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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결단(누가복음 9 : 51~62)

by 【고동엽】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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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결단(누가복음 9 : 51~62)


우리 인간의 살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볼 때, 어느 한 때는 강할 때가 있고 어느 때는 약할 때가 있으며, 또한 용기가 있을 때가 있고 좌절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사람은 돈이나 권력이 있을 때는 강하고 용기가 있는 것 같으나 그렇지 못하면 약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항간에 쓰는 말 가운데 장사도 무일푼이면 무안색이란 말이 있습니다. 장사의 수중에도 돈이 없으면 안색이 변한다는 말입니다. 역시 돈은 상당한 힘을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돈이나 권력에 의해 얻어지는 힘이나 그에 의하여 평가된 용기를 진정한 힘과 용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용기와 힘은 돈이나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 즉 양심에 달려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한없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양심이 의로울 때, 즉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서 아무 꺼리낌 없이 떳떳할 때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힘과 용기의 근원이 되지만 거짓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질 때 사람은 약해집니다. 이기심은 자기 양심의 성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타적인 생각, 다시 말해서 남을 위하고자 할 때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 한 예로서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는 약하지만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로서는 강하다는 말입니다.
남을 위한다는 것은 곧 사랑이며 사랑처럼 강한 힘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은 알지 못할 때 약해집니다. 장래의 일에 대하여 확신이 없을 때 흔히 말하기를 자신 없다고 합니다. 모호하고 막연할 때 인간은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뚜렷한 결정이 없을 때 약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며 두 마음 혹은 세 마음이 되어 아무런 결정을 못할 때 약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어느 한 쪽으로 마음을 정하여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 때부터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한 마음. 단순한 마음. 여기에 힘이 있습니다. 힘은 언제나 직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기둥을 볼 때 굽은 기둥은 아무리 굵어도 쓸모가 없습니다. 비록 가는 기둥이라도 곧은 기둥이라야 힘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하나로 확실한 결정을 할 때 강한 힘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학적 입장이나 혹은 기독론적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원문이나 영어로는 예루살렘 쪽을 향해서 얼굴을 굳게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표현이며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결심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얼굴을 굳게 했다" 이것이 원어의 뜻입니다.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결심을 할 때 제자들이 알아볼 만큼 그 얼굴 표정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결단입니다. 거룩한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런 결단이 없는 십자가였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십자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연한 수고는 수고가 될 수 없고 마음의 결심과 사랑이 동반되지 아니한 희생은 하나의 행동에 불과한 것으로서 결코 희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미리 계획되고 준비되고 뜻이 결정되고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세계에 책임 결혼이라는 별로 좋지 않은 말이 있습니다. 사랑이 앞선 것이 아니라 젊은 정열에 먼저 행동이 앞선 것으로서 처음부터 빗나간 것입니다. 칼바르트는 사랑이 동반되지 않은 행위는 간음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하나되는 사랑의 결단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 후에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물리적 행위 동물적 행위가 앞서는 것은 진정한 결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의식이 없는 행위는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신병자가 어떤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본능일 뿐 의식적인 결단이 동반되지 않았습니다. 의식 없는 행위 또는 불가피적인 행동 이런 것들은 의미 없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며 인간의 행위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 사랑은 선택적이어야 하고 자원적이어야 하고 그리고 자유적인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불가피적인 상황에서 자유 의지 없이 결정되어지는 것은 정당하고 뜻 있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단을 하시고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간혹 어떤 이들이 외람된 말로서 예수께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잡혀서 서른 세살 아까운 나이에 죽게 되었다고 하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성경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벌써 여러 날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고 그리고 행위에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쫓겨서 도망가다가 잡힌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 무리들의 핍박과 그리고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모르고 하는 일에 간혹 용기가 있는 수가 있지만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입니다. 참 용기는 알고 그리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기약이란 timing입니다. 승천할 기약이 차 갔다라는 말은 그의 오신 목적 즉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그 날이 가까웠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행동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맺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들을 살피시면서 그 모든 예표와 상징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약과 일치되어 완성되도록 유월절 양 잡는 날을 택하여 바로 그 날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형편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 시간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약의 시간이라는 것을 아시고 굳게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하시려고 하는 일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민을 위한 대속물로서 십자가를 지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20:28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오신 목적을 한 마디로 피력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속물이란 말은 영어로 ransom이라고 하는 말로서 대신 죽는 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에 있지 않고 섬기는데 있었고, 대속물로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데 있었습니다. 이제 그 목적에 합당한 시간 즉 하나님의 기약하신 시간을 택하여 결정을 하시고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여러 가지 계획을 많이 세웁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자꾸 미루다가 세월을 다 보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아프리카의 한 청년에게 장학금을 보내며 공부하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의 대답이 자기는 효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편지하기를 아버지의 연세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지금 40세라는 것입니다. 이 청년에게는 결국 공부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의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미루면서 그 어느 때에 가서 한번 해 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얼굴을 굳데 해야 할 때가 왔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제 거룩한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을 살펴보면 몽롱한 가운데서 그 무엇엔가 줄줄 끌려가며 단 한 번의 결정도 없이 정말 만성적 미결단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자기의 생은 하나도 없이 나약하고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피곤한 생을 살아야 하는지 이유가 있다면 첫째는 결단이 없는 생을 살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겸비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모든 근심의 바탕에는 자기 중심의 이기심이 깔려 있습니다. 항상 자기만을 위하려고 하는데서 근심과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하여 희생하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근심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간을 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결혼 문제라든가 걱정되는 일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이럴까? 저럴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제가 권하는 말은 한 가지 뿐입니다. 날짜를 정하여 그 때까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기로 하고 그 다음은 둘 중 하나를 택하여 결정을 한 다음에는 더 이상 뒤돌아보며 생각하지 않기로 하는 시한부 근심을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은 생을 살기 위하여 이러한 결단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날에는 형편 닿는 대로 기회주의적으로 살아왔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만은 결정을 내리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박연폭포가 있습니다. 그 폭포를 향하여 가는 길에 두 절벽이 마주보고 만나는 곳이 있는데 그 간격은 약 1미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1미터밖에 안되는 거리를 건너뛰는 사람이 몇 사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지에서의 1미터라면 어린아이도 건너 뛸 수 있지만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를 바라보며 거기를 건너뛰자니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위를 결단의 바위라고 이름을 지었답니다. 밑을 바라보지 말고 평지라고 생각하며 앞에 있는 목표만 바라보고 결단을 내려서 뛰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1미터의 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사는 문제들이 모두 이런 것입니다. 문제는 결단이 없으므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생은 도피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로 결단하고 그리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기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 결단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과 상상할 수 없는 지혜와 놀라운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용기가 우리의 생을 승리로 이끌어 줄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 또한 남은 생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하며 바치기로 아주 희생해 버리기로 결단하십시다. 주의 은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 :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시던 그 시간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애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게도 이같은 결심을 주시어서 이제 남은 생애만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과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된 미래를 소망하여 주께서 주신 용기로써 영광과 승리가 있는 결단의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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