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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흐름
제 1장 유럽 신학
Ⅰ. 19세기 신학
1. 18세기 배경
19세기 초기 신학자들의 신학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18세기에 일어난 신학적 사상운동을 고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8세기를 지배한 사상운동은 크게 경건주의(Pietism)와 합리주의(Rstionalism) 두 가지로 열거 할 수 있다.
(1) 경건주의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 독일의 신교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루터파 교회는 외부적으로 정부의 행전적 관섭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죽은 정통주의라고 할만큼 생활과 상관없이 지적인 수납으로 성경 위에 교리를 강조하는 교조주의가 지배하였다. 이런 배경아래 독일에서 참신한 영적 각성운동과 경건생활을 강조하며 평신도 위주의 형태로 경건주의가 일어났다. 18세기 초엽 할레 대학교 필립 야곱 스페너가 중심이 되어, 신학자 뱅겔을 통하여 독일 강단에, 진젠돌프 등을 통하여서는 모라비안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모라비안 경건주의는 존 웨슬리와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웨슬리는 독일 경건주의처럼 교조주의에 맞서지 않고 당대 영국 교계를 지배한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웨슬리는 성경적 교리를 강조하며 그 바탕 위에 영적인 체험과 성결을 추구하였다. 미대륙의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드(1703-58)를 통해서 일어난 대각성 운동도 독일의 경건주와 적지않은 관련성이 있다. 첫째, 회개하고 체험하고 생활하는 개인 종교의 강조. 둘째, 종교적 체험을 강조. 셋째, 예수지상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2) 합리주의
성경의 영감을 문제시하기보다 영감된 성경해석의 문제를 더 중요시하고 해석의 여러 가지 상이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18세기 합리주의는 그 성격에 있어서 반드시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자연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경건한 사상가는 희소했다 할지라도 18세기 합리주의 역시 종교적 성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상가로서는 존 로크, 임마누엘 칸트가 있다.
2. 자유주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19세기 전반에 걸친 신학적 사상은 자유주의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지성인이 과연 기독교의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지성인은 18세기 합리주의를 상속한 자들이었기에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메시지를 수정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따라서 주지주의에 대항하여 낭만주의자들이 인간 활동이 단순한 지적인 영역 외에 예술적 표현이나 삶의 신비성을 나타내는 다른 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낭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배척하고 외면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삼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주관주의를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인간의 궁극적 경험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의 주관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의 활로를 개척하고 말았다.
3. 예수전 연구
영국의 합리주의로 인한 자연신론(Deism)은 예수전 연구, 곧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단히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스트라우스는 헤겔의 정,반,합 원리를 적용하였지만, 초자연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채, 예수를 분명이 역사적 인물로 주장하지만 관념론상으로만 인정한다. 예수는 그 당시 스스로 자신이 메시야 됨을 주장하고 믿었던 사람들의 메시야 대망사상 때문에 죽었으며, 제자들은 예수를 존경한 나머지 신성을 부여한 것으로 본다. 스트라우스는 그리스도가 신의 완전한 계시자도, 인간 본성의 완전한 계시도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신 세계에 의해서만 완전히 계시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예수가 기독교 관념들을 역사속으로 가져오긴 했으나,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관념적으로만 역사화시킬뿐이지, 예수의 역사적 생애 자체는 스트라우스에 있어서 크게 의미가 없다. 따라서 예수의 참된 역사를 알아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4. 리츨학파
이러한 스트라우스의 회의주의에 맞서 19세기 말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난다. 알브레히트 리츨(1822-1889)을 위시한 신 칸트주의 학파이다. 그의 신학은 실용주의적이며 반교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불가지론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리츨학파의 일부 학자들은 점차 정통적인 기독교에 더욱 반기를 들고 공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요한 빌헬름 헤르만(1846-1922), 아돌프 폰 하르낙(1851-1930)이 있다.
5. 종교사학파
율리우스 벨하우젠(1844-1918)
1870년대 리츨 학파가 출현한 지 20년후 1890년대 종교사학파가 등장했다. 벨하우젠을 대표로하여 종교사학파로 알려진 이 학파는 사실 성경해석을 문학적 비평에서 시작했지만, 문학비평보다는 역사비판으로 나타났다. 종교사학파는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와의 관계를 비교 검토하면서 문화적, 역사적 발전차원에서 성경을 연구하였으며, 그에 따른 영향으로 성경신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궁켈은 종교사적인 해석분야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혼합종교이며 기독론의 골자도 역사적 예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한다.
Ⅱ. 칼 바르트(1886-1968)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칼 바르트는 1919년 그의 로마서 주석을 통하여 현대신학의 기점을 알리게 된다. 그만큼 19세기 신학에 큰 도전을 주었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역사적 인물로만 보는 예수에 관한 기독론적 관심은 예수전 신학자들을 양산시켰지만, 그들 역시 회의주의적 사상과 관념론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큰 신학적 전환을 가져다 준다.
그의 사상은 세 단계의 발전을 보인다. 초기 단계는 자유주의 신학에 빠져 있던 때이다. 베를린, 튀빙겐, 마르부르크 대학을 다니면서 당시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 신 리츨 학파 신학자 아돌프 하르낙과 빌 헬름 헤르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19세기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의 신학으로 신학적 사고가 인간 중심적 방향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다. 성경은 단지 인간의 책이요, 인간의 종교적 체험에 관한 책이요, 인간의 도덕적 이상을 다룬 문서로만 인식한다. 두 번째, 제 1차 세계 대전을 목격하면서 93명의 독일황제 히틀러의 국가 지상주의 정책에 서명한 사람들 중에 바르트가 존경하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자 인간신학의 죄악성과 타락을 통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를 절감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유주의의 신학에서 완전한 회심은 10년간 스위스 사펜빌에서 시골 목회활동과 이웃마을 목회자,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과 성경공부를 통한 진리적 추구에서였다. 그의 이런 경험을 거쳐 1919년에 로마서 주석을 출판하였다. 1921년 재판은 지금까지 유럽을 지배하던 인간 중심적인 자유주의 신학에서 말씀의 신학으로 전환시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했다. 비록 성경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시 하지는 않았지만(칼빈),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강조는 지금까지 자유주의 신학에서와는 다른 성경연구의 관심을 갖게 하였다.
칼빈 신학교 교의학 클루스터는 다음 다 섯가지로 칼 바르트의 신학적 공헌을 설명한다.
1) 이 시대에 가장 지대한 신학적 영향을 끼쳤다.
2) 자유주의 신학을 넘어뜨렸다.
3) 성경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4) 종교개혁 신학 및 칼빈 사상에 새로운 관심을 집중시켰다.
5) 새로운 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1. 칼 바르트의 신학적 문제점
하나님 말씀의 실존적 의미
1) 정통주의가 성경을 계시와 동일시함으로 성경을 paper pope로 모시는 성경 우상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난한다.
2) 성경은 인간을 통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인간적 오류가 있기 마련이라고 본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자연계시를 인정한 브루너를 비판하면서도 비신화화론을 주장한 불트만에게는 관용적 입장을 취한다.
철저한 기독론 중심의 신학
1) 철처한 기독론 중심의 신학은 아담을 곧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그의 신학적 주장의 필연성 때문에 아담의 신학적 역사성을 부인한다.
2) 구원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한 자만이 구주가 될 수 있을 뿐인데, 만인 구원설을 주장한다.
3)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일반역사와 분리시키는 가현설을 주장한다.
Ⅲ. 루돌프 불트만(1884-1976)
1. 양식사 학파의 주장
불트만은 궁켈, 슈미트와 함께 양식사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저서 “공관복음 전승사”에서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니며 초기 크리스챤들의 종교적 작품에 불과한 사실을 지적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신양성경이 저술되기 전에 단편적인 구전들을 모아서 편집하였기 때문에 그 역사적 신빙성이 아주 적다고 보며,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려는 시도보단 오히려 초대교회가 어떻게 예배하고 선포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양식사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복음서 이전의 기록들을 구성한 양식을 따라서 구별해서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첨가된 이차적인 자료(비신화)들을 제거함으로 원래의 형태를 찾아내어 역사적 환경에 따른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서 거의 전부는 이차적인 자료 구성되었다고 주장하여 신화를 제거함으로서 비신화화 작업을 제창한다.
2. 비신화화
불트만은 신약은 거의 신화적 요소로 가득차 있으므로, 말씀을 재해석하기 위해서 케리그마의 실존적 작업, 즉 비신화화을 할 것을 말한다. 불트만은 신약의 거의 모든 신화들은 유대인의 종말론, 영지주의, 헬라의 신비 종파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상황에 맞도록 재해석하는 실존주의적 해석학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3. 실존주의적 해석
불트만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하나의 헬라의 신비종파나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화로 인식하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은 종말론적 주관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불트만은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종말론적인 신앙의 필요에 의해서 실존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4.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 요약
1) 계시의 주체성 문제
문제는 주어진 계시, 신약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를 불트만은 단순한 인간의 자기 이해의 해석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다. 불트만의 오늘날 상황에 따라 실존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계시의 주체성을 상실케 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인신의 결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신약의 참 의미를 밝히기 보다 오히려 완전히 이질화시켜 버렸다.
2) 예수와 그리스도와의 분리 문제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함으로서 역사적 사건 속에 일어난 케리그마의 뿌리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한다. 역사적 예수의 행한 일 자체에 대하여 외면한 채 신앙의 그리스도만 어떻게 강조할 수 있을까? 기독교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을 중요시 아니하고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신약성경은 이 양자를 분리하지 않고 함께 강조하고 있다.
Ⅳ.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본회퍼는 독일에 태어나서 일찍이 신학 연구에 뜻을 두고 튀빙겐, 베를린 대학 등지에서 기라성 같은 아돌프 폰 하르낙, 칼 홀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지만, 하르낙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풍기는 리츨 학파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서 칼 바르트의 위기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는 반 나찌 입장에서 독일 고백 교회의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며 지하 운동에 가담하다가 1945년 4월 9일 독일의 패망을 앞두고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파울 반 뷰렌은 디트리히 본회퍼가 1943년 독일 반 나치 지하 운동에 가담해서 잡힌 이후, 그의 옥중 서신에서 제시된 후기 사상을 두고 1960년대 후반기에 일어나기 시작한 사신론(死神論), 즉 급진 신학의 원조라고 한다.
1. 본회퍼의 후기사상
옥중에서의 그의 신학적 결론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쉬울 때만 찾는 복 방망이식의 하나님이란 불필요하며, 하나님은 인간의 죽음, 고통, 죄악 등 영혼구원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사회개혁을 위한 것으로 말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본받아 남을 위해 사는 인간만을 고조하는 인본주의 기독론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는 믿음이란 남을 위해 사신 “예수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새 삶”이라 한다.
그래서 교회란, 인류복지와 이웃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그것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차원을 가지고 대중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세속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전통적인 구원관을 가리켜 신화적 구원관이라고 비난하며 부활과 소망에 근거한 죄와 죽음에서 구원되어 영생을 얻는 종래의 구원관은 아주 잘못된 것이며 뿐만 아니라, 위험한 사상이라고까지 지적한다. 또 본회퍼는 전통적인 사도신경도 재검토하여 기독교 속에 잠겨 있는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비판적 논의
이상 살펴본 것처럼, 옥중서신에 부각된 본회퍼의 신학사상은 인본주의적 신학자가 인본주의적 기독론을 주장하는 그이상 아무것도 아님이 분명하다.
첫째, 신관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 대신 그의 그리스도를 본받는 주관적 사랑을 말함으로 결국 무신론을 말한다.
둘째, 개인의 구원 문제를 무시하고 사회개혁 문제를 중요시한다. 개인의 영적구원이 없는 사회구원은 있을 수 없다.
셋째, 교회와 사회의 명백한 구분이 없다. 교회의 영적인 의미없이 사회참여와 개혁을 주장하는 그의 사상은 성경적 교회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Ⅴ. 위르겐 몰트만(1926- )
1960년에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출세작 “희망의 신학”을 출판함과 동시에 희망신학 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알려진다. 1967년 희망신학이 영역되면서 미국 신학계의 큰 영향을 미치며, 종말론을 모든 신학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로 보았다. 신정통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잘못 해석되었던 종말론을 위르겐 몰트만은 신학의 바른 위치에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고 희망은 성경해석의 원리요, 성경의 주제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십자가의 그늘에 살고 있는 모든 자를 위한 희망의 표(sign)이다. 그러므로 희망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상에서 현재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형태이다. 몰트만은 십자가를 미래적 개선을 위한 현재적 사건과 동일시(同一視)함으로 희망신학의 사회적 방향을 제시한다. 이런 사회적 관심은 그의 교회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1. 몰트만의 신학특색 및 공헌과 그 한계
전통적인 종말론에서 볼 때 최후의 날은 역사의 끝으로만 본다. 그러나 몰트만은 종말론 신학의 한 항목이나 부록으로만 다루지 않고 종말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 기독론, 교회론, 기독교와 윤리, 기독교인의 현실참여 등 모든 항목들을 조명했다. 이런 다이나믹한 종말론의 입장에서 두 가지 잘못된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불트만의 비신화화된 실존주의적 종말론과, 다른 하나는 현세의 중요성을 외면하는 신비주의적 개인주의 종말론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런 두 가지 양극단적 입장을 비판하고 종말론의 약점이던, 현재적 의미를 더욱 강조함으로서 새로운 종말론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론에서 볼 때, 그는 갈보리를 통해 부활과 재림을 보려하지 않고 미래의 부활을 내다보고 그것을 예수 부활의 근거로 삼으려는 성경 신학의 새로운 도전 때문에 사도신경에 나타난 사도적 신앙고백을 역행한다. 뿐만아니라, 미래만을 실재의 유일한 가능성으로 보는 관점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적 의미를 외면한다.
또 교회론에서 보면 경건주의 교회가 지나치게 피안적이고 현실적인 도피 경향으로 흘러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이 경시되었다. 몰트만은 교회가 선민사상과 구별 의식으로서만 아니라, 사회의 한 구성체로서 전체적 사회 구원을 위하여 혁명적 사회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보는 그의 신학적 낙관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출처: DANIEL OH 2010.03.12 23:08 http://blog.daum.net/danielcompany/8898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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