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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이란 무엇인가? /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by 【고동엽】 2021. 11. 2.

개혁신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the Reformed Faith)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기독교의 딜레마와 좌표

 

작년에 미국,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각 대륙 출신의 이름난 신학자 6인의 이름으로 출판된 「기독교의 미래」(청림출판)라는 책에 의하면,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지난 300여년 동안 기독교는 서구 선교의 결과로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으나 이와 동시에 서구 교회가 쇠퇴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소수 종교로 전락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직접 통계에 참여한 한 교수는 유럽 대륙은 물론이고, 한때 세계 선교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상황을 보더라도 교회 출석 인구는 5%를 밑돈다고 지적하였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서구사회에서 기독교가 소수자의 종교로 바뀌면서 정신세계를 주도하거나 통제하는 규범으로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서구 사회의 기독교의 몰락 현상은 비서구사회의 기독교 확산과 비교되어 설명되기도 하지만 필리핀과 한국,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뿐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에서도 기독교 인구는 1%를 밑도는 소수 종교로 남아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 공국(公國)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기독교적 문화 유산과 위대한 선교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교회 역시 유럽교회와 마찬가지로 내리막길을 치닫고 있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여년전에 발행된 런던 타임즈(London Times, 1993년 1월)는 당시에 설문조사를 통해서 영국에 사는 90%이상의 사람들은 영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기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고 보도한바 있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거의가 노인들이며, 또한 매년 2백여곳 이상의 교회가 문을 닫고, 그 건물은 이슬람 사원, 힌두사원, 심지어는 나이트클럽으로 팔려나가고 있는 실정을 고발하였다. 혹자들은 두 차례나 부시 정권이 집권한 미국의 기독교 상황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9.11 사태 이후, 미국의 기독교는 내용과 가치면에서 현저하게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일례로 2002년에는 미국의 국공립 학교에서의 기독교식 기도가 금지되는 법원판결이 있었는가 하면, 또 수년전에는 기독교 건국 이념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법원 건물의 모세 10계 내용을 담은 설치물을 더 이상 비치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세계 기독교의 외형적 영향력 혹은 정치력의 퇴보 현상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점차 보편화되고 있는 기독교의 비(非)기독교화 현상이다. 참된 복음과 바른 신학에 기초하지 않은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다. 성경을 말하지만 성경의 본의와 상관없는 내용이 가장 성경적 것인양 왜곡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처한 가장 심각한 딜레마는 외부 환경의 요인때문이 아니라 자체내의 모순으로 기인된 것이다. 문제는 기독교의 외연의 축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하는 영적 능력의 상실과 변질에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기독교는 실패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영적인 간음과 배교와 배도를 일삼은 이스라엘을 목도하며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던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의 불같은 음성을 들어야 할만큼 심각한 영적 공항 상황에 빠져 있다.

 

따라서 곤핍하고 부조리한 영적 현실로부터 진정한 영적 회복과 참된 신앙의 부흥을 사모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호 4:6)라는 호세아 선지자의 경고와,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는 아모스 선지자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를 성경 곳곳에 숨김없이 기록케 하신 목적은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고전 10:11)로 삼도록 하시기 위한 신적 배려였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이러한 신앙의 실패를 경험하지 않도록 교훈하시기 위해 역사가운데 참 성도가 가야 할 “옛적 길 곧 선한 길”(렘 6:16)을 예비해주셨다. 그 길은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믿음의 선진들이 걸었던 길이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행보속에서 ‘옛적 길 선한 길’의 방향점과 목적지를 뚜렷하게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개혁신앙이라는 통로를 통해 진리의 중심으로 다가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남긴 족적은 비단 그들의 개인의 경건과 신앙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찬란한 진리의 빛가운데로 인도함을 얻은 그들의 신앙고백속에서 우리는 어느 시대에나 변치 않는 진리의 나침반과 진리의 그루터기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이 한결같이 추구하고 고백했던 ‘개혁신앙’은 격심한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가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붙잡아야 할 진리의 좌표이다.

 

 

개혁주의, 개혁신앙 이라는 명칭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종교개혁의 역사 초기에 종교개혁자들을 가리켜, ‘개혁하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 새로운 움직임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 이름을 명예롭게 받아들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하는 신앙은 로마 교회나 여타 변질된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개혁된’(reformed), ‘수정된’(corrected), ‘정화된’(cleaned) 성격이 분명하게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개혁주의자’라는 말은 종교개혁운동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16세기 말경에 루터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간의 성례전을 둘러싼 논쟁이후에 ‘복음주의자’ 혹은 ‘루터주의’라는 말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한편 ‘개혁주의’ 혹은 ‘개혁파’라는 말은 칼빈주의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1590년대 이후 ‘개혁주의(파)’나 ‘루터주의(파)’ 라는 신학적 노선의 차이를 가진 말로서 고유명사적 의미로 정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광의적 의미로 볼 때, 루터주의나 개혁주의나 태생적으로 반(反)카톨릭적 배경을 가진 개신교(Protestant)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내용적 엄밀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 진영은 매우 상이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개혁주의(파)’은 신학의 이해에 있어서 루터주의나 여타의 개신교 복음주의와 구별되며, 개혁신앙은 이러한 개혁주의(파)의 신학적 이해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개혁신앙은 칼빈파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견지하는 신앙을 가리킨다. 이미 지적한 것과 같이 개혁신앙이란 ‘개혁된 것을 끊임없이 개혁해 가는 신앙’이다. ‘개혁주의’를 영어로 리폼드 신학(Reformed Theology)라고 부르는 것은 이와 같은 신학의 독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칼빈주의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은 이미 개혁된(reformed) 것을 개혁해 가는(reforming) 일에 있다. ‘개혁된’ 것이란 이미 ‘성경에 따라서’ 완성된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교회와 신앙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따라 개혁되어 가야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분명히 개혁신앙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인 칼빈의 신학적 이해와 해석을 중요한 지침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칼빈이라는 개인적 존재보다도 칼빈이 지향했던 이념 즉, 말씀에 의해서만 추구되고 이해되어지는 교회와 신앙을 추구하는 자세를 계승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칼빈을 반대하거나 불편해 하는 사람들은 개혁주의나 칼빈주의가 칼빈 개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물로 보고, 개혁주의나 칼빈주의를 말하는 것은 곧 칼빈 개인에 대한 복종과 맹종으로 여긴다.

 

하지만 칼빈의 신학적 방법론은 그만의 독특한 창안물이 아니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정통주의 신학의 아버지인 어거스틴 그리고 진리에 편에 섰던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이후 많은 종교개혁자들의 가열찬 노고에 의해 그의 사상은 성경의 의미를 가장 바르게 드러내는 신학으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사상은 당대 가장 경건하고 박식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통해 유럽과 신대륙에 확산되어 갔다. 그 결과 유럽 대륙계의 칼빈파 교회에서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는 명칭으로, 스코틀란드를 중심으로 한 앵글로색슨계의 칼빈파 교회에서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역에 따라 명칭은 달랐지만 이 두가지 교회 형태는 칼빈주의적 신학을 모태로 한 가장 순수한 종교개혁의 열매이다. 이후 유럽 대륙을 거쳐서 미국, 카나다(북미), 호주(오세아니아), 남아프리카(아프리카), 그리고 한국(아시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개혁신앙은 가장 성경적인 신학적 이해를 담보한 내용으로서 참된 교회들을 통해 순수하고 엄밀한 종교개혁의 정신과 이념을 계승해 나가고 있다.

 

 

 

개혁신앙이란 무엇인가?

 

첫째, 개혁신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을 강조하는 신앙이다.

개혁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중심적 사고를 전제한 신앙이다. 종교개혁의 근본원리로써 루터주의의 ‘이신칭의’는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그런데 루터주의는 이 명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구원론적인 접근 방식에 편향되어 있다. 루터주의의 강점인 동시에 한계이다. 하지만 개혁신앙의 사유의 출발점은 인간의 구원이나 회심, 중생의 신비나 성령의 연합, 그리스도의 고난이나 교회의 보편성같은 주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 즉 하나님의 중심적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혹자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자연계와 도덕계에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정도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우주 만물의 어느 부분에라도 자유롭고도 선하신 뜻에 의해 제한없이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이란 말은 하나님을 최고의 입법자요, 또 자연법칙을 지으신 분이라는 추상적인 법적 술어로서 보다는 창조하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를 의미하는 실제적인 술어 여겨야 한다.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중의 한 사람인 워필드(B.B Warfield) 박사는 하나님의 주권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개혁주의적 성도를 가리켜,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 자기 전생애를 살아가며,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아의존은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Calvin as a Theologan and Calvinism Today, pp.23,24)라고 정의한 바 있다. 개혁신앙을 가진 성도는 자신과 더불어 존재하는 (사회적, 종교적, 지적, 도덕적, 물질적, 영적 활동을 포괄한) 모든 영역과 관련하여,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이라는 신앙 고백을 생의 가장 중요한 이유인 동시에 목적으로 삼는다.

 

 

둘째, 개혁신앙은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The Infallible Scripture)으로 믿는 신앙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독점적,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고 ‘성경만이’(Sola Scriptura)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것은 두 종류의 신학적 오류에 대한 통쾌한 반성적 차원에서의 주장이었다. 그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로마교회에 대해서였다. 로마교회에서는 ‘성경’보다 ‘전통’을 더 강조하였다. 로마 교회는 66권 이외의 정경을 인정할만한 신적 권위과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지 않은 성례를 구원의 조건으로서 제시하는 일에 대해서 종교개혁적 입장은 ‘성경만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둘째,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유일성을 주장하게 된 경위는 제세례파와 같은 극단적인 개신교도들의 종교적 열광주의와 신비적 경험주의 때문이었다. 이들은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성령에 의한 내적이고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지금도 이와 같은 ‘인간의 전승’과 ‘새로운 계시’에 대한 집착은 참된 교회를 훼파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제1장 6절)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그리고 신앙과 실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지혜(진리)는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아니면 필연적이고 좋은 추론에 의하여 그것을 성경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성령의 새 계시나 인간의 유전을 더하지 못한다. 우리가 말씀에 기록된 것을 구원받는 데 효과있도록 깨달으려면 성령의 내적 조명(內的照明)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개혁신앙은 신앙과 삶에 있어서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서, 성경 말씀이 말씀하는 곳에 머무르는 한편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것에는 침묵하며, 오직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철저하게 듣고, 따르며 살아가려고 하는 신앙을 가리킨다.

 

 

셋째, 개혁신앙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순전하고 바른 교리(The Pure and Right Confessions)들을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이다.

 

저명한 교회사가인 필립샤프(P. Schaff)는 “성경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다. 또한 성경은 신앙의 규범이요, 신앙고백은 교리의 규범이다.”고 하였다. 신앙 고백이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성도의 답변인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중 하나는 반(反) 교리적 정서가 팽배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현대에 적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정통교리를 배척하는 대신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교회 성장을 추구하는 유행성 바이러스같은 프로그램들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된 교회는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제네바 교회의 성도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발간한 「제네바 교리문답서」 <서론>에서 “이 교리문답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이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꽃을 피웠던 곳에서는 반드시 그 신학의 열매로서 신앙고백이 작성되었고, 개혁된 교회는 역사적으로 바르게 규명된 신앙 고백을 가지고서 성도를 양육하고 교훈하는 일에 힘썼다. 신앙고백을 통한 교육은 내용적으로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가능케 한다. 또한 신앙고백서는 끊임없이 참된 교회를 어지럽히고 변질시키는 사단의 궤계와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되어준다. 따라서 개혁신앙은 역사적인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를 존중하며, 그것을 통해 성경 말씀을 보다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신앙을 말한다. 특히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은 신앙고백서들 중에서도 성경 내용을 가장 적확하게 해설하고 있는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와 개혁교회의 3대 기본 신앙 고백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The Heidelberg Catechism), ‘벨직 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 of Faith), 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Dort)을 중요한 지침으로 삼는다.

 

 

 

 

넷째, 개혁신앙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아가는(Coram Deo) 신앙이다.

 

개혁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서있는 자’의 의식을 강조한다. ‘하나님 앞에’라는 말은 다른 어떤 표현보다도 성도를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내고, 우리를 부복하게 하는 강력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다른 종교에서 추구하는 신앙과 달리, 우리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앙’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3대 칼빈주의 석학중의 또 다른 한사람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그의 명저(名著)인 「칼빈주의」라는 책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앙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인간의 생활 전체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숨김없이 행하여야만 한다는 의식은 칼빈주의의 근본 사상이다. 이러한 강력한 사실에 의해서 생활의 전분야가 지배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사상을 모체로 해서 칼빈주의의 모든 포괄적인 윈리는 이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개혁 신앙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가정이나 사회, 나아가 피조계 전영역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대면하듯 그 분을 인식하며, 오로지 그 분의 영광과 나의 찬송을 목적으로 삼는 순수하고 정직한 기독교 신앙 자체를 가리킨다. 즉 참된 성도라면 하나님 앞에서만 순수하며 바르며 정직한 신앙을 추구하는 동시에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로서 철저한 신존재(神存在)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다섯째, 개혁신앙은 장로주의 정치(The Presbyterian in Government)를 지향하고 성경적 교회를 형성하려는 신앙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와 교회정치를 교회 개혁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으로 여겼다. 교회정치는 교회의 3대 표지(신실한 말씀 선포, 정당한 성례 집행, 적법한 권징 시행)중에서도 한 대목을 차지할뿐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마지막 부분(30장 “권징”, 31장 “대회와 협의회”)을 장식할만큼을 전통적인 개혁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교인들은 교회정치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 정치와 구별없이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교회에서 정치를 하는 목사들의 행태에 대한 반사적 염증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나 왜곡된 인상은 결국 오늘날 교회들이 성경적인 교회론으로부터 이탈하는데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비’(非) 혹은 ‘반’(反) 교회정치적 경향은 먼저 교단, 교파간의 신학적 차이를 무시한 무분별한 연합 운동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무교회주의 운동을 양산하는 거름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 유행하는 병든 교회상을 만드는 주범이 되었는데, 예를 들어,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한 독재형 목회, 회중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드는 민주형 목회, 무엇이든 좋다는 것은 모두 도입하는 개방형 목회, 개인적인 기질과 정서 중심의 개인형 목회, 음악이나 영상을 혹은 기술 중심의 테크닉 목회, 지분 관리에 힘쓰는 주식회사형 목회, 교회를 문화 활동과 여가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놀이형 목회, 대외적인 사회 활동과 봉사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봉사형 목회, 선교를 교회 자랑의 수단으로 삼는 업적형 목회,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자유형 목회 등등...

 

하지만 개혁신앙은 이러한 종류의 비 혹은 반 교회정치적인 목회를 배격한다. 전통적인 개혁교회는 소명에 의해 세워진 교회의 직원으로서의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 정치 형태인 장로교정치제도를 가장 성경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장로주의 교회 정치는 이것은 개인의 생각이나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기간동안 수많은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 해석과 논의를 걸쳐 가장 성경적인이면서도 바람직한 제도로서 구현된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교회정치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운영하는 사람이 말씀과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아니한다면, 언제든지 왜곡되고 변질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상기한 개혁신앙의 내용들을 철저하게 익힘으로써,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기 위해 세워 주신 교회정치의 정신과 질서들을 바르게 회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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