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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한 확실한 은혜(이사야 55장 1절~7절)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한 상습적인 탈영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용감하고 늠름한 청년이었습니다만 웬일인지 규칙적이고 조직적인 군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탈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붙잡히면 또 탈영을 하고 또 붙잡히면 다시 기회를 노려 탈영하는 일을 되풀이하다가, 형량이 점점 늘어나서 드디어 사형 선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가 저지른 죄목은 탈영한 것뿐인데 사형까지 받게 되니 재판장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사형을 언도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이 청년이 사형을 받게 되기까지의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람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교육을 시켰으며 매질도 했고 고생도 시켰으며 심지어는 간곡히 사정도 해 보았습니다만 그는 기어이 좋은 군인이 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라고 침통해하며 말했습니다. 그 때 탈영병의 친구 한 사람이 일어서서 "재판장님, 그 동안 이 친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은 잘 압니다만 한 가지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용서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5:1이하에 보면, 포도원의 노래가 있습니다. 한 농부가 산을 개간하여 돌과 잡초를 다 제거하고, 옥토를 만들어서 극상품 포도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파는 등 온갖 정성을 다했습니다. 드디어 포도 철이 되어 열매가 맺혔는데, 뜻밖에 들 포도였습니다. 그동안 최상품의 포도를 얻기 위해 수고와 정성을 쏟았는데 들포도가 맺힘은 어쩐 일이냐고 실망하고 슬퍼하는 노래입니다. 문제는 뿌리요 종자로서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는데, 여기에 수고하고 애썼으니 무슨 소용입니까? 결정적으로 실망할 수밖에 없도록 시작이 잘못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소망, 새로운 제도, 새로운 설계, 새로운 노력과 수고, 그리고 새로운 인내를 요구합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종자나 뿌리가 잘못되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대로 들포도를 심고 참포도를 기다리는 농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혹시나 우리들에게 이 같은 미래가 있을까 걱정입니다. 참포도인 줄 잘못 알고 속아서 땀흘리며 수고하다가, 그 수고가 헛된 것임을 알고 슬퍼할 그 날이 나에게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제도나 방법이나 기술이 바뀌었다고 열매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확실한 은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이 있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절대란 절대로 없다. 참이란 참으로 없다" 또는 "믿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라고 슬픈 이야기를 합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자본, 기술, 노력, 정치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사실 인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입니다. 구약을 평생 연구한 신학자 폰 라드(von Rad)는 "구약은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즉 구약이란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를 계속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먼저 약속이 있느냐, 즉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사건이냐, 그리고 이것을 믿느냐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성취하는 문제입니다. 이 성취가 어느 때 어디서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믿습니다. 그 구원의 약속, 평강의 약속, 메시아 나라의 약속 등이 이루어질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루어지되 구체적으로 오늘입니까 내일입니까? 또는 여기입니까 저기입니까? 그리고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까, 아니면 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까?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불 신앙의 사람은 그 성취는 여기가 아니고 저기서 이루어질 것이며, 오늘이 아니라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이며,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성취란 언제나 여기서 나를 통하여 오늘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현재적 성취를 믿는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역사 의식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그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라가 튼튼히 설 수 있는 길도 이 약속의 성취에 있는 것입니다. 경영에 있지 않고 공의에 있으며, 능력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으며, 수고에 있지 아니하고 바른 자세에 있습니다. 화해와 단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직함에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은혜뿐이요, 확실한 은혜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뿐입니다.
본문에서 '헛된 일'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사 55 : 2). 수고도 좋고 희생도 좋지만 원칙적인 것이 잘못되었다면 이보다 더 큰 실수가 어디 있습니까?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원칙적으로 뿌리에서부터 잘못되었다면 허무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끔 성도들이 저의 건강을 염려하여 여러 가지 건강 비법에 대한 책을 갖다주십니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 펼쳐 보니 누구나 잘 아는 내용으로, '음식을 적당히 먹어라. 영양을 골고루 취하라. 적당한 운동을 하라'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정직하라'는 것이 첨가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건강을 지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 안에 기쁨으로 사는 사람만이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가슴이 복잡해져 신체 각 부분이 제대로 돌아가질 못합니다. 흔히 여성들은 예뻐지기 위해 자꾸 바르고 먹고 합니다만 사흘만 속상하게 되면 화장이 받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마음이 편해야 화장도 잘 되고 그래야 예쁘지 않겠습니까? 맛사지나 미용식이 결코 건강 비결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 안에서 감사하고 겸손하고 기뻐하면 자연히 건강해집니다. 교만하고 거짓말 잘하는 사람은 벌써 눈동자부터 흐리고 얼굴색이 다릅니다. 특별한 건강 비법이 다로 여기에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나라의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지나간 슬픈 역사들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요즘은 독재다, 부조리다 하고 부패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그 원인을 시원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폭력은 어디서 왔으며 부조리는 어디서 온 것인지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폭력과 부조리를 말한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폭력과 부조리보다 더 심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부정과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며 역사의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 이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무식해서 저지른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모르게 되었습니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십니다. 무식은 심판입니다. 다른 사람을 못살게 하면서 부정부패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집을 지어 놓고는 이젠 팔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무식해서입니다. 하루 세끼 먹고 간단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족합니다. 간편하게 살아야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미련 없이 갈 수 있지 않습니까? 권세가 무엇이며 돈이 무엇이고 출세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라고 한탄하면서, 이어서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이므로 알게 하고 깨닫게 해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을 모르고 철학이 없어서 욕심을 부려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고집이 나오고, 거짓을 일삼으면 교만하고 초조 불안하여 시행착오가 생깁니다. 또한 나약할 때에 오히려 폭력이 나옵니다. 부부 싸움 할 때에 큰 소리하는 쪽이 약자이며 지는 사람입니다. 약하고 자신이 없을 때에 오히려 목소리가 커지고 폭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없으니까 미래는 불확실해지고 행동은 거칠어 폭발하게 된단 말입니다. 폭력을 통해서 나라가 세워지고 폭력을 통해서 사회가 밝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막다른 길에 이르고 보니 자포자기하여 폭력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독재를 유발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독재만이 가장 강한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강력한 힘, 강력한 제도, 강력한 단결만이 최고의 힘이라고 믿고 있기에 독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가장 강한 힘은 진실에 있고 위대한 지혜는 겸손과 온유에 있습니다. 정직함이 온유를 만들고 소망이 인내를 만들며 그리고 확실한 믿음만이 지도력을 갖게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분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역사 의식이 있어서 참된 지도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본문은 "청종하라"고 가까이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자신의 수고는 다 포기하고 빈손으로 나와, 하나님의 공의(진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 루즈벨트 대통령이 어느 날 해군 참모총장에게 "당신의 정치 이념은 어떻소?"하고 물었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배를 몰고 나갈 때에 파도가 높이 올라가면 사자처럼 용감하게 파도를 향하여 도전합니다. 그러나 파도가 점점 더 높아지면 잠깐 기다리면서 배 안에 쥐가 있지 않나 하고 살핍니다. 쥐가 구멍을 뚫으면 큰일이므로 조용히 쥐를 잡습니다. 그리고도 파도가 멈추지 않고 더 거세게 높이 올라 속수무책이 되면, 즉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게 되면 결단을 하고 정의의 편을 택합니다"하고 대답했답니다. 큰 일을 한다고 해서 작은 진실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위대한 역사를 이룬다고 해서 오늘 내가 해야할 경건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수년 전에 미국의 대통령 후보였던 카터가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할 때에 그에 대한 기사가 여러 가지로 났었습니다. 그 중에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로, 그는 주일이면 선거 운동의 바쁜 일정을 멈추고 고향 조지아 주에 있는 자기네 교회로 돌아와서 주일학교 교사의 자리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가 23년 동안 가르쳐 오던 교회학교 교사직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왕이면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큰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선거 운동도 겸해서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차분하게 자기 교회로 돌아와서 20여 명 되는 작은 반의 교사직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가 20여 명을 앉혀 놓고 성경을 가르칠 때, 취재 기자들은 70여 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그는 조용히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나서 기자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여러분이 이 교회를 나왔습니다만 다음 주일부터는 각자 자기네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충고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주일을 거룩히 지킵니다. 바쁠수록 여유를 가지고 조용히 명상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삼일운동이라 생각됩니다.
한국의 민주주의 뿌리가 바로 삼일운동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신학도 바로 삼일운동에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애국과 신앙을 하나로 생각했고 나라를 위해 죽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하나로 생각해서 순국과 순교를 동일시했습니다. 또한 찬송과 애국가도 함께 불렀습니다. 그 당시 찬송가의 14장이 바로 애국가입니다. 즉 찬송가를 애국가로 부르고 애국가를 찬송가로 부르면서 나라를 위해 기도와 만세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일운동이 비참하게 끝나고 말자, 젊은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초조하게 술을 마시고 방탕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산 속으로 은둔하거나 북간도나 만주로 나가서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마적대나 도적으로 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또 한편으로는 진정으로 애국하는 길을 찾아서 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전도하고 가르치며, 부지런하게 일하며 정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확실한 은혜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청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도자와 백성들이 다같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작은 진실을 다시 물으며 공의롭게 설 때에,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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