Zanchius(1516~1590)
- 이탈리아 알차노 태생.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수학. 1551년 제네바레 9개월간 체류하며 칼빈의 설교와 강의를 들었다. 이후 스트라스부르크대학(1553-1556),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1568-1577)로 재직.
- 1566 <혼합>에서 개혀파적 관점에서의 기독론과 성만찬론, 성도의 견인론을 저술하고, 1572년 <삼위일체의 엘로힘>과 <하나님의 본성>에서 칼케돈신조의 정통신앙적 입장을 철저하게 논술했고, 1591 <영적 교통>에서 그리스도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루터파의 개념을 반박하며 그리스도 인성의 유한성을 주장.
- 그는 개혁파 스콜라주의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즉 개혁파의 교리를 조직적으로 해설하고 변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스콜라철학의 작품들을 활용하여 결론을 도출하려고 했고, 토마스주의와 칼빈주의를 조화시키는제 노력했다.
5. Polanus(1561~1610)
- 개혁파신학의 초기 형성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베자와 도르트회의의 진행과정에서 논의된 정통 개혁파의 신앙문제에 대하여 중요한 교리적 사명의 글을 발표하였고 예정론의 논문과 로마서 주석을 썼다.
- 그의 <기독교 신학통론,1609>은 개혁파 신앙에 대한 광범위한 변증서이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견해들을 비판하고 개혁파교회의 교리들을 확립했다. 그는 인간의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행위 계약에 관해 최초로 거론한 인물로서 계약신학(Feteral Theology)의 기초가 되었다.
6. Gomarus(1563~1641)
- 스페인 태생의 개혁파 목사이자 신학자. 라이덴대학 조직신학 교수,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수 역임
- 1618년 도르트회의에 참석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논박하고 칼빈주의를 승리로 이끄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신학은 베자와 플란키우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타락전 선택설과 이중예정론을 주장했다. 그는 엄격한 칼빈주의자로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며 '당신의 말씀은 빛입니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7. Wollebius(1568~1629)
- 독일 태생의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 바젤에서 폴라누스의 문하생으로 신학공부. 1611년 목사 안수(43세). 1518년 바젤에서 구약 강의.
- 1626년 <기독교신학개론> 저술로 일약 유명세. 이 책은 기독론이 특징이며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교리에 관한 정확한 해설을 했다. 그는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했다.
8. Voetius(1588-1676)
-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 라이덴대학에서 고마루스와 아르미니우스에게서 수학. 평생 아르미니우스와 논쟁하고 도르트회의에 참석하여 아르미니우스를 정죄했다.
- 1648-1669년 <신학논쟁전집>, 1663년 <교회정치>, 1664년 <수도 또는 경건의 연습>을 저술했다.
9. Turretini(1623~1687)
- 제네바의 목회자이자 신학자. 라이덴대학에서 폴리안더와 부티우스에게서 수학.
- 대표적인 저서는 <논쟁신학강요, 1670-1685>이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법을 채용하여 개혁파신학을 체계적으로 진술했다. 이 책은 1812년부터 1871년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으로 대체될 때까지 약 100년간 프린스턴대학의 교과서로 체택되어 미국 정통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보존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0. John Owen(1616~1683)
- 영국의 청교도 목사이자 신학자. 1654년 논문 '성도의 견인'에서 아르미니우스를 비판했고, 1657년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통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1674년 <성령론>에서 개혁파신학의 입장을 증명했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여 성령의 내주를 각인시켰다.
<18세기>
11. Jonathan Edwards(1703~1758)
- 13세 이전에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터득하고 철학 관련 논문을 쓴 천재. 1720년 예일대 졸업, 1722년 대학원 수료한 후 26년까지 모교에서 강의하고, 1726부터 50년까지 메사추세츠의 노샘톤의 회중교회에서 목회. 휫필드의 영향을 받아 대각성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1758년 프린스톤대학의 총장에 취임한지 한 달 만에 천연두 접종의 후유증으로 사망.
- 그는 칼빈주의 정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철학자로서 뉴잉글랜드 칼빈주의의 수호자요 18세기 미국 개혁주의의 중심이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차단키 위해 <원죄론>을, 지나친 부흥운동의 열정을 경계키 위해 <종교적 정서>를 저술했고 그는 19세기의 노예폐지, 선교주의, 윤리적 개혁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활약으로 국교회가 비국교회가 되었다.
- 그의 후계자들, 조셉 벨라미, 사무엘 홉킨스, 조나단 에드워즈 2세, 에몬슨, 테일러 등이 뉴잉글랜드 신학파를 형성했다. 위필드는 에드워즈가 칼빈주의를 변호한 것이 100년 동안 미국 땅에 알미니우스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평가했다.
<19-20세기>
- 미국의 정통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은 장로교회와 화란 개혁파의 신학자와 목회자들, 그리고 (구)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역할로 말미암아 계승 발전해 갈 수 있었다.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1812년 개설된 프린스톤신학이 오염되자 메이첸, 반틸, 머레이 등이 중심이 되어 1920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 따로 칼빈주의 신학을 보존 계승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정통신학의 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2. Alexander(1772~1851)
- 뉴저지 대학(현. 프린스턴)의 위더스푼(1723-1794)과 윌리엄 그라함(1746-1799)에게서 수학한 미국 북 장로교회 목사이자 신학자로 스코틀랜드의 보편실재론의 대가이다. 아쉬벨 그린, 사무엘 밀러와 함께 프린스턴 설립자 중의 한 사람으로 교수 취임식 설교에서 '성경을 찾으라'고 역설하여 큰 감흥을 일으켰고, 이후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 등과 함께 프린스턴 신학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 그는 이신론에 대항하여 참된 지식은 이성과 종교적 체험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고, 성경영감론을 성령의 감독과 성령의 암시, 성령의 상승으로 구분했으며, 성경의 권위를 증명키 위해 객관적인 외적 기준을 찾는 한편 종교적 체험과 성경의 내적 증거를 정립하는데 주력했다. 저서로 <기독교의 내적 증거, 1825>, <종교적 경험론, 1841>, <인생의 본질>이 있다.
13. C. Hodge(1797~1878)
- 투레틴의 영향을 받았고 알렉산더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자이자 스콜라적 칼빈주의자로서 19세기 프린스톤신학교의 지도적인 신학자였으며 그의 조직신학 전3권(1871-1873)은 투레틴의 <논쟁신학요강>에 이어 프린스턴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시대적으로 진화론과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훼손될 무렵, 성경의 초자연적 축자영감과 무오를 주장하여 정통적 칼빈주의를 수호했다.
- 저서로는 <로마서주석, 1835>, <미합중국장로교회 조직의 역사,1840>, <생명의 길,1841>, <다윈주의란?,1873> 등이 있으며 그의 대표작은 단연 <조직신학 전3권>이다.
- 그의 아들 에이 하지는 1877년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프린스톤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으며, 부친이 대중을 상대로 강연한 신학내용을 문답식으로 간결하게 편찬한 <신학개요,1879>는 불후의 교리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또 1881년 워필드와 공동으로 <장로교회 평론>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성경원본에는 오류가 없다고 분명히 선포하여 성경무오설을 지키는 보수주의 장로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4. Thornwell(1813~1862)
- 19세기 남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칼빈주의 신학자를 들자면 돈웰, 댑니, 지라르데우(1825~1898, 콜럼비아대 교수)를 꼽는다. 돈웰은 사우스 캐롤라니나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와 앤도버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35년에 목사가 되었으며, 1847년 35세의 최연소의 나이로 미국 장로교회의 총회장이 되었으며, 1861년 장로교회가 남과 북의 총회로 분리될 때 남장로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1873년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가 되어 1855년까지 윤리학을 가르쳤다. 이후 콜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실천신학과 변증학을 가르쳤다.
- 그는 보편실재론적 사고방식을 사회와 자연을 하나의 통일적 세계로 이해하는데 적용하였다. 그는 자연의 성장 발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점진적인 과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개혁도 하나님 뜻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며 신자 개개인은 이에 적합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 그의 신학체계는 지라르데우가 완성했고 지라르데우의 조직신학은 콜럼비아대의 신학교재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고베개혁파신학교를 설립한 사무엘 피터 풀톤(Fulton, 1865~1938)이 그의 문하생이며, 풀몬의 제자가 일본 개혁하신학자의 대표자인 오카다 미노루(1902~1992)이다.
15. Dabney(1820~1898)
- 남 장로교회의 목사, 신학자, 정치가, 사회평론가이다.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고 모교에서 교회사와 교회정치를 강의했다. 그는 인본주의적 알미니안주의를 강도높게 비판했으며, 스코틀랜드의 보편실재론을 그의 신학적 방법론으로 채용했다. 저서로는 <19세기 감각주의 철학>, <조직신학, 1878>이 있다. 이 책은 887족 분량에 7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73장의 '국가의 위정자론'에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하여 주목을 받았다. 유니온신학교는 그의 조직신학을 신학교재로 사용했다.
16. B. Warfield(1851~1921)
- 프린스톤에서 찰스 핫지에게 수학하고 라이프치히대학에서 2년간 유학(1876-77)한 다음 웨스턴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으면서 디다케연구로 일약 유명해 졌으며 이후 프린스턴에서 스승의 후임이 되어 변증학을 가르쳤다.
- 그는 성경의 외적 증거(학문적 논증)과 내적 증거(주관적 체험의 요소)를 다같이 중요하게 여겼고, 당시 미국에서 성행하던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고등비평적 연구의 경향에 대해 비판하며 성경의 권위와 신적 영감성과 무오성을 확증하여 강력하게 변증했다. 그는 유니온신학교의 자유주의신학자인 Briggs, Smiths등과 오앳동안 논쟁했다. 그는 칼빈의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원죄, 제한적 속죄를 주장했다. 특히 장로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수정논의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고 신앙고백서를 함부로 수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하여 그 논의를 중단시킨 바 있다. 약 100권의 저서를 남겼다.
17. A. Kuyper(1837~1920)
- 바빙크와 함께 화란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1880년 암스텔담의 자유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과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 추임강연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영역주권의 원리를 제창하여 유명한 '일반은총론'이라는 이론을 생성했다. 일반은총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영역임을 말하고,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적 부패에 대하여 섭리적으로 어느 정도 억제케 하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지속되게 하셨다고 주장했다.
- 카이퍼는 루터의 출발점을 인간론적 이신칭의에 있다고 보았으며, 칼빈 사상의 출발점은 포괄적이며 보편적이며 우주적이며 객관적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칼빈의 세계관적 입장에서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일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인각관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이 동등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특히 그의 <성령론,1900>에서 제1은총과 제2은총을 논했는데, 제1은총은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제2은총은 성령을 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협력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23권의 저술을 남겼다.
18. H. Barvink(1854~1921)
- 카이퍼의 후계자. 화란개혁파신학교의 교의학 교수. 1904년 자유대학의 총장 취임하고 1908년 프린스턴대 초청강연에서 '계시철학'을 발표.
- 그의 신학적 방법론의 특징은 튼튼한 성경신학의 기초 위에서 역사신학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밖의 신학체계의 요소들을 종합하여 개혁파신학 자체의 다양한 견해들을 종합하여 새롭게 정리하고 체계화하려는 종합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개혁신학 내의 이견으로 양립되었던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경우 다 같이 하나님의 선택교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어느 쪽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예정에는 선후가 없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으며, 인간의 영혼의 기원관에 있어서 창조설과 유전설의 문제도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또 성경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성경 저자들의 인격 뿐만 아니라 문자와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과 하나님의 모든 계시적 사실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 유기적으로 영감되어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결론지었다.
- 그는 정치와 교육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으로 적극적으로 관여하였으며 대표적 저술로 화란 개혁파 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 <개혁파 교의학 전 4권>이 있다.
19. G. Vos(1862~1949)
- 화란 태생의 미국 북장로교회의 목사로 프린스턴에서 신학교수 역임. 미시간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칼빈신학교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에 진학하여 모세오경을 연구한 다음, 독일 베를린대학과 스트라스부루그대학에서 유학하고, 1888년 귀국하여 칼빈신학교의 조직신학, 주경신학 교수를 역임했고, 1893부터 프린스톤에서 성경신학 교수로 생을 마쳤다.
-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1903>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예언된 사실을 실현시킨 분이임을 상기시키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계시 사이에 역사적 통일성이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범위와 중생된 인간의 모습에서 찾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가 아니면 참된 인간의 행복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로서의 하나님나라'(the kingdom as the church)를 주창했다. 또 <예수님의 자기계시, the self-disclosure of Jesus, 1926>에서는 정통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 온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일치성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집필된 것으로 중보자의 다양한 명칭들을 구약적 맥랙에서 주석하였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기의 죽음에 대해 메시야적인 해석을 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역에 있어서 메시야로 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종말론,1930>에서는 바울의 종말관을 구원관과 연관지어 검증을 시도했다. 그는 바울의 종말관이 바울사상의 핵심이자 전부라고 했다.
- 보스는 성경신학자로서 성경에 대한 포괄적이며 정통적인 개혁파 성경신학을 체계화한 장본인이다. 즉 보스 이전까지 개혁파 신학은 특별계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성경적 이해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이에 보스는 <성경신학-구약과 신약, 1948>을 출판하여 보수주의 개혁파 성경신학을 완성시켰다. 그는 여기서 구원사적인 방법에 의한 성경신학적 구조를 고안하여 발전시켰는데 성경의 계시사상과 예언사상은 구약과 신약을 일관하여 통일적으로 유기적인 관점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또 기존의 주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으로 된 네 분류의 신학범주를, 주경신학을 단순히 성경을 주석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신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봄으로서 주경과 성경신학을 따로 분류하게 되었다.
20. G. Machen(1881~1937)
- 존스 홉키스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린스턴에서 카스파르 하지, 패톤, 워필드에게서 수학한 다음, 독일 마르부르그대학과 괴팅겐대학에서 요한네스 바이스, 빌헬름 헤르만, 부셋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수학했다. 이 때 배운 자유주의신학으로 인해 잠시 갈등했지만 암스트롱과 패톤 등의 도움으로 8년 만에 회복했다. 이후 프린스턴에서 1906년부터 1929년까지 신약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점점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적인 방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달아 그 때부터 자유주의의 입장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프린스톤 내에 마찰이 생겨 1929년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며 Oswald Allis, R.D.Wilson, C.Vantil 등과 함께 그해 가을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 1937년까지 학장 겸 교수로 역임했다.
- 그는 개교강연을 통해 두 가지를 분명히 강조했다. 첫째,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평범한 책으로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둘째, 프린스턴은 이제 더 이상 복음주의의 입장이 아니므로 이제 웨스트민스터가 그 권위를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 그의 신학사상은 기독교 변증론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를 해설하는 일과 기곡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저서로 <기독교와 자유주의, 1923>, 바울종교의 기원, 1925>, <기독교 인간관, 1965>, <동정녀탄생,1967>등이 있다.
21. C. Van Til(1895~1987)
- 화란 태생의 미국 개혁파 변증신학자이다. 프린스턴에서 보스, 카스팔 핫지, 윌슨, 오스왈드 알리스, 메이첸 등에게서 신학을 배우고,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8년에 프린스턴에서 변증학을 강의하다가 사임하고 메이첸과 함께 WM에서 변증학을 가르치다가 생을 마감했다.
- 그는 전제론적 방법이라는 새로운 변증학적 방법론을 체계화했다. 기존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합리적인 논증으로 불신자들을 설득하여 기독교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다른 사상에서 증거와 논증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나, 밴틸은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인간은 하나님께 반응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이미 영감된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므로 성경 이외의 어떤 인간의 사상에서 기독교진리를 변증하기 위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지나 성경에서 출발하여 성경에서 논증과 논거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밴틸은 철저하게 성경적 기독교 진리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거의 모든 저서에 'In Defence of the Faith'(신앙의 방어에 있어서)라는 표제를 달았다. 그이 제자인 William White는 밴틸을 소개하는 책자에 '신앙의 방어자 밴틸'이라고 소개해 화제를 낳았다. 밴틸의 저서 <조직신학 서론>, <변증학>, <험증학>, <신앙의 방어>, <기독교 인식론>, <칼빈주의의 변호>, <복음의 지적 도전>, <신근대주의> 등은 오늘날 개혁파 신학의 주요한 지침서가 되어 있다.
22. L. Berkhof(1873~1957)
- 화란 태생의 미국 개혁파 목사로서 20세기 초 신정통주의와 지유주의 신학의 조류를 막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위대한 신학자이다. 칼빈신학교에서 보스와 뵈커 하에서 수학했고, 1902-1904까지 프린스턴에서 워필드와 보스 등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이후 칼빈신학교에서 1906년부터 14년까지 신구약을 가르쳤고, 1937년에 <성경해석의 원리>를 집필했다. 다시 1928년부터 44년까지 칼빈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 그는 많은 경우 헤르만 바빙크의 영향을 받았다. 바빙크의 용어와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복사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조직신학, 1941, 58, 60, 63>은 칼빈, 풀러, 루이즈빌, 남침례신학, 고든, 웨스턴, 밥 존스, 무디신학교 등에서 교과서가 되었고, 한국은 신복윤 박사에 의해 1958년 <기독교신학개론>으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칼빈주의 신학교들의 교과서로체택되고 있다. 한편 신복윤 박사는 벌콥의 <기독교교리사,1937>를 1979년에 번역하기도 했다.
- 그는 무엇보다 체계있는 조직신학을 설립한 공로가 크다. 수많은 자료를 이해하고 그 주요한 내용들을 잘 분류하여 함축된 형태로 재생시키는 능력을 가진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이 대표적 저서인 <조직신학>은 분명하고, 간결하고 조리있게 저술되었으며 천성적으로 논쟁을 싫어하여 다른 신학적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작업을 실천했다. 그의 이 책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투레틴의 <논증신학강요>과 함께 개혁파신학의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23. Jhon Murray(1898~1975)
-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개혁파 목사이며 신학자. 1923년 프린스턴에서 카스파르 핫지, 윌슨, 보스, 메이첸 등에게서 수학했다. 당시 미국의 사정은 자유주의가 위세를 떨치면서 '성경의 완전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의 다섯 가지를 부인하는 이른바 "오번확인서(1924)"가 출현했는데, 여기에 장로교 목사 1,292명이 찬성하는 서명을 했고, 급기야 프린스턴은 자유주의신학의 본산지로 개편되고 말았다. 그는 메이첸, 밴틸 등과 함께 프린스턴을 나와 웨스트민스터를 설립하고 1966년 은퇴할 때까지 강의했다. 이 때 그의 동료인 R.B.Kuiper, B.Stonehouse, Paul Wooly, Allan MacRae 등이 함께 가세했다.
- 그의 일관된 신학적 특색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경건함과 진지한 태도로 성경 원문을 정밀하게 해석함을 근거로 하여 신학적 연구를 더하면서 조직신학적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그는 보스의 영향을 받아 주경신학에서의 성경신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구원론,1955>과 <로마서 주석,1959>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사역을 죄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논술하고 있다. 이외 <칼빈의 창조교리,1954>와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칼빈의 견해,1960>를 발표했다.
24. 박형룡(1897~1978)
- 프린스톤에서 메이첸과 보스 등에게서 수학하고 평양신학교, 고려신학교, 총회신학교(현 총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며 한국의 정통 칼빈주의의 확립에 공한한 신학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교리와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영감교리를 주장했다. 저서로는 <교의신학 전7권>외 14권의 주요 저서들과 100여 편의 주요 논문이 있다.
25. 박윤선(1905~1988)
- 웨스트민스터에서 메이첸, 밴틸, 에드워드 영 등으로부터 언어학과 변증학을 배우고, 화란 자유대학에서 신약학을 연구했으며, 고려신학교를 설립했으며, 총신대와 합동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한국인 최초의 주석집인 <신구약성경 주석>과 <성경신학>, <교회헌법주석>외 250여 편의 논문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칼빈주의 정통 보수주의 주경신학을 확립하고 계승함에 있어서 혁혁한 공헌을 한 세계적인 신학자이다.
26. 오카다 미노루(1902~1992)
-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사무엘 풀튼에게서 신학을 수업받은 후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 특히 워필드로부터 영향을 받음. 일본 코베개혁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일생을 헌신하며 일본의 개혁파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개혁파교리학교본,1969>이 있다.
27. 최순직(1923~1999)
- 평양신학교를 거쳐 총회신학에서 박형룡으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운 후 코베신학에서 오카다 미노루에게서 수학하고 탈봇에서 공부했다. 특히 미노루 교수의 신학을 그대로 전수했다. 대한신학교(현 대신대학원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고, 기독신학교의 학장을 역임했다. 대표적 저서로 <6일의 신학-기독교 노동론>, <플러스의 인생>, <크리스찬의 생활규준-복음 하의 율법>이 있다.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출처] 칼빈주의 정통신학자들 (아리엘교회) |작성자 Grace
<16-17세기>
1. J. Calvin(1509~1564)
- 1536~1559 <기독교강요>: 1권)신론, 2권)기독론, 3권)성령론, 4권)교회론
- 1537 <기독교신앙안내>, 1542 <제네바교회문답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성경전체를 주석했다.
- 칼빈의 신학사상은 모든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어거스틴의 사상을 재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동신조(사도신경)의 기초 위에 있는 어거스틴의 신앙과 신학사상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교리체계를 확립했다. 단,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의 유일무오, 예정, 하나님의 섭리, 인간의 타락, 신앙칭의, 구원의 단계, 교회제도 등은 칼빈만의 독특한 교리들이다.
2. T. Beza(1519~1605)
- 제네바아카데미 초대원장이자 칼빈의 후계자로서 칼빈 이후 40년간 제네바의 정통신앙의 입장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헌신했고 칼빈의 사상을 체계화하는데 기여했다.
- 1570 <신앙고백>, 1575 <기독교의문답서>외 100여 편의 저술 및 논문(예정론도표)
3. J. Knox(1513~1572)
-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540년에 목사 안수 받음. 칼빈을 만나기 전부터 개혁주의적 신앙과 사상을 견지함. 1554년~1567년까지 스위스로 망명생활.
- 1555년 제네바에서 피난민교회를 담임하면서 칼빈을 만나 제네바아카데미에서 수학.
- 1560년 스코틀랜드의회가 낙스와 윌로크 등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승인하고 낙스가 세운 개혁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함. 이후 스코틀랜드는 로마카톨릭주의를 버리고 프로테스탄트주의를 국교로 정함.
- 1561년 <권징서>에서 교회회의의 단계적 구성과 교회의 직제를 규정하여 장로교회의 기틀을 쌓았다.
4. Zanchius(1516~1590)
- 이탈리아 알차노 태생.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수학. 1551년 제네바레 9개월간 체류하며 칼빈의 설교와 강의를 들었다. 이후 스트라스부르크대학(1553-1556),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1568-1577)로 재직.
- 1566 <혼합>에서 개혀파적 관점에서의 기독론과 성만찬론, 성도의 견인론을 저술하고, 1572년 <삼위일체의 엘로힘>과 <하나님의 본성>에서 칼케돈신조의 정통신앙적 입장을 철저하게 논술했고, 1591 <영적 교통>에서 그리스도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루터파의 개념을 반박하며 그리스도 인성의 유한성을 주장.
- 그는 개혁파 스콜라주의 형성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즉 개혁파의 교리를 조직적으로 해설하고 변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과 스콜라철학의 작품들을 활용하여 결론을 도출하려고 했고, 토마스주의와 칼빈주의를 조화시키는제 노력했다.
5. Polanus(1561~1610)
- 개혁파신학의 초기 형성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베자와 도르트회의의 진행과정에서 논의된 정통 개혁파의 신앙문제에 대하여 중요한 교리적 사명의 글을 발표하였고 예정론의 논문과 로마서 주석을 썼다.
- 그의 <기독교 신학통론,1609>은 개혁파 신앙에 대한 광범위한 변증서이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견해들을 비판하고 개혁파교회의 교리들을 확립했다. 그는 인간의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행위 계약에 관해 최초로 거론한 인물로서 계약신학(Feteral Theology)의 기초가 되었다.
6. Gomarus(1563~1641)
- 스페인 태생의 개혁파 목사이자 신학자. 라이덴대학 조직신학 교수,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수 역임
- 1618년 도르트회의에 참석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논박하고 칼빈주의를 승리로 이끄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신학은 베자와 플란키우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타락전 선택설과 이중예정론을 주장했다. 그는 엄격한 칼빈주의자로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며 '당신의 말씀은 빛입니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7. Wollebius(1568~1629)
- 독일 태생의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 바젤에서 폴라누스의 문하생으로 신학공부. 1611년 목사 안수(43세). 1518년 바젤에서 구약 강의.
- 1626년 <기독교신학개론> 저술로 일약 유명세. 이 책은 기독론이 특징이며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교리에 관한 정확한 해설을 했다. 그는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했다.
8. Voetius(1588-1676)
-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 라이덴대학에서 고마루스와 아르미니우스에게서 수학. 평생 아르미니우스와 논쟁하고 도르트회의에 참석하여 아르미니우스를 정죄했다.
- 1648-1669년 <신학논쟁전집>, 1663년 <교회정치>, 1664년 <수도 또는 경건의 연습>을 저술했다.
9. Turretini(1623~1687)
- 제네바의 목회자이자 신학자. 라이덴대학에서 폴리안더와 부티우스에게서 수학.
- 대표적인 저서는 <논쟁신학강요, 1670-1685>이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용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법을 채용하여 개혁파신학을 체계적으로 진술했다. 이 책은 1812년부터 1871년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으로 대체될 때까지 약 100년간 프린스턴대학의 교과서로 체택되어 미국 정통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보존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0. John Owen(1616~1683)
- 영국의 청교도 목사이자 신학자. 1654년 논문 '성도의 견인'에서 아르미니우스를 비판했고, 1657년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통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1674년 <성령론>에서 개혁파신학의 입장을 증명했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여 성령의 내주를 각인시켰다.
<18세기>
11. Jonathan Edwards(1703~1758)
- 13세 이전에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터득하고 철학 관련 논문을 쓴 천재. 1720년 예일대 졸업, 1722년 대학원 수료한 후 26년까지 모교에서 강의하고, 1726부터 50년까지 메사추세츠의 노샘톤의 회중교회에서 목회. 휫필드의 영향을 받아 대각성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1758년 프린스톤대학의 총장에 취임한지 한 달 만에 천연두 접종의 후유증으로 사망.
- 그는 칼빈주의 정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철학자로서 뉴잉글랜드 칼빈주의의 수호자요 18세기 미국 개혁주의의 중심이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차단키 위해 <원죄론>을, 지나친 부흥운동의 열정을 경계키 위해 <종교적 정서>를 저술했고 그는 19세기의 노예폐지, 선교주의, 윤리적 개혁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활약으로 국교회가 비국교회가 되었다.
- 그의 후계자들, 조셉 벨라미, 사무엘 홉킨스, 조나단 에드워즈 2세, 에몬슨, 테일러 등이 뉴잉글랜드 신학파를 형성했다. 위필드는 에드워즈가 칼빈주의를 변호한 것이 100년 동안 미국 땅에 알미니우스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평가했다.
<19-20세기>
- 미국의 정통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은 장로교회와 화란 개혁파의 신학자와 목회자들, 그리고 (구)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역할로 말미암아 계승 발전해 갈 수 있었다.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1812년 개설된 프린스톤신학이 오염되자 메이첸, 반틸, 머레이 등이 중심이 되어 1920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 따로 칼빈주의 신학을 보존 계승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정통신학의 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2. Alexander(1772~1851)
- 뉴저지 대학(현. 프린스턴)의 위더스푼(1723-1794)과 윌리엄 그라함(1746-1799)에게서 수학한 미국 북 장로교회 목사이자 신학자로 스코틀랜드의 보편실재론의 대가이다. 아쉬벨 그린, 사무엘 밀러와 함께 프린스턴 설립자 중의 한 사람으로 교수 취임식 설교에서 '성경을 찾으라'고 역설하여 큰 감흥을 일으켰고, 이후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 등과 함께 프린스턴 신학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 그는 이신론에 대항하여 참된 지식은 이성과 종교적 체험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고, 성경영감론을 성령의 감독과 성령의 암시, 성령의 상승으로 구분했으며, 성경의 권위를 증명키 위해 객관적인 외적 기준을 찾는 한편 종교적 체험과 성경의 내적 증거를 정립하는데 주력했다. 저서로 <기독교의 내적 증거, 1825>, <종교적 경험론, 1841>, <인생의 본질>이 있다.
13. C. Hodge(1797~1878)
- 투레틴의 영향을 받았고 알렉산더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자이자 스콜라적 칼빈주의자로서 19세기 프린스톤신학교의 지도적인 신학자였으며 그의 조직신학 전3권(1871-1873)은 투레틴의 <논쟁신학요강>에 이어 프린스턴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시대적으로 진화론과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훼손될 무렵, 성경의 초자연적 축자영감과 무오를 주장하여 정통적 칼빈주의를 수호했다.
- 저서로는 <로마서주석, 1835>, <미합중국장로교회 조직의 역사,1840>, <생명의 길,1841>, <다윈주의란?,1873> 등이 있으며 그의 대표작은 단연 <조직신학 전3권>이다.
- 그의 아들 에이 하지는 1877년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프린스톤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으며, 부친이 대중을 상대로 강연한 신학내용을 문답식으로 간결하게 편찬한 <신학개요,1879>는 불후의 교리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또 1881년 워필드와 공동으로 <장로교회 평론>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성경원본에는 오류가 없다고 분명히 선포하여 성경무오설을 지키는 보수주의 장로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4. Thornwell(1813~1862)
- 19세기 남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칼빈주의 신학자를 들자면 돈웰, 댑니, 지라르데우(1825~1898, 콜럼비아대 교수)를 꼽는다. 돈웰은 사우스 캐롤라니나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와 앤도버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835년에 목사가 되었으며, 1847년 35세의 최연소의 나이로 미국 장로교회의 총회장이 되었으며, 1861년 장로교회가 남과 북의 총회로 분리될 때 남장로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1873년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가 되어 1855년까지 윤리학을 가르쳤다. 이후 콜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실천신학과 변증학을 가르쳤다.
- 그는 보편실재론적 사고방식을 사회와 자연을 하나의 통일적 세계로 이해하는데 적용하였다. 그는 자연의 성장 발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점진적인 과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개혁도 하나님 뜻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며 신자 개개인은 이에 적합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 그의 신학체계는 지라르데우가 완성했고 지라르데우의 조직신학은 콜럼비아대의 신학교재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고베개혁파신학교를 설립한 사무엘 피터 풀톤(Fulton, 1865~1938)이 그의 문하생이며, 풀몬의 제자가 일본 개혁하신학자의 대표자인 오카다 미노루(1902~1992)이다.
15. Dabney(1820~1898)
- 남 장로교회의 목사, 신학자, 정치가, 사회평론가이다.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고 모교에서 교회사와 교회정치를 강의했다. 그는 인본주의적 알미니안주의를 강도높게 비판했으며, 스코틀랜드의 보편실재론을 그의 신학적 방법론으로 채용했다. 저서로는 <19세기 감각주의 철학>, <조직신학, 1878>이 있다. 이 책은 887족 분량에 7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73장의 '국가의 위정자론'에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하여 주목을 받았다. 유니온신학교는 그의 조직신학을 신학교재로 사용했다.
16. B. Warfield(1851~1921)
- 프린스톤에서 찰스 핫지에게 수학하고 라이프치히대학에서 2년간 유학(1876-77)한 다음 웨스턴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으면서 디다케연구로 일약 유명해 졌으며 이후 프린스턴에서 스승의 후임이 되어 변증학을 가르쳤다.
- 그는 성경의 외적 증거(학문적 논증)과 내적 증거(주관적 체험의 요소)를 다같이 중요하게 여겼고, 당시 미국에서 성행하던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고등비평적 연구의 경향에 대해 비판하며 성경의 권위와 신적 영감성과 무오성을 확증하여 강력하게 변증했다. 그는 유니온신학교의 자유주의신학자인 Briggs, Smiths등과 오앳동안 논쟁했다. 그는 칼빈의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원죄, 제한적 속죄를 주장했다. 특히 장로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수정논의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고 신앙고백서를 함부로 수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하여 그 논의를 중단시킨 바 있다. 약 100권의 저서를 남겼다.
17. A. Kuyper(1837~1920)
- 바빙크와 함께 화란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1880년 암스텔담의 자유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과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 추임강연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영역주권의 원리를 제창하여 유명한 '일반은총론'이라는 이론을 생성했다. 일반은총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영역임을 말하고,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적 부패에 대하여 섭리적으로 어느 정도 억제케 하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지속되게 하셨다고 주장했다.
- 카이퍼는 루터의 출발점을 인간론적 이신칭의에 있다고 보았으며, 칼빈 사상의 출발점은 포괄적이며 보편적이며 우주적이며 객관적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칼빈의 세계관적 입장에서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일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인각관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이 동등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특히 그의 <성령론,1900>에서 제1은총과 제2은총을 논했는데, 제1은총은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제2은총은 성령을 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협력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23권의 저술을 남겼다.
18. H. Barvink(1854~1921)
- 카이퍼의 후계자. 화란개혁파신학교의 교의학 교수. 1904년 자유대학의 총장 취임하고 1908년 프린스턴대 초청강연에서 '계시철학'을 발표.
- 그의 신학적 방법론의 특징은 튼튼한 성경신학의 기초 위에서 역사신학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밖의 신학체계의 요소들을 종합하여 개혁파신학 자체의 다양한 견해들을 종합하여 새롭게 정리하고 체계화하려는 종합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개혁신학 내의 이견으로 양립되었던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경우 다 같이 하나님의 선택교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어느 쪽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예정에는 선후가 없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으며, 인간의 영혼의 기원관에 있어서 창조설과 유전설의 문제도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또 성경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성경 저자들의 인격 뿐만 아니라 문자와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과 하나님의 모든 계시적 사실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 유기적으로 영감되어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결론지었다.
- 그는 정치와 교육의 문제에도 깊은 관심으로 적극적으로 관여하였으며 대표적 저술로 화란 개혁파 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 <개혁파 교의학 전 4권>이 있다.
19. G. Vos(1862~1949)
- 화란 태생의 미국 북장로교회의 목사로 프린스턴에서 신학교수 역임. 미시간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칼빈신학교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에 진학하여 모세오경을 연구한 다음, 독일 베를린대학과 스트라스부루그대학에서 유학하고, 1888년 귀국하여 칼빈신학교의 조직신학, 주경신학 교수를 역임했고, 1893부터 프린스톤에서 성경신학 교수로 생을 마쳤다.
-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1903>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예언된 사실을 실현시킨 분이임을 상기시키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계시 사이에 역사적 통일성이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범위와 중생된 인간의 모습에서 찾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가 아니면 참된 인간의 행복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로서의 하나님나라'(the kingdom as the church)를 주창했다. 또 <예수님의 자기계시, the self-disclosure of Jesus, 1926>에서는 정통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 온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일치성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집필된 것으로 중보자의 다양한 명칭들을 구약적 맥랙에서 주석하였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기의 죽음에 대해 메시야적인 해석을 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역에 있어서 메시야로 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종말론,1930>에서는 바울의 종말관을 구원관과 연관지어 검증을 시도했다. 그는 바울의 종말관이 바울사상의 핵심이자 전부라고 했다.
- 보스는 성경신학자로서 성경에 대한 포괄적이며 정통적인 개혁파 성경신학을 체계화한 장본인이다. 즉 보스 이전까지 개혁파 신학은 특별계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성경적 이해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이에 보스는 <성경신학-구약과 신약, 1948>을 출판하여 보수주의 개혁파 성경신학을 완성시켰다. 그는 여기서 구원사적인 방법에 의한 성경신학적 구조를 고안하여 발전시켰는데 성경의 계시사상과 예언사상은 구약과 신약을 일관하여 통일적으로 유기적인 관점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또 기존의 주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으로 된 네 분류의 신학범주를, 주경신학을 단순히 성경을 주석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신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봄으로서 주경과 성경신학을 따로 분류하게 되었다.
20. G. Machen(1881~1937)
- 존스 홉키스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린스턴에서 카스파르 하지, 패톤, 워필드에게서 수학한 다음, 독일 마르부르그대학과 괴팅겐대학에서 요한네스 바이스, 빌헬름 헤르만, 부셋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수학했다. 이 때 배운 자유주의신학으로 인해 잠시 갈등했지만 암스트롱과 패톤 등의 도움으로 8년 만에 회복했다. 이후 프린스턴에서 1906년부터 1929년까지 신약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점점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적인 방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달아 그 때부터 자유주의의 입장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프린스톤 내에 마찰이 생겨 1929년 교수직을 사임하였으며 Oswald Allis, R.D.Wilson, C.Vantil 등과 함께 그해 가을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 1937년까지 학장 겸 교수로 역임했다.
- 그는 개교강연을 통해 두 가지를 분명히 강조했다. 첫째,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평범한 책으로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며 둘째, 프린스턴은 이제 더 이상 복음주의의 입장이 아니므로 이제 웨스트민스터가 그 권위를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 그의 신학사상은 기독교 변증론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를 해설하는 일과 기곡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저서로 <기독교와 자유주의, 1923>, 바울종교의 기원, 1925>, <기독교 인간관, 1965>, <동정녀탄생,1967>등이 있다.
21. C. Van Til(1895~1987)
- 화란 태생의 미국 개혁파 변증신학자이다. 프린스턴에서 보스, 카스팔 핫지, 윌슨, 오스왈드 알리스, 메이첸 등에게서 신학을 배우고,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8년에 프린스턴에서 변증학을 강의하다가 사임하고 메이첸과 함께 WM에서 변증학을 가르치다가 생을 마감했다.
- 그는 전제론적 방법이라는 새로운 변증학적 방법론을 체계화했다. 기존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합리적인 논증으로 불신자들을 설득하여 기독교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다른 사상에서 증거와 논증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나, 밴틸은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인간은 하나님께 반응하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이미 영감된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므로 성경 이외의 어떤 인간의 사상에서 기독교진리를 변증하기 위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지나 성경에서 출발하여 성경에서 논증과 논거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밴틸은 철저하게 성경적 기독교 진리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거의 모든 저서에 'In Defence of the Faith'(신앙의 방어에 있어서)라는 표제를 달았다. 그이 제자인 William White는 밴틸을 소개하는 책자에 '신앙의 방어자 밴틸'이라고 소개해 화제를 낳았다. 밴틸의 저서 <조직신학 서론>, <변증학>, <험증학>, <신앙의 방어>, <기독교 인식론>, <칼빈주의의 변호>, <복음의 지적 도전>, <신근대주의> 등은 오늘날 개혁파 신학의 주요한 지침서가 되어 있다.
22. L. Berkhof(1873~1957)
- 화란 태생의 미국 개혁파 목사로서 20세기 초 신정통주의와 지유주의 신학의 조류를 막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위대한 신학자이다. 칼빈신학교에서 보스와 뵈커 하에서 수학했고, 1902-1904까지 프린스턴에서 워필드와 보스 등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이후 칼빈신학교에서 1906년부터 14년까지 신구약을 가르쳤고, 1937년에 <성경해석의 원리>를 집필했다. 다시 1928년부터 44년까지 칼빈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 그는 많은 경우 헤르만 바빙크의 영향을 받았다. 바빙크의 용어와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복사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조직신학, 1941, 58, 60, 63>은 칼빈, 풀러, 루이즈빌, 남침례신학, 고든, 웨스턴, 밥 존스, 무디신학교 등에서 교과서가 되었고, 한국은 신복윤 박사에 의해 1958년 <기독교신학개론>으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칼빈주의 신학교들의 교과서로체택되고 있다. 한편 신복윤 박사는 벌콥의 <기독교교리사,1937>를 1979년에 번역하기도 했다.
- 그는 무엇보다 체계있는 조직신학을 설립한 공로가 크다. 수많은 자료를 이해하고 그 주요한 내용들을 잘 분류하여 함축된 형태로 재생시키는 능력을 가진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이 대표적 저서인 <조직신학>은 분명하고, 간결하고 조리있게 저술되었으며 천성적으로 논쟁을 싫어하여 다른 신학적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작업을 실천했다. 그의 이 책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투레틴의 <논증신학강요>과 함께 개혁파신학의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23. Jhon Murray(1898~1975)
-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개혁파 목사이며 신학자. 1923년 프린스턴에서 카스파르 핫지, 윌슨, 보스, 메이첸 등에게서 수학했다. 당시 미국의 사정은 자유주의가 위세를 떨치면서 '성경의 완전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의 다섯 가지를 부인하는 이른바 "오번확인서(1924)"가 출현했는데, 여기에 장로교 목사 1,292명이 찬성하는 서명을 했고, 급기야 프린스턴은 자유주의신학의 본산지로 개편되고 말았다. 그는 메이첸, 밴틸 등과 함께 프린스턴을 나와 웨스트민스터를 설립하고 1966년 은퇴할 때까지 강의했다. 이 때 그의 동료인 R.B.Kuiper, B.Stonehouse, Paul Wooly, Allan MacRae 등이 함께 가세했다.
- 그의 일관된 신학적 특색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경건함과 진지한 태도로 성경 원문을 정밀하게 해석함을 근거로 하여 신학적 연구를 더하면서 조직신학적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그는 보스의 영향을 받아 주경신학에서의 성경신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구원론,1955>과 <로마서 주석,1959>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사역을 죄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논술하고 있다. 이외 <칼빈의 창조교리,1954>와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칼빈의 견해,1960>를 발표했다.
24. 박형룡(1897~1978)
- 프린스톤에서 메이첸과 보스 등에게서 수학하고 평양신학교, 고려신학교, 총회신학교(현 총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며 한국의 정통 칼빈주의의 확립에 공한한 신학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교리와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영감교리를 주장했다. 저서로는 <교의신학 전7권>외 14권의 주요 저서들과 100여 편의 주요 논문이 있다.
25. 박윤선(1905~1988)
- 웨스트민스터에서 메이첸, 밴틸, 에드워드 영 등으로부터 언어학과 변증학을 배우고, 화란 자유대학에서 신약학을 연구했으며, 고려신학교를 설립했으며, 총신대와 합동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한국인 최초의 주석집인 <신구약성경 주석>과 <성경신학>, <교회헌법주석>외 250여 편의 논문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칼빈주의 정통 보수주의 주경신학을 확립하고 계승함에 있어서 혁혁한 공헌을 한 세계적인 신학자이다.
26. 오카다 미노루(1902~1992)
- 고베중앙신학교에서 사무엘 풀튼에게서 신학을 수업받은 후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 특히 워필드로부터 영향을 받음. 일본 코베개혁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일생을 헌신하며 일본의 개혁파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개혁파교리학교본,1969>이 있다.
27. 최순직(1923~1999)
- 평양신학교를 거쳐 총회신학에서 박형룡으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운 후 코베신학에서 오카다 미노루에게서 수학하고 탈봇에서 공부했다. 특히 미노루 교수의 신학을 그대로 전수했다. 대한신학교(현 대신대학원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고, 기독신학교의 학장을 역임했다. 대표적 저서로 <6일의 신학-기독교 노동론>, <플러스의 인생>, <크리스찬의 생활규준-복음 하의 율법>이 있다.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출처] 칼빈주의 정통신학자들 (아리엘교회) |작성자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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