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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특강 정리
-― 20세기의 신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
1999년 7월 16일 발 표 자 이승구 교수1)
강의정리 권우강 목사2)
Ⅰ. 강의 정리자의 변
Ⅱ. 몇 가지 안내 서적
Ⅲ. 20세기 신학의 동향들
1. 20세기 신학의 배경으로서의 19세기 신학의 특성: 내재주의
2. 20세기 신학의 출발점 : Barth, Romans (1919, 1922)
3. 50년대 말까지의 신학의 거장들
4. 좌파 바르트주의자들의 신학 (Left- wing Barthian Theology)
5. 우파 바르트주의자들의 신학 (Right-wing Barthian Theology)
6.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 (New "Theology of the Cross“)
7. 다양한 해방신학들
8.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1990년대 신학들의 다양성
Ⅳ. 20세기 후반의 개혁신학의 동향
1. 20세기 초반의 개혁신학
2. 20세기 후반 개혁신학의 동향
Ⅰ. 강의 정리자의 변
신학교 시절 현대신학에 대해서 매우 관심있게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잊어버린 것도 있고, 또 한쪽 면에서만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제대로 이해했는가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로고스신학연구원에서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며 전달해 줄수 있는 강의가 있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하며 진지한 자세로 강의에 임하게 되었다.
강의의 내용은 감히 수강자가 평가할 문제는 아니지만 대체로 좋았다는 중론이 있었다. 특히 어렵고 복잡해서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현대신학자들의 사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정리해서 쉽게 들려 준 데 대하여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서 이 강의의 내용이 시간과 함께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로고스신학연구원의 공간 속에 묶어 두려고 글로 옮기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순식간에 해 낼 것 같았으나 막상 글로 옮기다 보니 문장의 흐름이 잘 연결되지 않았고, 나중에 독자가 스스로 읽고 이해하는데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몇 번이고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면서 몇 번이고 다시 글을 읽고 다듬고 제 위치에 재정리하다 보니 그런대로 괜찮은 내용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남의 강의이지만 내 글처럼 써서 보고서로 작성하였는 바, 한 가지 두려운 것은 혹시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잘못 옮긴 내용은 없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실수를 줄여보려고 사전을 찾아가며 스펠링도 고치고, 관련된 다른 참고서적도 찾아보았다. 최선을 다한 만큼 잘못된 것은 넓은 아량으로 보아주기 바란다.
주의할 것은, 이 글은 어디까지나 강의자의 신앙과 사상에 입각해서 쓰여진 것이며, 강의정리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정리자의 사견이나 해석이 전혀 덧붙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고 정리자의 사상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강의 중에 많은 문제점이 도출된 것을 독자와 함께 공감하기 위해서 질문과 답변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자료를 얻는다는 차원에서 이 글을 읽고 함께 경각심을 가지며, 오늘날 한국교회 아니 세계교회의 신학사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보람으로 느끼겠다.
Ⅱ. 몇 가지 서적 안내
20세기 현대신학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몇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1. David F. Ford, ed., The Modern Theologians: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in the Twentieth Century, 2vols (Oxford: Basil Blackwell, 1989).
David F. Ford는 캠브리지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다. 이 책은 각 현대신학자들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분들이 각자에 대해서 논문으로 발표한 책이다. 아직 한국에는 번역 소개되지 않았지만 아래 4~5번에 소개된 ꡔ현대신학개관ꡕ과 ꡔ최근신학개관ꡕ이 비슷한 유형을 띠고 있어서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의 유익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깊이 있게 분석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해소하였다는 것이고, 난점은 우리와 같은 개혁신학자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2. ꡔ20세기 신학』신재구 옮김, (한국기독교학생회 출판부, 1997). Stanley J. Grentz and Roger E. Olson, 20th Century Theology: God & the World in a Transitional Age (Downers Grove, Ⅲ: InterVarsity Press, 1994),
이 책은 이번 특강의 교재로 소개한 책으로서, 두 사람이 썼기 때문에 깊이는 부족할 수 있지만 일관성이 있고, 비교적 복음주의 입장에서 현대신학자들을 잘 이해하고 비판하였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하지만 이들은 침례교 소속으로서 침례교 우호적이다. 그들은 복잡다난한 <20세기 신학체계>를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하여 전통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강조하였다. 즉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 가운데 들어오셔서 일하시는 내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역사 속에 갇혀 계시는 것이 아니라 초월해 계시는 초월성도 인정한 것이다. 이 책은 대부분의 현대신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초월성을 배제하고 내재성만 강조하는 것”을 잘 지적하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초월성과 내재성의 두 축을 어떻게 잘 유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이 도식 자체도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서 초월성만 주장하다가 내재성은 간과하지나 않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이승구 저,『현대 영국신학자들과의 대담』(서울: 엠마오, 1992).
오늘날 영국 신학자들의 견해를 솔직하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서 현재 영국 신학계를 이해할 수 있다.
4. 조성노 편,『현대신학개관』(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4).
5. 조성노 편,『최근신학개관』(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3).
Ⅲ. 20세기 신학의 동향들
1999년 4월 12일 연세대학교에서는 기독교학문연구회 주최로 ꡔ20세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ꡕ 하는 주제의 세미나가 있었다. 그 커리큘럼 중에서 제가 첫 번째 주제로 강의했던 ꡔ20세기 신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ꡕ의 내용을 다시 소개함으로서, 20세기 신학을 전반적으로 한 번 훑어보고, “우리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자세를 가다듬고자 한다. 우리는 현재 20세기를 살고 있는데, 동시대에 살면서도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신학적 견해들을 가진 자들이 매우 많다. 그들을 그냥 방임할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오늘 강의할 뒷부분은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 할 일이지만 앞부분은 그냥 믿고 따라가기에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저는 처음 신학을 시작했던 70년대 후반에, 이제 언급할 현대신학자들과 같은 신학적 견해를 가진 교수들로부터 현대신학의 내용을 배운바 있다. 그 때에 느낀 감정은, 저런 이야기를 순수한 대학생들에게 전해주면 그냥 따라가게 될텐데..., 저런 자를 따라가지 않도록 개혁주의 입장에서 잘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 줄 그런 신학자는 없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물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천박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 강의도 그들의 입장에 서서 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에서 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후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능한 그 두 입장을 지양하면서 철저히 현대신학을 이해하면서도 성경적인 입장에서 비판할수 있는 방법으로 강의하려고 한다. 이런 강의를 그런 방향으로 지성인들을 이끌어갔던 장소(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도 매우 의미있은 일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20세기 현대신학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해 보기로 하겠다.
1. 20세기 신학의 배경으로서의 19세기 신학의 특성: 내재주의(Immanentism)
우리는 복음이 들어온지 100여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19세기 신학은 미처 접해보지도 못한 신학이다. 초창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신학은 통일성있고 체계화된 신학이 아니라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신학이 많았다. 세대주의를 비롯해서 부족함이 많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순수함은 있었다. 그래서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신앙을 유지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100년의 신학은 신학의 전부가 아니라 2000년 교회사에서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구약까지 따지면 간격이 더 벌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으로 다 알았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저들을 무시해서도 절대로 안된다. 우리가 받은 것 중에는 왜곡된 것도 많은데 그런 것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1) Immanuel Kant (1724∼1804)
19세기까지는 이 세상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하나님, 즉 <내재주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하더라도 왜곡된 상태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서 그 당시 신학의 중요한 틀을 제공하였는데, 첫 번째 사람은 임마뉴엘 칸트이다. 그는 이층 세계관을 피력하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계, 곧 “의식 속에 들어온 것만을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이것을 넘어선 것, 곧 “사물의 본질 자체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늘 “물(物) 자체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곧잘 묻곤 하였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있는 이 현상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즉 현상계를 초월한 영역이 또 있다고 말하였다.
19세기 이전 18세기까지는 신학자나 자연주의 과학자들까지도 이성이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에 칸트는 이성이 너무 교만하기 때문에 이성을 비판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ꡔ순수이성비판ꡕ, ꡔ실천이성비판ꡕ을 씀), 이성이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지만 그 영역을 벗어나면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그 넘어서는 영역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신앙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위해서 이성을 비판한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옳은줄 알았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보편적으로는 이성으로 하는 것을 ‘학문’이라고 말하는데, 그들은 학문을 넘어서는 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며 학문과 신앙을 분리시킨 것이다. 그러나 신앙과 학문이 분리될 수 있는가? 요즈음 보수주의자들 중에도 가끔 신앙과 지식을 분리시키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떤 물리학자도 과학으로 풀리지 않는 것은 신앙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목사님도 그것을 격려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것은 칸트적인 이원론의 발상인 것이다.
신앙을 논하는 학문, 즉 신학도 학문인가? 칸트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으로부터 신학은 퇴출당한다. “너희들은 너희 영역에서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대학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신학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대학인데, 이제는 이런 사상의 결과로 주객이 전도되어 신학은 대학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아니면 겨우 한 분과에 속하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 신학교가 대학과 떨어져서 따로 명맥을 유지하며 존재하게 된 것은 이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 “하나님은 신앙의 영역에서만 존재하고 이성의 영역은 벗어났다” 고 말한다. 칸트가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신앙으로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하니까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가 말하는 신앙의 기준은 도덕에 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우리의 도덕적 교사이다.” 라고 말하는데, 오늘날 신앙의 윤리적인 모습이 이런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2)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또한 부류는 헤겔이다. 칸트는 “하나님이 현상계 밖에 있다”고 하였으나 헤겔은 “역사는 계시의 과정, 즉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과정이다. 이 역사에서 하나님 스스로가 자기를 전개해 가신다”라고 보았다. 그는 또 “온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히 드러나시려면 이 역사가 마감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려면 역사가 끝나야 되고, 하나님이 완성되는 것도 역사가 끝나야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역사 가운데서 어떤 존재인가? 시사점만 줄 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삼위일체도 “하나님의 일부분이 완성으로 되어져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역사 안에서만 이해하였고, 기독교를 역사철학으로 세속화시키고 그 세속화된 역사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가는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인가? 그가 기독교를 강조하고 참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기독교라고 말하고 또 누구든지 기독교를 믿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전부 올바른 기독교를 증거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헤겔이 칸트와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개념에 충실하지 않도록 이 세상의 어떤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3) 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86∼1834)
슐라이어마허는 19세기 현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어질 정도로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칸트는 하나님을 도덕에서 찾고, 헤겔은 역사 가운데서 찾았지만 마허는 “마음의 노력이나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감성의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조상들인 경건주의자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절대의존의 감정, 곧 하나님을 절대 의존했다는 마음” 그 자체를 ‘신앙’이라고 규정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을 절대의존하지만 문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감성에만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과 의지에도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설령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해도 절대의존만 하면 된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밖에 많은 신학자들이 등장했지만 모두 위의 세가지 유형 속에 다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2. 20세기 신학의 출발점 : Barth, Romans (1919, 1922)
20세기 신학의 출발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 많은 견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나온 때로부터 본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을 두 번 썼는데, 한 번은 1919년 한국의 3.1운동이 있었던 해에, 그리고 두 번째는 1921년에 쓰고 1922년에 출간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번째 출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다 무너뜨리우리라는 말씀처럼 첫 번째 쓴 것을 완전히 다 고쳐서 새롭게 하였다. 그래서 20세기의 신학의 출발점을 1919년이나 또는 1921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왜 역사적 분기점을 1901년으로 보지 않고 1919년으로 보는가? 그것은 바르트 이전 19세기 신학과의 극명한 차이점 때문일 것이다.
3. 50년대 말까지의 신학의 거장들
(1) Karl Barth (1886∼1968)
19세기의 분위기가 다 이러했다. 하르낙의 제자로서 이런 광경을 보던 스위스의 젊은 목회자 바르트는 “성경 안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고 말하며 ꡔ성경의 놀라운 세계ꡕ 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또 ꡔ로마서 주석ꡕ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로마 천주교의 칼 아남은 ”신학자들이 놀고 있는 유원지에 떨어진 폭탄과 같다”고 평가하였고, 그의 스승인 하르낙은 비신학적이고 설교적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 하기도 하였다.
바르트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19세기 신학 전체를 비판하였다. 심지어 1921년에는 자기가 먼저 발표했던 것까지 비판하였다. 그는 로마서 주석에 대해서 1세기의 사도 바울이 속달우편으로 보내온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읽고 썼다고 회고한다. 그의 글은 처음에는 팔리지 않았으나 뮌헨에서 발행하자 금방 몇백만부가 팔려나갔고, 이를 계기로 뵈팅겐 대학교의 신학교수로 강의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바르트가 과연 잘못된 19세기 신학을 벗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것을 발견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당시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사실이고, 친구인 불트만과 폴틸리히와 비교해 봐도 당시에 가장 보수적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칸트의 사상을 그대로 받았다. 그래서 그도 학문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신앙은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적인 예수(Historical Jesus)를 신앙의 그리스도”라고 믿었다. 즉 성경 속의 예수는 제자들이 신앙으로 바라 본 예수이지 진짜 역사 속의 예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그 예수라고 하는 인물이 이 역사 가운데서 살다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죽었다 라고 하는 사실만 알고 나머지는 모른다. 나머지는 신앙의 그리스도일 뿐이다. 비록 모를지라도 우리는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성경의 저자들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지만(1세기의 우매한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신화적인 것이 먹혀들어갔기 때문에 오병이어나 물 위에 걸으시는 예수를 믿도록 표현하였지만) 과학이 발전한 이 시대에는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그때에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오늘 우리 시대에 알맞는 방법으로 전달해 주어야 한다”
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비신화화’이다. ‘비신화화’란 신화적인 용어로 표현된 것을 현대적인 것으로 쉽게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고 있다.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비판하였다. 너무나 비판하다 보니 인간적인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의 저편에 계시고 이 세상 역사의 과정은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전5:2의 말씀3)을 인용하면서 유한과 무한 사이에 질적 차이와 영원과 시간 사이의 질적 차이를 주장하고 ꡔ전적타자ꡕ라는 책을 쓰게 된다. 그는 하나님을 인간의 모든 것에서부터 따로 떨어져 계신 전적 타자(全的他者)로 본 것이다. 이것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20세기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분으로 이해하고 역사와의 관련성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초월성만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초절주의> 라고 하였는데, 이는 너무나 초월해서 하나님을 역사 가운데서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인지 전 13권의 ꡔ기독교교의학ꡕ을 쓸 때에 그 중간에 있는 안셂연구 편에서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 믿으면 알게 된다. 일단 믿어야 한다. 믿은 후에는 잘 알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증명할 때 누구라도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심지어 바보라도 알 수 있도록 증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 나중에는 “그렇게 다 알수 있게 해 주셨다”고 감사의 기도를 하였다.
그는 “어느 것으로도 더 완벽할수 없는 가장 온전한 존재 a를 내 머리에 상상하고 있더라도 그보다 더 완벽한 존재 a'가 내 머리 밖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가 더 큰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은 개념상, 관념으로만 있은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ꡔ교회교의학ꡕ에서 하나님은 천지를 피조하셨고, 피조물에 독자성을 부여하셨으며, 하나님에게는 인간성의 고려가 처음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거기서는 예수의 신성은 많이 나오지 않고, 삼위일체 중심으로 전개해 가면서 계시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바르트는 “예수의 십자가가 역사 안에 속한 것이고, 역사는 심판을 받아야 하므로 결국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긍정이 된다”고 생각하여 결국 하나님은 모든 것을 부정하신 후 곧바로 이 세상 전체를 긍정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긍정되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버림받으신 인간이고 선택받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것이 ‘보편구원론‘의 기초가 되기도 하는데,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알미니안의 이론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저들은 “알미니안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긍정하는지 모르겠군요?” 하면서 전적인 은혜를 긍정하지 않는 알미니안과 차별화를 꾀하고, 예수가 우리 모두의 진노(전 인류의 죄를 위해)를 다 받아 주셨지만 어떤 인간 스스로가 그 은혜를 차단하게 되면 그에게는 어쩔수 없이 어린양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하여, 결국은 그러한 논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는 또 역동성을 강조하여, “사람이 붙잡으려는 순간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즉 계시는 하나님 스스로가 일으키는 것인데, 이 역사 가운데 들어오는 순간 상대적인 것이 되므로 심판의 대상이 되고 부정이 되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론으로는 하나님의 계시가 이 세상 역사 가운데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20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내용은 계시가 아니라 그 말씀이 오늘 내게 역사될 때에 계시가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계시’와 ‘계시의 흔적’을 구분한다. 즉 2000년 전 예수의 삶은 계시가 아니라 계시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 바깥에 계셔야 하고 이 시공형의 세계에 들어와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 바르트는 철저히 헤겔을 반대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는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하고, 역사의 영역과 자유주의 사상을 비판하면서도 역사를 넘어선 영역에서 설명하기 위해 신앙을 끌어들여 그것을 신앙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앙의 순간과 계시의 순간이 같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역사 안에 있으므로 계시가 아니다. 성경은 모세와 바울 및 사도들이 기록한 인간의 말이며, 계시의 흔적일 뿐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동성을 강조하면서 성령께서 역사를 하시면 그 흔적(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시는 그 순간 뿐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면 이미 그 순간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명제적인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의 사실을 듣고 내가 그 사실과 관련해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내용을 가지고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의 성경은 프로포지셔널(propositional - 명제적) 하지 않고 퍼스날(personal - 개인적 - 주관적임) 하다.
칸트는 “하나님이 현상계인 여기에는 없다”라고 보았는데, 그런 이원론이 바르트의 사상체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가장 위험하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아주 다르면 유혹도 받지 않을 것인데, 우리와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선지식이 없이 그의 글을 읽으면 감동하는 자가 많다.
(2) Adolf von Harnack (1851∼1930)
앞 장에서 말한 세 사람 중 19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역시 슐라이어 마허이다. 그 다음으로는 헤겔이다. 그는 모든 것을 역사화 하였고, 그 결과 19세기 말에는 종교사학파가 유행하였다. 이런 접근에 가장 가까운 자가 아돌프 하르낙(Adolf von Harnack)이다. 그는 역사를 가르친 자로서, “성경의 핵심(중심, 본질)이 무엇이냐?”를 살폈다. 그는 방송연설에서도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강의하였다. 그가 항상 성경의 본질을 찾으니까 근본적인 것에 접근하려는 좋은 자세인줄 알고 우리와 유사한 것 같이 여기는 자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본질이 아닌 것은 모조리 배격하려는 자세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그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아버지 되심”을 강조하고, 둘째는 “인류의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강조했으며, 셋째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언뜻 말로 들어봐서는 잘못된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그 이면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인본주의에 투철한가를 알 수 있다.
그의 보편적 아버지 되심은 창조주의 관점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성경에서는 모든 자의 아버지가 아니라 “믿는 자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하고, 두 번째는 “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지 않으랴” 하였는데, 인간이 위대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격해야 하고, 세 번째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처럼 말해서 결국은 인간이 중심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목적은 인간 유토피아 건설이 아니겠는가?
(3) Ernst Troeltsch (1865∼1923)
트뢸치는 기독교를 절대종교로 보았다. ‘절대종교’라고 말하니까 마치 우리와 유사한 것 같지만 그가 말한 뜻은 하등종교에서 점점 발전되어 고등종교로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역사철학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이 역사를 하나님이 온전케 되어지시는 계시과정으로 본 것이다.
(4)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신학계에서 그리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본회퍼는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감옥생활을 하였고,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감옥에서 죽게 된다. 그는 크게 활동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그가 만약 살았더라면 어떤 신학을 펼쳤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짧은 저서를 통해 시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를 세속적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남겨놓은 결과는 좌파 바르트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하며 신 죽음의 신학과 세속신학을 이끌어내게 된 것이다.
< 질문과 답변 >
문 : 하나님은 초월하시면서도 내재하실수 있다고 말한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답 : 현대인들은 “초월은 위에 있고 내재는 아래 있어서 동시에 있는 것이 부조리하다” 라고 생각한다. 네모와 원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듯이 어떻게 하나님이 동시에 두가지를 소유할수 있겠는가? 그래서 19~20세기에는 내재성을 선택하고 초월성을 버리거나 아니면 내재적인 초월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반동해서 바르트는 내재를 다 부정하고 초월로 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셨으면서도 동시에 신성을 가지셨다. 인성은 유한하고 신성은 무한하다. 하나님은 역사 이전 영원한 상태에 계셨고, 또 시간과 함께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순간에도 계실수 있다. 이것이 개혁주의적인 입장이다. 그래서 칼케돈 신조(The Definition chalcedon)에서는 신성과 인성을 같이 인정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특성을 사용해서 기록하였으나 바르트는 기계적으로 생각해서 여기에 나타나면 다른 데는 없어지는 것으로 단순하게 보았던 것이다.
문 : 칼세톤 신조를 개혁주의 입장으로 보았는데, 영원한 것이 어떻게 시간화될 수 있는가?
답 : 신앙이 없으면 이것을 “부조리(absurdity)하다” 라고 본다. 이것이 기독교 최대의 스칸달론(scandal), 즉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다.
문 :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놓고 설명하려니까 이래도 안 맞고 저래도 안 맞는다. 그 자체가 넘어지게 하는 스칸달론이 되는 것 같다. 결국 개혁주의자들의 설명방법이 문제가 되지 않는가?
문 :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바르트는 고민했는데, 결국 개혁주의자들은 믿음으로 수용하라고 맹신을 요구한 것이 아닌가?
답 : 아니다! 어느 쪽으로 이해하느냐가 중요한데, 합리적인게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이성에 맞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말하지만 신앙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한다. 합리성의 개념을 바꾸라!
문 : 그것이 믿어야 하는 내용인가?
답 : 그렇다!
문 : 내재신을 설명하는데,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으로 자리매김 하려다가 내재신을 인성으로 대입하여 모순을 일으킨 것은 아닌가?
답 : 하나님이 내재신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이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 전형적인 모습이 성육신 사건에서 나타났다. 이것을 믿는 것이 칼케돈 신조를 따르는 것이고, 칼케돈 신조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개혁주의자가 아니다.
문 : 학문적인 체계를 세워나가고 이해를 하도록 설득해야 할텐데, 설득이 안되니까 결국에는 믿음을 강요하는 경우가 아닌가?
답 : 그렇지 않다! 칼케돈 신조는 성경이 계시해준 내용을 선배들이 잘 정리해 놓은 것으로서, 무오하지는 않으므로 고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이 된다. 기독교사에서도 이 신조를 따르지 않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된 적이 있다. 그것이 성경계시를 잘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내 이성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면 20세기 신학자들의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할 것은 사람이 표현해 낸 이론 중에 무오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성경 계시에 의해서 우리의 이론이 언제나 고쳐질 수는 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가장 잘 표현한 것인가를 선정한 다음 그것을 따르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런 면에서 칼케돈 신조가 가장 신임하고 기준이 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 : 바르트의 영원개념은?
답 : 플라톤주의적이다. 하나님은 시간 이전부터 계시고 시간이 시작된 다음에는 ‘영원함’에서 ‘무시간적’이 아니라 ‘끝 없음’ 쪽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바르트는 시간과 영원이 너무 대조적이다.
4. 좌파 바르트주의자들
(1) the death-of-God theology (신죽음의 신학)
Thomas J. J. Altizer (1927), The Gospel of Christian Atheism (Philadelphia, 1966). God has become fully human in Christ; extreme kenotism rooted in Barth.
and W. Hamilton (1924), Radical Theology and the Death of God (New Yo가, 1966).
Paul van Buren (1924∼ ), The Secular Meaning of the Gospel (New York: Macmillan, 1963)
God was "cognitively meaningless".
(2) secular theology (세속신학)
Harvey Cox, The Secular City (New York: Macmillian, 1965).
--___________, The Feast of Fools (Cambridge, Mass.: Harvard Univ. Press, 1969).
, Religion in the Secular City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84).
본회퍼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신 죽음의 신학>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며, 그것은 우리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서 죽어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또 등장한 <세속신학>은, 이 세속 가운데서 기독교의 의미, 즉 복음의 세속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해방신학의 단초로 이어지게 되어진 것이다.
5. 우파 바르트주의 (Right-wing Barthian Theology)
Otto Weber (1902∼1966) Prof. of Reformed Theology, Univ. of Goettingen Foundations of Dogmatics (1955), 2 vols. trans. Darrell L. Guder (Grand Rapids: Eerdmans, 1981).
Thomas F. Torrance (1913∼ ) Dr. theol. under Barth (1946).
George Newlands (1941∼ ), Prof. of divinity, Glasgow Univ. (1986∼ ).
Theodore Hart, Professor of divinity, The Univ. of St. Andrews (1994∼ ).
David A. S. Fergusson, Prof. of divinity, University of Aberdeen (1990∼ ).
Colin Gunton, Prof. of Theology, London Univ.
David Ford (1948∼ ), Prof. of Theology, Cambridge Univ. (1990∼ ).
John Webster, Lady Margaret Prof. of Divinity, University of Oxford.
우파 바르트주의에는 많은 수가 참여하여 좌파를 비판하면서 “바르트가 오늘날 어떻게 역할하는가?”를 밝혔다. 그들은 기독교를 재해석하면서, 오늘날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을 다 망쳐놓았다고 보고 칼빈과 바르트를 밀접하게 보았다. 그들은 만일 칼빈이 20세기에 살았더라면 바르트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바르트에 근거해서 지금까지의 신학을 새롭게 제시하는데, 그것이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을 제창한 것이다.
6. New "Theology of the Cross"(새로운 십자가의 신학)
Juergen Moltmann (1926∼ ).
Eberhard Juengel (1934∼ ).
W. Pannenberg (1928∼ ).
본래 십자가의 신학이란 루터가 한 말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강조하느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영광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고난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루터와는 달리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로 보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생각한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아버지는 육체적인 고난은 받지 않으셨지만 아들을 끊어내야 하는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고난은 성자가 당하시고, 정신적인 고난은 성부가 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은 곧 ‘고난’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도 이 고난의 현실에 들어가서 헤치고 나아가는 길에 앞장서야 하는데 이것이 곧 <십자가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전통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은 고난을 받으시는가?”하는 질문을 비판하고, 또 삼위일체도 십자가의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마치 십자가 이전에는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닌 것처럼 시사를 주는 것이다.
7. 다양한 해방신학들
그 외에 이 영향을 받아서 다양한 해방신학이 크게 세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1) Black Theology (흑인신학)
James H. Cone. Black Theology and Black Power (New York, 1969).
“Black theology puts black identity in a theological context, showing that Black power is not only consistent with the Gospel of Jesus Christ, but that it is the Gospel of Jesus Christ." (most radical).
. 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 (Philadelphia, 1970).
. God of the Oppressed (New York, 1975).
. My Soul Looks Back (Maryknoll, N.Y.: Orbis, 1986).
. Speaking the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86).
. For My People (Maryknoll, N.Y.: Orbis, 1986).
Gayraud S. Wilmore, Black Theology and Black Radicalism (New York, 1973).
Gayraud S. Wilmore and James H. Cone, eds., Black Theology: A Documentary History 1966∼1979 (New Yo가, 1979).
Jesus is black - 백인은 흑인이 됨으로서만, 즉 예수께서 해방자로서 맞서신 맥락 안에서 백인들에 의해서 받은 흑인들의 억압의 경험에 들어옴으로서만 구원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함.
South African Black Theology: 미국에서보다는 폭력적 혁명에 대한 표현이 드물고 마르틴 루터 킹(1929∼1968)의 비폭력적 개념에 더 가까이 감.
Allan Boesak, Farewell to Innocence: A Socio-Ethical Study on Black Theology and Black Power (Kampen, 1976: Johannesburg and New York, 1977).
“Black power is the legitimate expression! of our humanness; it is black people at last resuming their responsibility as whole human beings."
Louise Kretzschmar, The Voice of Black Theology in South Africa (Johannesburg, 1986).
Basil Moore, ed., Black Theology: The South African Voice (London, 1973).
흑인신학은 미국에서 발생한 신학으로서, 흑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본질에 있어서는 한국의 경험적인 민중신학과 유사하다. 그들은 “흑인들의 힘으로 예수의 복음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그 힘(Black power)을 드러내는 것이 곧 복음이다” 라고 말한다. 즉 흑인들의 억업받는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삶이 곧 복음에 충실한 삶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을 꼽는다.
(2) Feminist Theology (여성신학)
Elizabeth Fiorenza, In Memory of Her (New Yrok: Crossroad, 1984).
Letty Russell, Human Liberation in a Feminist Perspective - A Theology (Philadelphia: Westminster, 1974).
, ed., Feminist Interpretation of the Bible (Philadelphia, 1985).
, Household of Freedon: Authority in Feminist Theology (Philadelphia: Westminster, 1987).
Elaine Storkey, What's Right with Feminism (London: SPCK, 1985).
Rosemary Radford Ruether, Sexism and God-Talk: Toward a Feminist Theology (Boston: Beacon, 1983).
, Women-Church: Theology and Practice of Feminst Liturgical Communities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6).
Susan Dowell and Linda Hurcombe, Dispossessed Daughters of Eve: Faith and Feminism, revised edition (London: SPCK, 1987).
Anne E. Carr, Transforming Grace: Christian Tradition and Women's Experience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6).
M. Daphne Hampson, Theology and Feminism (Oxford: Basil Blackwell, 1990).
남아프리카에서 나온 것은 약간 보수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 인종차별과 성차별에서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독교가 남성위주로 잘못 인도하였다고 믿는다. 성경에도, 언어에도 사람을 지칭할 때 ‘Man(남자)’으로 표기한다. 왜 남자로만 표기하는가? man-woman 하든가 woman-man 하든가 아니면 그동안 남자들이 기득권을 유지했으니까 이제는 양보해서 woman으로 대표성을 띠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만 하는가? 하나님에게도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 하든가 또 다른 식으로 여성성을 표기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의 억눌렸던 경험을 통해서, 또한 인류가 가진 것에 대한 경제적인 해방 문제 등등 이런 것들이 1980년대까지 휩쓸었던 신학이었다. 결국 이러한 신학은 역사 안에서의 신학으로서, 그 아버지는 헤겔이라고 할 수 있다.
(3) Liberation Theology (해방신학)
Gustavo Gutierrez, The Theology of Liberation, rev. edition (Maryknoll, N. Y.: Orbis, 1988).
Jose Miguez 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Philadelphia: Fortress, 1975).
, Christians and Marxists: The Mutual Challenge to Revolution (Grand Rapids: Eerdmans, 1976).
, Toward a Christian Political Ethics (Philadelphia: Fortress, 1983).
1960년대 이후 출현한 혁신적인 신학체계로서, 68년 콜롬비아의 메덜린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구체화 되었고, 이후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제3세계에 퍼져 유럽신학과는 다른 제3세계의 신학이 되었다. 역사적 사회적으로는 피억압과 경제적 좌절,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신학적으로는 칼 바르트의 종말론과 본회퍼의 정치신학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하나님이 압제받는 자들과 함께 하며, 고난 받는 자들의 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하고 있음을 선언하면서 현세의 구조악에서의 해방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임을 주장한다.4)
(4) Minjoobg Theology, Han Theology (민중신학)
민중신학은 한국에서 경험한 일종의 해방신학으로서, 토착화신학의 근거 위에 한(恨)을 풀자는 신학이다.
8.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1990년대 신학들의 다양성
90년대부터는 새로운 형태의 신학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과정신학과 이야기신학과 종교들의 신학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1) Process Theology (과정신학)
John B. Cobb Lewis S. Ford
Norman Pittenger John B. Cobb and Griffin, Process Theology
첫 번째로 과정신학에서는 하나님이 두 초점을 지닌 원과 같은 존재라고 설명한다. 즉 그동안은 하나님의 영원성, 불변성, 절대성 등 한 초점만 보았는데, 이제부터는 영원하신 것만이 아니라 시공간에도 계시고, 절대적인 것만이 아니라 상대적이기도 하며, 불변만이 아니라 변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다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두 측면이 있어서 이 세상 역사 과정에 참여하시려면, 하나님도 이 역사 과정에서 영향을 받고, 고난도 받고, 그 결과로서 변화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이 자기는 하나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무슨 참여가 되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a를 선택할지 b를 선택할지 모른다고 말하고, 오히려 선택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하여 인간의 권리를 더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과정신학에서는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위대해지는 것이다. 이것 역시 헤겔의 역사관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Narrative Theology (이야기신학)
우리말로는 기사신학, 이야기신학, 서사신학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신학으로서, 성경이 일종의 넬러티브 스토리(이야기, 설화)로 되어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기사 안에서 무엇이 강조되었는가? 문학적인 단위 내에서 강조점은 무엇인가를 잘 찾아낸다. 이전 신학자들처럼 “이것은 실제가 아니니까 잘라내야 한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우리와 유사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나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은 물론 사실이 아니라고 믿으면서도- 그러나 그 의도가 무엇인가를 찾는다. 잘 사용하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그들의 분위기에 넘어갈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까지 신학의 정형들이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개혁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과제이다.
(3) Theology of Religions (종교들의 신학)
Religious Pluralism: Hick
Inclusivism: Rahner, Clark Pinnock, Sanders
또 하나의 형태는 종교들의 신학으로서, 이 세상에 나타나는 어느 종교를 가지든지 다 구원받을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종교가 중요한게 아니라 진지하게 열심히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굳이 다른 종파에게 선교할 필요 없이 너만 잘하면 된다고 말하는 식이다.
(4) Postmodern Theology: Griffin (종교다원주의)
Deconstructive Theology
A-Theology: Mark Taylor
Nonrealistic Theology : Don Cupitt
포스트모던 데올로지를 다른 말로는 아데올로지(A-Theology)라고도 하는데, 이는 헬라어 부정문 아(A)가 붙어서 “신학을 부정하는 신학, 또는 해체신학”으로 명명할 수 있다. 전에는 시를 읽을 때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보았지만 이제는 이제는 독자의 반응을 중시하는 것처럼, 신학에도 영향을 미쳐서 객관적인 성경의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을 읽고 각자가 느끼는 감정, 견해, 방식 등이 다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가 중요한게 아니라 독자의 주관적인 견해가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는 ‘QT’ 라고 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5)
(5) 중도파 신학자들에 의한 조직신학에의 새로운 강조
Ex. International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의 창간
founding editors: John Webster, Colin Gunton
내포주의(Inclusive Theology)는 “구원받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면 앞엣 것과 정반대의 주장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 사실을 인식하고 아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즉 내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카톨릭 신학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쓰면서, 복음을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불교신자라도 신실한 상태에 있었다면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내가 인식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복음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음이 없는 비기독교 국가에도 구원받을 자가 있다는 말을 함으로서, 결국 복음이 들어가서 심판을 하게 되므로 차라리 전하지 말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사상은 그들 뿐 아니라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에게까지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 간혹 한국교회 안에서도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지옥에 갔겠는가? 천국에 갔을 것이다! 하고 긍정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이런 사상이다. 이에 비하면 바르트는 철저히 배타주의자이다. 그는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도 무조건 좋아할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부정당하셨고, 부활승천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긍정되었기 때문에 그 역시 만인구원설과 유사하고 그의 말 이면에는 엄청난 독소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 질문과 답변 >
문 : 19~20세기의 영향이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이 설명하셨다. 왜 하필 저사람일까? 그가 신학자인지 철학자인지 알수 없는데? 헤겔의 어떤 요소때문에? 헤겔의 후예는 누구인가?
답 : 네오헤겔이즘, 역사에 대한 강조 때문이다. 헤겔은 모든 것이 역사 안에서 다 이뤄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헤겔은 인간이 수고하고 애쓰는 그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심지어는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오는 것을 보고도 “나폴레옹은 이성의 교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뿐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후계자는 판넨베르그(W. Pannenberg (1928∼ ) - 하나님의 계시), 한스 퀸 등이 있다.
가장 이성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이다. 변증법적 방법을 말하였고, 모든 것이 역사 안에서 이뤄지되 현실은 하나님의 생각하는 것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성과 인간의 이성을 도외시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간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사실은 사람의 시각을 하나님의 시각처럼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문 : 슐라이어 마허가 절대의존 감정을 말하였고, 그 반동으로 틸리히가 나왔다. 그런데 틸리히도 황홀경(ecstasy)을 강조하였는데, 마허가 말한 이성의 심연과 접촉이 비슷한 것이 아닌가?
답 : 비슷하다. 이는 19세기 신학사상사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성이 합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들뜨게 하고 매혹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슐라이어마허는 이성적이지 않은데 그것을 이성적으로 끌어온 것이 다르다. 결국 같은 접근을 한 것이다. 오늘날 가장 많이 출간되는 책이 윤리관에 속한 것으로서, 도덕, 감수성, 종교성 등에 가장 민감함 사람이 틸리히이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존재의 근거로 생각한다. 우리의 존재하는 근거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순간순간 의식할 뿐 아니라 영원한 것이라고 본다. 그것을 “영원한 지금”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이 생각하셨던 것이 나타나도록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서 마허는 예수가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하였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그만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사람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의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은 우리도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의 의식으로 가득차면 예수와 비슷한 존재가 되어진다는 뜻인데, 이것은 누구든지 부처가 될수 있다는 불교적 색채가 짙다. 이것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매혹적인 말이다. 그는 또 생각이나 도덕적 실천으로 되는게 아니라 무언가 그 존재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면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종교라고 말한다. 그는 가끔 성경을 말하였지만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각도이다. 그는 성령을 공동체의 영으로 파악하였고, 삼위일체론을 그의 책 맨 뒤로 놓았다. 그것은 삼위일체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지 않았다간 이단으로 몰릴까봐 넣은 것이다. 이것을 뒤집은 자가 바르트인데, 바르트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삼위일체를 맨 처음으로 넣었던 것이다.
문 : 현대신학 배후에 현대철학이 있고 그들의 조종하에 되어진 처럼 보았는데, 다른 각도에서 당대의 보수신학이 무신학적인 배경이 아닌가? 보수신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조직신학이 가지고 있는 추상성, 성경 진리를 교리적으로 가진 것에 대한 반성, 최근 성경신학은 성경 자체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역사의 중요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 최초로 반성한 자들이 경건주의이다.
당시 루터파 신학과 성도들의 삶은 매마른 신학 논쟁에 매달려 삭막한 모습을 띠었다. 그래서 경건주의자들은 그 문제점을 반성하며 “우리는 신학을 가지지 않는다. 성경만 가질 뿐이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어리석은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 나름대로도 틀림없이 신학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건주의자가 게르할더스 보스(Geehardus Vos 1862∼1947)인데, 그는 원래 조직신학자로서 구약학을 하다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성경신학교수로 초빙받아 37년간 가르쳤다. 그는 역사를 하나님의 특별계시사로 보았다. 그 자신이 조직신학자이면서 성경신학자이므로, 비유적으로 조직신학은 역사 가운데서 원을 끄집어내고 성경신학은 선을 끄집어 낸 것과 같다고 설명한 적도 있다.
따라서 조직신학이 방법론에서 무식한 방법, 즉 성경 주해에 근거하지 않으므로 잘못된 것이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 주해에 의해 나타난 것이 경건주의인데, 그들은 칸트, 헤겔, 슐라이어 마허의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특성에 유의하면서 신학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은 첫째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라는 것이다. 소문난 집단들도 한결같이 특별계시라고 하지만 엉터리 해석으로 특별계시의 성격이 다 사라졌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그러려면 선배들이 해석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100년 밖에 안된 우리의 전통을 가지고 2000년의 전통을 무시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한번도 개혁신학자들의 노력에 충실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단 충실해 보고 그 다음에 문제가 있거든 고쳐보자! 우리는 개혁주의에 충실한 교회를 해 봤는가? 그렇게 한 적이 없다. 두 번째는 성경이 유기적 점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루 아침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온 것이기 유기적 점진성으로 보아야 한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있는 것처럼 보지 말라! 성경계시는 유기적 점진성을 드러내면서 어떻게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왔는가를 찾아야 한다. 좋은 조직신학은 올바른 주해에 근거한 것이다.
Ⅳ. 20세기 후반의 개혁신학의 동향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현상을 보는 면에서는 주관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객관적인 것은 받아들이든지 안받아들이든지 간에 진리이다. 만일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면 넌크리스챤(Non Christian)의 생각을 따라간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이성과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칸트의 생각이다. 물론 신앙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만 이성의 영역에도 반드시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성으로 되어야 하는데, 어느새 사람들은 “내 이성에 안 맞아!” 하고 경험주의자들의 이성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이 세 영역에 다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이 이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맹신이 되어지고 사랑하는 감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도덕적으로 사악해진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세워진 신앙이 개혁신앙이므로 우리는 선배들의 신학을 듣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1. 20세기 초반의 개혁신학
20세기 초반의 개혁신학은 두 가지 전통을 가지고 있다.
(1) Dutch Reformed Tradition
A. Kuyper (1837∼1921) Herman Bavinck (1854∼1921)
Geehardus Vos (1862∼1947) Louis Berkhof (1873∼1957)
더치 리폼드 개혁신학은 화란에서 만들어져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칼빈신학교를 세운 자들이다. 우리와 같은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이 단절할 필요가 없다.
(2) Old Princeton-Westminster Tradition
Benjamin B. Warfield (1851∼1921) 1887년부터 Princeton에서 가르침
Casper W. Hodge (1870∼1937) Oswald T. Allis (1880∼1973)
J. Gresham Machen (1881∼1975)
또 하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로서, 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이어졌다. 기본적으로 가는 성향은 성경에 가장 가까이 가려고 하였고, 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셀 때에도 성경 전체를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
2. 20세기 후반 개혁신학의 동향
(1) 발전적 형태
John Murray (1898∼1975) Anthoney A. Hoekema (1913∼1988) David Wells
이 개혁신학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발전된 양태는 기존의 틀 안에서의 발전을 모색한 자들(존 머레이 - 조직신학 교수, 후크마 - 칼빈신학교 조직신학, 웨일즈 - 코넬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이다. 이들은 다 게르할더스 보스의 영향을 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주의깊게 살피고 대화할 필요가 있다.
(2) 철저한 개혁신학의 추구
Cornelius Van Til (1895∼1987) John Frame
또 이런 입장에서 좀더 발전적으로 나아간 자, 즉 신학에서는 리폼드(개혁적)해야 하지만 변증할 때는 공동점이나 불신자와의 접촉점을 마련해 놓고 기독교 신학을 접근하는 방안을 모색한 자들이다. 이들에 대해서 준거점을 불신자에게로 옮긴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전도할 때는 알미니안적이기었기 때문에 이것을 철저히 성격적인 입장에 서 있는 반틸이 비판하였던 것이다.
(3) 개혁신학을 하는 새로운 틀의 제시
Gordon J. Spykeman, Reformational Theology: A New Paradigm for Doing Domatics (Grand rapids: Eerdmans, 1992)
Richard Lints, The Fabrid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세 번째로는 개혁신학을 하는 새로운 틀을 제시하였는데, 이제는 틀을 새롭게 바꾸자는 것이다. 특히 스파이크 맨(Gordon J. Spykeman)은 기존의 조직신학이 서론 신론 인죄론 등의 순서로 되어있는데, 이것을 세계관의 틀로 이해하여 “창조 - 타락 - 구속 - 완성(극치)” 의 순서로 바꾸어 쓰자고 제안하였다.
또 한 사람은 린츠(Richard Lints)인데, 그는 복음주의 신학의 새로운 틀을 제시하였다. 즉 보스의 구속사적인 틀을 중시하면서도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수용하자는 것이다. 즉 복음주의에는 장로교 뿐 아니라 알미니안, 감리교, 침례교 등도 다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과의 접촉점을 끌어내면서도 그들을 성경 중심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4) "개혁주의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의 제시와 발전
Alvin Plantinga Nicholas Wolterstorff
신학 외에도 안믿는 자들의 이성개념을 생각하면서 개혁주의 인식론( 칼빈신학교 출신, 노트르담, 에일)을 새롭게 썼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는데, 순기능은 믿는 바에 충실하도록 하고, ‘합리적이다’라는 말이 안 믿는 자에게도 이성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문제(역기능)는 자칫 하나님 개념이 성경의 하나님 개념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하나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쨋든 그들의 공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이해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ꡔ종교철학저널ꡕ에서는 그들의 견해가 옳다거나 옳지 않다고 반박하는 글을 게시하기도 하였다.
(5) 개혁주의적 인문학의 시도
Richard C. Richards Stephen Evans
기독교적인 인문학으로서, 한국사람 가운데서는 철저하게 개혁주의적으로 실천한 사람으로 김홍전 박사를 소개하고 싶다. 그는 학적인 것은 부족해도 설교적인 스타일로 성경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좋은 선배가 있다는 것이 매우 좋다. 하지만 좋은 선배가 있으면서도 어깨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 손봉호 박사는 “윗물은 더러워도”라고 했는데, 우리는 밑의 물까지 더럽히지 말고 개혁주의적으로 가장 성경적인 신앙과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어보자! 그리고 나서 거기에 혹시 문제가 있다면 함께 연구해서 고쳐나가기로 하자! 그런 것이 없이 우리끼리 새로운 무엇을 막 하려고 해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갑자기 토출된 것이 아니라 2000년 교회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서도 무엇이 갑자기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 질문과 답변 >
문 : 신앙을 강조하는 전제, 신앙은 신학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답 우리는 전제주의다. 성경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반틸의 신학적인 입장,
문 : 인식이라는 것이 신앙의 주(主)가 아니잖은가?
답 : 안셂과 어거스틴으로부터 출발한 것은 신앙이다.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내용이 있어야 한다. ① 노디티아(Knowledge?) - 알아야 믿는다. 이성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선포된 내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잘못된 것을 열심히 믿는 것은 이단이다. ② 어센셔슬(A suggestion?) -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내가 동의해야 한다. ③ 피조시아(Faith?) - 의뢰해야 한다.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내가 어디가면 아는 것을 너무 강조한다고 말하는데, 오늘은 믿는 것을 너무 강조한다고 말하는 것이 재미있는 현상이다.
문 : 내포주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해 달라.
답 :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다 괜찮다"고 말하는 종교다원주의는 부정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몰라도 된다"는 식이다. 왜냐하면 회교(다른 종교)권에 있으면서도 본성적으로 선한 일을 잘 하면 자기는 모르더라도 곧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 주의를 부정했지만 그 역시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입고 있다고 말하여 내포주의적 사상이 있다. 캐톨릭주의자들이나 복음주의 가운데서도 이런 경향은 많다. 그래서 이순신, 세종대왕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존재적으로 안다"고 말한다. 그 근거로는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새로운 세상을 가져왔고 모든 사람을 구속의 영역 안에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성경적 근거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을 그런 식으로 주해한 결과이다. 그 결과 어떤 현상이 드러나는가? 도덕적인 삶을 통해, 즉 착한 일을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문 : 교회사 2000년의 중요성을 주장하시면서 성령의 계시는 전제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전제를 보수해야 한다는 것과 대안으로 개혁주의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전통을 보수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개혁하자는 것인가?
답 : ‘개혁주의’란 성경에 근거해서 우리의 믿고 있은 바 계시에 일치하면 발전시키고 어긋나는 것은 고쳐가자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현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좋은 것에 일치되는 것은 계속 발전 유지 보수해야 될 것이고 나쁜 것은 개혁해야 할 것이다.
문 : 그리나 유감스럽게도 소수의 개혁주의자들을 남겨놓고 대부분은 잘못된 곳으로 기울고 있다. 보수 중에서도 어디까지가 보수이고 어디까지가 개혁인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 여전히 우리가 그들에게 의지해야 하겠는가? 불확실한 자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맡겨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다. 2000년 전에 제시했던 대전제를 우리에게 믿으라는 말인데, 계속 개혁되어지고 보수주의자들도 많이 바뀌어져가는데 우리가 거기에만 믿음의 뿌리를 둘 수 있는가?
답 : 그때에 주의 할 것을 두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성경에 근거한 것을 따라야 하는데, 지금까지 과거의 모든 신학자들을 살펴 본 결과 그래도 개혁주의가 가장 건전하다. 우리는 2000년의 역사를 섭리하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잘 살펴야 한다. 왜 선배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하는가?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자칫 과거에 이단이 했던 주장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니다. 칼빈도 실수가 많아서 천사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칼빈 정도도 괜찮지 않은가?
문 : 신학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변증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인데, 2000년대 것을 그대로 답습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현대신학을 배워야 할 필요가 어디있는가?
답 : 사도적 전승을 떠난 것은 다 잘못된 것이다.
문 : 바르트가 우리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데도 사상의 근저가 칸트적이라고 해서 비판하는데, 과연 5세기의 어거스틴에게는 그런 오류가 없는가?
답 : 그에게도 플라톤적 사상이 근저에 있다.
문 : 그렇다면 어거스틴을 기준으로 바르트를 비판할 수는 없잖은가?
답 : 그래도 어거스틴의 프라톤 사상은 바르트의 칸트적 경향보다는 훨씬 덜하다.
문 : 그러면 덜하니까 어거스틴과는 대화가 가능하고 바르트와는 안되는가? 그 기준선을 어디에 두는가?
답 : 그의 신학이 어느정도 성경 계시에 근접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물론 어거스틴은 이원론적인 시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계시에 충실하고, 바르트는 성경을 많이 인용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성경 계시의 틀을 벗어나고 있다.
문 :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런가?
답 : 그렇다.
문 : 대부분 전제를 들어서 해명하려하는데, 전제가 아니라 증명의 방법으로는 증명될 수 없는가?
답 : 무조건 전제가 아니라 정말 성경에서 근거하고 있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의 근거를 드러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성이 작용하게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의 자체는 성경의 내용이어야 한다.
문 : 개혁신학의 건전한 근거로서 유기적점진성을 강조하셨는데, 자칫하면 다양성으로 보일수도 있다.
답 : 다른 것이 아니라 점진성 속에 다양성이 있는 것이다.
문 : 구속사적 통일성에 한계점이 있지 않은가? 오히려 언약사적 관점이 더 포괄적이지 않은가?
답 : 그것은 구속과 언약을 대립적으로 본 것이다. 구속사가 전개되는 것은 언약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둘은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언약사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곳이 개혁신학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을 다른 말로는 ‘언약신학’이라고도 칭한다. 우리 선배들은 구속사와 언약사를 서로 떼어놓지 않고 하나로 보았다. 실례로 카이저는 잠언을 <언약의 삶>으로 보았다.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언약’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다.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말할 때 성경 전체가 지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통시적 원리가 언약이다. 따라서 언약이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이것을 잘 설명한 사람이 게르할더스 보스(Geehardus Vos 1862∼1947)이다. 1800년대에 이미 말한 우리의 선배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우리가 다른 것을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구속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와 떨어질 수 없다.
어떤 자는 성경의 내용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전체의 주제가 없다고 하는 자도 있지만 다양성 가운데 유기적 점진성이 있다. 보스는 “씨앗이 자라면 뿌리로 줄기로 나무를 보여주지만 이미 그 씨앗 속에는 전체(나무)가 다 잠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점진성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되었고, 유기성과 점진성을 다 강조해야 통일성과 다양성이 보인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와 그것을 갱신하는 틀로서의 언약사, 이것을 잘 깨닫고 있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그런 후에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자! 대립적으로 보지 말자!
문 : “구속사와 언약사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라고 하는 정도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구체적으로 구속사의 틀 속에서 구속을 위한 언약으로 볼 것인가? 언약의 전개 과정에서 구속을 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
답 : 구속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게 하는 것이 구속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속(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식으로 이뤄가시는가? 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당신의 백성들과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여 맺으신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하고 물으면 “내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라서 성경을 보니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주시려고 온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문 : 하나님의 섭리 목적의 초점을 ‘하나님의 나라’에 맞추면, 자유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고 지상에서 유토피아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관점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 자신이 이루시는 일로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도 이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케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므로 자기가 나서서 뭘 하려고 하는 것은 안되고 열심히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문 :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는가?
답 :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
문 : 이미 이루어진 것이면 왜 또 만드시는가? 하나님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가? 만일 우리를 위해서 백성 만드시는 것이라면 우리 위한 하나님이 아니신가?
답 : 우리에게 좋은 것은 곧 하나님에게도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 백성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문 :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영역이라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이 기독교 윤리학에서 문제되고 있다. 칼빈도 기강 제3권에서 악에 대하여 많이 다루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와 관련해서 악의 문제의 난관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 것인가?
답 :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안된다. 우리가 악이 있는 현실은 인정하되 현실로부터 악이 필연적이다 라고 하면 안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만일 그쪽으로 가면 개혁신학을 버리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악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과적으로 악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신다. 다른 표현으로는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는 방해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작업을 하여야 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은 있어도 아무것도 방해하지 못한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으니까! 그러므로 처음부터 악이 필요했다라고 보거나 필연적이라고 보면 하나님을 악의 창조자, 또는 근원자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자들은 이를 피하였다. 내 머리 속에 이해되지 않는 일이 상충될 때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상충될 때면 하나님의 주권을 살리려고 인간의 책임을 버리든가 아니면 인간의 책임을 살리려고 하나님의 주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끝까지 이 둘을 놓지 않았다. 즉 우리가 안되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갈 때 물어볼 망정 지키고 있어야지 절대로 난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타협해서는 안된다.
문 : 그러면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은혜가 은혜되게 하시려고 인류를 죄 아래 가두셨다”6)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도구나 방편으로 악을 사용하시지는 않는가?
답 :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다 창조하셨다7)고 말씀하신 곳도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선을 기뻐하신 것처럼 악이 일어나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기뻐하신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선이 발생하는 것처럼 악이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어렵지만 계속 말한다. 다만 ‘허용적’라는 말은 사용할 수 있다.
성경 한 절 읽고 마치겠다.
전도서 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지으셨지만 사람들이 꾀를 내어 악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악의 주체를 하나님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한 절 읽겠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셨다. 그러므로 악한 것은 있을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의 의미를 찾아 보라!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우리의 연약한 이성으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차라리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겨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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