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거저 주어라(마태복음 10장 1절~8절)

by 【고동엽】 2024. 3. 28.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거저 주어라(마태복음 10장 1절~8절)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리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구분한다면 인간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채권자형(債權者型)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단적으로 두 가지의 예를 들어봅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낳았으니 먹이는 것이 당연하고, 공부시키는 것이 당연하고, 일생을 살아갈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입니다. 요즈음에는 부모에게 '그렇지 못할 바에야 무엇 때문에 낳아서 고생시키느냐'고 대거리질하는 패륜아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직장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나의 수고에 대해 당연히 보수(報酬)가 따라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고마울 것도 기쁠 것도 도무지 없습니다. 오히려 수고에 대면 적게 받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관계에서 항상 자신을 채권자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독립형(獨立型)입니다. 고립주의자이지요. 내가 누구로부터 받을 것도, 내가 누구에게 줄 것도 없습니다. 너는 너요 나는 나입니다. 누구의 간섭이나 도움도 배제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심경이나 입장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왜 남의 비판을 받느냐'는 식으로 매사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도움을 받을 것도 줄 것도 없습니다. 교만하고 자신만만하며 이기적이고 반(反)사회적인 사람입니다. 사회야 어찌되든, 남이야 어떠하든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고집스런 사람입니다.
셋째, 윤리형(倫理型)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도덕을 중시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살면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무감이 마침내 자만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교만을 낳습니다. 내가 도와야 할 많은 사람이 있으며 나는 항상 돕는 자로서 그들 위에 군림합니다. 사회가 어두운 것은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만인에 대한 채무자(債務者)로서 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빚을 지고 있다. 부모형제나 스승은 물론, 하나님께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은 모두 다 남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내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남한테 돌려주어야 할 것들입니다. 이미 받은 것을 다 갚기에는 일생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항상 채무자의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뉴욕에서 살던 제 친구에 바로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뉴욕에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해엔가 제가 그 친구를 방문하였더니 참으로 잘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러웠던 것은 시간이 자유롭더라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무려 3개월의 휴가를 즐길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이 친구가 어느 날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귀국했습니다. 왜 그 좋은 조건을 다 버리고 귀국했느냐는 물음에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을 합디다. "나는 하나님께 너무나 많이 신세를 졌어. 그것을 갚지도 않은 채 편안히 살자니 마음이 괴로워." 그래서 청산하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얼마나 신세를 지고 있습니까? 주님의 축복이니 아니니 하는 차원을 떠나서 하나님께 신세진 것이라고 생각해보십시다. 참으로 엄청난 신세를 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 하나, 처음부터 내 것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소유하고 향유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서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는 어느 유형의 사람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느 쪽이 합리적이냐, 어느 쪽이 이상적이냐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선행을 베푸는 동기도 이와 유사한 네 가지 형태로 나뉩니다.
첫째는 저주받을 것이 두려워서 선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저주 의식이 생각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서 마지못해 선을 행하게 됩니다. 심판이 두려워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보상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 복을 받으려 하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은 선행에 대한 보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자식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라고 말씀합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은 자신도 후손도 복을 받게 되며,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의 구제에 대하여 하나님은 자손만대에 복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받을 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봉헌 기도를 당회장인 제가 드립니다마는, 가끔 다른 교회에 가보면 집사님들이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듣게 되는 경우에는 마음이 조금 묘해집니다. "하나님, 쓰고 남은 돈을 바쳤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을 주시옵소서." 쓰고 남은 푼돈을 바쳐놓고는 엄청나게도 오병이어의 축복을 요구합니다. 또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적은 돈을 바쳤습니다.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시옵소서"-참으로 넉살좋은 사람들입니다. 푼돈을 바쳐놓고는 복부터 내려달라고 조릅니다. 그것도 만 배를 바랍니다. 이러한 보상심리는 정말 버려야 합니다. 주시고 안 주시고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염려할 부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치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복을 기대하는 마음, 기복사상(祈福思想)은 벗어 던져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볼 때에도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세 번째 경우는 공로주의자(功勞主義者)입니다. 내 것을 준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공로를 쌓아가며, 적선을 하고, 자기의(自己義)를 내세웁니다. 특권적이요, 바리새적 생각이라 하겠습니다. 특별히 도덕적 향락주의에 침잠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찾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보다 처지가 나은 사람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쾌감을 얻습니다. 항상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고 주는 것을 즐깁니다. 우월감을 즐기는 것입니다.
네 번째 경우는 이미 받은 것을 주는 사람입니다. 은혜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은혜로 나눕니다. 마땅한 일일 뿐 자랑이 아닙니다. 괴테는 인생에 대하여 참으로 훌륭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훌륭한 일은 한평생을 바칠 수 있는 사업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면서도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다." 그렇습니다. 물질로든 정신으로든 말로든,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존귀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이나 존귀한 일로써 생을 살아가십니까?
한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심부름이나 잘한 일에 대해 어머니가 칭찬을 해주고 용돈을 주기도 했습니다마는 조금 크니까 자기의 수고에 대하여 어머니가 베풀어주는 보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는 어째서 제가 심부름한 것을 칭찬해주시지 않습니까? 제가 잘한 일을 알아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저는 몹시도 서운합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편지를 받아 본 어머니는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답장을 씁니다. '나도 너한테 섭섭한 것이 많다. 내가 열 달 동안 너를 뱃속에서 키웠고, 낳아서는 젖먹여 키웠으며, 학교 보내고 도시락 싸주느라고 애써왔다. 그런데 너는 한번도 알아주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공짜로 해주었던 것이다.' 답장을 읽자 아이는 어머니 앞에 잘못했노라고 사과를 하였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애당초 마음가짐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거저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거저'라는 말은 공짜요, 은혜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공로나 나의 의가 조금도 개입됨이 없이 받았다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의 그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종합해서 후대 사람들은 소위 '칼뱅의 5대 교리'라는 것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하고도 기초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이 다섯 마디에 칼뱅의 깊은 사상이 다 압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바, 첫째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둘째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셋째는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넷째는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다섯째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입니다. 한 가지씩 차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전적인 타락'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남보다야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일전에 크게 신문지상을 오르내렸던 '룸 살롱 살인 강도'가 잡혔습니다. 항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치를 떨며 그들을 욕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한번 차분하게 돌아보십시다. 나는 과연 그들과 다른 사람입니까? 그 사람들을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는 흔히 '나는 타락하고 불의한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겠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깊이 상고(詳考)해보면 볼수록, 전적으로 타락한 나의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문득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런 말이 내 입에서 나오다니!' 행동이 없었을 뿐이요, 어쩌면 기회가 없고 용기가 없었을 뿐, 우리가 마음속으로 살인을 한 적은 없습니까? 실제로 우리의 생각은 얼마나 악합니까? 참으로, 전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아는 것에서 우리의 모습이 바로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남보다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까? 내가 남보다 더 낫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입니까? 남보다 더 의롭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까? 아무 것으로 선택될 여지가 없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 그 뜻에 따라서 내가 나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한속죄'에 나를 포함시키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인 것입니다.
또한,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십니다. 나는 이런 은혜를 얼마나 자주 저버렸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얼마라 멀리 떠나려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심지어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도 얼마나 자주 못된 길로 치닫곤 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으로만, 교육으로만, 교훈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능력으로 화하여 강권적으로 나를 붙드십니다. 나로 나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절대적 은혜입니다.
강권적인 은혜요,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다시 이 모든 것을 종합해봅시다. '모든 것은 은혜이다. 은혜는 능력이다. 은혜는 권능이다. 그 은혜로 내가 존재할 뿐이다'-칼뱅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건대 생명이 은혜올시다. 구원이 은혜요, 믿음과 십자가와 복음이 은혜입니다. 또한 죄사함받은 것이 은혜요,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시시때때로 말씀을 주시는 것이 은혜요,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주시는 것이 다 은혜입니다. 농사를 짓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로지택(雨露之澤)의 은혜를 받습니다. 땅이 은혜로 주신 것이요, 건강과 지혜가 다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입니다. 또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총명을 은혜로 받습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난 것이 은혜요, 좋은 부모를 만나 좋은 교육적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 은혜입니다. 인간지사(人間之事)에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변변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갈릴리호수에서 고기나 잡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그야말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셔서 사도를 삼으십니다.
병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십니다. 말씀의 지혜를 주십니다. 말씀을 전파할 사역지(使役地)를 주십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용기를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6절)"-무조건적으로 받았으니 무조건 주어라, 불가항력적으로 받았으니 불가항력적으로 주어라, 이 얼마나 합당한 말씀입니까?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며, 사랑 받았으니 사랑하고, 그가 나를 위하여 죽었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받은 내가 사랑을 주는데 무슨 조건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데 무엇이 그리 대단합니까?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데 무슨 보상을 바랄 수 있습니까?
선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마는, 이 은혜를 바라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복받기 위해서 선행을 베푼다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로서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 사람한테서 답례나 인사를 바라는 마음, 이 모든 보상의 마음을 버리십시다. 답례나 보상은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해(理解)를 바라는 마음은 갖기 쉽습니다.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값비싼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명예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이 낙심을 가져옵니다.「탈무드」는 이에 대하여 재미있는 교훈을 줍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는 베푼 사람도 받은 사람도 모르게 하라.' 일리있는 교훈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베풀었다는 시혜의식(施惠意識)이나 내가 누구로부터 받았다는 수혜의식(受惠意識)이 없을 때에 참다운 선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언제 누구에게 주었다는 것을 깊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기회가 되면 '내가 이사람을 도와주었는데 이사람은 왜 나를 돕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섭섭해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선을 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받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내가 이사람에게 무슨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것 또한 올바른 선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준 자와 받은 자가 다 깨끗이 그것을 잊어버릴 때에 비로소 선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깊은 의미가 있는 교훈입니다. 선행에 대한 또하나의 히브리 격언이 있습니다. '선행에 대한 최대의 보수(報酬)는 한번 더 선을 행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선을 행할 때에 문제가 되는 또 한가지는 결과를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도움을 받고나서 이사람은 어떻게 될까? 자꾸 받기만 하다가 의존적인 사람이 되면 어떡하나?' 이런 것을 염려합니다. 이 선행은 직감적(直感的)입니다. 결국, 이같은 생각이 선한 일을 막습니다. 참다운 선행은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서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우월감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베푸는 자이다, 내가 주었다, 나는 도덕적으로 더 큰 자이다'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 선행은 의미를 상실합니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행 20:35). 주는 자가 되었다는 것, 주는 입장에 선 것, 줄 기회를 얻은 것-이것이 복입니다.
요한 웨슬리의 행위는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일생을 통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하여,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회에, 주어지는 기회대로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옥스퍼드에서 연간 30파운드의 사례를 받았을 때, 그는 절대생활비로 26파운드를 쓰고 2파운드를 남을 위해 썼습니다. 연간 120파운드의 수입을 얻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28파운드를 쓰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얼마를 벌든, 얼마가 생기든, 나의 절대적 필요를 제외한 모든 것을 다 남에게 베푸는 생애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는 물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끈질긴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는 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 은혜, 참 자유, 참 기쁨을 원하십니까? '오직 모든 것이 은혜'라는 그리스도 중심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오직 은혜를 생활화하십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깊이 간직하고 그러한 자세로 살아갈 때에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