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1:1-11
수난의 한 주간 예수님의 고난이 오늘부터 시작되어 금요일까지 계속됩니다.
기독교입장에서 보면 일년 중에서 가장 경건하고 엄숙한 주간에 해당됩니다. 기독교 역사는 적어도 금번 한 주간을 가장 경건하게 보내야 할 것을 강조하여 왔습니다.
경건하게 보내기 위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금식운동을 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하루에 한끼 씩 또는 금요일만이라도 금식을 강조하였습니다.
절제운동을 하였습니다. T.V를 보는 것을 절제하거나 신문을 보는 것도 절제하였습니다. 여행과 오락을 삼가 하기도 하였습니다.
경건운동을 하였습니다. 남다른 기도의 시간을 정하여 새벽이나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특별한 기도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거나 성경읽기와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주간으로도 드려졌습니다.
수난의 한 주간 중 첫날인 오늘은 종려주일이나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2천년 전 오늘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때 군중들은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가지를 꺽어들고 입으로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 외치며 열렬히 환영하며 환호하였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말씀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 가신 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것은 성공이나 축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땅히 대접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지만 대접받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육신의 영광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가지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려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마20:18절에는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아 가노니 인자가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며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절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 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위해 십자가를 향해 간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위해 십자가를 향해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길에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은 영광만 생각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길에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은 육신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주님 가신 길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주님 마음을 이해하는 제자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오직 영광만 있을 뿐입니다. 오른편 왼편을 욕심내던 저들, 주님이 주시겠다 했던 잔을 거부하거나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는 도무지 말씀이 말씀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가신 길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이제 시작 될 제자들의 배반 그리고 가야바, 빌라도 헤롯의 계속되어지는 불법재판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채찍질 그리고 십자가. 이 모든 것을 앞두고 주님은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먼저 겟세마네기도의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바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미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니 마땅히 가야 할 길인 줄 아시면서도 피하고 싶을 정도의 고난이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이런 단어들로 예수님의 고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채찍에 맞음으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때에도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입니다.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열 두 영 더 되는 천군 천사를 부릴 수 있는 분이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의 길이 하나님의 원하심이었고 주님이 마땅히 가셔야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진 고난 앞에서도 주님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심 이것이 전부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 가신 길은 모진 외로움의 길이었습니다. 사53:3절에서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자 되었으니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도다 하였습니다. 주님 가신 길은 이처럼 십자가의 길이자 외롭고 무거웠던 길이었습니다.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결국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주님 가신 길을 따르는 사명의 삶은 누가 이해해주고 응원해주어 가는 길이 아닙니다. 외롭고 무거운 길입니다. 그래 많이 외로울 수도 많이 힘들 수도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가신 길은 대속의 길이셨습니다. 사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였습니다. 주님 가신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주님이 흘린 눈물은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이었고 주님이 당하신 채찍의 아픔은 내가 겪어야 할 아픔이었습니다. 주님이 쏟으신 피는 내가 쏟아야 할 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착각은 무엇입니까? 사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셨던 주님의 걸음은 대속의 걸음이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적어도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내 앞에서 주님 자신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정말 사랑입니다. 나는 없어집니다.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여전히 나입니까
주님이 가신 길은 또 하나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루살렘입성은 죽음을 위한 입성이요 십자가를 위한 입성이요 그가 인류의 메시야인 왕임을 선포하는 입성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기 입성을 스스로 준비하십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에 오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두 제자에게 입성을 위한 준비를 시키십니다. 맞은 편 마을에 가면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한번도 다른 사람을 태워보지 낳은 새끼입니다. 웃기는 것 아닙니까 왜 하필 작은 자를 몰고 오라는 것인지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되신 분이 천한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길을 가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따라서 자기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을 때 화를 냅니다.
나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큰 차를 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차를 타지 못하면 자존심이 상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보다 큰 집에서 살아야 한다 합니다. 단칸방에서나 월세를 살면 큰 벌이라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도 나는 이 정도 대접받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크신 분이 작아지신 것입니다. 나귀를 탈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고 대속의 길이고 용서의 길이고 사랑의 길이기에 기쁨으로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매력은 작아지는데 있습니다.
얼마 전에 대전에 집회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KTX를 타고 대전 역에 내렸는데 입구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전화했던 부목사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이 커서 입구가 어느쪽이냐 했더니 동쪽방향으로 오라는데 얼마나 먼지 가방을 끌고 헤메고 갈려니 순간 화가 났습니다. 지금까지 집회를 가면 입구에 마중에 나오거나 가방을 들어주거나 꽃도 준비하여 환영해 준 적도 있는데 그런데 이번은 아닌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대접해 하며 생각하고 주자창에 갔더니 인사를 하는데 얼마나 밉덥지요? 그러나 첫 시간 집회를 인도하면서 얼마나 회개하였는지 모릅니다. 나 스스로도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 환대받는 것부터 시작하여 어느날에서부터인가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입성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준비하셨습니다.
왕이신 그분이 수백마리 군마의 행렬이 아니라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얼굴에 열등감이 젖어있었을까요? 패배감에 젖어 있었을까요? 대접받지 못한 억울함이 있었을까요? 오직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했고 우리를 향한 사랑이 중요했습니다. 사람은 정말 사랑하면 자존심을 버리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은 자기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자기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따라 감정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안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섬기느냐가 중요합니다. 정말 사랑하면 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요구는
주님가신 십자가의 길 먼저 걸으신 주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마16: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사명 곧 헌신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가운데 주님은 스스로 최고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주님 가신 길 앞에 주님은 먼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여인의 헌신에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물질적 가치로 따지면 3백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향유입니다.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기보다는 어쩌면 제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는 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막14:18절에 저가 힘을 다하며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합니다. 주님은 아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나귀 주인의 헌신을 받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한 마디에 헌신하는 나귀의 주인입니다. 주님의 구속사역에 동참합니다. 보지도 못하고 말씀만 듣고 행한 헌신입니다. 주님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에 구레네 사람 시몬의 혼신을 받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메고 가는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주님 가시는 십자가의 길에 동참한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헌신하였더니 자신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때나 아무나 헌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아무에게나 헌신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아무에게나 십자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누가 인정해 주어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의 길, 외로움의 길 마져도 오직 하나님의 원하심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안고 최고의 겸손으로 나를 향해 가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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