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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2,345편◑/종려주일 설교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다/이사야 53:1-5.

by 【고동엽】 2021. 10. 19.

이사야 53:1-5.

고난 주일입니다.
어떻게 고난 주일을 지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자세일가요?
너무나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나타나면 주변이 환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머니의 얼굴을 세상에서 그렇게 추할 수 없을 정도로 이그러져 있었습니다. 불에 타다남은 부지갱이같은 흉측한 얼굴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어머니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싫어서 그는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에게 어머니를 소개하여 준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도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락을 빠뜨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배고플 것을 걱정하여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로 갔습니다. 딸의 교실을 찾아 갔습니다. 도시락을 전해 줄 때 그 여학생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누구냐?>
이 여학생은 도시락을 받으면서 친구들에게 어머니 듣는 데서 말했습니다.
<우리 집 식모야>
그리고는 도시락을 빼앗듯이 가지고는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 온  여학생은 울며불며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왜 학교에 왔어요? 이제는 창피해서 학교 못 다니겠어요>
  그 때 어머니가 울고 있는 딸 옆에 앉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딸아! 엄마 얼굴이 이렇게 흉측하게 일그러진 사연이 있단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란다.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하시고 나는 집 바깥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원인 모를 불이 났었단다. 집안에는 어린아이인 너만 있었단다. 내가 불이 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방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미 집은 불덩어리였지. 그러나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 갔다.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말렸다. 소방수들도 네 생명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나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 갔지. 안방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너를 부둥켜안고 뛰쳐 나왔다. 나는 너를 안고 있기에 내 얼굴을 무엇으로 가릴 수가 없었다. 너만 꼭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한 화상을 얼굴에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생명을 건졌다. 그러나 얼굴은 이 모양이 되었다>
딸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 감격하여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흐느껴 울며 말했습니다.
<엄마. 용서해주세요. 제가 너무 잘못했어요>
  그 후 이 여학생은 얼굴이 일그러진 어머니를 누구에게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자랑하였습니다.
내가 당할 것을 어머니가 당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당할 것을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절)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절)

예수님의 고난은 다음과 같은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대속의 고난
예수님은 자신의 죄나 허물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4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절)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절)

가수 윤 복회는 이 말씀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윤 복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윤 복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윤 복회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윤 복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나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원한 나무밑에서 한 성인이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선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진정한 도가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그 때 배고픈 귀신인 아귀에게 쫓기던 불쌍한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품안으로 도망쳐 들어 왔습니다.성인은 그 비둘기를 품에 감싸고 내놓지 않았습니다.
<여보시요.그 비둘기는 내 밥이니 내어 주시요>
<나는 내 품으로 들어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비둘기를 네게 내어 줄 수가 없다>
<난 배가 고파 죽겠으니 내주시오. 나는 배가 고파서 미치겠습니다>
<나는 이 가련한 비둘기의 생명을 내팽개칠 수가 없다. 차라리 비둘기 무게만큼 내 살을 베어 주겠다>
성인은 양쪽에서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한 쪽에 비둘기를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저울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비둘기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습니다. 성인은 자신의 살점을 더 베어서 저울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비둘기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습니다. 성인은 벌떡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저울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서 저울이 평형을 이루었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서 아귀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며 꽃잎이 휘날렸습니다. 성인은 그제서야 도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려는 곳에 생명이 있음을 알았고 전적으로 헌신하는 곳에 성취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딸 대신에 어머니 얼굴이 망가졌습니다. 비둘기 대신에 성인의 살점을 잘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2. 자청의 고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초하셨습니다.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 데 사람들은 힘이 없어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4절)

요한 사도도 예수님의 고난은 스스로 당한 고난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은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신 분이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예수님은 자청하여 찔리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에 찔리셨습니다. 창에 찔리셨습니다. 채찍에 찔리셨습니다. 못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찔리셨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예수님은 온 몸이 고난으로 몹시 상하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으로 머리가 상하셨습니다. 채찍으로 온 몸이 상하셨습니다. 못이 박힘으로 손과 발이 상하셨습니다. 창으로 찌름으로 옆구리가 찢어져 가슴이 상하였습니다.
그가 상함은 바로 나의 죄악을 위함입니다. 죄악의 원어는 원죄입니다. 나의 자범죄와 원죄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징계를 받았습니다. 빌라도에게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가야바에게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로마 병정들에게 끌려가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자청한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약 3시간동안 채찍에 맞으시고 약 9시간동안 피가 흘렀습니다. 이는 우리 병을고쳐 주시려는 고난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3. 최대의 고난
에수님이 죄인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시시한 고난이 아닙니다. 작은 고난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최대의 고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질고, 간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라는 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모두 극심한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최대의 고난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어떤 악인들이라고 하더라도 40대 이상은 치지 못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칠 때에도 꼭 40에 하나 감한 매 즉 39대씩만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만은 채찍으로 칠 때에 수도 세지 않고 가혹하게 쳤습니다.
더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사하였을 때 죄가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도 정치가라 군중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의인이 죄수가 되었습니다. 성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강도짓 한번 하지 않으시고 강도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돈 한 푼도 없으신 분이 부자의 묘에 누우셨습니다.
최대의 의인이 최고의 악인 취급을 받으시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3가지 특징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대속의 고난, 자청의 고난, 최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신학자 켐벨 몰간은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다>라고 말했습니다. 신학자 델리취는 <이사야 53장은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력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좋아하는 데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밝게 살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어둠속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살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그만 사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위에 있기를 바라는 데 예수님을 친히 낮아 지셨습니다. 사람들은 앞서 가기를 원하는 데 예수님은 친히 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쌓아 놓으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모두 없애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런 고난을 받으셨는 데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받아야 할 고난은 무엇일가요?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남은 고난은 우리가 당하여야 할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남긴 고난은 무엇일가요? 우리가 채워야 할 고난은 무엇일가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고난을 받으시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며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이 모범을 보여 주시면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늘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외쳤습니다.
<나는 5분 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그는 칼을 하늘을 향하여 휘두르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5분내 이 칼로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요. 이 많은 사람앞에서 당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여 보시요>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1분, 2분.....5분이 지났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쟁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게는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칼을 휘둘러 대는 그에게 아무도 다가가지 못 하였습니다. 그 때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으로 다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긴장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다가가더니 휘두르는 칼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젊은이는 자기 아들을 가르켰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 이에게칼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이 잘못 할 때 이 칼을 들고 와서 5분 내에 죽여 달라면 죽이겠습니까?>
젊은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요? 할머니!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어요>
그 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십니다>

19세기 미국의 교육자 호라스만이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소년 감화원을 짓는 개원식에서 이런 연설을 하였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여기서 감화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된다면 이 건물을 세우는 데 든 예산과 인력은 조금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개원식이 끝나고 한 신사가 호라스만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한 말은 너무 과장된 말이 아닙니까?>
이 때 호라스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지나치다니요? 만일 그 아이가 당신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보십시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울과 같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는 수 십억원을 들여서 건물을 지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얼마 전 주간 신문에 박 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군이 결혼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동안 아무도 나에게 전도하는 이가 없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총에 맞아 비명에 갔습니다. 아버지마저도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비극적 최후는 그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술과 마약과 여자가 아니면 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깊어졌습니다.
지만군은 스스로 교회만이 수차례 들락 날락한 교도소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기대하고 스스로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얼굴이 확근될 정도였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영혼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군이 적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좀 지난 사건입니다.
온양온천에서 강의 부탁을 받고 아내와 함께 밤중에 차를 몰고 달렸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밤이었습니다.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천안에서 온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오른 편에 오트바이가 박살이 나 있었고 그 앞에 두 사람이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방금 난 사고였습니다. 비가 장대같이 내리니까 모든 차들은 달리기만 하였습니다. 나와 아내는 내려서 비를 다 맞고 두 사람을 뒷 의자에 실었습니다. 피를 많이 흘려서 혼수 상태였습니다. 의식을 완전히 잃어 버렸습니다. 온양에 가서 보이는 병원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급히 두 명을 응급실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가려고 하니까 병원에서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경찰도 달려 왔습니다.
<당신들이 이 사람을 치지 않았다고 증명될 때까지 기다리라>
기가 막혔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고를 내지 않았다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꼼짝없이 응급실을 떠나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이 사람들을 병원에 데려다 주지 않으면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 일을 내가 하였는 데 범인으로 몰린 것이었습니다.
한 밤중에 이 사람들이 의식이 들었습니다. 경찰이 물었습니다.
<무슨 차에 치었습니까?>
그들은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트럭이 치우고 도망쳤습니다>
나는 협의를 벗어나 풀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뒷 의자가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피비릿내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카센터에 가서 뒷 의자를 떼어내고 닦아내고 말리고 그 이튿날 온통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수 비용을 병원으로 달려가 받아 낼 수도 없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로 병원에 가보고 싶지도 않아서 거냥 올라 왔습니다.
<하나님만 아시겠지?>
그가 살아난 것은 그 사람은 몰라도 나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출처/강문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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