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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장 1절~12절)/곽선희

by 【고동엽】 202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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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장 1절~12절)


모세가 그 장인(丈人)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사람의 가치는 그의 용모나 그가 지니고 있는 재산과 지식의 정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어떤 일에 쓰임 받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된 값어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객관적인 평가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 누구를 위해 일하느냐, 무엇에 쓰임 받느냐 이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값어치가 평가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쓸모 있다면 어떠한 일에 쓸만합니까? 또한 여러분은 스스로를 남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필요하다면 얼마만큼 필요한 존재입니까? 만일에 쓸모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 왜 쓸모가 없는지, 과연 아무짝에도 필요치 않는 무용지물인지를 다시 한번 숙고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람을 먹고삽니다.
흔히들 잘먹고 잘입어서 행복한 줄로 착각합니다마는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면 행복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나의 행복이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내 가치를 인정해줄 때에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노처녀들은 걸핏하면 '죽겠다' '죽고 싶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해서 어린아이를 낳아놓으면 그런 소리는 온데간데없어집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 50억이라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지만 그 어린아이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다시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못합니다. 누구든 한 사람이라도 진정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 눈에는 내가 불필요한 존재로 보일는지 몰라도 이런 내가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을 찾지 못해 문제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 순간, 내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 시간에도 나를 꼭 필요한 존재로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내가 없어서 안될 존재입니다. 지금 이 시점, 내가 하나님 당신께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이 땅에 두신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나 우연으로 내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필요한 존재요 여기에 이만큼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 삶의 의지를 굳건히 가질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행복을 맛보고 존재의 가치도 느끼게 됩니다.
아시는 대로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사자요, 이스라엘의 영도자입니다. 크게 쓰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름을 받았던 당시에는 말할 수 없이 처량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세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모세는 살인자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체포될 것이 두려워 도망 다니던 사람입니다. 마음놓고 사람을 만날 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를 헤매는 방랑자가 됩니다. 이름 석자를 내놓을 수도 없고 심지어 자기의 자기 됨조차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은둔과 피신으로 이어지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심신은 늘 불안하고 불안정합니다.
둘째로, 모세는 처가살이하는 사람입니다. 처가살이가 반드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 국의 왕족이 전락하여 별 볼일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업도 없고 직업도 없습니다. 재산이라고는 쌀 한 톨이 없습니다. 그저 얻어먹기 위해서 아무 집에나 들어가 얹혀 살다가 마침 총각이 귀한 그곳의 그 집 딸과 혼인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한 뜻이 있어서 그 집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모세는 처갓집의 양을 치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의 존재가 무엇이고 나의 기업이 무엇이고 장차 나의 계획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 이러한 생각들조차 전혀 의미가 없어진 사람입니다.
처갓집 양을 이끌고 목장을 찾아 광야나 헤매는 '별 볼일 없는' 신세인 것입니다.
셋째로, 모세는 목자입니다. 목자로 40년을 살아와 어느덧 나이 여든이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생활에도 어느 정도 타성이 붙었습니다. 의욕도 욕망도 이상도 없습니다.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는 사이에 흐지부지 소망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나를 포기한 상태에서 그저 모진 목숨 하나 연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육체의 길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결정적 운명의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그러구러 살다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바로 그런 때입니다. "모세야, 모세야"---그러시고는 엄청난 사명을 맡기십니다. "내가 너로 하여금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게 하리라. 저 가나안땅으로 인도해내게 하리라." 깜짝 놀란 모세의 고백이 진실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 --- 하나님, 내가 누구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형편없는 인간이지 않습니까? 도망자가 아닙니까? 이 처량한 꼴로 40년을 썩어온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내가 언감 그런 일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이 너무 크고 위대한 것인데 나의 형편이 그런 일 하기에는 당치도 않게 초라하고 비참하다는 말입니다. 조금도 지나친 겸손이 아닙니다. 겸비도 아닙니다. 의식적인 자기 비하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진정의 고백입니다. 나는 보잘것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 바른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한 능력 앞에 진실하게 응답하는 모습입니다. 그의 약함과 구제 불능함과 비참한 모습을 액면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백성을 제발 구원케 해주세요'하고 일구월심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나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하게 해주세요, 지도자가 되게 해주세요, 이 백성을 구원하게 해주세요, 보람있는 생을 살게 해주세요 --- 이렇게 기도해서 급기야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주도하고 하나님께서 보상하셨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이 내세우는 중점 내용은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 하시고, 모세는 단지 그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모세가 고용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붙들리어 하나의 그릇으로 쓰임 받고 있을 뿐입니다. 실인즉 모세의 남은 인생은 부름 받은 그 순간부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버려졌던 과거, 잊혀졌던 옛일이 이제 새로운 의미를 띠고 떠오르게 됩니다. 부름 받는 그 순간에 그는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보십시오. 그가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해서입니다. 갈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지고 정처 없이 떠내려가다가 바로의 공주 앞에 닿고 그 눈에 띄어 마침내 40년 동안이나 애굽의 궁전에서 자라나지 않습니까? 그 모든 일이 결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곳에서 애굽의 모든 문물을 공부하게 되고 지도자로, 정치가로, 학자로 훈련받게 됩니다. 그러한 애굽의 궁전에 우연히 살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기 위하여 진작에 설정하신 소중한 과정이었습니다. 교과과정입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그는 광야로 내쫓깁니다. 양을 치는 목자가 됩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그야말로 죽어지고, 꺾이고, 찢기고, 코가 땅에 닿도록 낮아질 대로 낮아집니다. 완전히 자기를 버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제 모세는 양을 치는 목자로 양을 사랑하면서 양과 함께 살아갑니다. 중동 지역에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양을 쳐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 미련한 양을 치면서 많이 생각하고 인내와 지도력과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격언입니다. 긴 세월 그 40년, 어찌 우연이었다고 하겠습니까?
이윽고 모세는 부름을 받습니다. 세상에는 목자도 도망자도 많겠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지금 그가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바로 그 순간에 비로소 새로운 의미가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세 가지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어디까지나 명령입니다. 이어 세 가지의 약속도 하십니다. 먼저 세 가지의 명령이 무엇이었는지를 봅시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첫 번째 명령입니다. 이는 무장 해제와 같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귀한 분을 만날 때에는 여간해서 모자를 쓰지 않습니다 마는 쓰고 있었다 해도 벗는 것이 도리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사람들은 귀한 장소에 가면 신발을 벗습니다. 먼지가 심한 길을 다녀서 신발이 워낙 더럽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신발 벗는 것은 과거와의 절대 단절을 의미합니다. 과거와는 이제 관계를 끊는다는 말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별의별 생각을 다한 것 같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의 과거를 물었다면 그가 어찌 돌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돈은 얼마나 남겨 왔느냐?" 이렇게 물었다면 아마도 탕자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혀 묻지도 않았을 뿐더러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묻지 않으시는 과거를 내가 왜 묻습니까? 거기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과거와 얼마나 깨끗하게 단절할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미래를 향한 추진력의 바로미터(barometer)가 됩니다. 과거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면 영원히 거기에 묻히고 맙니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남을 볼 때나 나 자신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제주도에 가보면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니기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아무튼 신혼부부들로 와글와글하는데 참 재미있는 일이 많다고 합디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혼여행을 온 신부가 신랑이 잠깐 나간 사이에 옛 애인한테 전화를 하다가 신랑한테 그만 들키고 말았습니다. 한바탕 싸우고는 그 자리에서 헤어졌답니다. 여러분, 결혼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의 완전한 청산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애인이 10명이었건 20명이었건 그 시각으로 깨끗이 청산하여야 합니다. 결별하여야 합니다. 다시 연결이 되면 결혼생활은 끝입니다.
이와 같이 결혼이란 미래를 향한 약속인 동시에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과거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신발을 벗으라 --- 지난날의 성공을 가지고 무슨 큰일이나 한 듯이 교만해서도 안되며, 실패했다고 해서 오늘에까지 좌절하여 자포자기해서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의지, 애굽적인 생활을 완전히 끊어라, 실패와 비겁함과 체념과 실의, 불신앙을 다 끊어라, 특별히 이기적인 생각을 끊어라 --- 이것이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입니다. 지금 모세는 안일(安逸)에 빠져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 있습니다. 제발 나 좀 괴롭히지 말라, 이대로 살다 죽겠다 --- 그런 심경입니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병으로 여러 달 누워 있다보면 특별히 아이들의 경우, 병이 다 나았는데도 병상 생활에서 벗어나기 싫어합니다. 아프면 부모님들이 잘해주지 않습니까? 학교에 안가도 되고 잘못해도 매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갖은 응석을 다 받아줍니다. 그래서 다 나았는데도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기가 못내 서운합니다. 타성에 젖어 있어서 입니다. 미래는 누구에게나 모험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여든 노인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어디를 가고 어디를 옵니까? 이대로 가만히 둬주세요, 이대로 살다 죽으렵니다 ---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현재에 안주하려는 안일입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 그 모든 과거, 그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깨끗이 버리고 끊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그 다음 40년을 보면 간간이 옛 버릇이 불식간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실수하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발은 벗었는데도 완전히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참으로 아깝고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두 번째 명령은 '믿으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 ------ 확실히 믿으라고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믿으라는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이적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 많은 역경과 환난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사, 배신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을 믿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으라 ------ 모든 사건을 통해서 줄기차게 말씀하십니다. 열 가지 재앙을 왜 내리셨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왜 홍해를 건너가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분명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너는 나를 믿으라, 너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네게 하는 말을 믿으라, 내가 네게 주는 약속을 믿으라, 내가 네게 주는 명령을 믿으라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명령은 '가라'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모세는 많은 괴로움을 겪습니다. '가서 건져내라'하시니 '나는 빈손이오'하고 대답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믿겠습니까? 어디로 가란 말씀입니까?" 모세는 워낙이 눌변이었습니다. 변명을 합니다마는 속에 있는 말은 한마디도 할 줄 모릅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애굽에는 정녕 못 갑니다"라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럼에도 "그곳으로 가라" --- 일방적으로 분부하십니다. 엄청난 분부입니다. 순종하기 지난한 분부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야만 했습니다. 너에게 아무 능력도 없으나 내가 너와 함께 하니 가라 --- 절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명령하신 다음에도 그에게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을 아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는데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입도 유창하지 못합니다" "내가 어떻게 가라고 그러십니까?" --- 급기야는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십니다.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내가 가라면 가는 것이지 왜 그리도 몸을 사리느냐, 필요한 것은 내가 다 대줄 것이다 --- 하나님께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구나"하고 대안을 찾으시는 법은 없습니다. 모세를 찍으셨으면 끝까지 모세를 보내셔야 하는 분입니다. "가라!" 행동적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 생각으로 긍정하는 것, 감정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순종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충성된 노예와도 같이 종과도 같이 무조건 순종하라 하십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종취급 당하는 것에 자존심이 근지럽다면 종될 자격이 없습니다. 종한테는 '나의 감정'이 없습니다. 깨끗하게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가면서 기분이 좋다 나쁘다, 뭐가 어떻다 저떻다 하는 소리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알아주느니 못 알아주느니의 이야기가 종으로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에는 내 존재가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라" --- 온전한 순종, 절대 명령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얽힌 일화는 참 많습니다마는 그중 재미있는 일화 한 도막을 보겠습니다. 한번은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합니다.
부하들이 하나둘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저 끄트머리의 졸개 하나가 끝까지 혼자 남아 부상당한 알렉산더 대왕을 돕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으로서는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이 충성스러운 졸개한테 큰 보따리 하나를 짊어지게 하고 함께 도망을 갑니다. 무거운 짐을 메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넙니다. 한참을 가다가 대왕이 졸개보고 묻습니다. "그 보따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아는가?"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메고 가는가?" "뭐가 들어 있는지는 알아서 뭐합니까? 메고 가라시니 메고 가는 것이지요." 그 보따리 속에는 금덩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금덩이를 팔아 다시 군사를 모집하고 마침내 승리하여 큰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그 졸개를 높은 벼슬에 앉힙니다. 이 졸개처럼 되어야합니다. 지고 가라면 지고 갈 뿐이요 이것저것 물어서는 안됩니다. 절대 순종이 요구됩니다.
또한 약속하십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 첫 번째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사역할 것이니라' ----- 두 번째 약속입니다. 네가 하는 것이 다 내가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는고로 네가 하는 모든 일이 곧 내가 하는 일이다, 이렇게 믿고 나아가서 일하라, 라고 하십니다. 자상하게 깨우쳐주십니다. 네 손과 함께할 것이요, 네 지팡이와 함께할 것이요, 네 명예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너를 거스리는 자는 나를 거스리는 자요, 네게 순종하는 것은 내게 순종하는 것이며 너를 높이는 것은 나를 높이는 것이요, 너를 모독하면 나를 모독하는 것이니라 ----- 실제로 그렇지 않았습니까? 모세를 배반하고 비난하던 많은 사람이 죽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네 존재와 네 명예와 네 이름과 내가 함께 할 것이다 ----- 엄청난 말씀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일생을 바친 리빙스턴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학위를 받고 나서 많은 청년들을 앞에 놓고 강연합니다. 그는 사자에게 물려서 한쪽 팔을 잃었습니다. 빈 소맷자락만이 늘어져 덜렁거리는 그의 몰골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감동하고, 선망의 눈으로 그를 우러러봅니다. 그리고는 질문을 합니다. "사나운 맹수들과 야만인들 속에서 어떻게 그리도 귀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리빙스턴은 담대하게 대답합니다. 오직 하나뿐인 참 비결을 말해줍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20)" ----- 이 약속을 믿는 신앙뿐이라고 갈파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반드시 가나안땅까지 들어갈 것이다 ----- 나아가 약속의 신실함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건 이 백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이끌 것이다 ----- 절대적인 약속을 하십니다. 저 모세가 참으로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마는 그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를 쓰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캐나다 터론토에 있는 유명한「피플스 처치(People's Church)」에 오스왈드 제이 스미스(Oswald J. Smith)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교회는 세계에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기로 유명합니다.
이분은 늘상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 대해서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여기에 몇 가지의 조건을 붙입니다. 첫째는 목적이 하나만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 목적을 위해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셋째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어야 하며, 넷째는 기도의 승리에 체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다섯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섯째는 메시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일곱째는 믿음의 결정적 결과를 체험한 사람이어야 하며, 마지막 여덟째는 성령의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여덟 가지의 기준에 의거하여 선교사를 선별하고 파송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고용하여 당신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뜻을 위해서 부르십니다. 그에게 불리어 쓰임 받는다고 하는 자기존재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또한 내 과거도 나 자신도 내 형편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주시는 말씀에만 순종하고 그와 나와의 관계와 소명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에 내 생은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순수한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바른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통하여 오늘도 역사 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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