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내가 실상을 안다(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

by 【고동엽】 2023. 2. 16.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내가 실상을 안다(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인구 11억으로 알려진 공산주의 나라 중국------죽(竹)의 장막이라 불릴 정도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오랫동안 단절되고 폐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다소 복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는 현실 여건상 두 종류의 교회가 공존합니다. 공인교회와 지하교회가 그것입니다. 공인교회는 정부가 인정하는 교회입니다. 건물도 있고 목사도 있으며,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습니다.
반면, 지하교회는 어느 가정집 골방 혹은 바위산 속에서 여기저기비밀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물론 건물도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이 지하교회들 가운데에는 교인이 무려 삼백 명씩이나 모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 전체의 통계로 보면 대부분이 지하교회요,공인교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공인교회에는 불성문(不成文) 금령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 금령이란 이런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을 하지 말 것, 둘째는 교회의머리는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말 것------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라고 말하지 말라, 교회의 머리는 공산당이라고 가르치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요한계시록을 본문으로 설교하지 말 것, 다시 말하면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주제로 설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인교회가 이같은 제지를 받으므로 지하교회에서는 자연히 그 금지된 세 가지 주제를 주로 설교합니다. 지하교회 교인들은 주님이다시 오신다는 메시지를 열렬히 사모하고 경청합니다. 그래서 저의 설교를 방송으로 듣고 써보낸 그들의 편지를 보면 서두가 모두 한결같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워 온 이 때에……' 편지마다 하나같이 종말의 때를 강조합니다. 이 지하교회에서는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복음의 중심으로 하여 교회를 확장시켜 가며,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요한계시록을 본문으로 택한 것은, 종말론적인 메시지가 교회의 중심이요 복음의 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종말론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일곱 교회는 시대를 초월한 모든 교회의 대표라고 볼 수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교회를 성격적으로 분류할때 그 일곱 교회로 대별(大別)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교회는 가장 특징 있는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를 향해 주신 메시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교회마다 칭찬 들은 일도 있고 책망 들은 일도 있습니다. 칭찬 들을만한 일도 있고 책망 받을 만한 일도 있습니다. 잘한 일도 있고잘못된 일도 있습니다. 장려해야 할 일도 있고 개선해야 할 일도있습니다.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들 교회를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서머나교회만은 책망받은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서머나교회는 모든교회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훌륭한 교회였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서머나는 에베소 다음가는 큰 도시였으며, 오늘날도 소아시아와 에게해 주변 지역에서 가장 큰 상업도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즈미르(Izmir)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구 20만이 넘습니다. 그중 삼분의 일 이상이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서머나는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또한 서머나라는이름 자체도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어원이 '몰약(沒藥)'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서머나교회가 지금 큰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전쟁이나 재난이나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겪는 환난------첫째는 핍박과 고문과 처형입니다. 끌려가서 매맞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다 죽는 것입니다. 둘째는 재산의 몰수와 추방,그리고 유리(流離) 방황입니다. 셋째, 모든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일가 친척까지도 많은 고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교회가 겪는 당시의 환난이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재산을 빼앗겨야 했고 매를 맞아야 했고 추방당해야 했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가난해져야 했습니다. 소유를 다 빼앗기고 아주 어려운 고난을 치렀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백 년, 이백년 계속되는 고난이었습니다. 서머나교회 교인들은 그러한 환난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러한 환난 속에서 믿음을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간혹 절망할 수밖에 없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험을 견뎌나가야 했습니다. 재산도 명예도 평화도 건강도 없었습니다. 곧잘 말하는 대로 예수님 믿어서 복받는다, 잘산다 하는 이야기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가난해야 했고 매맞아야 했고 쫓겨나야 했고 죽어야했습니다. 이것이 서머나교회의 당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욱 어려운 문제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난받는 사람한테는 공통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비록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내 진실을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내가 정직하다는 것만은 알아주겠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내의(義)만은 알아주겠지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이것만 있어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당하는 고통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배고픈 고통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고 합니다. 사람 앞이나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고 하는 것---이것이 가장 큰 아픔이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더러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 해도 그것이 명예롭고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고통이라면 그래서 누군가가 내 고통을 이해하고 내 진실을 믿어 주기만 한다면 그런 고통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는 고통에 있습니다. 외롭고, 때로는 부끄럽기까지 한 고통------이것이 가장 어려운 고통인 것입니다.
2차대전 말기의 이야기입니다. 온 세계를 제 손에 넣겠다고 광분하는 히틀러의 만행을 보고 복음주의자 본 회퍼 목사는 가만히 참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히틀러에 대항하여 그를 죽여 버리겠다고까지 결심합니다. 그러다가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당합니다. 컴컴한 감옥 속에 갇혀 처형 날짜를 기다립니다. 본 회퍼가 감옥에 있는 동안 쓴 편지는「옥중 서신」이라고 하여 아주 유명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글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내가 고통당하는 것, 내가 매맞는 것, 내가 죽는 것---이것은 그리 심한 고통이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감옥에서 의로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왜 바깥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는가------한마디로 말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데모라도 좀 해 주어야 내가 힘이 날 텐데, 어쩌면 이리도 조용하냐는 것입니다. 왜 의롭고 정당한 외침에 성원하는 사람이 없느냐, 왜 동조자가 없느냐, 왜 뜻을 같이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느냐! 여기에 본회퍼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에도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이는 대로 거짓된 자들의 행세가 있었습니다. 거짓유대인들이 득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는 이 위선자들로 온 세계가 다스려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칭 유대인---그러나 실상은 사단의 회입니다. 악인의 형통, 불법자의 만행---바로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지금 여러분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습니까? 오늘이라도 집에 가다가 돈 쓸 일이 생긴다면 새 돈과 헌 돈 중에 어느 쪽을 내놓으시겠습니까? 사실, 같은 돈이라 해도 우리는 헌 돈을 보관하고 새 돈을 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만 며칠만이라도 새 돈을 더 오래 가지고 있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헌 돈을 내놓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이 일반적인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새 돈보다 헌 돈이 더 많이 돌아다니듯 사람도 주로 헌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이러이러한 사람, 그렇게 훌륭하고 깨끗한 사람이 정치도 하고 큰일에도 나서주었으면 좋겠다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런 사람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사람, 바로 헌 사람들이 밖에 나서서 무엇을 해보겠다고 설칩니다. 이것이 참으로 못마땅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싶을 때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줄곧 말씀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라. 그것은 잠시 후에 없어질 안개와 같다.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합니다. 의인의 고난에 대한 불만과 불의한 자의 득세에 대한 원망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혼미합니다. 모순투성이 입니다. 때로는 무질서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내가 실상을 안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알고있다는 말씀입니다. 서머나교회가 당하는 고난, 그리고 서머나교회의 진실한 행위, 애정, 충성, 그 중심을 아십니다. 서머나교회에 닥친 환난이 무엇인지 아시며, 그 궁핍도, 가난도, 원수가 누구인 것도 아십니다. 그 대적들이 서머나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어떻게 괴롭히고 있는지, 그 잔인한 수법도 알고 계십니다. 여기에 또하나 알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의 배후에 있는 실상---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서머나교회의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금보다 귀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서머나교회가 그처럼 소중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고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믿음 위에 약속이 있고, 믿음 위에 영원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른 것 없어도 소중한 믿음이 있는고로 너희는 가난하지 않다, 너희는 고독하지 않다, 너희는 불행하지 않다, 너희가 부자인 것을 내가 알고 있다------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을 위하여 순교한 순교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을 순교사(殉敎史)라고 합니다. 이 순교사의 금자탑이라 할 만큼 두드러진 인물은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캅(Polycarp)입니다. 그는 2세기 초중엽 서머나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던 감독인데, 그의 장엄한 순교는 모든 사람 중에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86세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기에 믿는 사람들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를 존경했습니다.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폴리캅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형 집행인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감독이여, 나는 당신이 이렇게 나이 많은 노인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원치 않소. 그러니 거짓으로라도 제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해주시오. 그러면 당신을 놓아 줄 테니 다른 지방에 가서 예수를 믿든지 전도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때에 폴리캅은 대답했습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겨 왔습니다. 그분은 내게 아무런 잘못도 없고 거짓말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분,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한마디의 거짓말도 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교회를 위하여 두 시간 동안큰 소리로 기도한 뒤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담대한 죽음입니까? 당시 온 교회가 그의 순교를 애도했음은 물론, 지금도 유럽에서는 해마다 폴리캅의 순교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서머나교회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믿음이 있는데 무엇이 가난하고 무엇이 비참합니까? 신령한 안목으로 볼 때에 서머나교회는 부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실상을 아노니 너희는 부자라." 조금도 불행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실상은 '사단의 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유대인들 중에도 거짓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상을 아십니다. 그래서 저 거짓된 사람들은 사단의 무리라고 심판하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하는 말이 어떤 사람한테는 위로가 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줘도 좋습니다. 주님은 아시니까요. 그러나 회개치 아니한 죄, 숨겨놓은 악이 있는 사람은 온 세상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도 "주님은 아십니다" 할 때에 마음이 괴롭습니다.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위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페루의 어느 지방에 가톨릭 교회가 있는데 이곳에 신부님들이 여러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가톨릭에는 고해 성사(告解聖事)라는것이 있어서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모든 비밀스러운 죄를 신부님한테 고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톨릭 교회에 있는 한 신부는 다른 동료 신부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자기한테는 고해 성사하러 오는 신도들이 많지 않은데 저 신부한테는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쪽 신부는 그것이 몹시 못마땅하고 질투가 났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많은 신도들이 찾아가서 고해하기 좋아하는 그 신부는 귀머거리였다는 것입니다. 죄는 고하고 싶지만 신부라도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귀머거리 신부한테 찾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진실, 여러분의 그 실상은 누가 압니까? 자식이 압니까? 남편이, 혹은 아내가 압니까? 누구한테 여러분의 진심이 통합니까? 내 진실은 그리스도만이 아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실상을 안다." 네 진실도, 네가 고난 당하는 것도, 네 마음도 내가 다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기쁩니다. 우리가 안심을 합니다. 이것이 용기요, 지혜요, 능력입니다. 역사가 심판한다---이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역사가 심판을? 글쎄올시다. 역사적인 사실도 해마다 수정을 합니다. 만인 앞에 공표된 사실도 훗날 모순이 발견되고 불완전한 구석이 드러납니다. 그런 역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엇을 바로 판단하겠다는 것입니까? 실상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안심합니다. 모두가 몰라줘도 주님이 아시기에 기쁘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부요한 자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아시기에 이제 나는 부요합니다. 나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초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의 부함을 인정할 줄 아는신령한 종말론적 가치관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주님이 아시기에 어떤 환난, 어떤 오해가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것은 매우 깊고 귀한 말씀입니다. "충성"의헬라어 '피스티스'에는 '진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맥에 따라 정리해 보면 첫째, 진리에서 출발하는 순수한동기가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생각하는 깨끗한 진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 동기가 불순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매사에 신앙으로 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독일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한 분 있었습니다. 가족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혼자 지내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외롭고 고독한 중에도 언제나 경건한 생활에 힘썼습니다. 이를테면 길을 걸을 때에 좋은 길을 놔두고 꼭 걷기 어려운 길만 골라서 갑니다.
주님과 함께 걷기 때문에 좋은 길을 주님께 양보해 드리느라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늘 혼자 식사하면서도 꼭 자기 자리 옆에 제일 좋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앞에 제일 좋은 식기들을 늘어놓습니다. 주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는 침대 머리맡에 빈 의자를 놓아두었습니다. 그 의자에 주님이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고 그분과 이야기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노인의 장례식 때 하관을 하는데, 하늘로서 이상한 빛이 환하게 비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충성입니다. 한순간도 주님에게서 떠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신다, 주님이 보신다, 주님이 들으신다, 주님이 아신다---이 마음으로 충분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마음이 최고의 행복이요, 최고의 의지요, 최고의 지혜요, 최고의 능력입니다. 바로 이것이 충성입니다. 셋째, 그 중심을 가지고 성실한 생활을 하는 것---그 마음으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범사에 살아가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끝까지 인내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주님이 아신다는 그 마음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그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 마음으로 인내합니다. 그리고 생명까지 바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첫째는 죽음에까지도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경제적인 손해, 명예 훼손, 체면 깎이는 것 등등에 신경 쓰지 말고 죽음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죽는 지경까지도 '죽도록'입니다. 둘째, 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까지, 죽는 순간까지 깨끗이 충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실상을 아신다면 어서 건져 주시지 않고, 고쳐 주시지 않고, 면케 해주시지 않고, 어찌해서 죽도록 충성하라시는 것입니까? 본문을 우리말로 한번 옮겨 보겠습니다. "내가 네 실상을 다 안다. 그대로 죽어라. 죽도록 충성하다 똑바로 죽어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네게 주겠다." 이것이 종말론적 메시지입니다. 고난을 면케 해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누명을 벗겨주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 생명의 면류관---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믿음의 근거요, 용기요, 사랑입니다.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