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의 전통과 오늘의 고백신앙 - 칼빈의 신학을 중심으로
- 안인섭 교수(총신대신대원)
<들어가는 글>
주지하는 바처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KACP)는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적 경향을 가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한국 교회의 일치(Unity)와 갱신(Renewal), 그리고 사회를 향한 온전한 섬김(Diakonia)을 목표로 1998년에 창립되었다. 올해의 전국 수련회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와 리더십”이며, 필자에게 주어진 제목은 “개혁신앙의 전통과 오늘의 고백신앙”이다.
일반적으로 개혁신앙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자면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주창된 신앙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좁은 의미로 본다면 개혁주의 신앙으로 제한될 수도 있을 것이다. 16세기 문맥에서 종교개혁 신학을 형성한 중요한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당대의 다른 개혁자들과의 연합을 중시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을 들 수 있다.
마침 올해는 종교개혁자 칼빈이 태어난 지 500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 발제는 한국 교회가 21세기 역사와 사회를 향해서 어떻게 나가야 할지 그 문제 의식을 염두에 두면서, 칼빈의 신학과 사역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접근함으로 본 발제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가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전체 주제와 연결을 지으려고 한다.
본 발제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목표인 “일치”와 “개혁”과 “사회를 향한 디아코니아”의 항목을 따라 작성되었다. 먼저, 2장에서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로서 칼빈의 “하나님의 나라(Regnum Dei)” 신학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3장에서는“일치”라는 항목에서 칼빈의 교회 일치의 기초가 어거스틴이라는 것과 칼빈의 성찬론에 나타난 연합의 정신을 살펴볼 것이다. 한편 4장“개혁”라는 항목에서는 예배 개혁과 설교 개혁을 고찰할 것이며, 5장 “사회를 위한 봉사”에서는 사회 봉사를 위한 칼빈의 신학을 연구한 후에, 칼빈이 실제로 제네바에서 사역했던 모델을 자세하게 알아볼 것이다. 마지막 6장에서는 16세기 칼빈의 신학이 21세기 한반도의 남북 평화 통일을 위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제시하게 될 것이다.
칼빈의 생애 전체에 나타난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칼빈을 해석할 때, 진정한 칼빈의 신학과 그의 사역이 드러나게 된다. 그 칼빈은 한 명의 교회의 신학자(Doctor Ecclesiae)이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온순하고, 유연성 있으며, 발전적인 사상을 가진 한 명의 조화로운 신학자였을 뿐 아니라, 통찰력 있고 현실적인 교회 정치 지도자였다. 그의 앞에는, 신앙 때문에 난민처럼 조국 프랑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삶의 현장이 있었고,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이 전개되는 숨을 조이는 유럽의 종교개혁의 치열한 역사와 제네바가 있었다. 칼빈은 그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그의 심장을 드리며 종교개혁 교회를 섬겼던 우리와 성정이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Regnum Dei) :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교회” 이해의 기초>
1. 이중의 정부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주” 이시자 “구속주” 이시다. 이 하나님의 주권(Regnum Dei)은 모든 창조 세계와 인간의 사회에 미친다. 칼빈은 인간 사회를 영적인 부분과 정치적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영적인 영역을 다스리는 정부(regimen spirituale)를 “교회(church)”라고 하였고, 정치적인 세계를 통치하는 정부(regimen politicum)를 “시민정부(civil government)” 혹은 “국가(state)”라고 보았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고 또 각각 다른 법적 지배를 받는다.1) 이 두 세계는 경건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적인 부분과, 법을 제정하는 책임이 있고 인간성과 시민성에 대한 의무가 있는, 일시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이다.2) 그것은 영적인 정부와 정치적 정부로서 곧 교회와 국가이다. 칼빈에 따르면 이 두 기관은 하나님이 제정하셨으며, 마치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목자 아래 있는 두 개의 다른 목자들처럼3)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귀결된다.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왕권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지만 국가도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국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한다.4)
칼빈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교회와 국가 모두 하나님이 제정하셨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교회와 국가라는 “이중 정부”의 지배하에 살고 있다.
2. 교회와 국가
그러므로 칼빈이 말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5)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6) 이 영혼과 육체는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며 각각 독립적인 “객체들”이다.7) 칼빈은 영혼은 모든 부분들에 생기를 넣어주며, 그 모든 기관들을 각각의 행동에 적절하고 유용하게 한다고 보았다.8) 칼빈이 해석하는 영혼은 거룩하며 인간의 불멸의 부분이지만, 육체는 이 세상 살 동안 영혼이 머무르는 거처이다. 따라서 칼빈은 영혼을 하나님의 실제적 형상으로 보면서 불멸하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9) 칼빈이 볼 때 이 영혼과 육체가 서로 분리되어 인간이 죽게 되더라도 영혼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다.10)
칼빈은 영혼과 육체라는 유비로부터 교회와 국가의 종말론적인 성격도 이끌어 내고 있다. 칼빈이 보는 영혼은 영원하지만, 육체는 소멸하게 되어있다. 칼빈은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영원하지만, 국가는 이 세상에서 한시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칼빈이 볼 때 이 세상에서 정치적 질서는 종말까지 지속될 것이다.11) 그러나 종말에 가면 더 이상 정치적인 권위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의 다스림과 국가의 통치라는 “이중 정부의 지배하에” 살고 있다. 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과 국가의 권력은 완전히 “구별”되지만 정반대 되지는 않는다.”12) 교회와 국가는 마치 영혼과 육체가 한 전인에서 서로 나뉘어 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는 영혼과 육체처럼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 이처럼 교회와 국가를 영적인 정부와 육적인 정부로 봄으로 해서 이 두 정부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한 것은 칼빈의 독특한 점이다.
<일치>
칼빈의 사상은, 특히 그의 교회론은, 그가 숨을 쉬며 살고 있었던 16세기의 교회 현실과 무관하게 책상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개혁교회의 현장 속에서 수립되었다. 16세기의 카톨릭 교회는, 최고의 관료제도처럼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급진적인 종교개혁 운동들은 유럽 사회에서 기독교적인 대안이 되기가 쉽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교부들의 시대 이래로 유럽에서 성장해 온 기존의 신학적 전통을 간과한 채 그 사회 속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무리들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칼빈은 양 극단의 교회론들 사이에서 종교개혁 교회를 형성시켜야만 했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지지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신학을 비판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또한 종교개혁의 교회 자체를 재세례파들의 그것과 구별시켜야만 하는 긴급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매우 미묘한 정황 속에서 칼빈은 두 개의 극단적인 교회론 기둥들을 피하면서, 성경에 근거한 그 자신의 교회론을 모색해야만 했다.
1. 교회 일치를 위한 칼빈의 교회론의 기초: 어거스틴
종교개혁의 교회는 고대교회의 참된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고의 권위를 공격했다. 그렇지만, 칼빈은 재세례파들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를 순결하게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보편적인 교회로부터 분리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16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어거스틴을 전적으로 따랐다.
물론 칼빈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이고 우선적인 권위의 근거는 성경이었다. 성경은 규범적인 근원(normative source)이었고, 교부들의 권위 또한 이 성경의 권위에 부속되었다.13) 그렇지만, 칼빈은 교부들을, 그 중에서도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을, 중요한 신학적 논리를 세워갈 때마다 적극적으로 사용(use)했는데, 그 이유는 칼빈이 어거스틴을 “순수하고 순결한” 교회의 선생(Doctor Ecclesiae)으로 존경했기 때문이었다.14) 16세기 문맥 속에서 교회론이 수립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칼빈이 교부, 특히 어거스틴을 사용하고 있다.
칼빈은 16세기의 개신교가 초대교회와 역사적 연대성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기 위해서 교부들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15) 또한 칼빈은 개신교를 역사적 기독교와 연결시키기 위하여 어거스틴에게 의존했다. 결국 칼빈은 어거스틴을 고대 교회의 증언자요,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로 보았기 때문에 어거스틴에게 의지했던 것이다.16)
칼빈은 자신의 작품들 중 교회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16세기의 모든 신학자들에게 공통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어거스틴에게 호소했고, 그렇게 함으로 칼빈이 지향하는 교회가 지상 교회의 범형이라고 여겨졌던 초대교회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으며, 동시에 칼빈 당대의 다양한 종교개혁 그룹들 간의 신학적 연대감을 이끌어 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동시에 또 다음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칼빈은 중세의 보편 교회를 통해서 참된 교회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는 점이다. 비록 칼빈 당대의 로마 교회는 칼빈의 시각에서 볼 때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지만, 칼빈은 그레고리(Gregory)나 버나드(Bernard)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칼빈은 당대의 왈도파(the Waldenses)를 후원하고 있었으면서도, 참된 교회의 형적을 중세의 이단자들(medieval! dissenters)에서 찾지는 않았던 것이다.17) 칼빈은 그런 논증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점은 칼빈이 교부를 사용해서 교회론을 개진하고 있는 특성의 한 단면이다.
이상에서 칼빈은 자신의 신학을 세워감에 있어서 어거스틴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논쟁적으로 자신의 교회론을 개진해야 할 경우에, 특히 그의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확장할 때에 교회론과 관계된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어거스틴의 어깨 위에 서 있었다. 결국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종교개혁의 교회는 하나의 참된 교회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거스틴을 사용했던 것이다.
2. 칼빈의 성찬론과 교회 일치 - 칼빈: 화해의 신학자
네덜란드 자유대학의 빔 얀서(Wim Janse) 박사는 칼빈의 생에 초기부터 말기에 걸쳐 저술되었던 그의 저작들을 총체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한 후에 성만찬에 대한 칼빈의 교리 중 시종일관한 점은 무엇이고, 발전적으로 강조되거나 혹은 그 반대인 신학적 내용은 무엇인지를 발견해 내었다.18) 그는 이렇게 함으로 칼빈에 대한 일방적인 오해나 추측은 배제하고 “칼빈, 그 자신의 모습”과 그의 교리를 그려내었다. 얀서 박사는 이에 근거해서 칼빈의 성만찬 신학을 새롭게 제시한다. 한 명의 신학자로서 칼빈의 성찬의 신학은 1536년부터 1564년까지 지속적으로 “역사적 발전(historical development)”을 했으며, 칼빈은 여러 면에서 화해의 신학자였다는 것이다.
칼빈의 성만찬 신학은 크게 세 시대로 나뉘어서 발전했다. 첫째는 쯔빙글리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시대(1536-7)이고, 둘째는 루터적 성경을 보여주는 시대(1537-48)이며, 셋째는 다시 영성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시대(1549-1550s)이다. 주지하는 바처럼, 칼빈은 종교개혁의 본질에 있어서는 타협을 불허하는 시종일관한 투사로서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을 신랄하게 반대했다.
그렇지만, 마치 평생을 칼빈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했던 마틴 부써(M. Bucer)와 같이,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 내부에 있어서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조율하고 융화할 줄 알았던 유연성 있는 신학자였다.
얀서 박사는 “유일한” 칼빈의 성찬 신학, 즉 실제로 그의 많은 저작에 근거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칼빈의 이해는 정당하지 못하다고 신랄하게 지적한다. L. Smits가 “Saint Augustin dans l’oeuvre de Jean Calvin”이라는 책에서 칼빈은 “유일한 책 한 권의 사람”(1559년에 나온 “기독교 강요”를 말함.)이라고 말했지만, 그 기독교강요는 칼빈의 전체 작품들(opera omnia) 중에서 칼빈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source)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칼빈의 성만찬 신학을 바르고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빈의 고린도전서와 공관복음서의 빵과 포도주의 성만찬에 대한 주석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1549년 이전에 고린도전서 주석을 기록했는데, 1546년에 라틴판, 그리고 1547년에 불어판이 나왔다. 1549년 이후에는 1555년부터 설교되어 1558년에 나온 칼빈의 19개의 설교문(Sermons sur le dixieme et onzieme chapitre de la premiere Epistre de sainct Paul aux Corinthiens)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1555년에 나온 칼빈의 공관복음 주석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1559년에 나온 칼빈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 등장하는 칼빈의 성만찬 신학이 이 모든 것에 종합적으로 비교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의 성만찬 신학에서, 기본적인 교리적 일치로서 중요한 것은, 쮜리히(Zurich)의 설교자들과 토론한 이후에 칼빈의 성만찬 신학의 정확한 표현으로서 결론지어진 1549년의 Mutua consensio 즉 Consensus Tigurinus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칼빈의 전체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은, “칼빈의 주의 만찬 교리”가 두 경향, 즉 루터의 성만찬적 실재론(sacramental realism)과 쯔빙글리의 영성주의적 상징주의(spiritualistic symbolism) 사이에서 움직여 갔던 성령론적(pneumatological) 견해였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1549년의 Consensus Tigurinus보다 2년 앞에 있었던 스위스의 압력과, 칼빈이 불링거의 문서에 서명한 것은, 칼빈의 성만찬 견해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칼빈은 1550년대에 명백하게 드러내 놓고 쯔빙글리적인 진술을 사용하려고 했다. 루터주의자에 관하여는, 칼빈은 자신을 1549년의 쯔빙글리적인 입장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매우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칼빈은 루터주의자들과 동역이 필요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을 루터파의 그것과 조율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1549년 쯔빙글리주의자와 루터주의자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실패했을 때, 칼빈은 반대로 스위스의 쯔빙글리파에 우호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1560년대에 북부 독일에서 멜랑흐톤 주의자들에게 보다 많은 공간이 열렸을 때, 칼빈은 다시 1540년대와 같이 친-루터적인 접근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마틴 부써가 그랬듯이, “위대한 대화의 신학자(the great theologian of dialogue)”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칼빈의 성만찬 신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칼빈에게 있어서 일관성있고 본질적인 성찬에 대한 견해는 무엇일까? 얀서 박사의 해석에 근거하여 칼빈의 성찬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성찬은 “exhibitio(드러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시지 않으시면서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들에게 실제로 주시는 것이다. 이 exhibitio는 주의 만찬의 신비적인 측면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은혜의 선물의 실체를 존중해 준다. 은혜의 실체와 초월 모두를 유지하기 위해서 칼빈은 쯔빙글리의 순수한 상징주의(pure symbolism)와 루터의 성찬 실재론(sacramental realism)이라는 양 극단적인 이론을 넘어섰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런데 칼빈의 모든 자료들이 일치하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칼빈은 지속적으로 신랄한 반 가톨릭주의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1549년 이전이나 이후나 이 점에 있어서 칼빈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개혁 : 예배와 설교의 개혁을 중심으로>
1. 예배 개혁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가톨릭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 부당함과 실제적인 무기력감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참예자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했던 당시에는 이 로마 가톨릭교회 단 하나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배의 개혁은 곧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기존의 로마 가톨릭의 예배를 개혁하려고 진력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요소 중에서 수용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을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여기에 신학적인 전망이 개입된다. 예배에 시대적 변화와 각 지역의 문화와 사람들의 정서가 반영되어야 하는지, 즉 예배에서 본질적이고 복음적인 것과, 문화적이고 적용의 다양성 속에서 포용할 수 있는 것의 경계선이 어디인지의 문제가 예리하게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루터나 칼빈의 예배 개혁에 대해서, 그것 조차도 미온적이며 아직도 더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는데, 대부분 급진적인 종교개혁 계열에서 나온 입장들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종교개혁 그룹들의 신학적 지도(map)를 정확하게 그려냄으로, 개혁교회의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관점은 무엇이며, 다양한 종교개혁 공동체들 속에서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역사적인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문제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1) 종교개혁의 시대적 배경과 예배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는 긴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단 하나의 교회만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유일한 교회의 예배가 미사, 예배 의식, 성례관 등의 신학적 문제에 있어서 크게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중세 후기의 로마 가톨릭의 예배와 예전으로부터 성경적인 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사 중심적이고 모든 예전을 성례화했던 로마 가톨릭의 예배로부터 다시 말씀 선포의 의미를 되찾자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회중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라틴어 예배가 아니라, 참예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도록 하며, 더 나아가 예배에 참여한 자들로 하여금 직접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찬의 잔을 다시 나누도록 하는 예배의 개혁이 바로 종교개혁의 예배인 것이다.19) 그러나 개괄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중세말 종교개혁 전야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 연속성과 단절성이 공존하는데, 제임스 화이트는 특히 “근대적 경건(Modern Devotion)과 같이 대중적인 경건은 개신교와 연속성 상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20)
2)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예배 규정
칼빈은 1537년 다른 2인의 제네바 목사들인 엘리 꼬로(Elie Coraud)와 파렐(Farel)과 함께 시 의회에 제출했던 『제네바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21)과 1541년의 『교회 법령』22)에서 매주 성찬식을 거행할 것을 의도했다.
그러나 칼빈은 인구가 약 10,000에서 12,000이나 되는 16세기 개혁 도시국가인 제네바라는 사회적 현실과, 교회와 국가 간에 존재했던 긴장 속에서, 제네바의 3~4개의 교구 교회에서 돌아가면서 매달 성찬식을 실시하자는 것으로 조정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성도들은 한 달에 한번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찬을 어떤 방식으로, 몇 번이나 실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배와 관련된 중요한 예배의 요소에 있어서 그의 목회적인 입장은 분명했지만, 동시에 제네바의 목회 현실을 고려할 줄 아는 안목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한편 각각의 개혁 교회들은, 신학적인 급진성 때문에 시종일관 반대해 왔던 급진적인 종교개혁, 즉 재세례파의 공동체 개념이라고 하더라고, 그것이 성경에 지지를 받으며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면 과감하게 수용하는 포용성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신학적으로 성경에서 벗어나 있었던 로마 가톨릭의 예배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가열차게 개혁해 나가는 역동적인 일관성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3) 칼빈의 “영적(spiritual)”이고 “잘 조직된(well-organized)” 예배
칼빈이 1536년에서 세상을 떠난 1564년까지 거의 평생(잠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난민 목회를 했던 1538년에서 1541년까지의 3년을 제외하고)을 목회하고 신학적 연구를 전개했던 제네바는, 로마 가톨릭의 종교적 박해와 사보이의 정치적 지배에서 방금 풀려난 신생 개신교 도시국가였다.23) 외부로부터는 제네바를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음모가 중단없이 시도되고 있었고, 제네바 내부에서는 칼빈의 철저한 통치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이런 역사적 현실 속에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전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만 했던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받고 있었다.
칼빈은 그의 초기 시대부터 예배에 대한 관점이 서서이 발전하여 점차 잘 조직된 형태로 확립되어 갔다. 이때 중요한 개념은 “eglise bien ordonnee” 즉 “잘 조직된 교회(well-organized church)”이다. 이 용어는『제네바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24)(1537년 1월 16일), 에서 비롯해서, 『교회 법령』25)(1541년 9월 13일), 그리고 『교회 기도와 교회 찬송의 형태』26)(1542) 등에 나타나고 있다. 칼빈이 말하는 “잘 조직된 교회”를, “설교-중심적”인 예배나, “회중의 권징”, 혹은 교회의 “4중 직책”등의 개념으로 단순하게 축소시키기 보다는, “성경적인 사상”에 의해서 “철저하게 관통되고” “적절하게 조직된,” 조화롭게 연합된 교회의 몸을 가르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27)
한마디로 칼빈이 말하는 예배는 “잘 조직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영적인” 예배라는 균형 의식이 잘 나타나 있는 교회다. 이것은 “via media”로 요약될 수 있는 칼빈 신학의 일반적인 특징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론인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도, 좌로는 만인제사장과 영적 교회론을 극단화 시키면서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을 과격하게 허무는 재세례파들의 주장도 배격하는 것이다.
오히려 양 극단의 교회 형태들을 피해가면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론을 가지고 제네바 교회를 세워가려고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와같이 성경에 근거한 “영적이면서도” “조직된” 균형잡힌 교회론이, 로마 가톨릭 주의나 재세례파 주의와 달리, 칼빈주의를 전 유럽과 미주에 역동성있는 교회 운동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으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했다고 이해된다. 칼빈의 위대한 점과, 그의 가르침이 아시아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칼빈의 신학은 영적으로 복잡하고 어둡던 시기, 옛 것을 새것으로 대체 해야만 했던 교회적 사회적 격변기에, 예배와 교회와 인간 사회를 건강하게 세워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살아있는 신학이었던 것이다.
2. 설교 개혁
칼빈은 그의 제네바 사역 중에(1536-1538, 1541-1564) 무려 2천회 이상의 설교를 했다. 특히 그는 생애 후기에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의자에 실려 교회에 오면서 까지 설교 사역을 감당했다.28) 그만큼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그의 최후까지 가장 비중 있는 사역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교회의 영혼(de ziel van de kerk)과 같은 것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의 통로(de van God gegeven weg ter zaligheid)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자유와 개혁을 향한 칼빈의 투쟁은 일차적으로 설교의 자유와 개혁을 향한 투쟁이었다.29)
칼빈은 설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씀의 선포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몸(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말함)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즉 말씀의 선포가 없이 교회는 건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가 없으며, 좋은 상태를 지속해 갈 수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만약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바란다면, 우리는 마땅히 겸손하게 배우는 자들이 되어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마치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리고 그 분께서 그런 임무를 맡기신 사람들의 말에 우리가 귀를 기울일 때, 그 분은 우리의 믿음의 순종과 복종을 인정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우리에게 보내진 목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30)
그렇지만 칼빈은 같은 에베소서 설교에서 바르지 못한 설교자들을 준엄하게 훈계하고 있는데, 칼빈의 기독교강요나 성경 주석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강력한 어조로 되어있다. 칼빈은 설교가 설교답게 선포되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설교가들이 거의 없고, 전혀 소용없는 불량배(knaves)들, 그리고 그들의 생계를 챙길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 대신 마호메트의 코란이라도 설교할 준비라도 되어있는 교황제도 속에 빠져있는 승려보다 더 타락한 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돼지와 같은 욕심을 가진 술주정뱅이들(drunkards), 마구 짖어대는 사나운 개들(mastiffs), 빛과 어두음을 혼돈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그들의 입을 열지 않는 자들, 그래서 모든 것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자들을 봅니다. 우리가 이런 모든 자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음을 그렇게 경멸하는 자들에게 정당한 복수를 실행하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31)
그러므로 칼빈의 개혁은 또한 설교 개혁이었다.
1) 칼빈의 설교 신학
(1) 설교와 복음 선포
칼빈의 설교학에 대한 이해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설교자는 복음을 선포하는 자라는 것이다.32) 심지어 발꺼(W. Balke) 박사는 설교자의 입은 마치 그리스도의 입(de mond van Christus)과도 같다고 말할 정도이다.33) 칼빈이 이해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의 성경을 강해하는 자이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청중에게 전달된다. 특히 칼빈은 설교자를 베드로에게 주었던 열쇠 기능을 가진 자로 보았다. 설교할 때에 죄 용서의 은혜가 선포되며 믿는 자는 이것을 수용하지만, 거부하는 자는 여전히 죄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34)
(2) 설교와 적용
그러나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지 교리를 제시하거나 성경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설교를 통해 성도들을 권면함으로 그들이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도 칼빈이 이해하는 설교의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35)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 말하는 설교의 목적은 믿는 자들을 교화(edification)하여3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3) 설교와 그리스도의 통치
예수 그리스도는 낮아지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높이시고 오른편에 앉게 하셨으며, 세상의 모든 무릎이 그리스도 앞에 꿇도록 통치권을 부여하셨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심으로 만유의 주로서의 통치권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다 그의 통치하에 놓여있다.37)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통치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교하고 있다.
"그러면 그 분은 어떻게 통치하십니까? 그분은 그의 성령에 의해서(by his Spirit), 그리고 그의 말씀의 수단에 의해서 (by menas of his Word) 다스립니다. 그런 수단들로써 만물이 그 분으로 채움을 받듯이, 또한 만물은 복음을 통해서도 채움을 받습니다."38)
칼빈의 설교에 의하면, 하늘로 높여지셔서 만유의 통치권을 소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성령으로, 그리고 그의 말씀의 수단에 의해서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와 그때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은 칼빈에서 있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
(4) 목사와 설교
칼빈의 에베소서 4장 11절 설교를 살펴보면 칼빈은 몇 가지로 목사와 설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 주고 있다.
a. 목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구직이다.
칼빈은 10년 전의 자신의 주석과 마찬가지로 목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목사의 임명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39)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를 보내실 때, 그것은 당신의 외아들의 인격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40) 목사의 선택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고백해야 한다.41) 이 목사의 직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교인들은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자녀는 또한 교회의 자녀라고 설교하고 있다.42)
한편 사도와 전도인과 선지자와는 달리, 일정한 시대에 활동하는 직분이지만, 목사와 교사는 영원한 직책이다.43)
b. 목사는 말씀의 사역자(ministers of the Word)다.
칼빈이 볼 때 목사는 말씀의 사역자다(ministers of the Word).44) 말씀의 선포자로서의 목사는 하나님께서 세운 성령의 도구가 된다.45)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자신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맡기셨다.46) 그러므로 칼빈의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사람을 임명하셔서 우리를 연합시키고 분쟁을 없도록 하신다는 것이다.47)
c. 설교는 구원을 위한 수단이다.
칼빈의 그의 설교에서 우리의 구원의 수단인 설교가 폐지된다면, 마귀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48) 복음의 선포는 교회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며, 결국 우리를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49)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목사에 의해서 말씀이 선포됨으로 믿음이 시작되고 성장하게 되며, 따라서 칼빈은 교회를 평생 학교라고 묘사하고 있다.50)
d. 목사는 교회를 세우고 다스린다.
칼빈의 주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하나님께서 사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신다고 설교하고 있다.51) 하나님께서는 이 통치의 질서로서 목사를 주셨다.52) 이 목사들의 설교는 교회를 세우며,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칼빈은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설교하고 있다.53)
e. 목사는 통전적인 목회를 하는 자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목사와 교사를 가져야 한다고 설교하고 있다.54) 그런데 목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다.55) 칼빈에 의하면, 목사는 교회의 안녕과 믿는 성도들의 궁핍의 문제 등 통전적인 목회를 감당하는 직책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목사를 교사와 비교하면서 목사의 직분을 설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교사는 교회의 순수함을 유지하고, 순전한 복음의 진리 안에서 강건케 하고, 분파와 잘못에 맞서게 한다. 한편 목사는 교인을 신실하게 인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직책이라고 칼빈은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56)
(5) 설교와 하나님의 임재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친숙한 방법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이끄셨다.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맞추는 것은,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오는 것과 같다.57)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무시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의 설교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무시하지 않으시며, 자신을 우리에게 맞추신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서 직접 우리에게 오시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58)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칼빈의 강조점이며, 이런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 견고하게 한다.
칼빈이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개혁주의 설교관이 위치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예배 의식을 통해서 서로 교통한다.59) 회중들은 예배 중에 성찬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60) 그러므로 예배 의식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펼쳐지는 장이 되며, 설교와 성례는 서로 잘 부합되어야 한다.61)
(6) 설교와 성령
칼빈의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12절의 주석 내용에는 교회의 직분을 성령의 은사와 연결시키면서 성령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곳이 오직 한 곳 뿐이며, 그것도 도입 부분일 뿐이다. 그 외에는 목사의 말씀 사역을 성령과 관련시켜서 언급하고 있는 곳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12절의 설교 내용을 보면, 칼빈은 무려 8회에 걸쳐서 “성령” (혹은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칼빈의 주석에서는 도입 부분에 단 한번만 나타나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그의 설교에서는 왜 8회나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성령론이 1548년에서 1558-1559년 사이에 급격히 발전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언급하고 있는 “성령”에 대한 신학적 내용을 검토해 보면 칼빈의 성령론의 질적 발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리려 그보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점은, 칼빈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의 선포”와 “성령”의 사역이 얼마나 상호 밀접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설교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이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사회를 위한 봉사(Diakonia)>
1. 종교개혁자들의 사회 봉사 활동에 대한 관점들
16세기를 보다 깊이 들여다 보면, 종교개혁 운동 내부에서도 그 스펙트럼은 상당히 다양했다. 독일의 루터(Luther)와 스위스 쮜리히의 쯔빙글리(Zwingli), 그리고 영국의 성공회 등은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 집전만 해야 한다고 보면서 종교적 권위를 갖는 국가에게 교회가 할 실천적이고 행정적인 일까지도 위임했다. 그러나 스위스 바젤의 외콜람파디우스(John Oecolampadius)와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써(M. Bucer)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의 존 칼빈(J. Calvin)과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 Knox)등은 다소 다른 입장에 서 있었다. 개혁주의자들인 이들은, 무엇보다 교회는 국가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교회는 교인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하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사역도 자율적으로 감당하되, 이 중 일부는 사회 안에서 국가와 함께 그 책임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말하자면 칼빈주의는 국가가 수행하는 사회 복지를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한 측면이라고 보았다. 또한 교회의 디아코니아(diakonia) 활동도 국가의 복지 활동과 구별되는 교회의 사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칼빈과 사회 복지
1) 칼빈 당시 제네바의 상황
16세기 사회복지 사업의 발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구체적 사례로서 제네바 도시 국가를 들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곳의 개혁은 매우 급진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프랑스에서는 국가가 대대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는데, 이들은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제네바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여들어 난민이 대거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네바는 가톨릭을 후원하는 이탈리아의 사보이로부터, 개신교를 주창하는 도시 국가로 이제 막 정치적인 독립을 획득했기 때문에, 박해받던 개신교도들은 난민이 되어 이 제네바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칼빈이 제네바의 부름을 받을 당시의 제네바의 사회적 환경이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던 제네바에서, 개혁 교회가 그 목회적 활동을 한다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첫째, 대거 발생한 프랑스 난민들이 인접한 제네바로 몰려왔고, 그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칼빈의 목회 환경의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면서, 이것을 목회적으로 풀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 것이다. 칼빈은 “오직 성경으로” 라는 그의 신념에 따라 성경으로부터 통찰력을 얻어 구체적인 목회적 적용을 하게 되었다.
둘째, 제네바 도시 국가 안에서 교회가 종교개혁의 신학적 정체성을 세우는 일은 국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회 복지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 두 기관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갖게 되었다. 즉 사회 복지 활동은 교회의 문제이기도 했고, 동시에 국가의 의제이기도 했다. 제네바의 자선은 국가의 법에 의해 성립되었다. 신학적으로 보면 개혁주의의 자선 사업은 필연적으로 교회론적인 문맥에서 찾아진다.62) 이 점은 사회 복지 문제에 있어서 제네바의 모델이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칼빈의 이상은 좀 더 넓게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제네바에 최고의 설교적 영향력과 함께 콘시스토리의 기능을 통해 사회적 윤리적 기능을 형성하였다.63) 게다가 칼빈과 시 당국은 가난한 자들을 살피는 것과 의무교육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옛 교회의 물건들은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에 조달하고, 프랑스 구호 기금(Bourse Francaise)을 수립함으로써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제네바에서는 목회에 있어서 종합적이고 의미있는 변화를 보게 되었다. 이 체계는 개혁된 사회가 현실을 만든다는 칼빈의 비전을 보여준다.64)
요약하자면, 16세기 칼빈이 목회를 감당할 때의 유럽 사회는 사회적 불안과 가난과 질병이 큰 문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이것이 새로운 신학으로 무장하면서 등장하고 있었던 개신교회가 실제로 활동을 펼쳐야 하는 삶의 환경이었다. 특히 칼빈은 이런 제네바의 상황 속에서 그 목회적 사역을 감당했다. 따라서 칼빈 당시의 제네바에서 사회 복지는 교회와 국가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 제네바에서의 칼빈은 양과 질에서 큰 목회적 변화를 주도했다.
2) 사회 복지 목회를 위한 칼빈의 신학
이상과 같은 목회적 환경 속에서, 칼빈은 어떤 신학을 가지고 목회적 활동을 펼쳤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먼저 기독교강요의 초판(1536년)과 최종판(1559년)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적 전망을 고려할 것이며, 이 후에는 그의 성경 해석을 통해서 칼빈의 목회와 사회 복지의 관계를 조명할 것이다.
(1) 교회의 본질적 사역과 자선
칼빈은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로부터 교회의 4대 사역을 주장하고 있다.65)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집회 때마다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 4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말씀을 가르치고, 둘째 기도를 드리며, 셋째 성찬에 참여하며, 넷째 구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이 네 가지,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구제 없이는(sine verbo, orationibus, participatione coenae et eleemosynis) 어떤 교회의 모임도 없다는 것이 교회론적인 변함없는 규칙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교회의 예배를 구제와 구별하여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말씀을 듣고, 공적인 기도를 하며, 성찬을 하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공동체는 동시에 반드시 구제를 시행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규칙이며, 이것은 변경되지 않고 내려오는 규정이라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강요 초판에 나타나는 칼빈의 이런 사상은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66) 칼빈은 초판의 내용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내용에 근거한다면, 교회의 목회적 활동에 반드시 구제 및 자선 사업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2) 이중의 집사직과 자선
칼빈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 로마서 12장을 주석할 때, 교회의 자선 사업을 교회론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해석하고 있다. 즉 집사를 2개의 직으로 나누어서 각각 자선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고 있다.67)
칼빈은 먼저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교회 안의 직분을 설명하면서, 다스리는 직과 구제하는 일의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68) 그러면서 칼빈은 “다스리는 일과 구제하는 일 두 가지는 영구적인 것이다”69)라고 기술하면서 교회 안에서 구제하는 직분의 영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한편 칼빈은 본격적으로 교회의 집사 직분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보다 명확하게 집사의 사역을 사회 복지적인 측면으로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칼빈은 집사의 직분을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우선적으로 집사들이 맡은 것은 구제하는 사역이라는 것이다.70) 그러나 칼빈은 로마서 12장 8절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구제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롬 12:8) 두 가지 종류에 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공적인 직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집사직에는 두 가지 다른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71)
이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집사를 “구제 물자를 나누어 주는 집사”와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모두 지칭한다고 보았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바울은 처음 문장에서 구제 물자를 나누어 주는 집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둘째 문장은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과부들도 두번째에 속하였다."(딤전 5: 9-10).72)
그러므로 칼빈은 집사를 구제 행정을 보는 역할을 맡은 집사와, 실제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해 주는 집사로 나누었던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 두 종류의 집사들의 역할을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우리는 이 두 종류의 집사들의 사역을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또 인정해야 한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교회를 위해서 구제 사업을 관리하는 집사들과 직접 빈민들을 돌보는 집사들이다. Diakonia라는 말에는 더 넓은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원과 임명과 직분에 대해서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했다.(행 6:3)…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73)
그러므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교회에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직분으로서 집사를 위치시켰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이 집사는, 구제 행정을 감당하는 자들과 실제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가서 구제금을 전달하고 위로하는 자들의 2중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3. 성경 주석에 나타난 교회의 표지와 사회 복지
1) 교회의 본질적 사역과 사회 복지
칼빈은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사건에 대한 요약적인 기록을 주석하면서, 분명하게 교회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자선과 연결시키고 있다. 칼빈은 먼저 교회의 본질적인 특징 중에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도”는 그 의미가 분명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74)
그러나 칼빈은 교제하는 일과 떡을 떼는 일에 대해서는 당시의 해석들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 즉 떡을 떼는 것을 주의 만찬으로 보거나, 자선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성도들의 음식 교제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75)
한편 다른 사람들은 코이노니아를 성찬의 집행이라고 하는 것도 반대한다. 왜냐하면 칼빈이 볼 때 코이노니아는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성찬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76) 그러므로 칼빈은 교제함, 즉 코이노니아를 상호 교제, 자선, 또는 기타 형제간의 사귐으로 해석하고 있다.77)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 사도행전 2장 42절의 주석에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참되고 성실한 모습을 판단할 수 있는 특성으로서의 네 가지이다.78) 칼빈이 볼 때,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모습은 바로 이 곳 즉 사도행전 2장 42절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79)
그러므로 칼빈의 사도행전 2장의 주석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자선이 잘 행해지는 교회야 말로 질서가 잘 세워져 있는 참된 교회라는 점이다.80)
따라서 만약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와 천사들 앞에서 참된 교회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헛된 교회의 이름을 자만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칼빈에 의하면 반드시 위에 언급했던 네가지의 질서를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8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552년에 출판되었던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에서 칼빈은 참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들의 설교의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자선이다. 이에 근거한다면, 이 네 가지가 균형있게 실시되는 목회가 칼빈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목회였던 것이다.
2) 로마서 주석에 나타난 이중의 집사직과 사회 복지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12장 8절을 주석할 때 집사의 2중 직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82) 칼빈에 의하면, 바울은 주는 자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교회의 공적인 재물을 분배할 책임을 맡고 있는 집사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83)
한편 이에 대칭적으로, 칼빈은 자비를 가지고 고대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병자들을 방문하여 간호하는 책임을 맡았던 과부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칼빈은 명확하게 이 두 종류의 직책, 즉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책무와 그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것을 구별하여 별개의 직책으로 보고 있다.84)
그래서 칼빈은 행정적으로 사회 복지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은 기만이나 사람에 대한 차별없이 성실하게 맡은 임무를 감당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85) 또한 빈민들과 병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하는 책임을 맡은 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86)
4. 칼빈의 사회 복지 목회의 실제
1) 칼빈과 제네바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
복지 개혁을 위한 움직임의 확산은 거의 정확하게 종교개혁의 확산과 함께 동시에 일어났다. 종교개혁자들은 많은 정통 가톨릭에게 도전을 주었다. 칼빈의 리더십 아래에서 제네바는 교회 조직 안에서 가장 철저하고 완고한 개혁을 개발하였다. 그것은 또한 초기 개신교들이 어떻게 사회복지에 대한 행정을 개혁했는지에 대한 모델이 된다.
제네바의 복지 개혁은 당시의 다른 도시의 일반적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즉 교회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가 빈민과 병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종합 구빈원이 그것인데, 빈민 구제 집중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네바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은 개혁에 의한 설립이었지만 칼빈의 의한 설립은 아니었다.
이 종합 구빈원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환대를 제공하는 다목적 기관이었다. 대부분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너무 늙고, 아프거나, 심한 장애를 가진 소수의 노인들에게 집을 제공하였다. 그곳에서는 가난한 가정에게 빵을 매주 나눠주었고, 자신들의 숙박료를 지불할 수 없거나 막 제네바에 도착한 방문객에게 매일 저녁 쉼터와 음식을 제공하였다.87)
구빈원 안팎에서는 재정과 행정적인 책임을 맡는 집사(procureur)와 직접 빈민과 환자를 방문하여 돌보는 구제 도우미(hospitallier)의 주관 하에 자선행사가 열렸으며 구걸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88)
자발적 기부를 기대하고 장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속화된 교회 재산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칼빈은 직접 이 구빈원에 관여를 하지 않았으나, 서신을 통해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사역했다. 요컨대 칼빈은 이 제네바 종합 구빈원에 직접 참여하여 사역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제시했던 집사 제도를 통해서 그는 사상적으로,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의 방향은 평신도에게 넘겨졌다. 전임 구제 도우미(hospitallier)를 임용하였다.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본부로 거처를 옮기도록 요구되었고 식사가 포함된 하숙이 제공되는 것으로 인해 이 자리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칼빈이 1541년 교회조직 구축의 총 책임을 맡기 위해 제네바에 돌아왔을 시점에는 복지 행정사(procureur)의 역할이 이미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복지행정사(procureur)들은 이외에 다른 많은 특별한 임무가 있었다. 그들은 구빈원에 할당된 상당한 자산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었다.
틀림없이 칼빈은 그의 글 여기저기서 구제도우미(hospitalliers)와 구빈원 복지행정사(procureur)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특히 1541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돌아온 직후 그가 감독하려던 개혁교회를 위한 정관으로 제네바 시를 위한 초안인 교회의 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s)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교회의 법령들은 교회 안의 사역을 네 종류로 구분하는데 네 번째가 집사에 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칼빈은 집사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1) 가난한 자를 위해 구호금을 모으는 자들과 2) 이러한 구호금을 나누어주는 자들로 분리했다. 더욱이 칼빈은 그의 여러 글에서 집사와 관련하여 원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진술들이 증거하는 것은 칼빈은 집사 직분이 오로지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일에 헌신하는 사역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편 킹던 교수는, 칼빈이 제네바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제네바가 칼빈에게 영향을 주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을 보면, 칼빈은 이미 제네바 사역을 시작하기 전부터 교회의 본질적인 4중 사역,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 그리고 구제를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9)
2) 칼빈과 프랑스 구호 기금(Bourse française)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이 해결해 줄 수 없었던 제네바의 사회적 문제는 다른 나라로부터 이주해 온 많은 종교적 난민들을 돕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구빈원은 제네바 시민과 제네바에서 단기 체재할 계획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만 대처하도록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네바에 장기간 거주하기 원하는 난민들의 경우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국제무대를 배경으로 한 종교 위기를 대비하려는 특별 헌금은 1545년 칼빈의 촉구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는데, 그 해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는 대대적인 개신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칼빈은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원조를 구했으며, 탄원을 위해 여러 다른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제네바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외부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현금 기금이었던 프랑스 구호 기금(Bourse française)이 칼빈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 기금은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피난온 난민들, 즉 질병이나 가족의 문제나 프랑스에서 자산을 모두 상실하는 등, 더 이상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가난한 프랑스 피난민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구빈원과는 달리 Bourse française는 사적인 기관이었다.90) 종교개혁 동안 제네바에 창립되었던 기관인 Bourse française는 칼빈의 목회와 사회 복지와의 관계 속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곳은 기증한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집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들이 운영하였다. 이런 집사들은 돈을 걷고 분배하고 수입 지출 모두를 기록하였다.91) 이러한 점에서 Bourse française는 구빈원과 매우 유사했으나 처음부터 칼빈의 관심과 강력한 지지를 얻은 점에서 다르다.
칼빈의 광범위한 프랑스 구호 기금 활동을 고려한다면, 칼빈은 가난한 자들의 필요에 관심이 특심했으며, 그가 가치를 두는 사항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긴밀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부제로 운영되는 망명자 단체는 정기적인 헌금을 후원받았는데, 이 단체는 제네바 빈민층을 위한 종합 구빈원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었다. 망명가 사회는 그들 사회 속의 빈민과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고자 자신들 스스로 조직화하기에 이르렀다. 최대 규모의 망명자 단체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집단으로, 가난한 구성원과 여행자를 후원하고자 정규 기금을 마련한 첫 번째 공동체였다. 집사는 기금 기부자들이 선출한 사람으로서 자금을 배분하고 빈곤층과 병자들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고 돌볼 책임이 있었다. 망명자 단체의 회합에서 성직자의 참석은 관례였으며 유서 깊은 기업과 교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올슨에 의하면, 많은 헌금 기부자들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정해진 금액을 기부했다.92)
제네바의 망명자들을 위한 다양한 원조 물자와 함께 프랑스 및 다른 지역 교회에 대한 개혁가들의 관심사를 한데 모으면서, 구제헌금은 여기저기 흩어져 활동하고 있지만 서로 결속된 개혁 단체들 사이를 묶어주는 끈이 되었다.
<칼빈의 신학과 한국 교회>
1. 칼빈의 예배관과 한국 교회
오늘날 예배 인도자로서의 목회자는 다음의 질문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하면 은혜로운 예배를 인도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예배를 더 힘을 주어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새로운 스타일의 예배로 변혁해 나아갈 것인가? 어떤 것이 개혁 신학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필자는 현대 교회가 반드시 풀어가야 할 예배와 관련된 긴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역사적인 해답을 제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필자의 중요한 전제는 이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참예자들과 만남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 참석자들을 “구경꾼”으로 전락시킨다면 중세 말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류를 다시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예배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하며, 또한 성도들 간에 뜨거운 만남이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참예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혁신적(renovated)이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배는 개혁주의적인 전통(Reformed tradition)에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 종교개혁 교회의 지도자들은,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목회적 고민들에 대해서 우리보다 먼저 더 진지하고 철저하게 사색했고 그 결과로 형성된 것이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장 성경적이고 이미 역사를 통해서 검증된 예배관이 개혁주의 예배 이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개혁 시대를 보다 깊이 들여다 보면 16세기 당시에 존재했던 세 흐름의 교회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스펙트럼 속에서 제일 우측에는 가장 전통적인 기존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존재한다. 한편 좌측 끝에는 급진적인 종교개혁 운동 즉 재세례파들이 위치하고 있다. 개혁 교회의 큰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은 이 두 극단의 흐름 속에서 중도의 길(via media)을 걷고 있었던 종교개혁자였다.
칼빈이 택했던 길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가톨릭 교회의 생명력이 없고 경직된 예배 모델도 반대하면서, 동시에 재세례파들이 강조했던 극단적으로 비조직적이고 무질서한 예배도 배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예배를 연구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제네바라는 작은 스위스 도시국가에서 칼빈이 구현하려고 했던 “Eglise bien ordonnee(잘 조직된 교회)”의 목표는, 여전히 21세기 한국과 아시아 교회에 중요한 방향이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부흥했을 때는, “영적인 역동성과 생명력이 있는” 예배와 “잘 조직된” 예배가 조화롭게 균형잡힌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이런 면모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한국 교회는 “영적”이면서도 “조직적”인 칼빈의 교회론이 잘 적용된 성공적인 한 예로서 계속 성장하는 교회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2. 칼빈의 사회 복지 사상과 한국 교회의 집사직
칼빈은 전쟁과 가난과 질병이 풍미하던 종교개혁 시대를 살면서 교회를 섬겼다. 그의 목회 또한 이런 현실을 저버릴 수 없었으며, 칼빈의 그의 기독교 강요와 성경 주석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가지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것은 “자선”을 “말씀”과 “성찬”과 “기도”와 더불어 동일하게 주요한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칼빈은 이 본질적인 사회 복지적인 측면을 두 종류의 집사 제도를 통해서 목회적으로 풀어갔다. 그것은 재정적인 행정을 감당하는 복지 행정사와 실제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격려하는 복지도우미였다.
이와 같은 신학적 이론을 가지고 실제로 칼빈은 그의 사역지였던 제네바에서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과 프랑스 구호 기금(Bourse française) 등을 통해서 목회의 장으로 펼쳐 나갔다. 칼빈의 위대한 점은 이처럼 신학이 이론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늘 교회의 현장에서 함께 나갔다는 점일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연구에 근거하여 본 논문은 한국 교회를 향한 몇 가지의 시사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칼빈은 교회의 예배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자선 활동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선을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 중에 하나로 보았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도 신앙과 삶, 예배와 윤리가 불일치하여 사회 속에서 그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통전적인 목회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둘째, 칼빈이 말하는 집사라는 직분은,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해서 행정적으로 구호 기금을 모으고 또 실제로 방문하여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집사 직책, 더 나아가 한국 교회의 직분론은 과연 칼빈의 신학 위에 서 있는가를 돌아보아야만 할 것이다. 칼빈의 집사직은 단순히 교회 안의 행정 및 회계 관리에 그치는 항존직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복지 개혁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한 사회개혁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교회는 이 칼빈의 집사직을 잘 음미하여 사회 복지적인 차원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러나 칼빈은 교회의 목회직을 사회 복지적인 차원에만 제한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와 성경 주석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교회의 목회적 활동은 말씀과 기도와 성찬, 그리고 자선(혹은 사회 복지)라는 네 가지의 요소가 잘 균형이 잡혀야만 한다.
<칼빈과 한국 교회의 통일 사역>
서양의 기독교(Western Christianity)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견지하면서 그 사회 속에 깊은 토대를 형성해 왔다. 현재의 서양 교회는, 문화화 되어 있었던 16세기 카톨릭 교회와 어떤 면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비서양 기독교(non-Western Christianity)는 비교적 역동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있지만, 다원적인 사회 속에서 잘 조직된(well-organized) 기독 교회를 세우는 일이 손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교회의 전통이 그 자신의 사회속에서 상대적으로 젊기 때문이다. 영적 활력을 가지고 팽창하고 있는 이 젊은 교회들은 아직도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성숙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의 사상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길을 찾아갔던 칼빈은, 21세기 서양과 비서양권 기독교 모두를 새롭게 하는데 매우 소중한 통찰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한국 기독교 역사와 통일
한국의 개신교 역사를 돌아보자. 한국 교회는 개신교가 전래된 1880년대부터 근대적 의미의 민족 국가가 형성되는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한국 개신교 역사가 진행된 120년은 크게 두 개의 덩어리로 요약될 수 있다. 한국 교회사의 절반이 펼쳐졌던 “일본의 식민지 지배” 속에서 한국 교회는 “기독교 민족 운동”이나 “신사 참배 반대”를 지향하는 것이 정당했다.
한국 교회의 그 나머지 절반의 역사는 “분단과 통일의 과정”이라는 토대 위해서 전개되고 있다.93) 한반도는 1945년 이후 현재 세계 유일의 냉전으로 인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엄성은 심각하게 도전을 받아 왔다. 이제 한국 교회는 미래 지향적으로 평화 통일을 목표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지혜를 모아 전략을 세워가야 할 것이다. 특히 남한 교회의 절대 다수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칼빈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사상은 이 역사적인 과정에 혜안을 비추어 줄 것이다.
2. 칼빈에 근거한 한국 교회의 통일 전망
1) 민족 문제에 대한 칼빈의 열정
칼빈은 16세기 당시 가장 국제적으로 활동했던 신학자 중의 하나다. 그는 프랑스 출신이었지만, 1536년에서 1564년까지의 전 생애를 (3년 동안의 스트라스부르그 시절을 제외하고) 스위스 도시 국가였던 제네바에서 사역했다. 그렇지만 칼빈은 단 한시도 그의 조국 프랑스를 잊은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단적인 예가 자신의 인생의 종말을 3년 앞두었던 1561년에 기록된 다니엘서 강의집의 헌정사다. 이 다니엘서의 주석은 먼저 라틴어로 나왔고 그 다음해인 1562년에 불어로도 출판되었는데, 칼빈은 이 주석을 “그리스도의 나라가 프랑스에 올바르게 건설되기를 갈망하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건한 자들”에게 헌정했다. 비록 자신은 조국을 떠나 있었지만 “내 민족을 망각하거나 국민의 복리를 도외시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책임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칼빈의 심정에 비추어 볼 때, 한국 교회는 한국의 민족적 문제에 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남북 평화통일
종말을 향해 전진하는 하나님의 나라(Regnum Dei)를 전망하는 칼빈의 역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속해 있다. 그 역사적 과정에서 모든 주권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귀속된다.94) 그렇다면, 한국 역사의 미래에 하나님의 통치가 반드시 드러나야 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남북 평화통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사상은 남측과 북측의 평화적 통일 또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섭리 하에 반드시 성취될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인 사건이 될 것임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전망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남측과 북측의 평화적이고 인도적인 통일 과정에 어떻게 나타날 수가 있을까? 이 해답 역시 칼빈에게서 주어진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권위 앞에 모든 국가 이데올로기와 사회학을 상대화 하였다. 기독교의 복음은 어느 특정 이념이나 철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따라서, 만약 한국 교회가 칼빈의 사상 위에 선다면, 한국 교회는 어느 형태이든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조망해야 할 것이다.
3. 남북 평화 통일의 동기가 되는 칼빈의 사상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 헌정사에서 명확하게 밝혔듯이, 칼빈의 전 신학적 체계는 경건(pietas)을 지향하면서 세워져 있기 때문에, 경건과 신학은 서로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통합되어 있다. 남북 평화 통일을 위한 칼빈의 사상도 그의 경건의 신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1) 사랑(caritas)
칼빈의 경건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와 관계된다. 이와 동시에 칼빈의 경건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호 관계에까지 관련을 맺는다. 칼빈은 타자를 위한 사랑은 구원을 위한 원인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웃을 위하는 사랑은 “중생의 확실한 상징”이자 “성령의 특별한 열매”가 된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이란, 타자를 위한 사랑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이기심을 포기하고 타자를 유익하게 할 때” 비로소 자아의 중생이 “증명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95) 칼빈은 이웃을 돌아본다는 것은, “자기의 허물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96)
이것을 통일의 문제로 끌어와 보자. 그리스도인들이 북한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통일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물론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숙고해 보면 다소 강력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북한의 동포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유익을 구하면서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것은, 자기의 이기심을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칼빈에 의하면 이런 사랑의 헌신은 자신의 중생을 증명해 주는 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청지기 사상
칼빈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간다. 이 제네바의 개혁자는 인간의 신체 기관들이 그 기관 자체를 위해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관들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듯이, “경건한 사람도 ... 교우들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97)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은사를, 타자의 이익을 위해서 나누어 주라고 하나님께서 위탁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우리의 청지기 직책에 관해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칼빈은 이 청지기의 유일한 자격 조건을 “사랑”이라고 했다. 칼빈은 이 사랑이란 타자와 자아의 유익이 일치되는 것이지만, 더 중요시해야 할 것은, “타자”를 위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칼빈의 청지기 사상은 통일을 향한 기독교인의 동력을 제공한다. 칼빈의 가르침에 근거한다면, 남한의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 은사 들은 우리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이웃을 돕고 북한의 형제, 자매들을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놓으셨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칼빈에 의하면, 타자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바로 그것이 우리가 “전심을 다해서” 타자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이유이다. 그래서 칼빈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타자를 바라볼 때 타자 안에 비천함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타자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형상을 주시해야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 아름다운 형상에 마음이 이끌려서 타자를 동정(compassion)하라는 것이다.98) 요컨대, 칼빈이 말하는 경건은 타자의 환경 여부에 관계없이 그를 동정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위의 언급은 왜 우리가 북한에게 사랑을 베풀고 북한의 형제 자매들을 존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바로 설명해 준다. 그들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에게 이해 타산을 넘어서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독생자를 보내 주셨듯이, 우리는 “전심”으로 북한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4) 디아코니아(diakonia)
이때 요구되는 정신은 “디아코니아(diakonia)”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거의 평생을 제네바에서 사역을 했던 칼빈의 모델에서 두드러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죽기까지 섬기셨듯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민족을 향해 섬김(diakonia)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국의 교인들이 동시에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면, 마땅히 북쪽에 살고 있는 형제 자매들도 사랑하며 섬겨야 할 것이다.
21세기 한국 교회는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칼빈의 신학과 그 영적 유산을 적극 수용하여 활용해야 할 것이다. 루터 탄생 500주년이 동,서독 통일의 기폭제가 되었다면, 칼빈 탄생 500주년은 남,북한 평화통일의 원년이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남북 평화 통일을 위해서 선교적인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현재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으며, 교회는 세속화된 현대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칼빈의 교회와 국가 사상을 잘 파악하고 그 제언을 경청한다면, 한국 교회는 오늘날 이 교회가 감당해야 할 평화 통일을 위한 귀한 디아코니아(diakonia)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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