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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 / 제3장 비구미 신학

by 【고동엽】 202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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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

제 3 장 비구미 신학

 

Ⅰ. 해방신학

 

남미의 특수적 상황을 배경으로 정치, 경제의 비판적 인식을 골자로 한 정치적 구조와 사회악을 신학적으로 대처한 남미의 신학이다. 이 신학은 빈부의 격차와 정치적 억압을 없애고 현실적 자유와 해방을 강조하여 신학의 현실적 기여를 강조한다.

 

 

1. 직접적 배경

 

해방신학은 시기적으로 볼 때 후기 에큐메니칼 신학이다. 공산주의 마르크스 사상을 옹호하는 가운데 몰트만, 리차드 쇼울 등을 비롯한 신학자들이 혁명 가운데 역사하시는 혁명의 신학을 제창하였다. 이 몰트만의 연설문이 라틴 아메리카에 재빨리 문서로 소개되면서 진일보한 혁명신학이 논의되었다. 1970년대 초에 해방신학의 붐이 남미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일기 시작한다. 구스타브 구티에레즈, 세군도, 휴고 애스만, 루벤 알베즈, 호세 미크에즈 등이다.

 

 

2. 신학적 배경

 

해방신학의 연원을 거슬로 올라가면 20세기 초반, 북아메리카에서 사회적 변혁운동의 대표적 인물, 발터 라우센 부쉬(1861-1918)응 만나게 된다. 그는 사회적 선과 악을 집합적으로 보았다. 1917년 그의 저서,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에서 하나님 나라와 영적 중생의 개념을 어떻게 사회화시키고 제도화 할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일차적으로 ‘크리스챤 아메리카’를 만들기 위하여 ‘아메리카 드림’을 부르짖었는데, 노동문제, 인권문제, 국제문제 등으로 크리스챤의 참여를 강조하였다. 개인의 구원과 윤리문제는 경시하며 하나님 나라와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의 성취를 동일시 보았다.

 

리차드 쇼울은 1955년 Encounter With Revolution에서 라우센부쉬에게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혁명 신학을 제창한다. 쇼울은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를 중요시하며 사회의 구조적 변혁이 개개인의 변화와 함께 중요하다고 보았다. 쇼울은 남미의 해방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전통적 기독교 사상이 현상 이해에 실패하였으므로 이제는 새로운 기독교적 혁명 방향히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1892-1964) 1932년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를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분석한다. 초기에 마르크스의 영향을 입어 사회주의와 현실주의의 색체를 강하게 드러내다가, 소련과 유럽의 독재와 폭력 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그는 다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1930년대 미국에 몰아닥친 경제공항으로 그는 다시 한번 더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가 비관주의가 된다. 국가의 경제 생활을 결정하는 자본가의 기업이 갖는 막강한 힘이 쇠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중앙 정부의 권력이 집중하는 것을 독일의 나치하에서와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가 보여 주는 위험성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시대적 상황속에서 사회의 부도덕성이 크면 클수록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의 책임이 크다고 보았다. 니버는 안이한 유토피아적 해결 방법을 거절하고 민주적 방법으로 사회의 악을 해결하려고 시도해야 함을 역설한다.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는 그가 살고 있는 독일 당대의 반히틀러 지하 저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학자이다. 나찌 정권은 곧 적그리스도이며 독일 교회는 제자도의 값을 치러야 할 것을 촉구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당시 사회악에 대항하여 혁명의 정신으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신학은 히브리적 역사 이해에서 시작된 미래 중심적 역사관이다. 미래를 강조하는 역사관은 마크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기도 하다. 첫째, 현실의 모순과 고난을 극복하고 타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둘째,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조한다. 셋째, 종교는 현실 고통에 대한 신비적인 항의에 불과하다. 넷째, 현대인의 고통과 소외는 경제적인 요인이 주된 원인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공산주의의 인간 소외의 표면적인 분석, 또 인간을 신의 위치에 지나치게 절대화한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은 환멸과 폭력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므로 이것을 정권 탈취의 정당한 방법이해하는 것에서 완전한 결별을 한다. 반면에 에른스트 블로흐의 영향을 받아 불의한 정치 구조를 개혁하는데 교회가 앞장서야 함을 강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하비 콘 교수의 지적과 같이 해방신학의 신학적 근거는 유럽의 정치신학과 다른 하나는 몰트만의 희망신학으로 설명한다.

 

3. 해방 신학의 제문제

 

종래의 정통신학에 대한 도전이요, 거부에서 비롯된 만큼 신학적 방법론, 신학적 주제, 성경의 해석학에 있어서도 문제들이 제기된다. 구스타브 구티에레즈와 다른 신학자들은 예수와 기독교 신앙을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방법론을 그대로 채택한다. 이분법적 분석방법을 통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구분해서 소위 행동 신학(Doing Thedlogy)의 새로운 방식을 세 단계 분석으로 주장한다. 1) 현실 분석이다. 사회를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이분화하여 대외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서 라틴아메리카 제국의 경제적 종속에서의 해방과 국내적으로는 억압자에 대한 피억압자의 종속에서의 해방을 구도화한 분석이다. 2) 성경의 검토이다. 해방신학자들은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다. 구원이란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해방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자로서 인간의 해방을 위해 위풍당당히 죽음을 맛보았다. 또 출애굽 사건은 계속적인 해방을 위한 투쟁의 근거로 우리는 경제, 사회, 정치, 문화에서 예속 당한 상태로부터 출애굽 사건을 이해해야 함을 지적한다. 3) 민중의 의식화 단계이다. 두 계층의 화해 불가능을 처음부터 고착화시켜 놓고, 민중에 의한 폭력의 정당성을 고무적으로 인식시킨다. 주로 산업 근로자의 계층을 대상화한다. 새로운 전도방식을 채택하여 산업 전도, 가난한 자가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워 행동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말한다. 성경은 현재 상황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데 필수적으로 보며 성경계시가 아닌, 역사적 상황에 근거를 기반으로 현실 유지의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4. 비판적 논의

 

1) 계시의 상황

성경의 계시를 무시한 채 역사적인 실제만을 근거로 제시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고 현대 사회주의의 이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성경의 계시성을 약화내지 변질 시킨다.

 

2)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수용

기독교와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전제를 어떻게 정치적 사회분석 방법에 도입할 수 있을까? 해방신학이야말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진실한 신학이라고 주창하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사회적 불의가 있는 곳에 영적 불의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색안경을 사용하는 것 부터가 변질된 기독교를 지지하는 것이다.

 

3) 구원의 참 뜻

성경에도 없는 예수의 모습, 즉 그리스도 구속주 되심과 메시야 됨을 사회정의를 위한 평등과 정의구현으로 성경을 왜곡시킨다. 또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구원을 받으며 그들이 정치적인 해방에 따라 실질적인 구원을 받게 된다는 구원교리는 비성경적이다. 따라서 죄를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역사적 사실로 간주된다.

 

4) 교회의 사명

교회는 마16:16의 신앙고백 위에 근거한 세상과는 엄격한 경계선이 있다. 그러나 신앙고백 없는 세상의 정치, 구조의 혁명을 위해서 집합된 폭력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회개와 개종을 통한 영혼의 변화를 우선시 할 수 없다.

 

5) 종말론과 미래의 소망

해방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해방된 사회’로 본다. 몰트만의 종말론적 희망신학에 있어서 그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가 정치적 반란과 활동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중 운동을 민중에게 끌어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해방 신학은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을 강조하되 가난한 자를 지상에서 완전히 없이함으로 이룩되는 완전한 평등한 사회 유토피아를 약속한다.

 

 

 

Ⅱ.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1.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의 특색

 

일본의 신학자, 기다무라가죠의 1945,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출간한 이래 그의 신학적 해석 틀은 여타 신학계에서 상당한 호응을 받게 된다. 기다무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요소를 하나님의 아픔에서 발견하고 일본인들의 ‘아픔의 체험’과 결부시켜 신학적 해석의 원리로서 ‘하나님의 아픔’을 제시하였다. “아픔에 있어서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아픔을 가지고서 우리 인간들의 아픔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아픔은 이 진노의 대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지적한다. 이 두 요소로부터 제 3의 것, 곧 하나님의 아픔이 생긴다. 기다무라의 십자가 신학은 바울의 경우에서처럼, 그의 모든 신학 사상의 원천임을 고백한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십자가에 대한 재해석이 일고 있으나, 슐라이마허, 리츨, 헤르만, 하르낙 등이 이해하는 십자가는 중보자가 없는 하나님 사랑 위주의 십자가 이해이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더나아가 기다무라는 ‘하나님의 아픔’을 계시와 동일시 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철학이나 사상과 혼동하는 것을 거절한다.

 

유사한 사상으로는 첫째, 쉘링의 후기철학으로서 ‘하나님 안에서의 자연’이다. 쉘링의 사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 개념으로부터 제 3의 것, ‘고뇌하는 하나님’으로 이른다. 이 ‘고뇌하는 하나님’없이는 모든 역사는 한낱 수수께끼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기다무라는 쉘링의 철학과 유사점을 인정하면서도 쉘링을 모색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하며 그는 하나님의 아픔 그 자체에 접촉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사변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한다. 둘째, 일본의 배경에서 이해된 불교사상과 유사함을 찾지만, 하나님의 아픔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본다. 셋째,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감사주시는 하나님은 될 수 있어도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기다무라 신학의 문제점

 

1) 신학 방법론의 문제

그는 그의 신학의 성경적 근거로 렘31:20, 사63:15, 고저1:18, 벧전2:24을 언급하며 제시한다. 이런 성구에서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창출하여 그의 전 신학의 체계에 근간을 삼고 있다. 문제는 성경본문의 문맥적 의미와 상관없이 해석되어진 것이다. 상황(Context)이 본문(Text)을 다스린 셈이다.

 

2) 성부 수난설

기다무라는 요한복음을 도입하여 예수의 역사성 속에 하나님의 아픔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픔 자체를 하나님의 본질로 보고 그 아픔이 결국에 십자가로 나타남이 필연적이란 논리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시를 피하기가 어렵다.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아픔이라기 보단 하나님의 사랑에서 연유된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의 본질적 설명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아픔이다”로 설명할 수 없다. 기다무라가 루터파의 강조한 십자가 신학의 영향으로 하나님 아픔의 신학이 창출되었다면, 기다무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이기심을 함께 강조한 루터의 신학에서 소홀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Ⅲ. 민중신학

 

1. 민중신학의 출발

 

미국의 흑인 신학, 남미의 해방 운동의 경우와 같이 1970년대 한국의 역사적 상황, 즉 박정희 독재정치 및 산업화 현상 하에서 민중의 자각과 함께 일어난 문화 신학 운동이다. 서남동은 자신의 신학, 민중의 출발을 1974년 ‘예수와 민중’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면서 시인 김지하의 문학과 사상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또 그는 “예수, 교회사, 한국교회”란 글에서 예수는 민중과 동일시,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며 소외된 민중을 해방하며, 지금은 복음이 다시 민중의 종교로 될 수 있는 지평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민중의 소리를 듣고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민중을 위한 교회’와 ‘민중 신학’이 한국 교회 일각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다가, 1982년 KNCC 신학연구위원회에서 체계 있는 신학 작업으로 민중과 한국 신학이 출판되었다.

 

2. 민중 신학의 주장

 

1) 신학이 주제로서의 민중

‘민중’이란 ‘한국 민중’을 뜻한다. 신학자들은 독재자에게 시달리는 민중을 거리와 교도소, 판자촌에서 만나며 민중의 눈을 통해서 성경을 읽게 되면서 성경이 바로 ‘민중의 책’이란 사실을 발견하였다. 구약의 ‘히브리 노예들’과 복음서의 ‘오클로스’가 바로 성경의 ‘민중’들이며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일으킨 사건들에 관한 ‘민중의 책’으로 새롭게 이해하려 한 것이다. 안병무는 공관복음에 소개된 무리 가운데 언제나 예수와 더불어 있는 무리, 그리고 예수가 언제나 관심한 이 무리를 단적으로 무리라고 본다. 민중 신학자들의 민중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지만, 몇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나타난다. 첫째, 민중은 단순한 대중이 아니라, 소수의 특권층에 의하여 억눌리고 수탈을 당하는 소외 군중이며 피해 대중이다. 둘째, 이 민중은 서구적 개념보다 한국적 역사 경험에서만 이해된다. 셋째, 민중에 대한 바른 개념은 인간 해방을 위한 역사적 과제를 동시 불러들인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이고 그 나라의 주인이다.

 

2) 반신학으로서의 민중 신학

민중 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타 신학들은 사변 놀음에 불구하다. 전통적인 신학의 방법을 뒤집어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곧 민중의 삶의 현장을 통하여 얻어진 지혜를 가진 성경과 신학을 해석하는 새로운 해석학을 주장한다. 이런 ‘반신학(Counter Theology)’의 성격을 서남동은 “전통적인 신학은 초월적인 신존재에서 출발한다든지 씌어진 성서나 주어진 교리에서 출발하여 이어받은 전통을 굳혀 간다.”고 주장한다.

 

3) 민중적 예수 이해

서남동은 마25장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는 곧 민중이다.”라는 동일성, 민중 신학의 기독론 공식을 세웠다. 그는 이 ‘동일화’ 야 말로 ‘무조건적 동일화’요, ‘절대적인 동일화’라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도 정치적 살해로 인정되고 예수의 부활도 사회학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진다. 예수가 죽은 것도 속죄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갈릴리 민중에게 인권 회복을 위한 의식화 작업을 계속하고 율법에 도전하니까 자신들의 체제 유지를 위해 예수를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처형이었다고 한다. 곧 인권회복을 위한 의식화 작업 때문에 예수가 죽은 것이라면 예수의 의식화 작업을 통하여 민중이 각성되어 미래의 새 역사에 들어서게 되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 부활은 어디까지나 몸의 부활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라고 한다. “우리의 부활은 사회학적인 것이다. 부활은 사체의 소생으로 이 세상에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새 사회에서 부활하는 것이다...부활 상징은 이렇게 사회학적, 정치 신학적인 개념인데, 부활신앙은 새로운 사회, 메시야 정치를 향한 의지인 것이다.”

 

4) 새 공동체로서의 민중 교회론

민중신학은 현장교회를 주장한다. 교회란 평등주의적 언약에 근거하여 세워진 새로운 공동체이다. 성직자가 필요치 않으며, 이는 해방신학이 성속을 구별하지 않는 것처럼 교회와 세상의 구별을 배제하는 것이다. 교회는 민중이 일하고 거하는 곳이 교회가 될 수가 있고, 도시 빈민 지역의 숙박처가 곧 교회가 될 수 있다. 교회는 구조악을 대항하여 싸워 민중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의 인권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다.

 

3. 민중 신학과 해방 신학

 

 

민중 신학과 해방 신학은 그 생성 배경과 동기가 서로 다르지만 몇 가지 유사점과 상이점이 있다. 먼저 유사점은 신학의 출발에 있어서 계시에서 시작하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출발한다. 역사적 정황이 신학의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다. 계시(Text)를 무시하고 상황(Context)에서 신학의 출발을 시도한다. 또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사회적 혁명 속에 나타난 새로운 인간의 형성과 동일시한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로 본다. 죄의 개념에 있어서 범죄한 인간의 책임보다 잘못된 사회 구조와 정치구조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서구 신학의 본체론적 사고방식을 떠나 문화와 역사에서 신학의 소재를 찾아 비서구화된 신학을 수립한다.

 

해방 신학은 외부의 경제적 침략이 생성의 배경이 되지만, 민중 신학은 내부의 민중 탄압이 신학 생성의 배경이다. 해방 신학은 가톨릭적 전통 속에서 기독교 신학 이해를 강조한다. 그러나 민중 신학은 한국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포함하는 포괄적 문화 신학이다. 해방 신학은 마르크스주의 사회비판 이론과 계급투쟁적 역사 해석을 채용한다. 그러나 민중 신학은 마르크스의 역사 해석의 도움을 거절하고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4. 민중 신학 비판

 

앞에서 살펴 본바, 민중 신학은 한국 신학자들의 정치, 사회적 자서전이다. 다시말해 한국적 상황속에 신학을 정치적 작업화 하였다. 따라서 성경이 아닌, 잘못된 한국의 정치, 사회 상황을 기반으로 한 신학화 작업은 결국 급진적 신학으로 비신학화로 끝나고 말았다. 민중신학은 엄밀히 말해 기독교 용어를 빌린 비기독교적 정치 사회 운동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신학적 규범을 부인하고 역사적 전거들을 규범화한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성경을 다른 역사적, 사회학적 서적들과 같은 자료로 취급되고 만다. 성경은 하나의 민중 신학의 참고서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속적 개념, 미래적 구원개념이 없다. 민중 신학에서 죄와 회개에서 오는 구원 개념 대신에 ‘한 풀이’ 개념을 말하고 민중의 인권 회복에소 오는 구조적 구원을 말한다. 이러한 구조적 구원을 위해 해방 투쟁을 하여야 하며 그런 투쟁에서 쟁취된 민중 중심의 세계가 곧 구원 세계이다.

 

 

Ⅳ. 토착화 신학 - 윤성범의 ‘성(誠)’신학

1. ‘성(誠)’ 신학에 나타난 사상

 

윤성범은 ‘성(誠)’을 종교나 신학의 핵심으로 보고 ‘성(誠)’을 신격화 작업한다. 그 최초의 업적이 1969년 “기독교 사상지”에 발표한 한국의 신개념생성이란 논문을 통해서이다. 여기에서 제시한 단군 설화의 삼신 개념과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을 결부시켜 토착화 신학 작업을 전개하여 그는 한국적 신학의 수립을 시도한다. ‘성(誠)’ 신학의 조화성을 율곡과 충무공이 각각 이론화 작업 및 실제화 작업에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윤성범 자신의 신학적 ‘전이해’로 삼고 있다. ‘성(誠)’ 신학은 에큐메니칼적인 신학을 지향하고, ‘성(誠)’ 신학은 종합적인 방법을 시도한다. 윤성범은 ‘성(誠)’ 개념이야말로 역사와 초 역사의 긴장을 지닌 특이한 개념으로 주장한다.

 

1) 신론

 

한국인은 계시라는 낯설은 개념보다는 ‘성(誠)’이라는 친근한 개념을 도입하여 신학적 문제를 대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윤성범은 한국의 신관은 천 사상(天思想)에서 출발하며 중국의 상제사상에 영향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유교는 중국의 상제사상보다 더 인격신으로 화하여 버렸다. 따라서 한국의 신 개념은 실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율곡의 성 사상이 한국인의 골격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 또 삼일신(三一神) 사상으로 집약되는 단군신화는 기독교 삼위일체 사상 이해의 전이해로서 받아들일 때 진리 이해의 상보관계가 성립됨을 주장한다.

 

 

2) 기독론

 

‘성(誠)’ 개념은 기독론적 해석학적 술어로서 최적의 개념이라고 한다. 성은 말씀의 성립이자 동시에 말씀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성립은 역사적 예수를 말하고 말씀의 완성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복음의 대표자요, 율법의 마침으로 본다. 둘째 성은 말씀으로 화목, 중재를 뜻한다. 성이랴말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신학적 해답으로 선정한다.

 

 

3) 성령론

 

성령론은 기독론의 연장으로 기독론의 현재화 내지 장래화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시시각각으로 귀를 기울이고 순응하는 신앙을 가지고 계시의 올바른 이해를 주객성의 중심에서 추구할때만이 참 성령의 뜻을 따르는 것이 된다. 윤성범은 이것을 ‘유교의 중용’에서 찾고 더 나아가 율곡의 성에서 찾는다.

 

2. 비판적 평가

 

윤성범은 잘못된 전제를 설정하였다. 단군신화의 잘못된 골제 위에 종교적 형식을 갗춘 생명적 기독교를 대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군 신화의 해석적 고찰에서 얻은 것을 기독교 신관과 근사점을 찾아서 주체성 있는 복음의 한국적 체질화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 아무도 믿지 않은 미신적 신화를 복음 진리와의 무리한 혼합을 통한 한국적 신학의 수립에 동의 할 수 없다.

 

유교 사상의 ‘성(誠)’ 개념을 기독교 신학의 해석적 방법론으로 극대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삼고자 한다. 이질적인 두 종교 사이에서 ‘성(誠)’을 매개로 한 동질적 해석은 불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誠)’ 개념 자체를 인격화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율곡의 성 모티브가 아무리 특이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양의 낙관적인 자율주의 사상의 열매에 불과하다. 성 개념의 인격화 및 신격화 작업을 시도한 그의 한국적 신학은 순수한 한국적인 것도 아니고 건전한 기독교 신학도 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크리스찬 사이언스 종교가 크리스찬도 아니요, 사이언스도 아닌 것과 같다.

 

출처: DANIEL OH 2010.03.15 16:47 http://blog.daum.net/danielcompany/8898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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