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개혁자의 힘(사도행전 4장 13~22절)110

by 【고동엽】 2024. 3. 28.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개혁자의 힘(사도행전 4장 13~22절)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세나 되었더라.


신교를 가리켜서 신교(新敎) 또는 개신교(改新敎) 혹은 개혁교회(改革敎會)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Reformed Church라고도 하지만 대개Protestant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Protestant란 Protest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즉 반항, 항거, 대항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그릇된 교리에 항거하여 나옴으로서 "반항자들"이라고 처음에는 좋지 못한 이름으로 불려진 이름이 그후로는 좋은 이름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항거란 곧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묘지는 언제나 고요하며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곳에는 계속 변화가 있고 진통이 있고 그리고 말이 있고 계속되는 항거가 있는 것입니다.
반항이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인간적인 공로에 항거하여 "오직 믿음으로"라고 외쳤고, 종교적 특권을 반대하고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직접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부르짖었으며, 교회의 전통이나 낡은 유전과 권위 의식에 대하여 정면으로
오직 성서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이를 신앙과 행위의 기초로 삼은 것입니다. 당시 생사권을 가지고 행사하던 권력의 중심인 교황청을 향하여 이처럼 항거한다는 것은 놀라운 위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개혁자들은 불의에 대항하며 부정을 반대하고 인간적인 거짓과 위선에 항거하며 우상에 반대하고서 오직 하나님과 진리와 의만을 긍정하였던 것입니다.
그 위대한 반항의 힘은 어디서 온 것이었던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힘을 믿었기에 이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가? 그 힘의 근원을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Ⅰ. 먼저는 철저한 믿음에서 나온 힘이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와 그들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그처럼 거짓과 불의를 항거함에 있어서 목숨까지 바쳐가며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어떤 돈의 힘이나 무력의 힘이나 권력의 힘을 의지하였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 안에서 그처럼 힘있게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으며 그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는 자기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있는 자아의식을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또한 그러한 사람들을 봅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다혈질의 성격을 소유해서 그러하였는지 모르나 매우 나약하고 한편 비겁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죽겠다고 장담하던 그가 예수께서 재판 받으실 때는 재판정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쪼이다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으며 실상은 맹세코 부인하였으며 심지어는 저주까지 하였던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공회에 끌려가서 무수한 매를 맞고서도 담대히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너희가 판단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자기가 서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믿음이 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은 자의 용기는 거짓된 것이요, 그 지혜는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이 확실할 때 그 신앙에서 무한한 용기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개혁자들은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보장이 되신다고 믿었으며, 동시에 자기들이 하나님에 확실히 서 있으며 그들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를 때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서 있다고 확신한다면 여기서 무서운 힘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것은 아집이며 고집이고 또 독선이요, 독단적인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확실한 믿음이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Ⅱ. 둘째는 자유의 힘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마틴․루터는 구원을 해방이요, 자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은 죄와 사망과 사탄과 율법과 진노에서부터 해방되며 자유 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구원받은 자 곧 자유인만이 위대한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종된 자는 힘이 없습니다. 종된 자는 비능률적이요, 비창의 적이며, 아무 일에도 무능하고 무지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의 긍지와 인격의 독립을 가지고서야 비로소 창의와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증거 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그런즉 죄를 지어서 양심의 가책에 눌려 사는 사람은 아무 힘도 없는 것입니다. 부정과 불의와 거짓에 쌓여서 "이래서는 안되지"라고 스스로의 가책에 매이면서 짐짓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비겁하며 나약할 수밖에 없고 또 어리석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는 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장에서 놓인 새가 하늘을 치솟아 날듯이 죄에서 구속받아서 자유인이 된 감격과 기쁨에서 그 자유가 주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죄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던 자들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그 안에 속죄 받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서 그 감격으로 힘있게 산 것이었습니다.
죄사함을 얻은 확신과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그 깊은 사랑만을 믿는 신앙에서 그들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유란 곧 의를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힘입고 그 안에 의인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즉 의인의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죄인은 용기도 지혜도 없는 것입니다. 죄인의 용기는 헛것이며 불의한 자의 지혜란 거짓된 것이고 간사한 것뿐입니다. 오직 의인만이 그 의로 인한 창조적인 지혜와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힘보다 무서운 것이 없고 의보다 강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와 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의 힘이었다고 봅니다.


사실상 이기적인 노력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기심은 인간의 본래적인 능력과 그 힘의 근원을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할 때 가장 비겁해지고 초라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와 사회와 국가를 위한다고 할 때에는 무서운 힘이 용솟음치게 마련입니다. 여자는 약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육체로서의 여인은 확실히 약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불타서 자녀들을 위하는 어머니로서의 여인은 매우 강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만을 위할 때는 자기의 양심도 그를 후원하지 아니하며 이웃도 그리고 하나님도 그를 성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비겁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 그 누구를 위함은 그 대상 때문에 때로는 무척 피곤해지며 실망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확실한 긍지를 가지게 될 때 인간은 최대의 능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의 슬로건, 즉 그들의 목표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을 살면서 바로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고 확실히 믿고 일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주변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이 많고 또 하나님을 등지며 원수 되는 일들도 많고 혹은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분명치 못한 일들이 있는데 이런 일을 막연히 그대로 따라가며 살게 됩니다. 이 일은 피곤하며 만사에 좌절과 공포가 따르며 무력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러한 일을 내가 하고 있다면 그는 무서운 용기와 담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확실하다면 어찌 그 죽음인들 슬퍼하며 또 주저하겠습니까?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이 분명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으며 그들의 수고와 희생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명확하게 알고 또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추호의 주저함도 없는 용기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저 베드로의 반항적인 용기는 돈 때문도 그의 지식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믿음에서 그처럼 용기 있는 항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웜스회에 끌려가면서 말리는 친구에게 "웜스 회의장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아도 나는 가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목숨이 걸린 재판장에서 "오------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라고 외마디 기도를 올렸던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개혁자는 내편에 서 계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그 안에서 진리와 의가 주는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으로 살 때에 모든 불의와 거짓을 항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개혁자의 믿음을 이어 받아서 오늘과 이 시대를 승리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