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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공부의 목적과 방법, 교리의 필요성과 중요성

by 【고동엽】 2021. 11. 2.

교리공부의 목적과 방법, 교리의 필요성과 중요성

[마틴 로이드존스]

 

1장 교리공부의 목적과 방법

 

성경본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항상 유익합니다. 설교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가 말하려는 모든 것의 배경이 되고 본 성경 교리 시리즈 연구에서 하려는 일을 설명해 줄 성경 말씀 신명기 29장 29절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이제 서론으로 강의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서너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하려는 일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대해 별로 많이 들어 보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심지어 어리석게도 자기들은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딱하고도 유감스러운 태도입니다.

한때 성경 교리에 대한 강좌나 설교는 매우 흔했지만 지금은 비교적 보기 드문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판을 직접 다루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는 우리가 마음속으로 아주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즉, 우리가 이 교리 강좌에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어떻게 하려 하는가, 왜 하려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성경교리란 무엇인가

-중략-

 

2. 어떻게 성경 교리를 공부할 것인가

-중략-

 

3. 왜 우리는 성경교리를 공부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내용이 우리가 앞으로 교리를 고찰해 나가려는 방법의 대략적인 정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요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제시하려는 몇 가지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성경 자체가 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특정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는 것인데, 그 진리들이란 교리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다는 말은 교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그 교리를 이해하기 원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성경을 대단히 잘 알 수 있으나, 그 교리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에 대한 내 지식은 내게 전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볼까요.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한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에 대해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던가요? 선지자들은 교리를, 특히 율법에 대한 교리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 교리들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민족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백성아! 너희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율법이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사실을 너희는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교리를 설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 스스로도 이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정말로 하셨던 일이 바로 이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7~28) 주님은 율법을 취하사 그것을 교리의 형태로 해설하셨습니다. 주님은 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저 율법을 일반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윈리들을 뽑아내서는 그것을 적용하고 시행하셨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사도들이 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고 초대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의 설교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본문을 취해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그 본문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시하고 분석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방식은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것을 백성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설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설교의 목적과 기능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건대 설교는 그저 성경 구절의 다른 번역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의 목적은 진리를 회중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설교의 본질적인 역할, 그것을 행했습니다.

신약 서신서들을 예로 들어 봅시다. 서신서는 무엇입니까? 이 서신서들에서는 몇몇 위대한 교리를 강조하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교회들에는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 저자들은 교리를 취해 그것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적용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언제나 교리를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일을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저는 성경이 그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 자체게 그렇게 하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말하곤 합니다! 우리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는 그들이 문자에만 얽매여서 그 정신은 결코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을(words) 안다는 데 만족하여 말씀(word)은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의 상황에 우리 모두도 처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문자에만 얽매인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자에 얽매이는 것은 우리 영혼을 저주받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나서도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연구가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연구가 대단히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수십 세기동안 교회가 언제나 성경 교리들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장 초창기부터 온갖 희생을 치르고 예수가 주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교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교리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례형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지망생들은 교리 문답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받았으며,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지요? 금세 이단들이 일어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진실하고 진지하긴 했으나, 옳지 않고 해로운 것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단 교사들과 거짓 교사들은 교회 내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잘못 인도했습니다. 교회 내에 이교가 발흥함에 따라 초대 교회는 우리가 보통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 예를 들면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오류와 이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신경들을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믿지 않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서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완벽하게 진지하고 진실한 사람들도 성경을 읽고 나서 상당히 잘못된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규정해야 합니다..” 교리들에 대한 정의들을 우리는 신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어떤 의미에서 하나였던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하지만 교리는 대체로 동일했습니다. 교회가 죽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 개의 위대한 신경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새 생명, 새로운 활력, 새로운 이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회는 교리를 정리하는 것과 그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도 간에 흔히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 교리들을 함께 열거하고 해설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않는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그 외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교회에는 [39개 신조]라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또한 유럽 대륙에도 많은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라비아 교회의 신조와 개혁 교회의 신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17세기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되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와 전 세계 모든 곳에 있는 장로교회 신앙고백입니다.

이 모든 신앙고백들 및 그에 수반되는 교리 문답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하고, 그 믿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성경 교리를 진술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우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초기 시절에 이 모든 것이 필요했다면, 종교개혁 시절과 17세기에 이것이 필요했다면, 분명 그것은 지금 현재 이 순간에도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는 사이비 종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의 문 앞에 와서, 그들 말로는 “성경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성경을 자기들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을 하는 순간, 여러분은 본능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그들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함께 그런 가르침들에서 잘못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정말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알게 되면 우리에게 제시되는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 주변에만 이 모든 오류와 사이비 종교의식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로 교회 안에도 심각한 혼란이 있습니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고, 분명한 정의가 없으며, 누구든 자기 좋은 대로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교리를 함께 고찰해 보는 일이 지금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때는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토대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하며,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모든 원수, 모든 교활한 원수,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오는 마귀가 사용하는 모든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교리를 여러분과 함께 고찰해 보아야 할 더 고상한 이유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교리 공부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에 들어가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어느 정도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세부적인 것들에 매여 헤매지 마십시오. 이 위대하고도 강력한, 교리의 최고봉들을 뽑아내어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입니다. 성경에 고찰은 언제나 예배이며, 성경과 그 가르침에 대하여 다른 교과서들에 대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말합니다. “신학 대학들이 대체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내가 아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는 멀쩡했는데, 졸업하고 나올 때 모습을 좀 보세요!” 그것이 언제나 시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 말이 간혹 사실이라면 제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된 이유를 말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의 사람들은 성경을 마치 하나의 교과서인 양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너무 자주 이 위대한 교리를 마치 그것이 인간의 사상과 아이디어인 것처럼 접근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배와 경외하는 마음으로 교리를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번역과 지적 지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리를 알기를 소망해야 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을 배운 후 그 지식으로 교만해지거나 지적 흥분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더 온전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과 경배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이 교리들로 인해 우리 모두가 소생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또한 우리 및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모든 교회가 소생하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다시 한 번 목도하기를 소망합니다.

 

(로이드존스 교리강좌시리즈 1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中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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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자 로이드 존스의 위대한 기독교 교리 강좌 시리즈

- 모든 기독교인의 서가에 자리해야 할 영원한 필독서 -

- 이보다 더 감동적인 교리서는 없다 -

 

<세트 구성>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1 (페이지 616, 가격 22,000) -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2 (페이지 456, 가격 18,000) -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3 (페이지 392, 가격 16,000 ) -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발간사┃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자를 통해 위대한 기독교 교리 시리즈 강의를 듣는 기쁨

백금산(예수가족교회 담임목사)

 

 

지금까지 저에게 영향을 끼친 분들은 부지기수입니다.

만일 단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로이드 존스를 들고 싶습니다.

 

저는 그를 통해 신자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통해 목회자의 영광스러움과 설교의 영광스러움을 보았습니다. 이 외에도 저는 그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성경에 계시된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배웠습니다. 또한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신학만이 아니라 조직신학의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교회사를 아는 것, 특별히 부흥의 역사를 아는 것의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경건 생활의 불꽃을 유지하는 데 신앙위인들의 전기를 읽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제 인생의 또 다른 결정적인 만남인 조나단 에드워즈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로이드 존스를 통해 청교도 신학의 광맥을 찾아가는 지도를 얻게 되었고, 로이드 존스를 통해 독서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통찰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 출판사나 도서관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자극도 받게 되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오늘날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나 내가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분야들이 로이드 존스를 알게 된 데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은혜를 입은 셈입니다.

이제 저는 로이드 존스의 대표적인 작품인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를 출간함으로써 그에게서 받은 은혜의 일부를 갚고자 합니다.

이 로이드 존스 교리 강의 시리즈는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해를(1955~1968년) 하기 직전에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약 81회에 걸쳐 금요일 밤에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설교식으로 강의한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조직신학 책을 통해 말하지 않고 설교를 통해 말했기 때문에 책처럼 항목과 길이에 있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면은 있지만 교리가 아주 생동감 있게 전달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내용의 상당 부분은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참고하여 설교식으로 쉽게 풀어쓴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탁월한 통찰력과 뛰어난 전달력은 벌코프를 참고한 부분조차 전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조직신학을 딱딱하게 접하지 않고 감동적으로 교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큰 유익을 줍니다.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또한 로이드 존스의 저작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에 속하기 때문에 이번 새로운 번역본이 여러분에게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를 공부하는 데 한층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 책은 제가 꼭 번역하고 싶었던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사정상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훌륭한 다른 번역자를 물색했습니다. 마침내 모래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듯이 실력 있는 번역자를 발굴하여 새롭게 번역을 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한 임범진 형제는 청년 시절부터 제가 저희 교회에서 신앙 지도를 한 제자입니다. 연세대 의대를 나와 현재 충남대 교수로 있는 의사로서 영어 실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독학으로 이미 벌코프의 『조직신학 시리즈』와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시리즈』 등의 기본적인 조직신학 책들을 아주 철저하게 마스터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범진 형제는 저와 같이 로이드 존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고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독파하여 제가 저희 교회 32과목으로 편성된 예수대학 성경공부 커리큘럼 중 로마서 강사로 임명한 형제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로이드 존스도 의사 출신으로서 정규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 독학으로 신학 공부를 한 분입니다. 이제 로이드 존스의 이 주저가 역시 의사 출신으로 정규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 독학으로 신학 공부를 한 사람에 의해 번역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제 이 책을 통해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위대하고 풍성한 하나님의 진리가 꿀처럼 달콤하게 맛보여지고, 금처럼 소중하게 취급되기를 기도합니다.

 

 

┃들어가는 말┃

 

로이드 존스 박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매주 금요일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한 방에서 토론 모임을 열었습니다. 이 토론 모임에서 다룬 주제들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실제적인 문제들이었으며, 이 모임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들은 온갖 종류의 성경적 가르침에 대한 지식을 요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종종 교리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 때는 보통 로이드 존스 박사가 토론 말미에서 요약하면서 그것들을 다루곤 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 금요 모임의 장소를 본당으로 옮겨 제기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연속 강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단 사람들이 그 방에 수용하지 못할 만큼 많아졌기 때문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이 그에게 성경적인 교리에 대해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1952년부터 1955년까지 교리 강의를 했으며, 그 후에는 1968년에 은퇴할 때까지 그의 대작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 강해설교 시리즈를 계속했습니다. 교리 강좌를 들은 회중은 그 강좌를 매우 높이 평가했고, 교리 강좌를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큰 힘을 얻게 되었음을 수년 동안 간증했습니다.

 

후에 로이드 존스는 정규 강해설교의 일부로서 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한 교리에 대해 알고 싶어할 경우, 교리 교과서에서 그것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교리 연구의 큰 강점은 교리 강의가 무미건조한 교과서적 강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설교자였으며 이 점이 모든 강의에 확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목회자였기 때문에 복음의 놀라운 사실들에 대해 그가 느끼는 경이로움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명확했고 복잡한 학술 용어들로 뒤죽박죽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틴데일(Tyndale)처럼, 그는 진리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표현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그는 진리가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모든 강의에 적용 항목을 포함시켜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에 분명한 영향을 주고자 했습니다. 이 강의들에 있어서 그의 가장 큰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설교와 책들을 이미 잘 아는 사람들은 이 교리 강좌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몇몇 주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되어 온 것이며, 그가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언제나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과거의 많은 위대한 설교자들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역이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결코 변함이 없었으며, 그의 나팔은 불분명한 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테이프들은 마틴 로이드 존스 녹음사(Martyn Lloyd-Jones Recording Trust)에서 배급을 맡고 있으며, 그의 모든 테이프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은 이 교리 강의입니다.

 

지금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 진리들에 대한 지식이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확실하게는 이 강의가 진행된 1950년대보다-부족한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이 교리 강의들을 다시 사용하시고 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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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필요성과 중요성


교리는 성경 해석의 열쇠다

 

무엇보다 먼저 교리는 성경 해석, 성경 이해와 관계가 있습니다.

교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성경의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경의 중요성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자신의 신앙과 삶의 유일무이한 법칙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모든 신앙의 근거와 대상은 바로 성경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삶의 내용 또한 성경을 근거로 합니다. 즉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교리와 성경의 주제

그렇다면 성경과 교리와는 어떤 관계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면 되었지 교리는 왜 필요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산다’ 고 하는 것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이 말의 의미는 바로 ‘교리대로 믿고, 교리대로 산다’ 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대로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교리란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그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대로 산다고 했을 때,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이 있습니다. 교리란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그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리란 바로 성경의 내용, 성경의 메시지로서 우리가 믿어야 하고 우리가 살아야 할 성경이 말하는 주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이러한 중심내용, 주제를 먼저 파악해야만 합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신학자는 성경과 성경 속에 담겨있는 주제를 조직화한 이러한 교리와의 관계를 자연 속에 있는 꽃과 식물원에 있는 꽃의 차이를 통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자연 속에는 여러 가지의 꽃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원에 있는 꽃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위치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기준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배열된 식물원의 꽃이 자연 속에 있을 때나 식물원에 있을 때나 동일한 꽃입니다. 그러나 식물원에서는 꽃과 나무들이 일정한 주제나 기준에 의해서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상태에서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전체적으로 일목요연하게 꽃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는 바로 이러한 관계에 있습니다. 교리는 바로 성경 속에 흩어져 있는 내용을 같은 주제별로 조직화시킨 것입니다. 즉 성경의 주요 주제들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종합해 놓은 것입니다.

즉 교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의 핵심이자 요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당 주제에 대한 교리를 알 때, 그 주제와 관련된 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게 됩니다.

 

교리와 전통

우리는 교리와 성경해석과의 상호관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알기 위해 먼저 전통과 성경과의 관계를 잠시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과 성경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초대교회의 상황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 초대교회는 교회 안팎으로 위기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밖으로는 유대주의와 로마제국의 박해와 안으로는 이단의 등장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를 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단들이 생기면서 이단들은 성경이외의 다른 계시의 원천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엉터리로 이상하게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러한 이단의 문제에 대처했을까요?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러한 이단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다음의 2가지 사항을 분명하게 주장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만 자신을 계시 하셨다. 성경이외의 다른 계시의 통로는 없다.

둘째 성경의 해석은 지금까지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온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야 한다. 성경을 주관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즉 교부들의 성경해석의 원칙은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전통적인 해석,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인 해석을 통해서 성경의 참된 해석의 기준, 정통적 해석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통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전통이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성경해석, 정통적인 성경해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성경해석은 오늘날 우리가 신조 혹은 신경이라 부르는 내용들에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중세기로 접어들면서 중세 카토릭 교회는 전통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로마 카토릭 교회는 성경이외의 전통이라는 계시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중세 교회가 하고 있는 성경에 없는 수많은 의식과 행동들을 전통에 근거해서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중세 카토릭주의자들의 잘못된 성경관과 전통관에 반대하면서 ‘오직 성경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개인적으로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말은 성경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읽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은 초대교회가 해석했던 방식 즉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전통이란 단어는 2가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로마 카토릭은 전통이라는 말을 성경이외의 또 다른 계시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로마 카토릭과는 달리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전통이란 초대교회로부터 전승되어온 바른 성경해석, 정통적 성경해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이란 2가지의 성경해석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으로 선조들이 성경을 해석해 왔던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함께 성경을 해석해 왔던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의에 비추어서 볼 때 교리란 무엇입니까?

교리는 바로 초대교회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바른 해석, 정통적 해석을 의미합니다. 교리란 바로 이렇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험한 생각은 교리와 성경해석을 서로 분리시켜서 교리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리 따로 성경 따로 분리시키는 것은 교리에 대한 가장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고 또한 성경에 의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교리는 성경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성경해석의 틀이기도 합니다. 결국 교리와 성경과의 관계는 순환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리가 나옵니다. 그러나 교리가 성경을 해석합니다. 교리와 성경사이에는 이와 같은 피드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호 보충적입니다.

 

교리와 성경해석

우리는 교리의 일차적인 목적이 바른 성경해석의 열쇠를 제공해 주는 데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종교개혁자 칼빈의「기독교 강요」또한 바로 이런 성경해석을 위한 안내서로서 기록된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와 같은 기독교 교리의 주요 주제에 대한 체계적인 제시는 성경에 대한 가장 뛰어난 안내자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공부해야 합니다.

교리는 곧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한 지침입니다.

교리는 곧 역사적으로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성경해석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인 셈입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곧 교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곧 교리를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교리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안경이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막론하고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매일 살아가는 삶의 배후에는 인생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하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삶과 구체적인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인생관입니다. 전문적인 철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리와 세계관

이러한 세계관과 인생관의 관점에서 교리를 고찰해보면 교리는 바로 성경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들 즉 가장 중요한 교리들은 다음과 같이 크게 8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 성경에 대한 교리

(2) 하나님에 대한 교리

(3) 인간에 대한 교리

(4)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

(5) 성령에 대한 교리

(6) 구원에 대한 교리

(7) 교회에 대한 교리

(8) 종말에 대한 교리

 

이러한 성경의 주요 8가지 교리에 대한 내용을 구속사적인 측면으로 요약하자면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주제로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한 구원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구원의 완성이라는 성경의 교리는 바로 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안경(세계관과 인생관)을 제공해 줍니다.

 

우주와 인생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질문

세상 속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먼저 우주와 인생의 기원 또는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나는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일까? 이 세상은 언제부터 존재하게 된 것일까?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과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것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 세상과 인간은 영원 전부터 그냥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세상과 인간의 악과 비참에 대한 질문

또한 이 세상과 인간의 악과 비참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인간들 사이에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왜 인간사회에는 이렇게 범죄가 발생하는 것일까? 범죄 없는 세상이 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일까? 왜 인간에게는 질병이 있는가? 왜 인간사회에 기근으로 인한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가?’

 

개인과 역사의 종말에 대한 질문

또한 개인과 역사의 종말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고 난 다음에 새로운 세상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이렇게 살다가 그냥 없어진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오래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세상의 역사는 마냥 지속되는 것일까? 앞으로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한 인간들의 답변과 하나님의 답변

이러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 즉 우주와 인간의 기원문제, 현재 삶의 목적과 의미의 문제, 인간의 사후와 역사의 종말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한 인간들의 답변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는 이러한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고 인간의 경험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철학과 현대인들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려고 하는 희망을 더 이상 품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풀 수 없는 질문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무의미한 질문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정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 즉 교리입니다. 성경의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종말에 대한 교리야말로 바로 이러한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기 때문에 진리이며, 정답입니다. 성경의 창조교리는 우주와 인생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바른 해답입니다. 성경의 타락과 죄에 대한 교리는 바로 인간의 범죄와 악의 현실에 대한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원 교리는 인간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종말과 죽음에 대한 교리는 우리의 영원한 미래의 운명에 대한 해답입니다.

 

교리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요약

그러므로 교리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정답 즉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는 나의 믿음을 진리에 기초하게 하고, 나의 삶을 진리에 기초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즉 교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사활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교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또한 교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진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을 포기해버리고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이러한 진리에 대한 확신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주관주의나 상대주의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세계관속에서 교리에 대한 확신 곧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비추이는 밝은 등불이 될 것입니다.

 

 

교리는 교회 공동체의 신분증이다

 

교리는 공동체의 아이덴티티 즉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도록 해 줍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개인의 자기 이해가 그 사람의 행동을 규정해주듯이 우리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 또한 공동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사명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지름길입니다. 즉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교회의 존재이유와 사명에 대한 정체성 문제입니다. 교리는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에 대한 분명한 울타리를 제공해 주는 표지입니다.

 

공동체의 신분표지인 교리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즉 세상과는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세상은 무엇이 다릅니까? 무엇이 교회와 세상을 구별해 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리입니다. 교회가 믿는 믿음 즉 교리가 교회와 세상을 구별시켜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의 핵심 즉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고, 세상은 성경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리는 공동체의 공동체 됨을 확인해 주는 울타리입니다. 즉 교리는 바로 그 공동체의 소속됨을 보여주는 신분증명서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2가지 의미에서 교리를 통한 공동체의 신분을 확인하게 됩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교리

첫째는 교회와 세상 또는 기독교회와 기독교회가 아닌 이단을 구별해주는 표입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기독교를 유대교와 구분시켜주는 것이 곧 기독교의 교리였습니다. 즉 기독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며, 유대교는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교리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분리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울타리였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때 일어난 수많은 이단들 가운데 영지주의적 전통의 이단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단과 구별하는 참된 기독교는 바로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에 대한 교리를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리가 또한 참된 기독교와 이단을 구별해주는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파와 교파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교리

또한 교리는 같은 참된 기독교 안에서 교파와 교파를 구별시켜주는 공동체의 신분표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당시 같은 개신교 안에서도 루터파와 칼빈파와 영국 국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파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교회와 세상, 교회와 이단사이를 구별해주는 근본교리는 공통적으로 믿지만 이 보다 조금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교리들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에는 교리의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서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교리적인 차이점이 곧 루터파와 칼빈파의 내부적 결속을 다져주는 공동체의 신분확인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차적인 교리와 이차적인 교리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의 신분을 확인해주는 교리의 역할 면에서 교리를 다음의 2가지로 편의상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로서 교회와 세상을 구별시켜주는 교리입니다.

이러한 교리에는

 

(1)삼위일체 교리

(2)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

(3)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이거나 교회라고 하는 탈을 쓰고 있지만 이단으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차적인 교리라 부를 수 있는 것들로서 각 교파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교리들입니다.

이러한 교리에는

 

(1)세례에 대한 교리

(2)성찬에 대한 교리

(3)교회정치에 대한 교리 등등을 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기 되기 위해서, 성도가 성도답게 되기 위해서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근본적인 교리를 먼저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등 동방과 서방, 카토릭과 개신교 등의 모든 세계교회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교리에 대한 내용을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교회의 교회다움에 대한 초석인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서 자신이 속해있는 교파의 신앙고백에 따른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같은 문화권을 가진 같은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라 할찌라도 각 가정에 따라서는 가정교육의 분위기와 생활양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성도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과 구별되는 신앙과 삶의 양식을 가지게 되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파의 신앙고백과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교파가 속해있는 교회의 성도답게 되기 위해서는 각 교파의 신앙고백을 바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교회들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근본적인 교리들을 무시함으로 교회가 세상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 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세속화된 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자신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교파의 신앙 고백적 전통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다른 교파의 사람들과는 좀 더 구분되는 분명한 특징을 드러내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교파간의 특색이 없다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바람직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단순한 교파의 특징을 드러내는 신앙과 삶이 없는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전혀 그리스도인 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교리는 삶의 지도다

 

교리는 성도의 신앙생활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성도의 신앙성장이 언제나 교리와 윤리가 결합되어 있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언제나 성도의 윤리는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이 성도의 삶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그 앞에 교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사실을 신약성경의 성화교리는 ‘그러므로’라는 한 단어 요약되어 있다는 아주 의미심장한 관찰을 하기도 했습니다. 즉 ‘그러므로’ 앞의 내용이 바로 교리요 ‘그러므로’ 뒤의 내용이 바로 윤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항상 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교리를 삶 속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만큼 성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삶의 경험과 교리와의 관계

우리의 체험은 언어로 모두 다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체험을 언어로 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리와 체험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죄에 대한 각성, 하나님에 대한 갈망 등등.... 이러한 우리의 체험은 곧 성경의 교리로 형성됩니다. 이런 면에서 교리는 우리의 삶의 체험을 그려놓은 지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도가 나의 경험을 모두 다 기술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지도는 내가 경험한 실제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지도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집합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는 우리의 경험을 해석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경험과 삶에 있어서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지도하던 한 학생이 신앙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엄청난 죄의식이 밀려왔습니다. 평소에는 죄로 생각하지 않던 모든 것들이 죄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운 생각과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의식이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실로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때 이 학생은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는 학생을 이상한 듯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의식을 체험한 학생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의 경험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있어야만 되는 회심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회심할 때 생기는 죄에 대한 의식이 이 학생에게 생긴 것입니다. 이상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드시 있어야 할 체험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학생이 회심과 성경이 말하는 죄의식에 대한 바른 교리를 배웠더라면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생겼을 때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자신의 체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리는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체험을 지도와 같이 그려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우리 삶의 지도와 같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신칭의 교리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태도

교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생각은 착한 일하면 천국가고, 나쁜 일 하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연인들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권선징악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런 구원받을 만한 자격조건이 없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이신 칭의 교리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이신 칭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에 있어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신 칭의 교리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신의 행위나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신칭의 교리를 아는 사람은 오직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며 구원에 대하여 전적인 감사를 하나님께만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교리는 ‘왜 우리가 착한 일을 행하여야 하는가? 우리가 바른 삶을 살아야 할 동기는 무엇인가?’ 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태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윤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기쁨이 됩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제 자녀답게 행하여야 한다는 성도의 삶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행하게 됩니다.

 

(백금산목사의 라이브러리에서 발췌-> http://rnrbook.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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