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Bartth의 『위기』 와 J. Moltmann의 『희망』
- 논제에 대한 시각적 이해와 신학의 접근 방법 -
오늘날 현대신학을 놓고 이야기 할 때 19세기와 20세기의 가교의 역할을 감당한 두 거장,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을 논하지 않고는 21세기 신학의 지표를 제시할 명제를 찾을 수 없다고 하겠다. 그만큼 두 거장의 몸집은 한 세기를 가릴만한 그림자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정확히 1919년 스위스의 한 작은 교회 목사에 의해서 발표된 『로마서 주석』이 잠자고 있던 20세기를 요동치게 만들었고, 1965년 여름 독일 튜밍겐 대학에서 젊은 교수가 『Theology of Hope』를 내놓음으로서 세상을 경악케 하였다.
두 신학자의 태동은 잠들었던 교회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고 21세기를 준비하는 길목에서 등불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김영한 교수는 그의 5년간의 현대신학 강의에서 각 신학자별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칼 바르트; 기독론적 보편주의적 계시신학
에밀 브루너; 논쟁적 신학
루돌프 볼트만; 실존론적 신학
칼 하임; 변증적 물리신학
오스카 쿨만; 구속사 신학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보편사 신학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적 희망의 신학
간하배 교수는 그의 현대신학 해설에서 바르트, 불트만, 폴 틸리히를 20세기가 낳은 3인의 거장이라고 꼽는다.
박아론 박사는 칼 바르트와 루돌프 볼트만을 거장급으로, 판넨베르크? 몰트만 ?에빌링? 옷트 등을 소장급으로 헬무트 골비쳐? 에벨하르트 윙겔을 유망한 신학자로 분류하였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외진 곳 비텐베르그 대학 예배당 게시판에 한 젊은 교수에 의해서 작성된 95개 논제가 종교개혁사에 포문을 열게 하였다. 또 연이어 1520년 발표된 3대 개혁 논문은 그 시대에 획기적인 서광이기도 했다. 그는 M. Luther이었다.
1536. 3 『기독교 강요』가 세상에 나왔다. 제네바를 무대로 한 종교개혁은 또 하나의 거대한 분수령을 이루게 하였는데 그는 J. Calvin이었다.
여기서 한 논제를 하기 앞서 신학자들을 거론하는 것은 누가 거장인가 아닌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20세기 신학을 견주어 논하려 할 때 그 시작과 끝을 어떻게 연관지어 21세기 신학에 시금석을 놓겠느냐에 관심을 모으려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대성을 띠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말하려 하는 지는 듣고 보는 자의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이 개별적인 것으로 끝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역사 선상 위에 서있고 그 서있는 자리에 따라서 시각적 착란을 빚을 수는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 듯이 4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네 사람의 자서전이 아니지만 어느 한 사람의 전기전과 같은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나사렛에서 살았던 예수라는 인물이었다. 그 인물을 놓고 네 저자는 각기 다른 시각으로 연출 각색하여 저술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기록이라고 하기보다는 증거라는 표현을 쓴다. 그는 곧 하나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혈통적으로 다윗 왕가의 혈손으로 나신 예수를 증거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누가는 한층 더 거슬러 올라가 아담에게서 그 뿌리를 찾고 있다. 인성이신 예수, 그는 곧 하나님이었다고 고백한다.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눅3:23-38)
요한은 한 차원 더 올라가 신성으로서 예수를 전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
마가는 단적으로 직역하여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이미 누구나 익히 아는 진술을 반복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함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증거함에 조금도 망설일 까닭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본 예수는 동일한 선 상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각기 서있는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와 누가는 좀 차이가 있을는지 몰라도 과거의 한 지점에서 기록을 하고 있고 마가는 현재의 위치에서, 그리고 요한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자리메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빛, 예수, 그림자가 있다. 투영도를 본다고 할 때 마태와 누가는 그림자가 있는 위치에서 예수와 빛을 본 것이다. 마가는 예수가 있던 자리에서 빛과 그림자를 보았다. 요한은 빛으로 예수를 지나 그림자로 간 것이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이것만큼 중요한 골격은 없다. 그래서 4기자는 보았다(see)고 하지않고 시작이다(beginning)라고 의미있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도마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우리는 무엇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보았다고 하지 않는다. 시작이라고 한다. 그것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13)
하신 말씀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정확히 시작만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열린 시각이어야 한다.
내가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을 20세기를 양분한 신학자로 꼽은 데는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칼빈주의에 입각하여 예수를 보고있으나 그 시작하는 위치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위기』와『희망』이라는 뉘앙스에서부터 컨셉의 설정이 우리를 전혀 다른 시작으로 몰입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저서를 통하여 과연 그들이 어떤 자리에 있었는가에 위치를 설정함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앞서 이미 많은 시각으로 조명된 그들의 초상을 살펴보는 것도 큰 유익이 될 것이다.
칼 바르트를 지상에 부각시킨 책은 뭐니뭐니 해도 『로마서 주석』이다. 제네바의 한 시골 교회에 이름없이 묻혀있던 목회자를 하루아침에 주목받을 인사로 급부상시킨 데에는 19세기의 역사적 비판학적 방법에 대해서 새로운 성서해석학의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로마 카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의 표현대로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18. 8월에 출판된 이 책은 1926년 2월 5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성공’이라고 하는 개념이 갖고있는 변증법”라는 바르트의 용어를 만들어 냈다.
1924년 『죽은 자의 부활』, 초기의 논문집『하나님의 말씀과 신학』, 투르나이젠과 공동 설교집『창조의 영이여 오소서』등이 출판되었고
무엇보다 그의 주요 저서인 『교회 교의학』(1932-1968)있다.
이 『교회 교의학』 제1권은 서론격으로 2부이며, 제2권은
‘신론’2부, 제3권은 4부로 그의 ‘창조론’과‘인간론’그리고‘섭리론’을 전개시키며,
그 중 핵이라고 볼 수 있는 제4권은 4부로 구성되어 ‘기독론’과‘속죄론’으로 되어있고,
‘구원론’과종말론’을 계획했던 제5권은 타개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 저서를 ‘프로테스탄트의 신학대전’(Protestant Summa)이라 칭하는데, 이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오리게네스(Origenes),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등의 교부들을 비롯하여 안젤무스(Anselmus), 아퀴나스 등의 중세 사상가들, 루터(Luther), 칼빈(Calvin)등의 종교개혁자들. 18C 신교 정통주의자들, 그리고 쉴라이에르마허(Fr. Schleiermacher)등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결을 통해서 풍부한 사상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Die Kirchliche Dogmatik(교회 교의학)
1. KD Ⅰ/1, 1932년(46세)☞ 하나님 말씀론
KD Ⅰ/2, 1938년(52세)
2. KD Ⅱ/1, 1940년(54세)☞ 신론
KD Ⅱ/2, 1945년(57세)
3. KD Ⅲ/1, 1948년(62세)☞ 창조론
KD Ⅲ/2, 1950년(64세)
KD Ⅲ/3, 1950년(64세)
KD Ⅲ/4, 1951년(65세)
4. KD Ⅳ/1, 1953년(67세)☞ 화해론
KD Ⅳ/2, 1955년(69세)
KD Ⅳ/3-1, 1959년(73세)
KD Ⅳ/3-3, 1959년(73세)
KD Ⅳ/4, 1965년(79세)
위르겐 몰트만의 저서들은 한국에도 많이 번역되어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희망의 신학』(1964),『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가 그의 전체를 구축하는 신학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창조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1985),『예수 그리스도의 길』(1990),『생명의 영』(1991),『오시는 하나님』(1995),『기독교 신학의 기초와 방법』(1999)등이 있으나 이 책들은 몰트만의 주요 후기 저서들로서 초기 신학적 주제로 한 주저(主著)들이다.
바르트와 몰트만의 사상의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학이 정립되기까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가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K. Barth는 스의스 바젤에서 개신교 목사이며 신학자인 프리츠(Fritz)의 3남 2녀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역사와 시에 관심이 많았고 연극무대에 활동을 즐겨하며 나마이어(Chr. Niemeyer)의 영웅전《해방 전쟁사》나 쉴러(Fr. Schiller)의 《빌헬름 텔 이야기》를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신학을 결심한 것은 16살 입교 문답을 받을 때 였으며 ?종교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교회의 신앙고백은 단순히 무조건 긍정하며 인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체험?(das Erlebnis)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 동기가 됐다.
1904년 아버지 프리츠가 교회사와 신약학 교수로 있는 스위스 베른(Bern)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여기서는 신학공부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칸트(I. Kant)의 《실천이성비판》과 쉴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의 《종교강화》등의 ?경험신학?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당시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대학에서 신칸트학파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헤르만(W. Herrmann)에게 가고자 했으나 보수적인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베를린(Berlin)대학에서 3학기 동안 쉴라이에르마허의 뒤를 이은 카프탄(J. Kaftan)과 교회사가 하르낙(A. v. Harnack), 그리고 종교사학파의 거장인 궁켈(H. Gunkel)에게서 강의를 심취하였다.
1908년 동경하던 마르부르크 대학에 편입하여 3학기 동안 불트만(R. Bultmann)과 나란히 앉아 헤르만(W. Herrmann)의 강의를 들었는데 ‘체험신학’이었다.
부분별로 정리하자면 역사적인 면에서는 하르낙(A. v. Harnack), 윤리적인 면에서는 헤르만(W. Hermann), 철학적으로는 신칸트주의자 코헨(Cochen)과 나토르프(Natorp)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1923년 그의 스승이기도 한 하르낙과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르낙은 《기독교 세계》(Die Christich Welt. 1923)에 ?신학자 가운데 학문적 신학의 무시자에 대한 15항의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비판적 질문을 던졌고, 동 잡지 Heft 5/6에 바르트의 「하르낙 교수에 대한 15항의 대답」이 주어졌다. 그후로도 피차간 공개서한이 오갔으나 양자간의 신학적 방향의 깊은 간격은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하르낙은 바르트의 비신학적 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공박한다.
“당신은 신학의 교수 강단을 설교단으로 변모시키고 있소. 나는 전 교회사의 진행에 근거해서 이와 같은 작업은 성공치 못하고 와해될 것을 미리 말해두는 바이오”
이에 대한 바르트의 답변은 이렇다.
“나는 여기에 설교자도 역시 권한 때문에 ‘말씀’을 증거해야지 그 자신의 경험, 규율, 반성을 선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인정한 것으로 전제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설교의 진리와 신앙이 오는 것은 당신도 인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전하는 것이 설교자의 과제라면 이것은 역시(설교자와 적어도 도덕적 인격적 연합 속에 있는)신학자의 과제입니다.…나는 신교신학의 시작 이후 수행된 학문적인 사고와 진술사이의 분리가 어떻게 일의 본질로부터 정초되는지 통찰할 수 없습니다.”
하르낙은 공개서한 끝말에서 변증법은 신학을 절대적인 종교적 회의주의와 소박한 성서주의의 보이지 않는 좁은 길로 이끌며, 기독교적 체험과 소망의 가장 고통스러운 해석이요, 따라서 모든 기독교적 경험을 깨뜨리는 ‘곤봉의 타격’이라고 비난했다.
이상을 보듯이 바르트는 이들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이것들을 성서이해의 한 방법으로 삼아 새로운 신학을 발전시켰다.
J. moltmann은 바르트와는 사뭇 그 배경이 다르다. 그는 세속적인 교육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막스 플랑크(Max Planck)와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동경하였듯이 수학과 원자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다.
그의 생애에 전쟁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종교와 신학과는 무관한 길을 가고 있을지 모르는 일였다.
1943년 함부르크가 영국에 의해 괴멸을 당할 때 학우들과 공군 지원단으로 참가했던 그는 4만명이 사람들이 불타 죽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무수히 쓸어져 피를 흘리는 교우들을 보며 공포와 절망과 절규 속에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나는 살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 않았습니까?”
울부짖음은 3년 간의 포로 수용소에서 성경을 접함으로 그 해답을 얻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비록 포로이기는 하였으나 영국 노팅엔(Nottingen)에 개신교 신학자를 수용한 수용소, 노튼 캠프(Norton Camp)에서 1947년 몰트만은 신학수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1948년 괴팅엔에서 한스 요하힘 이반트(Hans Joachim Iwand), 에른스톤 볼프(Ernst Wolf), 오토 베버(Otto Weber)등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강의를 통하여 영향을 받았다.
초기 그는 고백교회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헤겔(Hegel)이후에 철학이 없듯이 칼 바르트의 기념비적인 교의학 후에도 더 이상의 신학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썩 잘 말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바르트주의에 깊이 신봉했었다.
1957년 홀랜드 신학자 아놀트 반 룰러(Arnold van Ruler)를 만남으로 해서 새로운 길로 걷게 되었고 크로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의 글에서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발견하였으며,
무엇보다 1960년 에른스트 블르흐(Ernst Bloch)의 『희망의 철학』(Das Prinzip Hoffnung)은 감명을 넘어서 새로운 지평선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믹스(M. Douglas Meeks)의 『희망의 신학의 기원』(Origins of the Theology of Hope)에서 본 몰트만 신학의 기원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르트, 블로흐; 화해의 변증법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 미래의 자유 왕국을 성취하기 위한 혁명적 변혁의 아이디어를 성서(출애굽, 예언자들의 메시아 사상, 묵시주의 사상, 신비주의 요소 등)와 기,독교 사상(마르시온, 영지주의자들, 중세 신비주의자들, 천년 왕국론자들, 요아킴, 뮌처 등)에서 흡수한 미래를 향한 혁명적 변혁의 실천이론; 마르크스적 휴머니즘(무신론)
2) 오토 베버; 개혁전통의 종말론
개혁전통에 대한 베버의 비판적 통찰들과 성서의 전통과 성령의 경험을 강조하는 개혁정신.
약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의 지식은 현재에서 그 희망을 체현시키는 순종적 실천의 전제.
3) 룰러, 호켄다이크(J. C. Hoekendiik); 네델란드의 사도직 신학
신약은 사도직 운동에서 기원했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사도직 운동을 지향.
하나님의 선교신학 - 교회가 종말론적 비전하에 이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 속으로 파송받아(사도=파송받는다고 하는 뜻을 지니고 있음)하나님의 선교에 동참
호켄다이크의 교회론; 하나님 나라 - 복음 - 사도직 - 세상
4) 이반트; 화해의 변증법
신학의 분류 - 자연신학, 특수 계시신학, 영광의 신학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하고 해석 - 종말론적 성격을 띤 열려진 변증법; 부활- 영광의 나라, 십자가- 묵시적 고난
5) 볼프; 사회윤리
하나님의 명령을 항상 사회와 연관
우리가 바르트 신학과 몰트만 신학을 놓고 이야기 할 때 그들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가에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신학이란 어느 한 사람의 공유물이나 독자적인 행보가 아니라 역사를 두고 내려오는 맥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역사란 굴러가는 수레바퀴와 같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 수레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없이는 수레는 한 바퀴도 구르지 못한다. 정지하고 만다. 수레는 앞에서 끄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뒤에서 미는 사람도 있기에 험한 산길도 다닐 수가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이 바뀌어도 수레는 멈추지 않았고 지금도 굴러가고 있다.
바르트의 신학, 몰트만의 신학,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독자적인 각기 다른 수레를 밀고 끌고 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별되어 이야기를 할 수는 있어도 신학을 움직이게 하는 힘, 곧 에너지인 것이다.
앞서 4복음서의 저자에 관해서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조금도 문제삼지 않는다. 인자로 보든 메시야로 보든 왕이나 종으로 보든 그들의 각기 다른 시각에 맞추어 성경을 인식하고 서로의 연관성을 통해 완성해 나가려 한다. 성경은 곧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학이 성경을 떠나 존재하지 못한다. 모든 신학은 성경에서 시작된다. 긍정이냐 부정이냐는 철저히 시각적인 차이에 견주어 용해되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어려움이 있다.
마태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 나타나듯이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일세대에 사람들이었다. 마가와 누가는 그들에게서 종합하여 예수님을 만났다. 사도시대, 교부시대, 중세시대, 등등해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만나는 시각이 더 난해해 졌다고 보아야 한다. 성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예수님을 여러 안경을 써야 됨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곧 무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9)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도달하기까지 모세라는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다. 사도시대에서는 사도를 통하여, 교부시대에서는 교부가 사도를 통하여 본 시각으로…, 점점 가려지고 겹쳐지는 시각을 건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물론 시대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 할 수는 있으나, 당신 앞에 서있는 목사 역시 신학을 연수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서있을 자격이 없다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 목사의 설교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흔한 영감으로 한다고 하지만 그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한 신학이 없이 그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보면 그를 있게 한 그 신학의 배경이 그의 목회에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목사나 그밖에 다른 무엇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대제사장이 우리를 대신해서 지성소를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벧전2:9)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교감이 아니다. 글자 하나 모르는 사람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이 곧 기독교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하였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한,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을 논하고자 한다.
우리는 욥의 고백에서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발견할 수가 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40:4)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욥은 하나님 말씀대로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할 정도로 믿음과 순종에서 타의 추종을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우리가 욥기서를 보더라도, 그와 같은 이가 다시없을 정도로 흠이 없는 그가, 마지막으로 고백한 진술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겠는가?
귀로 듣기만 하였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욥은 직접 뵈었다고 말한다. 그 순간 그의 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본다. 들음의 생활과 만남의 생활, 이것이 욥기서의 주제요 진리이다.
흔히들 욥기서를 연단과 훈련으로 집약시키려한다. 곧,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하는 구절로서 대신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 주제에 있어서 온 세상을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들이 품게 되는 의문점, 의인의 재난과 악인의 형통이 던져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하고 적응시키려 한다.
젊은 수도자 마틴 루터가 왜 스칼라 산타(the Scala Santa)의 고행을 자처했었는가?
ST. 어거스틴은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겠는가?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회한과 쓰라림으로 인해 나의 눈물은 그칠줄 몰랐다. 그것은 나의 죄과가 너무나 엄청나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들음은 지식을 낳는다. 만남은 지혜를 얻는다. 구분하여 나누자면 지식은 아는 것이요, 지혜는 깨닫는 것이다.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謹愼)을 찾아 얻나니(잠8:12)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루터와 어거스틴은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그들이 성직자가 되기까지는 들음에서 기인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으로부터 이루어 졌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전까지 그 말씀들을 외면하거나 읽지 않았던 것은 아녔다. 우리보다 더 많이 보았을 것이고 묵상하였을 것이다. 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지식을 더하게 해주었겠는가.
욥의 변화는 들음에서 만남으로 바뀔 때 이루어 졌다. 지금까지 자신을 변호하고 주장하던 말들은 모두 들음에서 나온 지식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 입을 가리고 만 것이다.
바르트와 몰트만의 들음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바르트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목사이다 보니 자연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를 좋아하고 연극을 좋아한 그는 문학적인 소질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지사이고 순리적인 행보이기도 하였다.
반면에 몰트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철저한 인문주의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자신의 기대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죽음과 삶이 교차되는 전쟁터에서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귀를 기울였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신약 저자 가운데 누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대인이었다. 골4:14을 근거로 누가는 시리아 사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폭넓은 문화와 미적이고 수사학, 철학을 추구하는 헬라인의 자질과 의사로서의 고등교육을 겸비하였다고 한다.
들음은 시각적인 차이를 낳게 한다.
12 사도와 사도 바울은 전형적인 유대인임을 익히 우리가 아는 바다. 특이나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들음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시대에 최고의 명성을 지닌 가말리엘의 수제자였다. 그런 그가 신약 27권중 13편을 장식하고 있다. 서신 21편 중 다수가 그에 의해서 쓰여졌다.
구분을 하자면 ,
예수님이 택한 제자, 마태 요한 베드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유다
유대인 마가
헬라인 누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로 정리된다.
12제자들이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감동에 따른 자발적인 참여의식보다는 압권적인 복종과 기대 심리에 포만감이 작용하였다. 그들의 관심은 주님의 오른편에 왼편에 앉는 것들이었다.(마20:20-24)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도 물질에 현혹되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를 위한 왕국 등극에 대한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과 가까이 생활을 같이 하며 보고 들었으나, 그들이 체험한 기사와 표적으로 고무되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처사는 순간적이라기 보다는 이미 내재되어 있던 잠재의 표출이라는 말이 옳다. 그가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한 것은 자신의 비겁한 배신행위보다도 자신이 섬기며 따르던 스승의 존재에 대한 무지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후에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6,17)
하고 물으신 것은 지난날 있었던 그의 배반적인 행위보다 주님과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대목을 놓고 용서하셨다, 씻기셨다고 해석한다면 인간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학문이 있다. 학문은 곧 지식이다.
학이란 science라는 뜻에서 지식에 해당되며, 볼 수 있고 판단하고 입증되는 것을 충족시킬 때 정의되어진다.
학문은 학의 개념에 근원을 캐는 철학적인 요소를 지닌다. 포괄적이고 함축된 그 속에서 한 인격의 객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까지 학습을 통해 만들어지며 고쳐지며 다듬어지며 변화되어 간다. 변화가 없는 삶이란 정지된 지식에 갇혀진 고정관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지극히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경계를 이루어 적(敵)이라는 이슈(issue)를 돌출해 내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는 것은 타의 간섭이나 중개가 아니라 자아적인 깨달음으로 나의 관념의 형태가 바뀌어지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신이 나를 용서하시고 씻기셨다고 나에게 새로운 변화를 기대한다면 그는 반복적으로 용서받고 씻김을 받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살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화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사로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의 굴속에서 나와 다시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그가 본 세상은, 자다가 눈을 부스스 비비고 뜨고 본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몰라도 아이가 엄마의 배속에 있다가 열달이 차서 세상에 나와 처음 세상 빛을 본 그것과도 형용할 길 없을 줄 안다. 아이는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본 것이지만 죽었던 나사로는 전에 맛보았던 빛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서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죽었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 죽음은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가 되는 것이다. 죽었던 나사로 앞에 서있는 예수님은 정녕 그가 전에 늘 보아왔던 그분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보았든 들었든 그들은 바로 그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죽은 것은 예수님이지만 변화된 것은 그들이었다. 나사로는 자신의 죽음을 뛰어 넘어 예수님을 보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에게 열린 세상을 보았다. 그들은 보고 듣고 입증되고 판단할 수 있는 과학적인 사고에서 성서를 기록하였다. 그들의 시각으로 증거하였다. 그들이 본 그대로, 들은 사실 그대로, 입증된 논리적인 판단에 의거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들의 메시지에 의해서, 그들의 눈을 빌어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루터, 칼빈, 바르트, 몰트만도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을 실제로 목격하지 못했고 직접 듣지도 못한 상황은 우리와 다를 바 없다. 들음에 있어서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몰래 찾아왔다. 바리새인이요 사회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유대민족을 대표했던 산헤드린의 관원이며, 학문적으로는 율법에 정통한 뛰어난 교사인 그가 예수님에 관하여 듣고 자신이 갖고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독대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니고데모의 반문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그는 육적인 거듭남을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이 다시 모태로 들어가기 전에는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거듭남을 이야기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니고데모의 관한 기사는 다시 요한복음 19장 39절에 나온다. 예수의 장례에 참석해서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드렸다고 되어 있다.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 숨어버린 장례식에 그가 직접 참석한 것이다.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뵐 수밖에 없었던 니고데모였다. 그런 그가 당당히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하여 들을 수밖에 없다. 성서 기자를 의지하여 보는 것이다. 그가 본 예수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예수님, 그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고 주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오류는 시작부터 오만과 지식으로 가득 차 내가 주님을 만나고자 하기 때문에 밤중 몰래 주님을 찾아간 니고데모를 모델로 삼고자 한다. 그를 스승으로 추종하려 든다.
하나님과 만남은 모든 신학의 시작이다.
바르트가 신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앞서 어필했다. 그가 목회에 들어가면서 쓴 논문은 『현대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사업』이었다. 여기서 그는 소위 현대신학을 연구하는 학도들이 왜 하나님 나라 사업에 정진하려 들지 않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며 자신의 신학적 경험과 확신을 토대로 쓴 것이다. 그당시 그는 칸트와 쉴라이에르마허 등을 연구하며, 헤르만의 ‘체험신학’에 몰입해 있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다. 이성으로 증명된 신은 단순히 세계일 뿐이며, 세계의 신은 우상일 뿐이다. 통일된 이론 법칙으로서 도그마는 성령의 역사와 반대된다. 신앙이란 절대의존의 가정이 아니라, 자유로운 복종의 경험이다. 따라서 체험의 윤리로 나아갈 때, 존재(Sein)와 당위(Sollen)의 무한한 균열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내면적인 삶이 바로 구원의 사실이며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W. Herrmann)
그럼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상은 어떤 것인가.
그는 ‘역사적 범신주의’Geschichtspantheismus)를 제창하였다.
이것에 의하면 역사적 과정은 곧 신적 운동이고 이 신적 운동의 목적은 역사 속에 내재한 정신의 힘들이 점차로 승리를 획득하여 인류를 한 단계씩 자연상태에서 문화에로 상승하게 하는 데 있다. 개별적 인간은 힘들에 의한 자신을 밝히면서 자연상태로부터 자연적 인간성에로의 발전 속에서 이 역사적 과정에 참여한다. 이 특수한 양식 속에서 여기저기에 정신적, 신적 힘을 소유한 개인들이 역사에 나타난다. 이러한 ‘계시 전달자’중 최상 최대의 개인이 ‘나사렛 예수’이다. 인간들은 예수의 모범을 따르고 그의 내적인 생명에의 참여를 통해서 그들의 신적 의식은 강해지고 자유적, 정신적, 도덕적 인격성으로 성숙하게 된다.
그는 낭만주의적 ‘계몽사상’과 헤른훗형제단(모라비안 교회)의‘경건성’에 영향을 받아 ‘인간의 경건한 자기의식?을 신학의 출발점과 대상으로 삼았다.
바르트는 1909년 목사안수를 받았으나 양심에 직면하여 바로 목회자가 될 수 없었다. 스승인 헤르만이 강조한 ‘모든 참된 설교는 설교자의 경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해 말 빌립보서 3장 12-15절의 말씀에 힘입어 제네바에서 개혁교회 부목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회문제’‘노동문제’에 부딪혀 교회가 줄 수 있는 참 희망과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그는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교회와 사회, 텍스트(der Text)와 컨텍스(der Kontxt), 이 둘 사이에서 고민하고 참여하며 선포하는 목회자가 된 것이다. ‘한 손에는 성서를,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모토가 그의 목회적 관심 속에서 그리고 신학적 서술 속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여기서 보면 바르트는 다분히 루터와 같은 고민과 방황을 하였는지 모른다. 루터가 죄에 대해서 갈망하였다면 바르트는 양심에 의존하고 있었다.
1914년 8월 14일, 『93 지식인의 성명서』가 나왔다.
바르트는 다음처럼 당시의 신학적 체험을 술회했다.
“그해 8월초 한 날이 나에게 비통의 날로서 다가왔다.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빌헬름 2세와 그의 자문관의 정책에 승인의 발표를 했고, 놀랍게도 그 가운데 신뢰했던 나의 많은 신학 스승들의 이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의 윤리를 의심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윤리학, 조직신학, 성서해석, 역사서술도 더 이상 따를 수 없었으며 19세기 신학은 나에게 미래가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의 지식의 틀을 이루고 있던 스승들에 대한 회의, 19C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실망감은 목회자로서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 절박한 이슈가 되었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연구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온 것이 『로마서 강해』였다.
1919년에 출판된 1판은 신학적 자유화의 투쟁으로 우주적 종말을 말했다면,
1922년에 나온 제2판은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라는 초월적 종말론을 잠정적으로 유도한 것이었다.
서술방식은 변증법적이었다.
그는 그 뿌리를 헤겔에게서 찾지 않고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자들과 바울에게서 찾았다. 특히 ‘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하나님은 하늘에, 너 인간은 땅에’를 말하는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td)의 용어를 빌려 보다 강한 변증법적 서술로 이끌어 나아갔다. 즉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적 시간의 간격을 ‘실존 변증법적’ 범주인비약(飛躍)’(Sprung),‘결단(決斷)’(Entscheidung),‘동시성(同時性)’(Gleich-zeitigheit)에서, 또는 플라톤적인 범주인 ‘근원성’을 통해서 극복하려 했다.
『로마서 강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 어둠 속에 꿰뚫고 들어오는 빛과 같이 전 역사에 대해 내려지는 심판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Nein!), 그것이 우리에게 긍정(Ja!), 곧 구원이 된다.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오직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이 되는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을 이야기 할 때 ?십자가?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십자가 신학』이라고 칭할 만치 그의 신학의 원리는 십자가 밑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앞서 살폈듯이 그가 신학을 하게 된 계기도 죽음을 직면한 전쟁터였고 훗날 술회하듯이 죽음에 직면했던 자신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찾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큰 소리로 지르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아우슈비츠’‘히로시마’가 그의 신학의 골격이 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피력한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서 누구신가? 나는 일반론들 때문에 이와같은 개인적인 질문을 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기억으로 시작하려 한다. 나는 1945년에 벨기에의 전쟁포로 수용소에 투옥되었다. 히틀러의 제3국은 붕괴되었다. 독일 혁명은 아우슈비치의 유대인 학살을 통해서 파멸되었다. 나의 고향인 함부르크는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나의 생각에 변화가 왔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들에 의하여 버림을 받았다. 나의 젊은 날의 꿈은 사라져 버렸다. 나는 내 앞에 그 어떤 미래도 볼 수 없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미국인 군목이 나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었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애도의 시편(39편)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고난으로 인도되었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말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그리고 난 뒤에 나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 끌렸다. 내가 예수님의 죽음의 절규에 도달했을 때 나는 알았다. 바로 이분이 하나님과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릴 때에도 나를 이해하시고 내 곁에 서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바로 이 절규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절규였다. 나는 그분이 나를 이해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는 고난받으시고, 공격받으시며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 예수께서 우리의 곤경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신적인 형제(The divine Brother)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포로들과 버림받은 자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신다. 그는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들로부터 모든 미래를 빼앗아 가는 죄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인간적으로 볼 때 전혀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에 사로잡혔다. 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삶의 용기를 얻었다. “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몰트만은 즐겨 루터의 ‘십자가신학’(theologia crucis)에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의 신학적 사고 형성에 있어서 칼빈이 루터보다 결정적인 추진력을 가져다 주었다. 몰트만은 신을 떠난 희망 없는, 고통과 죽음으로 나타나는 현실 속에서 현재 경험되는 것에 모순되는 희망의 정열을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 칼빈에게서 적극적인 영향을 받았다.
1963년 5월 21일 튀빙엔 대학 신학부에서 행한 공개 강연, ‘에른스트 블르흐와의 대화’(Ein Gesprach mit Ernst Bloch)에서 몰트만은 같은 튀빙엔 대학 철학부의 동료, 블르흐의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적 희망의 철학에 대한 자기의 희망의 신학의 관계를 밝힌다. 여기서 그는 블르흐의 희망의 사고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에 오히려 『희망의 원리』가 희망의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서 ‘신에 의한 약속된 소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블르흐에 의하면 모든 종교들의 본래적 유산기저(有産基底)는 ‘총체성에 대한 희망’이다.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 희망의 관점에서 블르흐는 종교의 이러한 희망의 본질이 최종적으로 유출된 것이 기독교의 종말이라고 피력한다.
블르흐는 포이에르바하의 의미에서 “인간들은 신들-실체에 있어서 항상 갈망된 미래만을 표출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블르흐의 희망의 철학에서는 신의 전적 타자성은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 인간 깊이와 세계 깊이의 전적 타자성(他者性)을 나타난다.- 감추어진 인간과 감추어진 신
희망의 원리는 ‘죽음과 파멸성에 대한 실존핵심의 탈영역적 점’이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만남은 일대 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한다는 것은 기자의 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성서기자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과 직접 만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출애굽한 백성들은 모세를 내세워 하나님 뵙기를 거절하였다(출20:18-21). 그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다.
성경은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요지를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려 했던 백성들은 어떤 과오를 저질렀던가? 시내산에 말씀을 받으러 올라간 모세가 40일동안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아론을 몰아세워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고 그것이 곧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라 하여 축제를 벌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암흑시대의 역사라 일컫는 350년간의 사사기를 보면 더욱 뚜렷하게 그 백성의 부패함을 보게 된다. 2장 13절에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나안에 입성하여 정복하기까지에는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들을 인도하였다. 말하자면 여호수아를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과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부터는 대신하여 하나님과 만날 지도자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자유스러운 나머지 하나님과의 중개자가 그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였다. 그러나 핍박과 고통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할 사사를 청한 것이다.
사무엘서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번엔 아예 왕을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무엘의 만류에도 거절하고 왕이 있어야 할 명분을 주장한다(삼상8:20).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신다.
물론 선지자를 세우시고 제사장과 왕을 세우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들었고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갔으며 왕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았다. 이 말은 회복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거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씀하셨고,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며,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의미가 된다.
신학과 종교학, 철학의 차이가 여기 있다.
가끔씩 우리가 착각에 사로잡혀 망상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기초적 모순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혹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상상을 통해 알려고 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신학이 다른 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고 나타내신다는 데 있는 것이다.
철학과 종교의 본질은 같다. 탐구하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찾아가는 것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 성찰이며 수련이다. 이것들은 모두 들음에서 난다. 수양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선지자의 입술을 통하여, 제사장의 중재를 통하여, 왕의 통치를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다음의 예로 설명을 보충하고자 한다.
오늘날 모든 경영에 있어서 최우선이 마켓팅(marketing)전략이다. 기업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하다.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 이것처럼 효율적인 것이 없으며 모순된 것도 없다. 홍보는 생산과는 무관하다.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그 제품을 알리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에 입장에서 보면 돈을 쏟아 분다고 볼 수 있다. 만들어내는 제조가 아니라 효과의 창출인 것이다. 그렇지만 만든다는 개념은 같다. 제조는 제품을 만들어 내지만 홍보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상품의 이미지이든 기업의 이미지이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매개체로 삼아 시장성을 조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홍보를 통하여 상품과 기업을 만난다. 어떤 상품을, 기업을 택함에 있어서 그것은 절대적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물을 만나기까지 홍보를 통하여 그 이미지를 갖게된다. 즉 홍보는 들음이다. 보지는 않았지만, 보이지는 않지만 그 메시지만으로 이미지가 탄생한다.
하나님을 무엇에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얼마나 많은 무지가 우리를 어둡게 하는지 이해를 돕고자 할 뿐이다.
신학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신학이 아니라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이 신학이라는 말이다. 곧 성경은 상품이요, 신학은 홍보요, 우리는 신학을 통해서 이미지를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인 성경을 만드셨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1:1)
그분이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직접 오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요 3:16)
그분을 증거하게 하려 하심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성경은 선지자들과 예수님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이다. 어떤 이들은 구약은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복음서는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그 외 신약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분리하는데 이는 성경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을 그렇듯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나눈다는 것이 모순이며 무지이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록하였고,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록하였고, 나머지 서신들은 성령의 증거 하심으로 하나님을 기록하였다. 곧 성경은 하나님인 것이다.
신학은 이를 알리는 홍보에 해당된다. 우리에게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매개체인 것이다. 그럼, 신학은 곧 하나님이시다 라고 정의한 난해가 발생하겠으나 신학의 본체와 신학자라는 중개자가 있을 뿐이지 구별될 것은 없다 하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신학자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을까?
이 의문이 바로 신학의 모든 주제가 된다.
자신을 알리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볼 수도 보이지도 않는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가 된다.
모세가 하나님께 묻는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모세를 부르셨다. 사무엘을 포함한 모든 선지자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모세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분이 직접 찾아 오셔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선지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만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 말씀들은 곧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전달한 메시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거리.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그분을 알아야 됨은 당연지사요, 근본이요, 근원에서 오는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그 소리를 우리는 어디에서 듣고 있느냐는 거리만 존재할 뿐이다.
구약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났다. 신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찾아 오셔서 만나주셨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있어 우리는 정말 가깝고도 먼 거리에 존재해 있다.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과 거리를 무엇으로 가까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느냐가 우리의 고민인지 모른다. 그것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신학자들의 고민도 그러했다.
오늘날 신상품을 소개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소비자는 어디에서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매스컴(mass communication)이라는 매개체로 이미지 창출을 얻을 수 있다. 기자의 손끝으로, 배우의 얼굴에서, CF 중개자가 그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렇다고 그 이미지를 받는 우리 모두가 동일할 수는 없다. 받는 이미지는 그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그 상품을 만나게 되는 순간 그들이 하고자 했던 역할을 충분히 다한 셈이 된다. 그 나머지는 우리의 몫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다를 수가 있다. 또한 나의 느낌이 다른 사람과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 역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당신이 마태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이 어렵다면 루터나 칼빈에 의지하여 바울을 통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바르트나 몰트만의 힘을 빌어 루터와 칼빈에게서 바울이 만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정 힘든다면 당신이 나가는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설교한 목사 역시 신학에서 많은 신학자들의 뒤를 답습하여 그들을 통하여 바울이 만난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당신이 서있는 하나님과의 거리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이순간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와 몰트만이 만난 하나님, 루터와 칼빈이 만난 하나님, 사도 바울이 만난 하나님 그리고 당신이 만난 하나님은 동일한 그분이시다.
지금부터 논하고자 하는 바르트와 몰트만의 신학을 전제로 우리의 시각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다.
포커스(focus)를 어디에 두냐에 따라 신학의 방향은 여러 각도로 달라질 수 있다.
바르트와 몰트만이 만난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같으나 이미지에 있어서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성장한 배경은 너무나 다르고 또한 두 사람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나 신학자들이 다르다. 바르트신학이 바르트만의 신학이 될 수는 없다. 몰트만이 한때 바르트 사상에 매료되었다고 해서 그에게서 바르트를 찾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바르트가 만난 하나님, 몰트만이 만난 하나님은 동일 선 상에 계시지 아니한다. 분명한 것은 바르트가 만난 하나님의 그의 시각으로 우리가 볼 수 있고, 몰트만이 만난 하나님은 또 그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뿐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바르트와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td)를, 몰트만과 블르흐를 연관지어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혀서는 안된다. 바르트가 스승인 하르낙과 논쟁하고, 몰트만이 동료인 블르흐를 비판한 것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물론 두 신학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에 등한시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신학의 흐름이기도 하다. 역사 선상에 그들은 각기 다른 지점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우리는 또한 그들의 중개로 하나님을 보고 있다. 우리가 서있는 자리, 당신이 서있는 자리, 내가 서있는 자리는 같은 지점이 아니다. 다만 이글을 읽는 당신의 자리가 내가 서있는 자리요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일 뿐이다. 바르트가 그렇고 몰트만이 그렇다.
K. 바르트 신학과 J 몰트만 신학의 컨셉을 『위기』『희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1932년 영역판)에 대한 서언에서 자신의 신학을 변증법적 신학, 위기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학의 본질을 왜곡하기 쉽다고 경고하였다.
그의 저서는 바로 인간의 행위를 종말론적으로 심판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이었다. 이 부정 아래 인간의 전 실존과 역사는 뿌리 채 흔들리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위기?는 가장 깊은 곳에서‘심판?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모두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명령 아래 놓여 있다. 계시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의식으로 그것을 들어야 한다. ‘모든 것을 일단 중지하라. 지금까지 네가 가던 길은 무엇인가 잘못됐다.’이러한 ‘위기’의식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신학을 ‘위기의 신학’‘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바르트가 신학사에 끼친 공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째, 바르트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에 있다
둘째, 바르트 신학이 전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세력이 된 것은 그의 신학이 각 교회에다 영향을 끼친 것과 같이 사물의 핵심을 꿰뚫고, 역사적인 보편적 신학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교회론을 가장 중요시하였다는 데 있다.
셋째, 바르트 신학의 가장 특색있는 점은 어떤 면으로 보나 수육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또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인간성을 강조한 것이다.
넷째, 혼동되어 일치화되어 버린 계시와 종교, 신앙과 이성, 구원과 역사,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드러낸 일이다.
J. 몰트만 신학의 주제가 되는 세 저서의 요지는 다음과 깉다
1. 『희망의 신학』
몰트만의 저서 가운데 가장 창의적이고, 가장 영향력이 큰 저서로서 종말론에 대한 연구라기 보다 전(全) 신학의 종말론적 방향 설정에 대한 연구이다.
‘다만 끝에 가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는 종말론이요, 희망이요, 미래를 바라보는 그리고 미래를 지향하는 운동이요, 따라서 현재를 혁명하고 개변시킨다. 종말론은 기독교의 모든 것을 푸는 열쇠요, 대망의 새 날의 동터 오름 속에서 모든 것을 비추는 빛이다.… 때문에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일부가 아니다. 오히려 종말론적 시야는 모든 기독교적 선포와 모든 기독교적 실존과 모든 교회를 특징짓는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시야에서 이해되고, 변증법적 약속, 희망과 선교라고 하는 주제들에서 해석된다.
2.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단순히 십자가에 대한 가장 중요한 현대적 연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루터적인 의미에서 십자가의 신학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기독교 신학의 표준으로 보려는 시도이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다. 그것은 신학의 유일한 주제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신학의 모든 물음과 대답으로 인도하는 입구다. 하나님, 창조세계, 죄와 죽음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진술들이 그것의 초점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두고 있다. 역사, 교회, 신앙과 성화, 미래와 희망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진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부터 기원한다. 신약성서의 다양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모아지고, 다시 이 사건으로부터 흘러간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요 하나의 위격이다.… 따라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라기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해서 일어난 그 무엇’으로 확인해 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정의 시야에서 이해되고, 변증법적 사랑, 고난과 연대성이라고 하는 주제들에 의해서 해석된다.
3.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복음의 핵심 요소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성령론과 교회론으로 보충하고 있다.
본인이 출발부터 그렇게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볼 때 이 세 책은 서로 보충하면서 동일 귀속하는 책이다.… 누구든지 이 세 책을 한꺼번에 볼 때에, 그는 본인이 확실히 부활절과 희망으로부터 성금요일과 고난으로, 그리고 이어서 오순절과 성령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 해명을 위한 초점들이 변화했고, 변화하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충하는 식으로 그리고 본인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던 각 책의 일방성을 수정하는 식으로 변화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사명을 받은 성령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세계를 하나님 현존으로 채우시고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준비시킴으로써 저 변증법의 해소를 향하여 운동한다.
K. 바르트 신학과 J. 몰트만 신학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바르트의 신관은 실존적 방법에 의존하는 초월적이며 범신론에 속한다고 평한다.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일원론에 입각한 신학이라고 한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치 않고 있으며 계시관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주관적이며 변증법적 개념은 진리를 왜곡한다고 공격한다. 또한 그의 예정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은총의 선택론으로 ?기독론적인 보편주의?라고 부른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희망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사신신학? 또는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의 연장선이다.
둘째, 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에른스트 블르흐의?미래적 인간론?으로 기독교 종말론을 크게 변질시킨다.
셋째, 역사적 기독교의 절대적 신관을 상대화하고 상대적인 인간관을 절대화함으로 말미암아 ‘신인일치적 형이상학’이다.
넷째, 교회의 정치활동을 선교로 인식함으로써 교회를 정치기구화 하는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그 신학적 급진성을 보이고 있다.
다섯째, 인간들 사이의 경제적 평등화를 ‘구원’으로 생각할 뿐 초자연적 하나님과 내세를 전혀 고려에 넣지 않는 ‘순수한 사회 구원론’이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인간의 훈련과 하나님의 계획’(Man’s Disorder and God’s Design)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부탁받았을 때, K. 바르트는 그 주제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고 그 다음에 비로서 인간의 혼란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그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 했다.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은 ‘하나님 말씀’이다.
여기서 그의 저서 『교회 교의학』에 나타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 말씀을 세 형태로 나눈다.
1) 선포된 말씀(Das verktindigte Wort Gottes)
2) 기록된 말씀(Das geschriebene Wort Gottes)
3) 계시된 말씀(Das geoffenbarte Wort Gottes)
하나님 말씀은 먼저 선포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셋이 다 합해져야만 비로소 성립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계시를
1) 삼위일체 하나님(Der dreieinige Gott)- 창조자 하나님, 화해자로서 하나님, 구원자로서 하나님
2) 말씀의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 -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과 가능성
3) 성령의 부음; 성령 -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과 가능성
으로 보는 관점은 그의 신학이 삼위일체적으로 전개하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와 성령을 표현할 때, 현실성이 가능성 앞에 온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이 현실적이요 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성서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의 권위는 말씀은 권위이지 결코 교회 자체로서의 권위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바르트는 교회 자체로부터 오는 구원론을 비판한다.
넷째로, 말씀의 최종목표는 선포에 있다. 선포는 교회의 위탁이다. 교회의 선포가 있는 곳에 윤리가 있고 삶이 태동한다. 따라서 선포는 우리의 삶의 현장과 마주치는 현실이다.
지금까지 K. 바르트와 J. 몰트만의 신학의 뼈대를 살펴보았다. 이것이 그들의 신학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두 컨셉 『위기』와 『희망』을 전제로 한 신학을 구축함에 있어서 알아야 할 사항들을 나열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들음’ ‘거리’ ‘만남’이라는 세 테마를 전개해 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 하나님과 당신, 하나님과 바르트, 하나님과 몰트만의 관계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바르트와 몰트만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번 강조하였지만 ‘들음’과 ‘만남’은 다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체험에 속하지만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과 어떤 교감이나 대화가 없었다면 그역시 진정한 만남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을 우리는 ‘착각’이라고 말한다. 편협되고 폐쇄적인 신앙으로 자각하는 무리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시지만 그 하나님을 자신의 지식과 잣대에 의해서 만나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에 그분이 직접 그들을 찾아와 주셨다. 그것은 다분히 나사렛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만남이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메시야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그의 기사와 이적을 보면서 대리 만족과 충족이라는 현실적인 사건에 고무되었을 뿐이었다.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나의 이상을 실현하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나오는 요술램프에서 나온 요정과 같은 것이다. 그는 나의 요구를 들어줄 의무가 있으며 나를 대신해서 나의 이상을 실현해주며 나를 보호하고 지키고 돌봐줄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입술로는 이렇게 찬양한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이 시편은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와 주신다. 다윗의 노래가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들음은 지극히 사고적이요 현실적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 만져주시기를 기대할 때 그의 제자들은 오히려 그것을 나무라고 꾸짖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분히 여기셨다.
“어린 아이들을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눅 10:14-15)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나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금했다. 자신들의 특권인 것처럼 행사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포커스가 전혀 다른 한 장면에 불과하다.
우리는 도마의 고백에서 그 참 의미를 찾는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요 20:2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까지도 도마는 믿지 않았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녀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도마는 3년여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그의 제자 중 하나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그렇다면 그의 입술에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오기까지 예수님은 그에게 있어서 무엇이었을까?
비단 도마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그랬다는 것을 성경은 사실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누가복음 서문을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이 복음서는 마치 누가가 헬라지방에 살고있는 데오빌로라는 기독교인에게 보낸 서신처럼 시작하고 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눅1:1-4)
이 글을 세 대목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이 된다.
들음 -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
거리 -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만남 -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함이로라
이 글이 있기 전까지 데오빌로에게는 들음과 거리만이 있었다. 누가 또한 그 사람들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데오빌라 사이에는 거리만이 있다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다가오시지만 우리가 그 거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확실히 알게 됨은 내게 화합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누가의 눈으로 통하여 하나님을 보지만 그 안경이 내게 벗겨지는 순간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누가는 이것을 우리에게 기대한다.
이것들이 바르트와 몰트만의 저서를 읽기 전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사항들이다. 우리들이 갖고있는 얄팍한 지식과 학문 사고로 바르트와 몰트만이 만난 하나님을 경시해서는 안된다는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우리 세대가 신학을 상실했다고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으며 성급한 판단임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신학은 상실되는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자들이나 허무주의자들이 가로막던 시대에도 신학은 존재하였다. 우리가 신학을 잃는 것이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신다.
K. 바르트는 체험신학을 중요시하였다.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관계에서 만남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분은 철저히 타자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초절하신 분이시다. 그분과의 만남을 변증법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하나님과 만남에 있어서 그는 『위기』를 보았다.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2판 서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문제 자체(Die Sache)의 내적 변증법과 텍스트 표현 그 자체 안에서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이해와 설명을 위한 결정적인 요소라고 일컬을 때 나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 내가 하나의 ‘체계’라는 것을 갖고 있다고 … 곧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 시간과 영원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der unedliche qualitative Unterschied)바로 그것을 내가-그것이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가능한 한 고집스럽게 나의 안중에 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다.’이 인간에 대한 이 하나님의 관계가 나에게 있어서 성서의 주제와 철학의 요지(die Summe)가 하나인 바로 그것이다. 철학자들은 인간적 인식이 이 위기(die Krisis)를 ‘근원’이라 부른다. 성서는 이 교차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어떻게 보면 바르트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거리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즉, 하나님은 하늘 성서에 있게 하고 우리는 땅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인간은 인간 되게 하자는 데 그 주제가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된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은총과 심판, 하나님의 긍정(God?s Yes)과 부정(God?s No) 등 이러한 대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사고와 모든 신학의 근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고하는 것도 사람이고, 하나님에 관하여 예리한 질문을 말하는 것도 사람이며, 하나님을 알고자 갈망하여 그에 관하여 말하며 판단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마주 설 때에는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으며 자기에게 말하는 이는 하나님임을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 관하여 생각하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끊임없는 위기라 생각하게 되었고 영원히 시간과 맞서 있으며 하나님이 언제나 역사에 참여하시고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르트는 이러한 하나님과 우리와의 거리를 ?말씀의 신학?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바르트의 신학은 대화를 통하여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 대화는 곧 말씀인 것이다. 나아가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Nein!), 그것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긍정(Ja!), 곧 구원이 된다. 사람들은 기독론을 바르트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라 말한다.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는 은총의 신학으로서의 바르트 신학의 보편적 원리를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루터나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에서처럼 서기 1-30년 팔레스타인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성육신 사건에서 출발하지 않고 먼저 영원에서, 하늘에서 발생한, 그리스도의 선재, 삼위일체의 2위에서 출발한다.
여기가 바르트가 하나님을 만난 자리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사도 요한의 시각으로 신학을 종합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것이 구약이라고까지 한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시작하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포커스에 비중을 두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과 동격으로서의 하나님, 2위에서부터 포커스를 둔다.
예수의 탄생은 곧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예수가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이었다는 것이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오심은 또한 만남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만남의 자리인 것이다.
J. 몰트만은 수많은 주검과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들음이 시작되었다. 바르트와는 달리 종말과 같은 위기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였다. 두 사람이 처했던 정황은 어떻게 보면 대조적이다.
바르트는 1914-1919년, 1939-1945년에 걸쳐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대에 속한다. 『로마서 주석』이 1919년에 제1판을 내고 1922년에 제2판을 발간했다. 이 신학은 18-19세기의 ?모더니즘?혹은 인간의 능력과 역사의 진보를 내세우는 19세기적 낙관론을 여지없이 깨뜨렸고, 19세기 개신교 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말한 ?No?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18-19세기의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심판과 ?위기?로 몰아넣었다.
몰트만은 전쟁터에 직접 참가해 있었다. 붓을 든 학자로서가 아니라 총칼을 든 군인의 신분으로 죽음을 목격하였다. 그가 살아있는 자체가 버림받은 존재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는 말한다.
“기독교적 종말론은 영혼을 위한 희망- 초기 실존주의에서 사용되던 용어 - 뿐만 아니라 몸을 위한 희망, 개인을 위한 희망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희망, 교회를 위한 희망일 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한 희망, 나아가서 우주를 위한 희망을 가르친다.”
몰트만은 골고다 언덕에 놓여진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거기서 그는 『희망』을 발견하였다.
그가 서있는 자리는 바르트와는 다르다. 그의 신학이 미래를 향한 열려진 빛으로 그리스도를 비춘다고 하지만 그 빛은 반사된 빛이다. 바르트는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빛이요, 몰트만은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빛이다.
우리는 두 사람의 신학을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에게서 사도 바울로 이어지는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위기’를, 또 한 사람은 ‘희망’을 전개했다. 그것은 그들이 서있는 자리, 곧 하나님과 만난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변화는 시각의 차이에서 온다. 사람에 따라 부정이 될 수 있으며 긍정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부정이 나쁜 것이며 긍정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흑백논리는 인류를 발전하게도 하였으며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도 하였다. 인류의 분쟁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하자면 이념분쟁, 종교분쟁, 신학분쟁이다.
20세기를 정점으로 인류의 이데올로기(Ideologie)는 사라졌다고 말한다. 바야흐로 21세기는 화합과 평화, 번영만이 있다고 한다.
세계사에서 인류의 오점을 남긴 전쟁이 셋이 있는데, 바로 이데아에서 나온 국가 간에 전쟁이며, 종교로 인하여 빚어진 십자가 전쟁이며, 구교와 신교의 갈등에서 온 30년 전쟁이 그것이다.
대다수인들이 국가적 필요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참여한 방어전으로 생각했거나, 폭력에 맞서서 정의를 지지하고 조약의 신성함과 국제적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이상주의적 견해를 갖고 연합군과 동맹국으로 나누어 전쟁을 벌이 제1차 세계대전은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사라예보를 순방중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함으로서 발단되었다.
동맹군의 패배로 전쟁은 끝났지만 패배한 독일 국민의 굴욕감과 베르사유조약의 가혹한 조항, 바이마르 공화국을 괴롭힌 사회혼란 및 정치불안은 극렬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지향하는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초래하였고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일보의 추축을 이룬 스페인 내란에 개입함으로써 추축국과 연합군이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로 인해 희생된 사람은 4,000~5000만명에 이른다. 특이나 유대인 대학살 사건은 민족성으로 빚어진 참극이라 하겠다.
인류는 이미 1095-1270년 이르러 십자군전쟁을 경험했다.
샬레만뉴에 의해서 설립된 신성로마제국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를 로마시대의 기독교로 되돌려 놓으려는 꿈을 어느정도 실현하였다. 정치적인 힘과 교권의 강화는 옛 로마제국의 국교 시절에 버금가는 영화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화되어 가는 기독교에 대한 반격도 일어났으며, 부패는 더욱 골이 깊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에 불어닥친 흉년으로 인해서 민심이 동요되기 시작하면서, 요아킴 피오레 등을 위시한 종말론을 부르짖는 신비주의자들은 교회에 대한 강한 도전세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들이 주교를 임명하겠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도전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레고리 7세의 결과적인 패배는 교황권의 약화를 불러일으킬 위협이었다.
이상과 같은 위협을 유럽 내부에서 더 이상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일반 민중들의 관심을 교회로부터 성지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일단 위기를 면해야 했다. 그리고 황제의 군대로 하여금 교황청이 아닌 회교도들을 공격케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함과 동시에 교황의 명령으로 군대가 동원되었다는 사실에서 황제들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을 지속시키려는 속셈을 달성하였다. 이것이 십자군이다.
30년 전쟁은 1618-1648년 사이에 일어난, 기독교 내부에서 구교와 신교가 종교개혁사를 마무리하는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물론 유럽 여러 나라들이 왕조, 영토 및 통상에서의 적대관계 등 다양한 이유로 벌이 전쟁이기는 하였으나,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의 자격으로 자신의 영토 내에서 가톨릭 절대신앙을 강요하려고 하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번지기 시작하였다. 이 전쟁은 독일 인구의 2/3가 훼손될 정도였으며 특이나 비텐베르그에서는 40만명중 8천명만이 생존하였고 목사만 300명이 사망하고 겨우 30명이 남았다고 한다.
금세에 이르러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게 하는 곳이 중동이다. 이념분쟁이 종식되었다고 하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이 그 위험의 수를 넘고 있으며 미국은 정의의 심판을 내세워 이라크와 그 주변국가를 위협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분쟁으로 핵전쟁을 유발시킬지 모를 위험 수위에 와있다.
인류가 있는 곳에 분쟁이 없을 수는 없다. 아무리 세계가 하나가 되고 그 생활권이 하루로 미친다고 하나 민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보수적인 기질을 무마시킬 수는 없다. 유럽연합이 태동할 때 기독교 내부에서는 종말의 징조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바벨탑 사건의 한 면으로 묘사했다. 기독교가 사양길에 서있는 유럽이 연합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그 증거를 제시하려는 시도를 문자적이며 알레고리적 방법을 동원하여 사용하고 있다.
20세기 말은 특이나 종말론이 기승을 부렸었다. 지구의 종말이 금방이라도 닥칠 것처럼 불안을 조성하였고 2000년이라는 수에 집착한 나머지 주님이 재림할 것을 아는 사람들처럼 세기를 ‘위기’로 몰아넣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21세기라는 새로운 2000년은 인류에게 밀레니엄이라는 컨셉을 설정하게 하였다. 곧 ‘희망’인 것이다.
21세기 기독교 통계(2002)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매년 4.7%의 성장으로 주요 종교와 1억이 넘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것은 인구 성장률을 포함해, 지난 10년 동안 평균 600만명의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생겨났다. 로마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를 포함한 그리스도인은 1990년 3억에서 20세기에는 4억 2천만명으로 증가했다. 이중 1천 7백만명을 제외한 4억 3백만명은 개신교 개혁주의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다.
그러나 1900년 34.5%를 성장하던 기독교는 20세기에 와서 32.5%로 감소했다. 이에 비해 이슬람은 20세기 초 세계인구의 12%를 차지했으나 20세기 말에는 21%로 급성장하였다. 이와같은 추세라면 2060년에는 이슬람이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세속주의와 자유주의, 공산주의, 대량학살 그리고 감소하는 출산율이 기독교의 감소의 주된 요인으로 꼽는다.
불신자와 신자의 비율은 35개국에서 300:1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비율이 가장 큰 나라는 소말리아로 67,374:1이고 미국은 2:1에 이른다.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인을 12로 하였을 때. 북아메리카는 2, 남아메리카 2, 아프리카 3, 아시아 3, 유럽 1, 태평양 1이 된다.
북아메리카가 전체 인구의 30%가 그리스도인이며, 2000년대 기독교 대륙이라고 생각했던 아프리카는 14.8%만이 그리스도인이며, 아시아가 3.6%, 유럽이 2.4%이다.
이와 같은 자료들을 놓고 볼 때에 기독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위기?에 놓여 있음이 확연하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 지배함에 따라 세계는 평화로워 보인다. 모든 분쟁이 사라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강대국이 지배하고 주도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사로 남아있을 수는 없다. 그 균형에 따라 이념분쟁의 요소는 불씨로 타오를 것이다. 그렇지만 이디아가 인류를 멸망시킬 확률은 없다. 세계 1, 2차 대전을 경험한 인류가 또다시 다른 명목으로 3차 대전을 시도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보다는 우주를 겨냥하여 적이 아닌 공동체로서 동맹자의 관계를 지속하리라 본다.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
종교분쟁이 또 다시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을 확률도 희박하다. 물론 이슬람이라는 실세가 기독교를 압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예루살렘 성지가 그곳에 있고 유대인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과의 보이지 않는 앙금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적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기까지에는 아직도 많은 세대를 필요로 하고 있다. 교황이 유감을 표시하고 그들 의식에 참여했다고 해서 분쟁이 끝났다고 볼 수는 없다.
돌이켜 인류는 역사에 묻고 있다. 왜 우리가 그와 같은 전쟁놀이를 해야 한단 말인가?
무모하고 어리석고, 누구를 위한 꼭두각시놀이를 할 만큼 우리는 바보스럽지는 않다. 역사의 거울이 우리를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일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신학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30년 전쟁을 돌아본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세계대전과 종교전쟁은 휴전으로 역사 속에 영원히 고정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끝났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남과 북으로 나누어 있지만 내 겨레요 내 동포이며, 본래 하나이던 땅덩어리를 강대국에 의해서 갈라진 만큼 언제간은 하나가 되어야 함이 인지산정이다.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신학분쟁은 그 성질이 다르다. 종교개혁사를 통해 겪어야 했던 기독교인의 치부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요, 성장을 위한 훈련과 연단이었다.
‘위기’와 ‘희망’을 논하다 새로운 장르를 전개해 산만함 감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이 바르트 신학과 몰트만 신학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반문할 요지도 많다. 나는 앞서 신학의 기초를 여러번 되풀이하여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위기’와‘희망’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것은 신학자 바르트가 본 ‘위기신학’과 몰트만이 본‘희망신학’에서 우리가 그들의 시각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곳은 나와 하나님, 당신과 하나님, 우리와 하나님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의 정체성이다.
역사의 거울을 통하여 본 30년 전쟁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단지 그것이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역사를 간직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꼽는다. 에큐메니칼(WCC)신학이 ‘세계범종교연합’을 지향하여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편승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또한 그 근원을 K. 바르트에게서 시작하고 있으며, 에큐메니컬운동이 기독교의 유일종교사상을 포기하기까지 하면서 타종교와의 대화와 화해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후기 Tillich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한때 에큐메니칼 기독교의 견인차 역할을 한 신학자 Paul Tillich의 세계 범종교 공동체 사상(The commonwealth of the world-concept)에 힘입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20세기 후반기의 독일 신학자들은 Moltmann 과 Pannenberg를 포함하여 거의 모두가 기독교 유일 종교사상을 기각함으로써 이 세계 범종교공동체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위기』는 무엇이고, 『희망』은 무엇인가?
쓰라린 전쟁을 수없이 겪어낸 인류는 그것이 이념분쟁이든 종교분쟁이든 신학분쟁이든 위기감을 느껴왔다. 승자나 패자나 그 피해는 절망적인 것에 가까운 것이며 인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 속에서 희망은 인류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결국 ‘위기’ 속에 있는 인류가 택한 길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인류는 평화를 원한다. 인류는 화합을 원한다. 인류는 번영을 원한다. 세계대전으로 국제연합이, 종교전쟁으로 세계범종교연합이 결성되었다.
그렇다면 신학전쟁 후에 기독교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 세계교회협의회와 로마 바티칸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기구는 될 수는 있으나 연합체라고 볼 수는 없다. 타종교에 있어서도 그 양상은 같다 하겠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 만큼 잔인하고 참혹한 전쟁사를 치러낸 종교도 없다. 30년에 걸쳐 단지 구교냐 신교냐의 나눔에 따라 무수한 생명이 희생이 되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위한 전쟁은 아니었다. 로마 피의 황제 네오 치하에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그 하나로 처형을 당할 때 그 희생은 보배로운 자랑이 될 수 있었고 세계사에 있어서 우리들의 긍지와 자부를 갖게 한다. 어떤 종교가 그같은 피를 흘리며 승리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인류의 가장 값진 진주였다. 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30년 전쟁이 치러낸 희생은 개죽음과 같다. 그로 인해 유럽지도가 바뀌고 개신교가 인정을 받고 그 위치를 동등하게 차지하였다 하나, 그 희생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를 살펴볼 때는, 신학이 그와 같이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때도 다시 없을 것이다. 이시기가 우리에게 있어서는 중세의 타락과 몰락보다 더 참담한 암흑시대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하나님이 우리와 없던 시대였다. 그것은 말라기 이후 마태복음서로 이어지는 공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장로교 칼빈, 감리교 웨슬러 등의 신학이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신학사의 ‘희망’이었다.
바르트와 몰트만의 신학은 칼빈주의에 입각하여 있음을 보게된다.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고 하나 칼빈주의 본고장인 스위스에서, 그리고 독일에서 사상적 체계를 갖춘 그는 칼빈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다. 그의 신학의 칼빈주의적 입장에 설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신앙의 모태는 칼빈의 시각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자유주의 신학에 정면 도전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던 힘의 모티브(motive)는 칼빈에게서 찾아야 한다.
몰트만의 신학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동방정교회, 로마 카톨릭 신학, 제3 세계의 신학들과 카리스마 공동체들의 신학과 대화하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그는 에큐메니컬(Ecumenical) 신학을 지향했다. 그는 “각각의 전통이 결코 세계적 크기의 에큐메니컬 공동테 안으로의 합체를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의 종말론적 복음이해와 종말론적 삼위일체론은 복음과 삼위일체론을 ‘신앙과 직제’전통과 공유하고 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하면서, 이 땅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야 하는 교회의 책임에, 에큐메니컬 선교 역사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삶과 봉사’전통의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정의, 평화, 창조의 세계의 보전)를 포함시키고 있다.
초기 그의 신학을 보면, 1968년 출판된『페젤과 브레멘에서의 칼빈주의』(Pezel und der Calvinismus in Bremen), 1961년 출판한 『예정과 견인』에서와 같은 신학사적 논구에서 몰트만은 개혁주의적 전통에 대한 그의 깊은 정취(情趣)를 증거한다. 몰트만은 신을 떠난 희망없는 고통과 죽음으로 나타나는 현실 속에서 현재 경험되는 것에 모순되는 희망의 정열을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 칼빈에게 적극적인 영향을 받았다. 또한 칼빈의 신학과 구개혁주의적 전통을 나타내는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 의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칼빈 신학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스스로 제시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 은혜,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포커스에 입각한다면 바르트나 몰트만의 신학은 적극적으로 개혁을 주도한 칼빈의 전처를 답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의 ‘위기신학’과‘희망신학’이 태동한 것이다.
오늘날 장로교는 칼빈의 정통성을 추구한다고 하나 칼빈니즘에 순수성을 잃은 것만은 사실이다. 칼빈이 추구하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그의 이상을 그대로 순종하려는 교회는 없다. 장로교 신학이라는 차원에서 칼빈주의를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 교단과 교파를 분리하기 위한 경계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감리교나 성결교나 침례교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희망적이다. 만일 칼빈의 시각으로만 하나님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이 위기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이 보낸 서신을 보고자 한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1:11-13)
에베소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었다. 두 항구 사이에 오가는 선박을 통한 왕래에서 들리는 소식은 바울을 근심케 하는 것들뿐이었다. 바울의 노고 어린 전도사업 중 가장 찬란히 그 빛을 발하던 고린도교회가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고린도의 부도덕과 부패가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첫째가 분쟁에 관한 소식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고린도 교회의 ?위기?였던 것이다. 또한 바울이 이 서신을 쓴 것은 고린도 교회에 ?희망?을 주고자 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유의 말씀으로 ‘위기’와‘희망’을 정리하고자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그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러 화목하라”(막9:50)
소금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바다에서 얻은 소금이 있는가 하면 육지에서 얻는 소금도 있다. 그 색깔도 이렇다 하고 한가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금은 짜야 한다. 그것이 그의 성질이다.
역사를 두고 신학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근본주의, 세대주의. 경건주의, 신비주의, 자유주의, 정통주의, 복음주의 등이 있는가 하면, 신학자들에 따라 ‘위기신학’ ‘비신화화’ ‘구속사’ ‘세속화신학’ ‘상황윤리’ ‘소망의 신학’ ‘역사의 신학’ ‘진화론 신학’ ‘과정신학’ ‘존재의 신학’ 등으로 불리어 진다.
그런가하면 개혁자들에 의해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오순절교회’ 등이 세워졌다.
이 모두를 집약해서 바꾸어 말하면 형태인 것이다. 소금이다.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가 되는 것이다. 소금의 본질은 짜다, 이것이다. 모양이 어떻고 색이 어떻고 어디서 나왔든 간에 소금은 짜야 한다. 그래서 신학의 본질은 하나님이시다.
신학자가 신학의 형태는 있으되 그 속에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이 없다면 그 신학은 형태만 있을 뿐이다. 만일 그 본질을 왜곡하였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이단이라고 규정짓는다. 소금이 만일 달다고 하면 그것은 소금이 아닌 설탕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오인을 하고 설탕을 넣을 때가 있다. 설탕과 소금의 형태는 비슷하다. 맛을 보지 않고는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그 용기에 소금, 설탕하고 써놓는다.
소금을 넣을 차례에 설탕을 친다면 그것이 ‘위기’가 된다.
교회가 건물과 간판만 있다고 해서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 종교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 본질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인치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에게 ‘위기’가 된다.
반대로 ‘희망’은 무엇인가. 소금이 짠 성질을 갖고 있기에 귀하게 쓰여지는 것이다. 신학자가 그의 신학을 인정받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숨쉬기 때문이요. 교회가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이요, 그리스도인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주께서 그를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러면 ‘위기’와‘희망’은 반대되는 개념인가?
역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만일 인류에게 ‘위기’가 없다면‘희망’은 없는 것이다.
헨리 클라우드?존 타운센드 저서 『No!라고 말할줄 아는 그리스인』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진정한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저술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이와 같은(명확한 정체성을 지닌 두 주체)바운더리(boundary)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바운더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잘 닮을 수 있도록 돕는다. 바운더리는 하나님을 진실된 모습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삶을 결정할 수 있게 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과 요구들을 완수하고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그분의 일을 대신해주려 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또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우리 일을 대신해주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 당신 일을 하신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 속에서 강한 능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무능력 속에 갇혀버린 자들에게 깨달음과 자유로 가는 출구를 제공해준다고 리치 블러는 말한다.
이 책은 우리의 삶 속에 바운더리(boundary)라는 컨셉을 설정해 놓고 No라고 할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위기’를 ‘희망’으로 바꿔주려 하고 있다. 나, 나와 타인과 관계에서,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킴으로써 자신과 타인에게, 또한 하나님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어느 교수가 강의 시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장로교 목사가 칼빈주의를 신봉하지 않으면 장로교 목사라 할 수 없다.
맞는 말이다. 장로교 신학을 하면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주장한다고 한다면 장로교 목사의 자격이 없는 지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장로교 신학, 감리교 신학, 성결교 신학, 순복음 신학 등과 같이 격리되어 그 신학에 따라 장로교 목사 감리교 목사, 성결교 목사로 구분되어지는가 하면 신도들도 장로교 교인이냐 감리교 교인이냐 하는가 하면, 장로교는 기장이냐 예장이냐로 예장은 합동 통합 등으로 세분되어 있다. 그래서 같은 기독교인들이 만나서 인사를 할 때도 그 족보를 나누느라 한참을 따져보아야 하고 정통성을 놓고 힘 겨루기를 하기도 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기독교인의 감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급진전하고 있는 이슬람교도 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세속주의에 물들은 무신론, 무종교인에 있지도 않다. 우려 속에 있는 범신론에 있는 것도 아니다.
소개한 저서에 바운더리를 저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 바운더리 개념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명확하게 구별된 존재로 드러내며, 당신 자신에 대해 분명하게 책임지신다. …
바운더리는 우리와 다른 무엇과 구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우리에게 시작할 지점과 마쳐야 할 지점을 가르쳐 주는 것…
물리적 세계에서는 담장이나 다른 종류의 구조물로서 바운더리를 나타낸다. 영적인 세계에서, 바운더리를 둘러싼 눈에 담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로 훌륭한 보호막을 만들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바운더리를 세우는 단어는 ‘아니오(No)’다. … 태도를 명확히 하는 것 -‘예’와‘아니오’- 은 성경 전체에 걸쳐 흐르는 주제이기도 하다(마5:37, 약5:12)”
레크리에이션에 ‘깃발놀이’게임이 있다. 두 팀으로 나누어 깃발을 먼저 꽂는 팀이 승자가 된다.
전쟁은 이와 흡사하다.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 목적이 어디에 있든 깃발을 올리는 나라가 승리하는 것이다. 그 병사들은 그 깃발만을 올리기 위해서 싸운다. 수비하는 쪽은 깃발을 고수하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이유가 없다.
종교전쟁도 이와 같은 것이다. 자신들이 숭상하는 깃발을 올리기 위해,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신학전쟁의 깃발은 무엇이었나 하면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그 깃발이었다. 십자군은 십자가가 그들의 깃발이 되었지만 신학전쟁에서는 그 깃발이 바뀌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든 놋뱀을 들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념전쟁의 바운더리는 자국을 위한, 정의를 위한 깃발이었다.
종교전쟁의 바운더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알라 하나님의 깃발이 있었다.
신학전쟁의 바운더리는 카톨릭 하나님과 프로테스탄트 하나님이었다.
그후 개신교는 장로교 하나님의 깃발, 감리교 하나님의 깃발, 침례교 하나님의 깃발 등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깃발을 역사에 꽂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바운더리인 셈이다.
신학자들에 의해 교파가 나누어지는 다반사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이 위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희망이다. 한 나라의 깃발이 있으면 그 나라에 속한 깃발은 무수히 많으며 그 종류도 다양하여 자국의 이익과 명예와 긍지를 심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그러나 그 깃발들이 그 나라를 대변할 수는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전쟁만큼은 명분이 있어야 한다. 이념전쟁이나 종교전쟁은 그 명분이 뚜렷하다. 물론 동기가 어찌되었든 누구를 위해 희생을 치렀던 명분에 있어 손색이 없다 하겠다. 그렇지만 신학전쟁은 다르다. 그것은 하나의 힘 겨루기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해 싸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우편에, 좌편의 자리를 놓고 분하였던 것(막10:35-41)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오늘날 신학의 위기는 교회의 바운더리가 잘못 설정되어 있는 데서 온다. 사람이 사는 것에 분쟁이 없을 수는 없다. 분쟁은 위기가 결코 아니다. Yes 와 No는 역사를 구르게 하는 에너지이다. No는 부정을 의미하지만 정지를 전제로 한 브레이크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방향이 다를 뿐이고 역사를 움직이게 한다. 인류의 위기는 역사가 멈출 때 일어나는 것이다.
신학의 정체성은 부패와 타락만을 조성한다. 칼빈이 꽂아 놓은 깃발만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칼빈니스트는 진정한 칼빈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다. 칼빈의 신학은 칼빈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칼빈이 만난 하나님을 웨슬러의 하나님으로 착각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칼빈주의는 칼빈의 관점에서 연구되어지고 발표되고 체계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곧 칼빈신학이다.
그러나 모든 신학을 칼빈의 시각으로 조명하고 규정하려 든다면 그것은 세상 고등학문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하자.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논리를 전개하는 데 문제가 있고 위기가 있는 것이다. 다만 깃발놀이를 하듯이 그릇된 바운더리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마치 칼빈이 만난 하나님을 자신이 만난 하나님으로 착각하며 교만과 오만에 갇혀있다. 칼빈을 통해 들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과의 거리에 칼빈이 가로막고 있어서 모든 시각을 칼빈에게 포커스를 맞추려하고 한다. 그에게 칼빈을 빼놓고 이야기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자부심이요 명예인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에서 아무것도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명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우리에게 No!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바운더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일대 일로 만나시기를 원하신다.
오늘의 신학은 고민하지 않으려는 데 문제가 있다. 칼빈의 이름으로 회피하거나 정당화 하려드는 데 그 한계가 있다. 신학자 칼빈이 고민하면서 만난 그 하나님을 칼빈의 이름을 빌어 쉽게 하나님을 만나려 들고자 한다. 그리고 모든 논쟁을 칼빈의 이름으로 거부한다.
루터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스승들의 전례를 답습하면서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나도록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수도사들이 체험하는 고행을 자처하면서 그는 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는 지 우리에게 말해 준다.
칼빈이 깃발을 꽂았다고 해서 그곳이 정상은 아니다. 칼빈은 고민을 하면서 자신의 깃발을 꽂았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그 깃발을 들고 올라가 주기를 원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산에는 많은 깃발이 꽂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옛날 모세가 오르내리던 시내산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K. 바르트의 고민은 무엇이었나?
많은 신학자들은 바르트를 가리켜 부정(否定)에 머물러 버린 신학이라고 평한다.
카톨릭 신학자 폰 발타자르(Hans Ure von Balthasar)는 그의 『칼 바르트 - 그의 신학의 설명과 해석』에서 바르트는 ‘절망 속에서 표현하며 이것이 곧 비극’이라고 비평한다.
틸리히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방법에서 정(正)보다 반(反)이, 긍정적인 역설보다 비판적인 역설이 지배적이라고 비난한다.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주석』제2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제 지금 내놓는 나의 이 로마서 주석의 ‘내용’에 관한 사항으로서 내가 피력하고자 하는 것은 삼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괸심사는 소위 순전(純全/ ganz)한 복음이라기 보다는 ‘현실적인(wirklich)’복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모든 측면으로부터 동시에 드러내지 아니한 바, 곧 현실적인 복음을 파악하는 길을 파악하지 않고는 순전한 복음에 도달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길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위기’는 하나님의 부정에 있다. ‘아니다’가 인간에게 현실적이 될 때 그 순간부터 위기가 온다고 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바운더리, 인간의 바운더리를 외친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하늘에, 인간은 땅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이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거리가 그것이다.
바르트의 위기신학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찾아야 한다.
마26:36-46, 막14:32-42, 눅22:40-46, 요18:1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민을 만나게 된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사람의 모습으로 예수님은 간절히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예수,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세 번씩이나 계속되는 그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아니다’와 ‘그렇다’를 보게 된다. 예수의 청원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은 분명 ‘아니다’이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을 포기하는 순간 ‘그렇다’가 된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앞에 것은 예수의 바운더리요 뒤에 것은 하나님의 바운더리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였다.
또한 앞에 것은 하나님의 바운더리요 뒤에 것은 예수의 바운더리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예수가 땅에 있는 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게 된다. 그 순간, 예수에게는 위기이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되는 것이다.
체험의 신학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현실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거리는 ‘아니다’이다. 그러나 자신을 포기하고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때 ‘그렇다’된다. ‘오직 은총으로만’이 긍정이 되는 것이다.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칼빈은 자기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체험을 통해서 신의 은총의 절대성을 느꼈다. 특히 칼빈의 은총 절대주의는 말년에 이르러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기계론적 이중 예정설의 교리가 되고 말았다.
바르트는 바울이 강조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는 예정이란 말 대신 ?은총의 선택?(die Gnadenwahl)을 사용했다.
그의 신학을 은총의 선택에 의한 기독론적 보편예정론이며 범구원론에 속한다고 비평을 한다.
바르트의 역사관에 있어서, 그는 역사를 Historie와 Geschichte로 구분하는데, 두말은 역사라는 뜻은 같으나 독일어의 내포된 의미로서 전자는 객관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과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총화이고 후자는 나에게 실존적으로 부딪히는 일들,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하며 내 결의를 촉구하는 이들을 말한다. 바르트는 예수의 부활을 후자에 입각하여 우리가 만나야 한다고 보고 있다 - Cornelius Van Til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가 바르트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상가나 신학자들 눈으로 그를 보아서는 안된다. 사상의 흐름이나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해석해서도 안 된다. 물론 그들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의 신학의 기초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그의 신학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바르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아야 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 만남이 있어야 한다. 그는 다만 칼빈의 깃발을 들고 올라가 그의 깃발을 꽂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가 칼빈보다 더 가까이 하나님 앞에 갔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금물이다. 역사 위에 깃발을 꽂은 신학자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고민을 통하여 깃발을 만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는 인간적인 예수였다. 그의 고민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진정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현실적인 참여가 일어날 때, 말씀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긍정이 있게 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바울의 로마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다. 그가 느낀 위기는 부정이었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부정으로 위기에 처해지게 된다. 바르트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몰트만의 고민은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에서 찾아야 한다. 곧 마27:46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의 처절한 부르짖음. 도저히 하나님 아들이라고 볼 수 없는 절규와 버림받음. 철저하게 유기 당한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의 신학은 십자가 밑에서 시작된다. 그의 신학은 미래를 향하여 열려져 있고 종말론적 성격으로 현실 속에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과제가 그에게는 중요하다. 그것은 그의 희망의 신학이 종말론적 시야로부터 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예수의 고난은 하나님의 참여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53:4-5)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버림받은 예수, 유기된 예수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가 그 고난에 참여하고 계셨기 때문이며, 그의 침묵은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는 소망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종말론은 기독교의 희망론을 의미한다. 종말론은 기대된 것과 그것에 의해서 움직여진 희망을 포함한다. 기독교는 다만 하나의 부록이 아니라,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희망이고, 앞을 향한 전망과 성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현재의 혁신과 변화이다. … 종말론은 메시야에 의해서 일어나는 고통과 수난이다. …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이나 세계 밖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엑소더스(Exodus)와 이스라엘 예언에서 알려진 바와 같은 ‘희망의 하나님’(롬15:13), ‘존재와 본질로서의 미래’(E. Bloch)를 가진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 속에나 자신을 넘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신 앞에서만 가질 수 있는 하나님, 그의 미래의 약속에서 인간에게 만나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인간이 ‘가질 수’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적극적인 소망 속에서 기다릴 수 있을 뿐인 하나님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이 말하는 미래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부활에 근거하기 때문에 소망이라는 말이 ‘로고스’(logos)의 형태가 아니라‘약속’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술어는 그가 누구냐, 그가 무엇을 말했느냐 만이 아니라, 그가 장차 무엇이 될 것이냐(what he will be), 그에게 무엇이 기대되느냐를 포함한 술어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소망이다(골1:27). 소망의 명제는 고난과 죽음이 경험되는 현실과의 대결에서 형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누구냐(who is man), 인간이 무엇이냐(what is man). 내가 누구냐(who am I)하는 질문들은 하나님의 사명(divine mission)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발생한다. 이러한 자기의식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라는 하나님의 소명에 직면해서“내가 누구이길래…”(출3:11)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며, 이사야(6:5), 예레미야(1:6)선지자가 당면했던 사명(mission)과 소명(call)이다.
그의 역사관은 항상 새로운 것이 나타날 가능성으로 보았으며, 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명의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며, 이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사명에 응답함으로써 역사가 참역사가 되며 우리는 참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고민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다. 이것은 데카르트와 같은 희랍적 사고가 아니라, 바울을 통하여 바라본 하나님이었다.
들음은 어디에나 있다. 바르트와 같이 하나님의 초월적 자아 계시(transcendental self-revelation)에서 또는 몰트만의 본래적 자아의 드러냄(disclosure of authentic selfhood)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르트가 만난 하나님, 몰트만이 만난 하나님이다. 우리는 바르트를 통해, 몰트만을 통해 하나님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업적을 치하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 위에 나타난 하나님은 각기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의 예수의 성화나 상이 우리를 위로하게 만든다. 성지순례를 통하여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위로를 받을 뿐이다.
우리의 참여는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을 해보고 골고다 언덕에서 고민을 해 보는 것이다. 바울과 함께 고민하며, 루터나 칼빈과 함께 고민하며, 바르트와 몰트만과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이 내 앞에 서있을 것이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 바울이 만난, 하나님, 칼빈이 만난 하나님, 바르트와 몰트만이 만난 하나님을 내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 백성과 같이 모세만을 바라볼 때가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간 그의 제자들처럼 잠들어 있을 때가 많이 있다. 모세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금송아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즐거워하며 춤을 추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날에 그 제자들은 피신하여 숨었으며,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며 저주하였다고 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거리도 있어서는 안 된다. 들음은 무엇을 통하여 이루어지나 만남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는 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가까이 다가오신다. 그러나 만남이 없다면 우리는 단지 그 하나님을 보았을 뿐이다.
바르트는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다. 몰트만은 ‘희망’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신학을 ‘위기의 신학’ ‘희망의 신학’이라는 컨셉(concept)을 설정하였다.
컨셉은 모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의적인 발견이 없이는 컨셉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두 컨셉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된다.
‘위기’와‘희망’은 상반된 개념을 갖고 있을 수 있으나 - 부정과 긍정- , 그것에 동질성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위기만을 부르짖는 자는 그 위기 속에 갇혀 파멸할 것이요, 희망만을 부르짖는 자는 그 속에서 타락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신학의 부재에서 오고 있다. 그들은 ‘위기’만을 말하고‘희망’만을 노래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무엇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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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 정경연 역, 『교의학 개요』(성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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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서)
____________,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박봉랑 역, 한국신학연구서)
____________, 『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이신건 역, 한들출판사)
John Calvin 『기독교강요Ⅰ,Ⅱ,Ⅲ,Ⅳ』(성문)
Herman Ridderbos저, 『바울신학』(박영희역, 개혁주의신행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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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타C. 미어즈 저, 『미어즈 성경핸드북』(구영재 역, 아가페)
차종순, 『교회사』(한국장로교출판사)
Justo L. Gonzalez 저, 『종교개혁사』(서영일 역, 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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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Augustin 저, 『참회록』(오병학, 임금순 역, 예찬사)
Henry Cloud and John Townsend 저, 『No!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차성구 역, 좋은씨앗)
조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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