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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 / 제2장 미국 신학

by 【고동엽】 202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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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

 

제 2 장 미국 신학

Ⅰ. 개혁주의 신학

 

 

1. 프린스톤 신학

 

개혁주의 신학은 16세기 제네바에서 존 칼빈에 의하여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발전한다.

 

1) 먼저 유럽대륙에서 화란 개혁교회의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가 대표적이다. 미국이민자들은 미시간주 칼빈 신학교에서 그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2) 또 한 편으로 영국으로 건너간 개혁주의 신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널리 확산되었고 다시 미국 이민자들을 통하여 1706년에 미국 장로 교회 첫 노회를 설립해서 1812년에 프린스톤 신학을 설립하여 미국 교회 교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프린스톤 신학의 영향은 미국 사회적인면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또 19세기 미국 문화형성에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공헌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대표적인 신학자들로 아치발드 알렉산더와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가 있다.

 

1. 1.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bald Alexander 1772-1851)

 

 

1812년 프린스톤 신학교가 설립되고 첫 교수로 알렉산더가 취임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는 자연신론이 대두대면서 자유주의가 일어나고 있었고, 뿐만아니라 미국 전역에 부흥회 운동으로 만연된 감정주의로 혼란이 일고 있었다. 따라서 프린스톤 신학은 두 가지 문제, 반자연신론적 변증과 성경의 권위에 역점을 두었다.

 

자연신론의 반하여 알렉산더는 종교에 있어서 이성의 올바른 사용의 타당성과 성경적 계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또 당시 잘 믿는 신자는 개혁주의 교리를 믿는 것보다 영적인 체험을 가지고 뜨겁게 믿는 것으로 통할 때에 알렉산더는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며 교리적 확신이 없는 영적 체험이 얼마나 위험한 신앙인지 피력한다. 따라서 프린스톤 신학의 사명은 당시 미국내 부흥회적 종교의 열정으로만 가열된 신학생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으로 신학적 방향성을 제시하여 신학과 경건을 겸비한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1. 2. 찰스 핫지(Charles Hodge)

 

그의 탁월한 귀납법적 조직신학 연구때문에 오랫동안 프린스톤 신학의 대명사가 되었다. 찰스 핫지는 알렉산더의 신학적 가르침을 잘 계승하여 성경의 권위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위에서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따라서 그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합리주의와 주관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참 신학의 방법으로 베이컨의 귀납법을 따랐으며 성경적인 신학의 합리성을 제시하였다. 핫지는 신학의 합리성을 이렇게 주장한다.“하나님은 조직 신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속에서 진리를 주셨다. 그 진리는 합당하게 이해되고 체계화되면 신학의 과학을 성립시킨다. 자연 사물이 물리적 법칙에 의하여 서로 연관되고 결정되는 것처럼 성경도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본성에 의하여 서로 연관되고 결정된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된 만물을 연구하여 그들의 놀라운 유기적 관계와 조화를 발견하도록 원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배워서 진리란 끝없는 조화와 장엄함 속에 엮어지는 조직이요, 체계란 사실을 깨달을 것을 원하신다”

 

1.3.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알렉산더가 프린스톤을 이끌어 갈 때 목회적 신학 경향으로 기울어 갔다. 핫지는 그 뒤를 이어 조직신학으로 묶어 신학적 기초를 세웠다. 워필드는 이미 확립된 신학을 변호하는 변증학 교수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다. 위필드가 프린스톤에서 가르칠 무렵 핫지의 신학은 사방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개혁주의 인간론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독일에서는 이성을 계시의 자리로 대치한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에 맞섰다. 이러한 주의 상황은 워필드로 하여금 방어의 신학자요 기독교의 변증가로 나서게 한다.

 

그러나 변증학의 입장을 일반신학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는 화란 신학자들의 입장과 달리했다. 당대 화란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는 변증학이 모든 신학적 사명을 마친 뒤에 기독교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신학의 맨 마지막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워필드는 당시 미국의 성경의 권위와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들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과격한 자쥬주의적 신학의 오름세때문에 변증학은 일반 신학에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워필드가 변증학에 대한 열정은 그의 두 번에 걸친 유럽 유학을 통하여 독일 신학의 문제점을 직접확인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튀빙겐 학파 바우어의 신학적 탈선과 아돌프 하르낙의 교리사를 가장 파괴적인 요소를 담은 책이라는 지적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가장 예리한 분석과 변증적 비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워필드는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를 성경 자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과, 또 자연주의적 전제를 도입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지적한다. 기독교 자체의 특색을 성경 속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독단적 진리를 찾으려는 잘못된 철학에 맞도록 기독교를 변조했다는 것이다. 워필드는 그들의 사상적 배경과 소속 학파, 철학적 전제를 철저히 밝히며 기독교를 변증하는 한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조직신학의 정당성이란 그의 책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교리적 신학의 변증을 잘 변호하였다.

 

1.4. 프린스톤 신학의 특색

 

장로교 프린스톤의 개혁 신학은 19세기 초엽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한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이 신학의 특색은 그 단일성에 있었다. 앞서 소개한 세 신학자들이 계대적 전통계승과 교리적 일치를 통하여 개혁주의 성경의 권위를 높였다. 1904년 워필드는 그 교리적 기반을 이렇게 공언하였다.“칼빈주의는 교리적으로 순수한 고백종교다. 우리는 교회적 순수성을 강조하며 오직 그것이 칼빈주의이다. 칼빈주의적인 것을 배제하고 지상에 참 종교는 없다. 본질상으로나 의미상으로 칼빈주의적일 때만이 참 종교라 할 수 있다.”다음으로 또 하나의 프린스톤 신학의 특색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이다. 상식 철학은 프린스톤 체계의 신학적 방법론을 제공한다.

 

 

2.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1881-1937)

 

워필드 밑에서 특별지도를 받고 독일 유학뒤, 1906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가르친다. 그러나 프린스톤의 신학적 변천기에 정통 신학자로 고군분투하다 학교강단을 물러간다. 그러나 그는 전 미국 정신계에 파급되리만큼 지대하다.

 

1) 그의 신학과 사상

 

메이첸은 워필드와 같이 기독교 변증에 많은 관심을 쏟는다. 바울종교의 기원, 기독교와 자유주의, 믿음의 본질은 그가 저술한 학적 탁월성과 개혁주의 신앙 때문에 그를 프린스톤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로 세웠으며, 또 그는 성경 진리의 이성적 방어의 필요성을 통하여 기독교 변증을 피력하였다.

 

다음 세 가지 특징을 통하여 메이첸을 알수 있다. 첫째, 그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에 반한 기독교의 역사성, 즉 사도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복음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 그 역사성을 강조한다. 성경의 모든 신빙성은 역사적 조사와 증빙문서에 제공된 증거의 분석에 의하여 증거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프린스톤의 성경적 개혁신학을 계승한다. 메이첸은 프린스톤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일부 프린스톤 교수들과 함께 세워야 하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1929년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개학 예배에서 “프린스톤 신학교는 이제 죽었지만, 프린스톤 신학교의 전통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 프린스톤 전통을 손상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신학교는 모호하고 타협적인 토대위에 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스럽고도 정직한 토대 위에 굳게 서서 옛 프린스톤 신학교가 견지해 왔던 동일한 신학을 보존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장로교 교회 신앙 고백에 명시된 대로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한다. 메이첸은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을 그의 사명으로 알고 탁월한 학문성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싸웠다. 그가 쓴 변증적 형태의 많은 저서들, 기독교의 기원 사실의 성격, 성경의 성격, 그리스도 동정녀 탄생의 타당성 등은 이것을 뒷받침한다.

 

2) 메이첸의 과오

 

정통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노력 때문에 교리와 신앙의 지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주지주의적인 성향과 표현들이 나타난다. 또 그가 가진 신학적 순결과 신학적 의지 때문에 메이첸은 교회의 분리로 연결되는 불행을 초래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긴장속에서 순결과 연합이 발전되어 오다가 양자간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3. 루이스 벌코프

 

미국 미시간에 소재한 칼빈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서 20세기 중엽까지 미국 보수 교회 전반에 걸처 가장 많은 신학적 영향을 끼친 개혁주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20세기 초엽에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단순한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면, 루이스 벌코프는 그 이상으로 자유주의 주장대로 사회적 무관심을 보이던 보수주의 신학의 허상을 솔직히 부분적 실수를 지적하면서, 또 개인 구원의 복음과 타계적 복음 전파 이상의 사회에 대한 교회적 책임을 촉구하였다. 따라서 목사들은 단순히 구원복음만 전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로서 사회개혁을 위하여 단체를 조직하여 적극적 책임으로 사회 참여 할 것을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입장을 들어 강조하였다. 근본주의와 달리한 또 하나의 특이점은 세대주의와 전천년설에 대한 그의 부정적 입장이다.

 

1) 개혁주의 신학은 단순한 기존 신학의 변호와 보수에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부단히 창의적인 발전을 거듭하는데 그 특색이 있다. 그러나 그는 화란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를 지나치게 의존하여 화란 신학의 수입적 역할만을 하고 만다.

 

2) 조직신학에서 성령론 취급은 지극히 미흡하다. 카이퍼의 성령론을 받아들일수 없었다면 반론이라도 전개하면서 비중있게 다루었어야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서 잘 엿볼 수 있는 성령론의 무관심은 루이스 벌코프에게서도 다를바가 없다.

 

4. 코넬리우스 반틸

 

화란 개혁교회 목사로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영향아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대표적 신학자로 변증학을 가르쳤다. 그가 내세운 변증학은 종전의 접근방식과는 달리 변증을 버리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론을 인식체계로 전제주의를 제창하였다. 물론 그의 변증방식에서 알수 있듯 신학적 진술이 과도한 탓으로 때로는 변증학과 조직신학을 혼동케 한다. 그는 워필드나 메이첸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 사상을 시정하고 보다 복음자체의 본질에 일치한 개혁주의적 변증학을 확립한 신학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권위주의의 표본이라는 비난과 함께 그의 반복적 진술이 지나친 점은 신학적 정열의 과잉으로 보여지며 그의 칼 바르트 비판서인 사상연구는 기념비적 공헌을 세웠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단순히 변증학자에 그치지 않고 변증을 위한 신학적 진술을 전제한 신학과 변증의 상호 보완적 관계성을 독특하게 보여준 공헌자이다.

 

5. 프란시스 쉐퍼

 

60년대 중엽부터 쉐퍼는 복음주의 지성인들에게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를 통해 그의 탁월한 지성적 가르침과 저서로 영적인 자극과 감동을 주었다. 그는 복음적 입장에서 현대문명의 병폐를 지적하고 진단하며 삶의 한 복판에서 구현화되는 살아 있는 복음적 기독교를 제창하였다(이성에서의 도피). 교회와 문화관계를 역사적 연결고리로 설명하고 교회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쉐퍼는 문화 신학자요 동시에 문명 비평가로서 예리한 분석과 비판력은 높이 평가된다. 쉐퍼는 단순한 기독교 사상가로 머물기 원치 않았다. 첫째, 분명한 교리적 확신(정통신앙)과 둘째, 구체적인 사랑의 구현(신앙의 사회적 적용)을 실천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의 물질적인 부요의 문제, 인종차별주의, 교회 안에 공동체 개념, 낙태문제 등 다방면에서 쉐퍼는 그의 21권에 달하는 저술 속에 인식론에서 시작하여 문명비평까지 창의적인 답변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그를 신학자로 보아야 하느냐, 전도자로 보아야 하느냐의 이론이 있다.

 

 

Ⅱ. 존재의 신학 Theology of "Being"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철학으로 시작하여 신학으로 결론을 내리는, 철학과 신학의 조화일치를 시도한 종교철학자이다. 그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프로테스탄트의 원리

 

틸리히는 루터교 배경에서 자란 루터교 신학자였기에 루터의 칭의론을 재해석하여 거기에서 현대적 의미를 찾는다.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중심된 원리는 칭의론 교리이다. 그는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에게까지 칭의론을 확대 적용한다. 1952년 존재에의 용기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곳에서도 칭의가 적용된다고 보며 칭의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2. 상관의 방법

 

이 방법은 기독교의 진리를 실존적 질문을 통하여 철학적으로 묻고 다시 신학적으로 대답하는 방식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모든 신학은 항상 인간 존재의 분석으로 연결된다. 그의 모든 신학적 문제는 신 개념이 인간 개념에 상호 관계로 본다.“하나님은 그의 본질상 인간에게 의존되지 않으나, 그의 계시면에서 계시를 받아들이는 인간에게 의존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질문에 대답하고 이런 하나님의 대답의 범위 안에서 인간들은 인간 문제들을 묻는다." 틸리히가 이런 다이나믹한 신-인간의 실존적 문제로 출발하는 것은 그가 실존주의적 신학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항상 인간 존재의 분석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그의 조직신학적 체계는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질문 대답의 양태로서 전개한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조직 신학은 경험을 통해서 원천적 자료(성경, 기독교 사상사, 종교사, 현대문화를 포함한 문화사)가 우리에게 이해되고 수납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① 이성과 계시 ② 존재와 신 ③ 존재와 그리스도 ④ 삶과 영 ⑤ 역사와 천국

 

 

3. 존재의 신학

 

존재의 근본적인 과제,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문제를 틸리히는 기독교의 신과의 관계성으로 답하고, 다시 신의 실재문제를 창조와 인간과의 상호관계성으로 연결함으로써 신과 세상의 문제로 설명한다. 틸리히는 인간 실존의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예수 그리스도, 즉 ‘새로운 존재(New Being)’로 본다. 불완전하며 허무한 존재인 인간을 새로운 실재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으로써 새로운 실재에 참여한다고 한다. ① 새로운 존재 속의 참여로서의 구원-중생(Regeneration) ② 새로운 존재를 수용하는 구원-칭의(Justification) ③ 새로운 존재에 의한 변화로서의 구원-성화(Sanctification) 틸리히는 바르트의 초월주의를 거절한다. 오히려 그는 종교와 문화의 틈을 메우려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세속적이고 모든 세속적인 것은 잠재적으로 종교적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교회와 세상, 문화와 종교, 가시적 교회의 구별은 있을 수 없다.

 

4. 존재의 신학 비평

 

불트만처럼 틸리히도 실존주의 사상을 활용하여 현대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개념을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이 아닌, 존재론적 추리의 신으로서 설명되었다. 틸리히는 신은 존재 자체이지, 존재하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나와 너의 관계를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철학적인 존재론적 추리의 결론으로서의 신일뿐이다. 그의 신관을 보면 존재 자체로서의 신은 본질 존재에 치우쳐 초월신관에 빠질 수 없으며, 현실 존재에 매여서 범신론에 기울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얼핏 신의 절대성을 높이는 것 같으나, 인격성 대신 절대성을 말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철학적 허구에 그치고 만다.

 

두 번째, 틸리히에게서 그리스도는 속죄주로서의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논리적 필요에 의한 가공적 산물일뿐이다. 기독론의 문제역시 그의 신론에 기인한다. 그리스도는 인간 소외를 해결하는 필요한 방편에 불과하다.“사람은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다른 사물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사실”을 말한다. 현대인은 이 소외성을 물질주의, 향락주의로 메우려 한다. 여기에 새 존재로서 그의 논리적 필요에 의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사건은 역사성 자체로서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예수가 십자가의 수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실존적 변화를 한 사실만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기독교 신앙이 중요시 할 사실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새 존재속으로 참여 할 수 있는 상징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예수 자신이 새 존재를 향한 상징이므로 역사적 예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확히 말해 틸리히에게서 예수는 신도 아니며, 새 존재도 못된다. 단순히 새 존재의 보유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절대적 종교가 될 수 없고 우주적이며 절대적 종교를 향한 증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그는 실존주의 철학의 틀에서 짜낸 방식의 기독교는 힌두교나 불교처럼 하나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예수의 역사성을 외면한 그의 신학적 입장은 슈바이처와 불트만에게 큰 영향을 입은 사실때문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틸리히는 조직 신학자로서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존주의 철학을 가지고 현대적 시각에서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철학적 고민 속에 신학적 해답을 주려고 변증의 노력은 인정할지라도, 틸리히 역시 자기 한계의 신학적 사상체계 속에 성경적 진리를 부합하려고 하였던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

 

 

 

Ⅲ. 급진신학

 

1. 사상적 배경

 

폴 틸리히의 신관은 존 로빈슨에게 대중화되고 토마스 알티저에게서 꽃을 피웠다. 그는 무신론 신학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지성인의 사회에서 폐어 처분된 신 개념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며 현대인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립하였다. 그의 신 개념은 궁극적 관심, 혹은 존재의 기반등으로 표현된다.

 

루돌프 불트만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기독교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로 인식하지 않고 은혜를 내포한 복음적인 종교임을 주장한다. 그는 나름대로 객관화된 계시를 외면하고 비신화화된 복음을 현대인의 실존주의 사고방식 속에 심으려 하였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역사적 시점에서 일어난 역사성을 부인하며, 단순히 실존적 사건이라는 신앙으로 인식하는 비신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주관주의의 소산이며 급진 신학의 밑받침이 되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비종교화를 주장한다. 신앙은 하나님을 인격적 실존으로 믿는게 아니라.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새 삶이며 교회의 사명은 영혼구원을 위한 선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를 통한 사회 개혁에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 차원에서 겸손히 내려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차원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일을 다할 때 ‘역사적 구원’을 위한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성숙한 세계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복음으로 지적한다. 그의 독일 옥중에서의 신학으로 급진주의 인본주의의 촉매제가 되었다.

 

 

2. 급진신학의 여러 가지 형태

 

1) 세속화 신학

세속화 운동은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와 계몽주의의 무신론 사상에서 시작된 이래 근대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가속화되었다. 사회와 과학의 발달은 인간 자아상과 자기 가능성의 확대에 큰 변화를 초래하며, 이로 인해 세속화 현상에서 오는 신학적 무관심은 세속화 신학을 창출하게 된다.

 

하비콕스는 세속화 신학을 정의하기를 “인간을 종교와 형이상학의 보호에서 해방시켜 내세에서 현세로 그 관심을 옮기는 운동”이라고 한다. 콕스는 “세속도시”에서 성경이 세속화 정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은 현대 사회의 변화에 대하여 분명한 신학적 이해로 세속적 모드에 알맞은 체질 개선할 것을 말한다. 창조사건은 자연의 세속화, 출애굽 사건은 정치의 세속화, 시내산 언약은 우상금지를 통한 가치의 세속화를 가르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곧 하나님이 그의 의와 신적 속성들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를 입음으로 하여 자발적으로 자신을 세속화 시킨 사실에서 세속화의 이론적 근거를 찾는다. 그는 현대교회의 개혁은 정치적인 차원을 가진 교회만이 이 시대의 사명이라고 한다.

 

존 로빈의 “신에게 솔직히”는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와 함께 세속화 신학을 대중화시키는데 공헌을 한다. 그는 교회의 사명을 현대 지성인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는 기독교의 초자연주의를 배제할 것과 함께, 거룩의 소재는 지성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 속의 한 복판 이웃을 위한 봉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역으로 거룩한 세속의 삶이라고 역설한다. 기도는 절대자이신 초월신에게 드리는 간구가 아니라, 윤리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로빈슨에게 있어서 신학적 교사는 첫째, 비신화화 요소를 배제하여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적응시킬 것을 주장한 불트만, 둘째는 종교성 없는 기독교를 강조한 본 회퍼, 셋째는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자 존재의 기반을 강조한 폴 틸리히였다.

 

2) 사신 신학

 

“신은 죽었다.” 1960년대에 출현한 신학운동으로 토마스 알티저는 한 세기 먼저 사용되었던 니체의 표현을 신학화한다. 그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오늘에 신학’을 체창한다. 그의 양극 일치론을 통하여 신의 부정은 곧 긍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자유를 얻는 사실을 말한다. 신의 죽음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 시대의 크리스챤으로서 마땅한 의무라는 것이다. 알티저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신학은 불가능을 선언하고 과거의 신 개념을 창산해서 버릴 것을 호소한다. 오늘의 삶이 전적으로 긍정되기 위해서 전통적인 신관은 배제되어야 하며 초월적인 신은 죽어야 한다. 이렇게 알티저는 기독교의 성경관을 배격하고 계시의 완료 개념을 비판하며 신학의 재료를 성경보다 현대의 세속적 지성의 작품에서 찾고 있다. 그는 멜빌, 프로이드, 브라운, 마커스, 사르트르, 블레이크등을 통해 급진신학의 영향을 입었다고 고백한다.

 

폴 반 뷰렌은 알티저처럼 역사적 사실로 ‘신의 죽음’을 취급하지 않지만, 언어 분석학적으로 신 개념의 무의미성을 주장한다. 그는 The Secular Meaning of the Gospel이란 저서에서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관한 논의가 불가능한 것이므로 신이란 말은 그 의미성을 이미 상실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곧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크리스챤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신’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성보다는 의미성을 부여하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속죄문제와 부활 그리고 주로 고백하는 신앙 등은 그 자체로서의 역사성보다 예수의 자유케 하시는 그 자유의 의미가 무엇이냐의 그 자유성의 빛을 통하여 아는 것을 주장한다. 이 자유는 예수 사건 이해의 열쇠이며 복음의 세속적 의미의 핵심이란 것이다.

 

3) 과정 신학

과정신학자들은 제3의 유신론을 주장하면서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기독교 진리를 연결시키려 한다. 그들은 미국의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따른 신학자이다. 존 콥은 그의 저서 기독교 자연신학에서 화이트헤드에게 사상적 영향을 크게 입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또 그의 책 과정신학에서 다섯 가지로 신 개념을 언급하면서 전통적 개념과 다르단 사실을 미리 경고한다. ① 하나님을 우주적 도덕주의자로 볼 수 없다. ② 하나님을 불변하고 무정한 절대로 볼 수 없다. ③ 하나님을 현상 유지의 지지자로 볼 수 없다. ④ 하나님을 주권자의 능력으로 볼 수 없다. ⑤ 하나님을 남성으로 볼 수 없다.

 

3. 급진 신학 비판

 

첫째, 현세주의적이다. 그들은 전통적 기독교가 사회참여와 관심의 결여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본다. 그래서 복음의 내세축복과 사죄의 메시지를 배격한채 인간간의 화해와 액션만을 강조한다. 둘째, 합리주의적이다. 신앙보단 이성을 중시하며 종교개혁의 정신보단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를 지지한다. 계시의 빛을 거절한채 합리주의의 그늘에서 급진신학이 대두된 것이다. 셋째, 경험주의 기독론이다. 삼위일체 신관을 경험적인 기독관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이웃사랑을 노래하지만, 그리스도의 역사성이 아닌, 그들의 철학적 사고에서 활용된 실존적 그리스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넷째, 낙관주의 신학이다. 죄의 문제를 배재한채, 창조계의 조화와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과 교회사에서는 구원과 심판을 함께 가르치지, 지상 유토피아의 약속이 없다.

 

 

Ⅳ. 근본주의 신학

 

1. 20세기 초기(1930년대까지)

 

근본주의란 용어는 1920년에 침례교 기관지의 편집인 커티스 키 로스에 의하여 처음 사용되었다. 미국의 역사학 교수 메킨타이어는 근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유주의 신학과 독일 고등비평과 다윈주의와 기타 미국 교회에 해를 끼치는 신학 사상의 도전에 대항하여 정통적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재확인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제 1차 대전 기간과 직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정통주의 신학을 외면하고 신학적 좌경에 대한 반동으로 근본주의와 경건주의 계통의 은사 운동이 나타난다. 근본주의의 선구적 대표는 드와이트 무디가 있다. 1895년 나이아가라에 모인 사경회에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중에 가장 근본적인 다 섯가지의 교리를 선정한다. 1. 성경의 무오성, 2. 예수의 처녀 탄생, 3. 예수의 대속적 죽음, 4. 예수의 육체 부활, 5. 예수의 육체적 재림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운동은 문서 사업을 통하여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1909년부터 수년간 출판 보급된 The Fundamentals: A Testimony to th Truth 12권의 신학 논문집은 보수 신학의 학문적 변호의 역할을 크게 감당하였다.

 

근본주의 운동의 충격은 교육계에 파급되어 진화론에 대한 찬반의 대결로 법정에 까지 문제가 되었고 신학계에 있어서도 좌경을 등지고 연맹에 가입한 대학과 신학교의 수가 100개가 넘었다. 그중 미국 북장로 교단의 프린스톤 신학교만 1812년 신학교 창립이래 재건하였는데, 1929년 메이첸 교수의 퇴진을 기해서 점차 그 전통적 신학입장은 변화가 나타났다.

 

 

2. 신근본주의 운동(1930년대 이후-현재까지)

 

개혁주의를 고수했던 메이첸과는 달리 초기 신근본주의자들은 싸움과 분리, 독립적 정치원리에 따라 더 많은 분리현상을 빚었다. 완전 분리를 최대의 미덕으로 내세운 전기 근본주의와는 달리 1970년대 후기 신근본주의자들은 정치참여에 적극성을 띠고 분리와 함께 참여를 강조하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마약, 이혼가정, 도색문화, 게이운동 등, 세속사회에 조직과 매스미디어를 동원하여 기독교 원리를 적극적으로 반영시키고 공격적 선교전략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3. 근본주의 비판

 

 

20세기 초창기에 자유주의 신학을 대항하여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또 하나의 신근본주의 운동으로 전락하면서 한 때의 공헌이 다른 한 때의 문제점으로 바뀌어지는 불행한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4. 근본주의 운동의 약점은 무엇인가?

 

첫째,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싸워오면서 부정 습성이 체질화된 부정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지엽적인 문제를 크게 교회 정치문제로 쟁점화시켜로 분열과 교파가 갈리는 사분오열적 현상은 잘 설명된다. 둘째, 비성경적인 이유로 비판한 비판 습성이 체질화되어 자기 반성의 결핍을 가져오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과 싸우면서 또 하나의 개혁주의적인 신학 사상을 만들어 천명할 수 있지만, 반지식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지면서 나타나는 신학발전의 기피현상은 폭넓은 신학연구와 신학계에 공헌 할 수 있는 학자들을 기르지 못하고 말았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나 적이 쓰는 무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학문성에 대한 기피, 과학에 대한 혐오, 세속에 대한 무관심은 근본주의 신학운동의 주류에서 배제되고 말 것이다.

 

 

 

Ⅴ. 신복음주의

 

 

신복음주의는 20세기 중엽부터 미국 신학계에서 근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수정주의로 일어난 운동이다. 애쉬브록은 신복음주의를 전도 운동보다는 변질된 신학 운동으로 보고 신복음주의는 신학적 중립주의라고 칭하며 첫째, 자유주의와 협력. 둘째, 지적인 교만. 셋째, 죄에 대한 관용. 넷째, 말씀에 의한 심판을 자초한다고 정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의 결함을 보충하고 나선 신복음주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학문 연구의 강조

 

초기 근본주의자 워필드, 메이첸의 서거로 보수 신학계는 한때 신학적인 저조 현상과 함께 개신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제 2차 세계대전후 개신교회들은 신학의 학적 수준을 좀더 높이고자 대학원급의 신학교 설립을 하였다. 신복음주의는 과거 근본주의의가 신학과 과학의 부정적인 관계를 재음미하였으며 더 적극적인 자세로 복음주의 신학의 학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풀러신학교는 이런 경향의 좋은 예가 된다. 미국 부흥사 찰스 풀러에 의해서 1947년 10월에 설립되면서 오켄가를 초대 교장으로 초교파적 보수 신학의 보루로서 출발하며 단기간에 고명한 학자들을 통하여 놀라운 학적 수준 향상을 과시하였다.

 

풀러신학교의 카넬은 신학과 과학의 차원을 세 가지고 분리한다. 첫째, 신학은 궁극적인 원인을 취급하는 반면, 과학은 비궁극적인 원인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둘째, 성경은 자연을 표현할 때 단순히 시각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해는 서쪽에서 진다”는 성경적 표현은 참된 것이지만, 과학적으로 참된 것은 아니다. 셋째, 신학은 섭리와 자유를 말하지만, 과학은 통일성 있는 자연법칙만 말한다. 이러한 차원 분리는 신학과 과학의 조화를 말한다.

 

2) 사회 참여의 강조

 

자유주의의 지나친 반도으로 근본주의 신학은 지나치게 영혼구원만 강조한 나머지 기독교를 타계적인 것으로 잘 못 소개한 한 것을 고쳐 신복음주의는 기독교의 사회성을 주장하며 더 나아가 기독교의 사회참여와 관련된 기독교인의 생활 윤리면에서 근본주의적 윤리관을 탈피할 것을 지적한다.

 

3) 보수 신학의 변증

 

자유주의 신학의 기독교 변증은 종교철학으로 기울었고, 근본주의는 반지식주의로 기울어지서 신학적 변증을 위한 철학을 사용하기 꺼려하였다.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 반틸의 명저, 믿음의 방어등을 빼놓고는 역사적 기독교의 변증은 오늘의 보수주의 교회가 담당해야 할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무게 있는 학적 변증서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절감하고 신학자들은 지난세기 변증자들과는 달리 모든 사상체계는 하나의 전제로서 시작된다는 전제주의 방법으로 변증을 시도한다. 믿음으로 시작한 그 전제가 결과적으로 진리를 기준으로 한 세계관을 잘 드러내면, 그것이 전제된 첫 원리를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클라크는 이와같은 진리성 여부를 ‘일치성’이라고 부르고, 카넬은 ‘조직적 타당성’이라고 칭한다. 이 첫 원리를 전제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추리해서 어떠한 원리를 발견하려는 벙법은 위험한 것이며 이미 로마 가톨릭에서 취하여 온 자연 신학적 방법이다. 오직 하나님을 첫 원리로서 전제할 때만이 변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4) 복음주의 교회의 연합운동

 

신복음주의 신학자 가운데도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신학자와 오히려 찬성하며 독립노선을 비판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풀러신학교의 카넬은 후자에 소가며 독립주의를 택하는 분리주의를 배격하고 교회가 전부 배교의 길을 가지 않는 한 분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카넬은 메이첸의 분리를 바성경적으로 보고 큐탄한다. 하지만 그는 오늘의 W.C.C.적인 연합운동에 대하여 책임있는 비평은 삼가면서 오히려 분리주의 운동에는 일방적인 공격을 가한다.

 

독립주의는 관용성이 없고 연합주의는 포괄적이다. 전자는 배타적인 경향이 있고 후자는 혼합적인 위험이 있다. 전자는 가견적 교회관에 있어서 제한성과 교리적 원칙을 고조하며 교리적 축소주의를 주장하나, 후자는 무제한성과 교권주의 및 교리적 모호성과 신학적 기초가 없는 혼합주의이다. 웨슬리, 휫필드, 피니, 무디, 선데와 같은 부흥사들은 전도를 위한 집회만은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적 방법인지에 대하여 학자들에게 크게 의심과 도전을 받고 있다.

 

 

2. 신복음주의적 비판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 내의 좌경성이 있는 신학자를 가려내지 못하고 전부 일괄적인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초창기의 풀러 신학교와 오늘의 풀러 신학교가 다르다는 사실, 오늘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입장과 풀러 신학교의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복음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첫째, 신복음주의는 성경관에 있어서 근본주의가 믿어 온 축자 영감설을 동의하기 주저한다. 유신적 진화론을 주저없이 따름으로서 과학적 결론 앞에 성경적 창조설을 쉽게 던져 버리고 만다. 둘째, 신복음주의 교회관은 종교개혁자의 교회관과 다르다. 카넬은 ‘정통주의’라는 그의 책 결론장에서 “고전적 교회관으로 돌아가자(Return to the classical view of the churcu)”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는 고전적 교회관이 무엇인지는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기성교회에서 분리하여 나간 근본주의의 우류를 신랄하게 비난하며 그중에도 메이첸의 분리를 혹평하고 있다. 카넬은 타당한 분리의 조건을 출교와 배교, 이 두 가지 현실 앞에서만 분열의 불가피성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반틸은 메이첸의 입장은 결코 분리주의자가 아니며 정통을 사수하다가 자유주의자들에게 축출된 것을 역설한다. 북장로 교회 총회록을 보면 메이첸이 약간의 자유주의자가 있었다고 그가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교권주의자들에게 쫓겨 났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복음적 교리를 그대로 믿는 자들만의 모임을 교회로 보고 있으나, 신복음주의는 복음적 교리를 믿는 않는 자의 자리를 교회에서 용납할 뿐만아니라,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이 교회를 주관하는 현실 속에서도 모교회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신복음주의 교회관은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처: DANIEL OH 2010.03.10 17:18 http://blog.daum.net/danielcompany/8898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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