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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되게 하는 은혜(고린도후서 12장 1절~10절)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주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오늘은 인생이라는 깊은 세계에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행복이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행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소유입니까, 지위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권세입니까? 내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참으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정신분석학자 칼 메닝거는 그 방법을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태도는 사실보다 중요하다." attitude--삶의 자세가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대우가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변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이 백 번 달라져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행복의 근본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이 엄연한 진리를 이제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반생(半生)을 살아오면서 환경을 많이 바꾸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나의 불행,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내가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실패했어요. 특별히 나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서 실패했습니다. 내 감정, 내 인격,'나'라고 하는 존재를, 내 욕망을 다스리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정직해야 할 시간에 정직함에 실패했습니다.
그것도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회개해야 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사과하고 회개해야 할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I am sorry"라고 딱 한마디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변변치 못한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마음 아픈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후회라고 하는 고통입니다. 지나간 일들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참 후회스러워요. '그렇지 않았어야 했는데……'하고 아무리 후회하고 가슴을 쳐도 지나간 일은 이미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것이기에 후회막급입니다. 후회하게 되는 그 모든 사건들을 통틀어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쓸데없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마음 아픈 일은 사랑해야 할 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랑해야 할 사람이고 평생을 같이 살면서도 우리는 바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행했어요. 그 많은 세월을 그렇게 덧없이 보내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한 단계만 더 아래에 있었어도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남보다 딱 한 번 조금만 낮추었어도 얼마든지 자유롭고 평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하지 못했습니까? 왜 사랑 받지도 못했습니까?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용기가 부족한 것도 겸손을 잃었기 때문이요, 지혜가 부족한 것도 바로 겸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화목하지 못한 것도 그렇습니다. 뭐니뭐니해도 화목이 중요한데, 주변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누구 다른 사람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쓸데없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사하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지금 우리는 얼마나 잘삽니까? 얼마 전에 제가 일본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각 나라의 민속 물들을 전시해놓은 민속박물관이 있어서 한번 둘러보았는데, -우리 한국의 것도 있더군요. 같이 갔던 청년이 어떤 것을 가리키며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것이 무엇입니까?" "짚신이라네." 그런데 그 청년은 짚신이라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짚으로 만든 신을 뻔히 앞에 보고도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 사람아, 너는 저것 만들 줄도 알고 신어보기도 했다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저것이 신는 것입니까?"라고 되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이 웬일입니까? 감사도 없습니다. 그 역시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모든 잘못이 내가 겸손하지 못하다는 데에 기인합니다.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는 것도, 축복이 축복되지 못하는 것도, 당연히 기뻐해야 할 사람이 기뻐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히 사랑 받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내가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덕목이 겸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idealistic personality--이상적 성격, 이상적 성품이란 어떤 것입니까? 용기입니까, 지혜입니까, 지능입니까, 아니면 지도력입니까? 흔히들 말하는 '실력'입니까? 실력 많아보았자 행복하지 못합니다. 공부 잘해보았자 별것 아닙니다. 너무 기쓰지 마세요. 자녀들을 고생시키지 마세요. 가만히 보면 자기도 불행했으면 남까지 불행하게 만듭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태도로 살면 어디서나 사랑 받고, 어디서나 행복하고, 어디서나 성공할 수 있고, 어디서나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평생에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일평생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갖기 힘든 덕목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얼마든지 겸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겸손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사실, 겸손을 의식한다는 것은 벌써 그가 교만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겸손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겸손을 의식할 수 없어야 참된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겸손할 때에 믿음을 가지고 되고 훌륭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다' 혹은 '덕 있는 사람이다'라고 칭송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젊은 정치가 존 에프 케네디(Kennedy, John F.)의 비서로 11년 동안을 일했었던 이블린 링컨은「여비서가 본 인간 케네디」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이 일약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Look at me, I am the great'--'나를 보라, 나는 위대한 사람이다'라며 저마다 자기가 잘났다고 떠듭니다. 그런데 케네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상원의원이었을 때에도 겸손했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는 더 겸손했습니다. 그와 일을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잠깐만 만나도 그가 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위대한 사람이고 대통령이고……이런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케네디는 사람들을 순수한 인간의 모습으로 만났습니다. 그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그 여비서는 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덕입니다. 덕이 뭐 별다른 것입니까? 세상에서 참으로 좋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겸손한 사람일 것입니다.
지위나 돈이나 명예 같은, 세상적으로 잘난 것 하나도 느끼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느껴지는 사람, 이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겸손합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이 겸손입니다. 진실이 겸손이라는 것은 별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부러 자기를 낮추고, 일부러 자기를 비우고, 일부러 자기가 겸손한 척하고, 일부러 자기를 비하시키고…… 여러분, 그럴 것 없습니다. 본래가 그러한데 비하시킬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미 그 상태까지 다 간 것인데요. 진실이 겸손입니다. 여기에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잘난 사람이 못난 척해야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 못난 사람이 못났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이야깃거리가 됩니까? 교만은 거짓일 뿐이요, 허세일 뿐입니다. 교만할 가치도 이유도 하나 없습니다. 괜히 남보다 좀 난 척하지만 그실 잘난 것이 뭐가 있습니까? 별것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교만은 악의 뿌리입니다. 이것이 모든 죄의 뿌리가 됩니다. 모든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모름지기 무식함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할 때에야 그는 비로소 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약함을 아는 것이 힘의 근원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할 때에야 그는 비로소 큰 소유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다'할 때에 그는 비로소 참된 가치의 인식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의 큰 덕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겸손이 제일 귀한 것이다'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를 존경하고, 겸손을 사모하고, 겸손을 간절히 소원하는, 그러한 시각과 마음가짐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으뜸가는 덕목이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그것은 겸손이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역시 겸손이다." "셋째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다." 정말입니다. 여러분, 겸손을 제일 귀한 것으로 아는 그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겸손하고자 하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겸손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겸손하려면 내 노력을 온통 겸손을 향하여 기울여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겸손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그렇게 겸손하고자 노력한 다음에 '아, 나는 스스로 겸손할 수 없는 존재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원래 못된 존재라서 조금만 기회가 있으면 고개를 내밀고, 조금만 뭐가 좀 잘되면 어깨에 힘주고, 조금만 뭐가 잘되면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내가 나쁜 놈이다. 나는 스스로 겸손하지 못하다. 내 노력과 내 수고로써는, 나의 나됨으로써는 절대로 겸손할 수가 없구나'--이렇게 스스로 겸손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교만 성향의 사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교만한 사람이다, 내 마음속에는 엄청난 교만이 있다'--이렇게 자기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그런고로 겸손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은혜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하나 겸손하기 위해서라면 병들어도 좋고, 실패해도 좋고, 욕을 먹어도 좋고, 모욕을 당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겸손해질 수만 있다면 'Why not'--언제든지 좋다는 말씀입니다.
나 하나 겸손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고맙게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전천후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하지 않는 전천후 신앙이 필요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물론 기억하고 있겠습니다마는 1960년 로마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아베베라는 에디오피아사람입니다. 그가 금메달을 따서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금메달 때문이 아닙니다. 올림픽 때마다 금메달 따는 사람이야 많이 있지요. 아베베는 마라톤 코스를 맨발로 뛰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맨발로 뛸 수밖에 없었는데 금메달을 딴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높이 존경하고 찬사를 참 많이 보냈습니다. 그 다음 1964년 동경올림픽 때에는 이제 돈을 좀 벌었던지 운동화를 신고 뛰었습니다. 또 금메달을 땄어요. 에디오피아를 너무도 영광스럽게 했기에 나라에서 차 한 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다가 사고가 나서 그만 불구의 몸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그 사람 참 안됐다. 상으로 받은 그 차 때문에 병신이 되었구나"하고 딱해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4년 후 아베베는 런던 장애자 경기에 나가서 또 장애자로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겸손이라는 최고의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혜, 도대체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가 은혜될 수 있으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엄청난 객관적 은혜가 사건으로 주어진다 하더라도 내가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분명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사랑이 무효요,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 따릅니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기란 당나귀한테 음악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렵다." 그렇습니다. 교만한 자는 몇십 년 교회에 나가도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 많은 날들을 기도해도 은혜 받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겸손해지고야 말씀이 들려지고 은혜가 은혜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은혜로 은혜 되는 하는 은혜, 그것이 가장 큰 은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교만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가끔 그 교만이 슬쩍 비치기도 합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5, 6절)." 이렇게 내가 잘났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 3:8, 9)"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다,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사도 바울은 신령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비체험을 얻었습니다. 삼층천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들었습니다. 엄청난 하늘나라의 행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말로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표현할 말도 달리 없겠지마는 내가 말을 할 때에 듣고 보는 사람이 지나치게 생각할까 하여 말할 수 없고, 또한 말하면서 내가 교만해질까봐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使者)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7절)."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게 사단의 사자, 즉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겸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교만해 진다면 은혜를 다 쏟아버리게 되니까, 은혜가 은혜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겸손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교만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 교만한 성향과 체질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진실하게 인정했습니다. '나는 내버려두면 교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내가 만사 형통하고, 잘되고…… 이렇게만 된다면 나는 별수 없이 교만하게 되는 사람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미리 아시고 내가 교만하지 못하게 일평생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그래서 나를 겸손하게 만드셨다. 이것은 은혜로 은혜 되게 하는 은혜다'라고 여깁니다.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구한 바로는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일일이 다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내 나름대로 집중적으로 연구해본 결과로는, 육체의 가시는 바로 간질병일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전제해 놓고 보면, 그가 갈라디아교회에 가서 설교할 때에 도중에 아마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14절)……" 자기를 업신여기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인지 세계사에도 보면, 시저라든가 크롬웰이라든가 나폴레옹 같은 장군도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멀쩡하다가도 가끔씩 간질로 쓰러져서 견딜 수 없어할 때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꼭 한 사람이 뒤따라 다니다가 간질로 쓰러질 때마다 입에 재갈을 물려서 이빨이 부러지지 않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러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이렇게 되면 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가 막힌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 번을 기도했습니다. 오늘의 성경은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응답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9절)"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이것은 네게 꼭 필요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겸손 때문입니다. 겸손을 위하여,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를 곧 은사라고 부릅니다. 은혜의 선물로 바꾸어 생각합니다.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었든 간에 그것은 소중한 은혜입니다. 이것을 은혜로 아는 데에 신앙적 역설이 있습니다. 겸손한 자만이 아는 겸손케 하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자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민과 번민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나됨의 자세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입니까? 좀더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나를 겸손하게 하지 못하는 나, 혹은 겸손하지 못한 나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여러분은 얼마나 진실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하여 내게 주신 모든 일을 우리는 모름지기 은혜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로 은혜의 사람 되게 하는 은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효과적인 은혜임을 알고, 진실해지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야 겸손한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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