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날 계수하는 지혜(시편 90편 1절~12절)

by 【고동엽】 2023. 2. 22.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날 계수하는 지혜(시편 90편 1절~12절)

 

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예배 시간입니다. 앞에 있는 새해를 바라보면서, 지난 한 해를 깊이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반성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끝내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적어도 오늘만은 누구 때문이라고 핑계하거나 사회 여건 때문이었다고 변명하지 맙시다.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고 해서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며 혹시라도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은 형제가 없는가 성찰하면서 하나님 앞에 진실을 묻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된 것까지도 내 탓이 아닌가 하고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나 국가가 어지러운 것까지도 나 때문일 것이라고 반성의 폭을 넓힐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옛날 에스라 선지자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스 9:6)"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자기의 할 일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렇게 되었다고 책임을 느끼며 하나님께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백성들을 대신하여 자복하는 기도입니다.

어떤 일의 성공을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자본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며 경험과 노력도 있어야 하고, 겸하여 지도력도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협력도 얻어야 하고 사회적 여건도 그 일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여러 가지 기본 조건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얼마간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사람마다 자기 나이를 바로 세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나이에 꼭 알맞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귀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나이 많은 사람이 항상 젊었던 시절만 생각하고 나이 값을 못해도 걱정이고, 젊은이가 마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겉늙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젊은이는 역시 젊은이답게 패기와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자기 실력을 쌓는 일에 골몰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다 하겠다고 앞장서서 자기들만이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자기 나이에 알맞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지혜 중에서 첫째 되는 지혜는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를 아는 것이며, 셋째는 주어진 시간을 아는 것입니다. 현재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나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란 이미 지나간 시간으로, 더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 때문에 현재를 손해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나의 날을 바로 헤아릴 줄 안다는 것은 굉장한 지혜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 지혜를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몇 시간을 일하느냐에 따라 돈의 액수가 달라지고, 또한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으면 일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역시 시간은 돈입니다. 그런데 사실 시간은 돈보다 훨씬 더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돈은 저축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저축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재주가 좋고 과학이 발달해도 시간을 저축할 방법은 없습니다. 둘째, 돈은 은행에 넣어 두면 이자가 늘고, 또 돈이 돈을 불어나게 하지만 시간에는 이자가 없습니다. 일을 하든 아니하든 여전히 시간은 정해진 대로 흘러갈 뿐입니다.

셋째, 돈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은행에서 대출하여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엄정한 것으로, 사람이 거기에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즉 사람이 마음대로 시간을 요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좀 주십사고 부탁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부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귀히 쓰고 있는 시간 중에서 남을 위하여 내어준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나의 생명의 일부분을 그를 위해 떼어주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돈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란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시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이요, 또하나는 피조물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무엇으로부터 연유되지 않고, 또한 무엇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 영원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구가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시간은 온전하고 영원합니다. 내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있고, 내가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는 영원히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초월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시간의 특징은 그렇지 못합니다. 첫 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한해서 주신 단절된 시간입니다. 이것은 잘라진 시간으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마치 임신한 여자가 열 달이 되면 해산할 날짜가 가까워 옴을 아는 것처럼 우리는 적어도 제한된 한계를 짐작하고 있습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 중에서 팔십 년 후에도 살아 있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기에 젊은 분들이 있다 해도 80년 후에는 다 사라질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죽음을 향하여 야금야금 시간을 먹어가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옛말의 표현 중 "곶감 빼어먹는 것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곶감을 상자에 진열해서 보관하지만 옛날에는 막대기에 열두 개씩 깨워져 있어서, 하나씩 하나씩 빼어 먹다 보면 열두 개가 다 없어져 버립니다. 이처럼 우리의 시간이 시작과 끝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러분과 제 시간은 이미 시작이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끝입니다. 끝이 있음을 분명히 알자는 것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날을 계수함에 있어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단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단절로부터 구원받을 길은 결코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뒤바뀔 수 없습니다. 단지 시간은 질서 정연하게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한번 휘둘러 보겠다는 시도가 바로 타임머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이며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시간을 여행해 보고 싶은 누군가에 의해서 상상으로 과거로 거슬러가기도 하고 혹은 미지의 미래 세계로 가 봅니다마는, 아무튼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간의 단절에서 구원받을 길이 없는 존재입니다. 피조물의 시간의 두 번째 특징은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과거는 현재에 밀려나고, 현재는 미래에 의해 밀려나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항상 생성에서 소멸로 항하고 있단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 시작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들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단절된 시간, 변화하는 시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각자가 흐르는 시간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살거나 게으르게 살거나 간에 주어진 시간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에 가끔 엔진 오일을 바꾸어 줘야 함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오일은 자동차를 많이 탄 경우에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차를 타지 않았어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교환해야 됩니다. 엔진 오일이란 일단 뚜껑을 열어 놓으면 계속 변화하는 것처럼, 우리도 열심히 바쁘게 살든 아니든 나이 들고 늙어 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주어진 시간의 한계 안에서, 즉 단절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구원받는, 승화되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은혜의 시간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시간에 연결되는, 영원에 잇닿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이며 소멸되는 시간이 아니라 구원받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끝을 향하여 가는 단절된 시간이 아니라 점점 더 향상되며 영원으로 치닫는 시간을 살아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쓴 기도문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다가 죽었는데, 이 기도문을 언제 썼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마는 거의 생 끝 무렵에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리학적으로 120세 정도를 살아야 정상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동물의 수명은 각기 그들의 성장기의 5배라는 데에 근거한 이론이지요. 그러고보면, 사람의 성장기를 25세까지라 할 때에 5배를 하면 125세라는 수치(數値)가 나옵니다. 즉 120세 정도까지 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공해도 없고 자연 환경이 좋은 서(西) 러시아의 고원 지대나 북쪽에서는 120세가 넘도록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공해가 없고 은혜 가운데서 평화롭게만 산다면 120세까지는 거뜬히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지으셨습니다. 모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기구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의 지배하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 중에 남자가 태어나면 바로 죽여야 했습니다. 바로 이런 위험한 시간에 태어나서 모세는 부득이 나일강변에 버려졌다가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40년 동안을 살게 됩니다. 의미상으로는 나일 강에 버려질 때에 이미 모세는 죽었는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사건은 구원의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로써 덤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가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였으니 그도 죽어야 마땅합니다. 만약 그 때에 애굽 사람에게 잡혔으면 죽었습니다. 그는 도망을 해서 미디 안 광야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 역시 은혜의 생활입니다. 살 수 있을 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마땅한 그가 삽니다. 그리고 80세에 호렙산 기슭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40년을 삽니다. 이것 또한 전적으로 은혜가 아닙니까? 그래서 모세는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그의 일생을 뒤돌아보면서 몇 가지 깨달은 바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돌아가라, 즉 인생의 한계를 말합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시 90:3)"---120년을 살아보아도 한계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돌아가라 하시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땅은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으므로 티끌로 돌아가라 하시면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시간이 신속히 간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 10)." 또한 5절에 보면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라고 시간의 흐름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시간은 신속하게 날아가듯 흘러갑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스물 일곱 살에 부목사가 되어 젊은 목사라는 소리를 귀찮을 정도로 많이 듣고 심지어는 어린 목사라고까지 불러서, 어서 빨리 나이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할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게 된 지 오래됩니다. 얼마 전에는 저를 잘 모르는 목사님께서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다고 인사하시면서 노(老)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까? 어느 사이에 벌써 노목사가 되었구나 생각하니 세월이란 정말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사람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에 비추면 아무 것도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시간은 빨리 지나갑니다. 우리들의 지난 일 년 간을 뒤돌아보아도 올림픽이다 뭐다 하면서 북적거리다 보니 어느 사이에 일 년의 달력이 다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셋째,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고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모세가 자기 일생을 뒤돌아보니 자랑보다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더 많이 살아왔다고 간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에, 은혜롭고 감격스럽고 찬송하는 시간은 잠깐일 뿐, 죄짓고 진노로 매맞는 시간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40년 역사가 그랬었고 모세의 일생이 그랬습니다. 9절에 보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 하나님의 진노 속에 징계와 후회로써 평생을 다 보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주실 때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하면서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라고 주셨는데, 그렇게 보낸 시간은 극히 짧았고, 그릇되게 보내어서 매맞고 진노 속에서 더 많이 살았으니 대단히 죄송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 생각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 싶으나 벌써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결에 120세가 다 지나갔습니다. 모세는 정말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에도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점검해야 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지나간 일생도 뒤돌아보아야겠지만 우선 지난 일 년을 한번 뒤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지난 일 년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느냐 말입니다. 어쩌면 또 한번 주의 진노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한 시간과 기회를 주셨는데 얼마만큼 충실하게 보내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남은 날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도 많지만, 지난날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오늘 현재를 그르치거나 미래를 보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육체의 남은 때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고 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밤은 깊었고 아침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나의 시간에 대한 인식을 바로해야 합니다.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에게 주어질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제가 사랑하는 한 친구가 약 열흘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가 나오더니 저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매일같이 '어떤 연구를 할까? 무슨 논문을 쓸까?' 꿈도 많고 계획도 많았는데, 병원에서 수술대에 한번 누워보니 생각이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이만큼 살았으니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끝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끝이 있음을 알고 인생 자체를 마감하는 준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