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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입니까(출애굽기 3장 1절~12절)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제가 직접 차를 운전하고 다닌 지 한 20년이 됩니다. 기름을 넣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주유소에 가는데, 그 곳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저를 '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한 단계 승진해서 '회장님'이라고 하더군요. 하긴 아주 틀린 호칭은 아닙니다. '당회장'도 회장은 회장이니까요. 아무튼 그들이 저를 향하여 '사장님, 회장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언제쯤이나 그들이 저를 '목사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현대인을 무엇이라 특징지을 수 있느냐고 어느 칼럼니스트가 당대의 석학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현대인은 우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앞으로는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점점 무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은 자신에 대하여 무지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독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색이 필요합니다. 명상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인간됨을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아내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아니요, 남편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자식이 아무리 소중하다지만 내 생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자식을 위하여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내게는 나대로의 존재가, 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고독하게 될 존재요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독을 다스릴 줄도 알아야 하고,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조용히 명상할 줄도 알아야 하고, 내 존재의 의미를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무엇엔가 끌려 바삐 돌아다닙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연속극을 한번 보십시오. 주인공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경우, 사업에 실패했거나 실연을 당했을 경우, 작가들이 그리는 그 다음 모습은 어떠합니까? 열이면 열 포장마차에 쭈그리고 앉아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왜 조용히 혼자 앉아서 생각하는 인간을 그리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인간은 정말 없는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정체, 자기 존재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하여 부득불 비상조치를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사업에 실패합니다. 그렇게도 중요하던 사업이 망하고보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제야 '나는 과연 누구인가'하며 자기 정체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병들기도 합니다. 바쁘게 이리저리 쫓기며 다니다 덜커덕 병에 걸려 입원을 합니다.
입원실에 누워서야 난생처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바로 이 한마디의 질문을 받아내기 위하여 이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놀라운 경륜 속에서 일어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정체를 잃어 버려 가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깨우쳐 자기로, 본질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나 자신이 누구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깊이 생각하도록 경륜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바른 해답을 찾기까지는 사실상 바른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는 남자의 일생을 일곱 단계로 나누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살 때는 임금님과 같다. 모두가 자기만을 위해주고 기분을 맞춰주고 떠받들어주니까. 두 살 때는 돼지와 같다.
진흙탕에서도 아무 거리낌없이 뒹굴고 뛰어놀 수 있으니까. 열 살 때는 새끼양과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니까. 열여덟 살 때는 말과 같다. 다 성장하여 힘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니까. 결혼하고 나면 당나귀와 같아진다.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걸어가야 하니까. 중년이 되면 개와 같아진다.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호의도 구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노년이 되면 원숭이와 같아진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다시 어린아이같이 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 과연 일리가 있다 싶습니다.
여러분은 저마다 신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설명해주는 신분증에는 우선 내 이름이 있고, 생년월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속이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고작 그것입니다. 엄격히 따져보면 그 전부가 다 소속에 관한 것뿐입니다. 어느 집안 사람이냐, 어떤 직장에 다니고 있느냐, 이렇듯 소속에 의해서 나를 증명합니다. 그 이름 석 자마저도 한 자는 내 것이 아닌 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딴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사람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고「탈무드」는 말합니다. 하나는 나면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요, 그 둘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 특히 친구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죽은 뒤의 명성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이름 가운데 제일 소중한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뒤에 나를 어떤 사람이라 불러줄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회학자 미드(Mead, H. George)는 그의 저서「Mind, Self and Society」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I라고 하는 주격의 호칭과 Me라고 하는 목적격의 호칭이 있다. I는 충동적이고 비조직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방임된 인간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Me는 일반화한 존재로 타인과 공유화하고 조직화한 유형을 말한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I라고 하는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고집불통의 인간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Me의 문제에 전적으로 매달려 살기 때문에 주체의식이 없는 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 책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I로 시작해서 Me에 의하여 통제를 받는다. 그리고 자아라고 하는 I와 다른 사람으로부터 불림 받는 Me가 혼합되고 타협되면서 정체감(identity)을 찾아가는 것이다.'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도식적인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적인 자아가 있습니다.
이 Ideal Self와 Actual Self, 이상과 현실, 소원하는 바의 나와 실제적인 나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존의 자아가 다 소멸된 후에야 새로운 자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나(I), 남에게 평가받는 나(Me)도 아닌 전혀 다른, 아주 새로운 존재를 찾게 됩니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깨어지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쓸 수 있을 만한 존재가 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까? 그리고 나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부름 안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참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마는, 모세의 일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아주 다혈질의 사람으로 실수도 많았습니다. 특별히 그는 시내산에서 40주야를 하나님과 함께 하며 계시를 받는 엄청난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섬기는 것을 보자 욱하는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여 그만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돌 판을 내던져 깨뜨립니다. 모세는 이렇듯 실수가 많은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 이르면 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돌 판은 내려놓고 다른 돌을 던질 것이지. 그만한 시간도, 그만한 자제력도 없었단 말인가'하고. 이렇듯 모세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물불 안 가리는 사람입니다. 결코 별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손에서 귀한 존재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에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는 그 음성에 진실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맡기시는 순간, 모세는 이렇게 고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리이까?"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바로는 애굽의 라암세스 2세입니다. 모세는 그의 밑에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고의 영광을 누리면서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모세는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친어머니에게서 유아교육과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적 정체감을 가지게 됩니다. 엘리트의식을 가진 다혈질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역(苦役)과 어떤 애굽사람이 이스라엘사람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 애굽사람을 때려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그는 민족적 의분으로 이런 일을 했으면서도 그것을 당당하게 내세우지 못하고 미디안광야로 도망가서 은둔생활을 합니다. 애굽에서 왕자같이 살던 사람이 이제는 작렬하는 태양볕 아래서 냄새나는 양떼의 뒷바라지를 하며 모진 고생을 합니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40년을 자기 양이 아닌 처가의 양을 돌보면서 지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80세입니다. 이제 더는 자기 존재도 없고 민족의식도 없습니다. 꿈도 환상도 다 내버린, 실패와 좌절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간 너무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에, 이제 더는 용기도 의지도 없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저는 가끔 권투시합 중계를 봅니다. 권투시합 자체에 흥미가 있어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에는 상관없이 저는 권투시합 중계하는 프로를 보면서 그 해설자의 말을 자세히 귀담아 듣습니다. 때때로 참 좋은 이야기가 그 속에 있습니다. 언젠가도 보니까 기량이 상당히 뛰어난 한 선수가 나와서는 자꾸 물러서기만 하고 그러다가 얻어맞고 하며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해설자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 선수 몇 달 전에 한번 잘못 맞아서 K0패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실패의 경험을 빨리 잊어버려야 하는데, 거기에 매여 있기 때문에 저렇듯 비겁해져서 경기를 바로 치를 수 없는 것입니다. 링에 올라갔을 때,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이나 승리했던 경험은 모두 싹 잊어버려야 합니다. 링에 올라가서 며칠 전에 매맞은 경험, K0패 당한 경험을 떠올린다면 그는 당당한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 실패의 쓰라린 경험에 매여 있는 사람은 결코 추진력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과거의 그 실패를 한시바삐 잊어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 자신으로서는 절대로 잊어버릴 수가 없는 엄청난 실패의 경험이었기에 이렇듯 나약해지고 만 것입니다. 바로 그 시각,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 그는 전혀 다른 인간으로 거듭 태어납니다. 과거의 자기 자신을 잊어버립니다. 자기의 능력도 과거도 경험도 지식도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 앞에 충실히 응답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하여 나간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누구입니까?"하고 여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묻지 마라. 내가 너를 불렀느니라. 지금 나는 너를 필요로 하고 있느니라"라고. 그 순간 모세는 그 커다란 사명 안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재해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 태어난 지 석 달만에 갈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떠내려간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살며 많은 지식을 배우고 애굽의 문물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경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양성하시고자 했던 시간이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큰 잘못을 저지르고 광야로 도망가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진실해지는 이 경험도 결코 우연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 속에 있었던 일입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내 과거의 일도 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경륜 속에 있었음을 모세는 이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 모두가 소중한 과거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팀 라헤이가 쓴「성령과 체질」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울질의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사랑의 열매를 맺고, 담즙질의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충성의 열매를 맺고, 점액질의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화평의 열매를 맺고, 다혈질의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희락의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 건강해야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병든 사람도 당신의 사역에 쓰십니다.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키가 커야 되는 것도 아니요 작아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 현실 이대로, 내 과거 그대로가 다 하나님의 손에 있었던, 소중한 의미를 가진 사건들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소명 받은 사람의 자의식입니다.
폐결핵을 앓았던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세 번이나 수술을 받고, 무려 십 년 동안이나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마침내 병을 극복한 그 친구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병을 앓는 중에 굳어진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는 폐결핵환자와 같은 중환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는 어떤 의미를 가졌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패한 자에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건강합니까? 건강한 자에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지식이 있습니까? 지식이 있는 자에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없으면 없는 대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소중히 쓰임 받을 것입니다. 나의 과거까지도 주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일본의 평신도 지도자이자 사업가로 이름난 혼다 순베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주한 사업에 시달리다가 은퇴한 그는 너무 한가한 나머지 삶이 허무하다고까지 느낍니다. 할 일이 없으니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실망하게 됩니다. 어느 날 놀다가 지친 손자가 그의 무릎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낮잠을 자면서 잠꼬대를 하는데 들어보니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 이거 만들어주세요. 이거 도와주세요" 합니다. 그 때 그는 큰 충격을 받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저 아이에게는 내가 필요하다'라고. 그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손자의 잠꼬대를 듣고는 그제야 나는 아직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일어나서 엄청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나약함, 가난함, 실패, 성공…… 이 모두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순간, 하나님과 confrontation하는 순간에 모든 일들이 다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일을 가능케 하는 자는 당신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진실하게 응답하고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의 사명을 내리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무엇이라 합니까?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4:10)" 하며 뒤로 물러섭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말을 가르치리라(4:12)"하십니다.
동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심입니다. 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자기를 보지 않습니다. 이웃사람에 의해서 자기를 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만 자기를 봅니다. 나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나를 구속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봅니다. 주님께서 지불하신 값을 보고 자기를 봅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사역을 보고 나를 봅니다. 그러므로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묻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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