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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이기는 길 (성탄절 설교) 마1:21

by 【고동엽】 2024. 11. 24.

죄를 이기는 길 (성탄절 설교)        마1:21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날에 이 땅에 오셨어요.
우리는 이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분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디에서 태어났고, 이걸 우리는 오랫동안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좀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해요. 
그분이 이 땅에, 우리에게 오셔서 <무엇을 해주셨나?> 하는 거예요? 

도대체 그분이 우리 인류에게, 가깝게는 나에게 무엇을 해주셨기에
우리는 이토록 주님의 태어남을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하고
기쁨으로이 날을 맞이하느냐 하는 거예요.
 
물론 작은 건 아니겠죠.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봐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에게 해주신 일들이 뭔지
주르륵 좀 이렇게 목록을 만들어 봤더니 1백 가지가 넘어가요.

그걸 오늘 다 볼 수 없으니까,  딱 하나만 볼게요.

오늘 본문 성경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분이 오셨는데
자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오셨나요?'
그게 주된 목적이 아니에요.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성탄절에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이에요.
이 구절의 의미를, 오늘 이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죄에서 구원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이 선물을 받으면 이제부터 죄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뜻이에요.
즉, 우리가 지속적으로 짓는 죄로부터 구원된다, 자유롭게 된다, 놓임 받는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칭의구원을 받은 후에, 성화구원을 이루어, 결국 새예루살렘 성에 
넉넉히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이냐 ?
이거는 '내가 다시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삶이 아니라
죄를 이겨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삶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냐면요. 지금까지 우리는
기껏 이렇게 살았어요. 우리 인생의 높이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몇 평짜리 집에서 살까?
서울에서 살까, 부산에서 살까?' 이런 걸 추구하는 삶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차원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다른 걸 추구하게 된대요.
왜냐면 이젠 영원히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분이 죽는 사람들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라면.. 뭔가 달라지겠죠.
이때부터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뀐대요.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는 이 땅에서도
영원히 사는 신분으로 살아가는데... 여러분 솔직히 그렇게 지금 살고 계신가요?

솔직히 예수 믿은지 10년 된 사람, 5년 된 사람 이렇게 있는데
'야~ 나는 완전 신분이 바뀌었어, 나는 안 믿는 세상사람들하고 달라 졌어!'
뭐 이렇게 체감이 되냐 하는 거예요.

되는 분도 (소수) 있고, 안 되는 분들도 있어요.
대부분 대답을 안 하고 다 저를 노려보시는데 하하하
'말이 되는 말을 해라!' 이런 식으로 저를 쳐다보시는 눈빛이네요.

우린 이걸 보려고 그래요. 
이 선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래야 '지금 나한테 그게 있는지 없는지..
내게 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누리질 못했는지 우리는 알아야 되겠죠. 
 
오늘은 그 시간을 가지려고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죄에서 구원"이란게 뭐냐?
"죄에서 자유함을 주신다"는게 뭐냐?
 
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대신에 살았어요. 우리는 이제 죄가 없어졌어요.
이것이 복음이잖아요. 여러분들이 이걸 알아요. 이걸 믿어요.
 
그래서 이걸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죄를 찾지 않아요.
 
내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셨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었다는 복음을 받아들였더니

구원의 기쁨을 크게 경험한 사람들도 있고 
서서히 경험해 가는 사람도 있고
내 영혼 안에서부터 경험하다 보니까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암튼 그래도 다 이걸 받아들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됐어요. 
 
예수님을 믿긴 믿었는데 근데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 가면 모든 죄가 용서됐다는 걸 아는데.. 여기까지예요.
여기까지는 아는데 그 이상은 살지 못하는 걸 저는 너무 많이 봤어요.

그러다 보니까 성경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죄에서 해방된 기쁨,
세상 권세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세상에서의 해방,
그리고 하나님만이 주신다는 평안, 그리고 소망
천국이 눈에 보이는 현실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소망, 지혜, 용기!
이런 것들이 과연 우리 마음에 막 철철 넘치던가요? 

그렇지가 않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아 그건 그냥 성경에 있는 말이고
내 삶은 내 삶이고..' 이렇게 이중적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고 충격으로 받았든지, 점진적으로 받았든지
예수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시작을 해요.
 
어떤 생활을 시작을 하냐면요.
규정(율법)으로 가득 치장된 삶으로 들어와요.
 
주일날에는 어디 가지 말고 꼼짝없이 교회 나와서,
꾸벅꾸벅 조는 한이 있더라도 예배를 드려야 돼
 
그리고 일정량의 기도를 해야 되고
일정량의 헌금을 해야 되고
그것이 메마르든 말든, 기쁨이 있든 없든, 아무 상관없이 해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지극정성으로 하나님께 기도도 드리고
예배도 많이 드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주실 거야!
그리고 나는 죽으면 천국 갈 거야 ... 하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요.

마치 보험에 가입한 것처럼, 내가 죽으면 예수께서 나를
천국 데려가는 보험에 가입한 것처럼 우리는 산다는 거예요.

생기가 전혀 없어요. 성경이 말씀한 기쁨이 없어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기껏 이런 삶을
우리에게 주려고 그 무서운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이건 뭔가 아니잖아요. 왜 우리 신앙생활에 생기가 없을까요. 기쁨이 없을까요?
변화가 없고 성장이 없냐 하는 거예요. 
 
성경에 기록된 무수한 약속들은 다 하늘에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것들이고
그래서 우리는 북한에서처럼, 남한에서도 똑같이 메마르고 방황하며 살아요.

북한에서 우리가 김일성이 앞에 나가면 뭐 정치사상 학습 시간에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주체사상 교육과
김일성의 고상하고 이상적인 말들을 들으면서 아 그 앞에서 아멘 아멘하고
집에 가면 또 '그건 김일성의 말이고, 내 삶은 내 삶이고...' 하고
이중적으로 살았던 것처럼,
 
여기서 교회 생활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아 그건 성경에 있는 말씀이고.. 그 세상을 모르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세상은 세상대로도 살아야 돼!'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으로 삽니다.
 
기껏 이렇게 해주려고 예수님이 오셔서 그 십자가를 지셨냐는 거예요.
 
△제가 우리 교회에 들어온 성도님들은, 목사든 장로든 사정없이 새신자교육을
합니다. 그걸 하면서 느꼈던게 뭐냐면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복음을 모른다'는 걸 경험했어요.
 
그래서 복음이 뭔지부터 다시 가르칩니다.
'저는 구원은 받았는데 분명히 예수는 믿는데, 예수 믿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거예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주신 그 아름다운 성도의 삶이
어떻게 작동이 되는지를 거의 모른다..는 거예요. 그것부터 가르쳐요.

그래서 이 시간에 제가 그걸 다시 요약적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이 성탄이 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 중에 하나를
구체적으로 알아서 집에 가져가라고...
이제는 그 선물 받고 정말 기쁜 삶을 살자고...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만들어 주신 선물이라면 허접하지 않겠죠.
정말 인간이라면 상상도 못하는 놀라운 차원이겠죠.
 
그거를 오늘 제대로 알아서 집에 가져가서 그걸로 삽시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이걸 준비해 왔어요.
 
저는 지금 예수님이 우리의 인간에게 해주신 일들의 목록을 쫙 써봤더니
아 이것도 시리즈에요. 이것도 또 설교하고 싶은 거예요.
언젠가는 제가 이거 또 할 거예요. 쫙 이렇게...

▲우리는 다들 복음은 영접했어요. 그래서 기독교인이 됐습니다.
근데 그 이후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니까
자기 나름대로 정리해서 살아요. 어떻게 사는지 아세요?

예수님이 날 구원해 주셨대!
그래서 어떤 사람은 눈물로 받아들이고, 너무 고마워서 펑펑 울면서
그 다음에는 이렇게 하는 거예요.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그죠.
 
그리고 '나는 이제는 정결하게 살아야 돼!' 하고 죄와 전면전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죄와 싸우는 삶으로 달려 들어가요.  *율법주의, 도덕주의
그 고마우신 은혜에 보답하려고요.
 
그리고 세상도 우리를 그렇게 부추겨요. 
'너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너 기독교인이란게 이래서 이래서 되냐?'
그래서 우리는 마치 자기도 모르게 성인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죠.
세상도 우리를 그 길로 부추기고...

그래서 우리는 그 손가락질 받으며 더욱더 죄를 안 짓는 삶으로 달려가요.
그러니까 꼭 우리 뒤통수에는 이런 말들이 와요. 
가정이나 친구 관계에서 혼자 예수 믿으면
'너는 예수 믿는다는 게 그렇게 (그 따위로) 사냐?'

솔직히 괴롭죠.
그럼 또 '아~ 내가 또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더더욱 죄 안 짓는 삶으로 끌려가요.
 
이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교묘한 속임수이고 유혹입니다.
이 길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 실패해요.
 
그래서 이 길로 뛰어든 사람들은 꼭 두 가지 극단으로 몰려갑니다.
 
1) 첫 번째 극단은 이런 경우에요. 완전히 포기해요. 자포자기!
싸우다 보면 이길 때가 있어요. 가끔씩 막 감정이 고양돼 가지고
이길 만한 상대가 오면 이길 때도 있어요.
그러면 한없이 업돼 가지고 '하나님 나 오늘 이겼어요.
하나님 나 경건하죠?' 그리고 하나님께 나와요.
 
마치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서 말고의 귀를 잘라내고 그러는 것처럼
그가 바로 몇 시간 후 예수님이 수난 당하는 자리에서 저주까지 해버려요.
비참하게 허물어집니다.
오늘은 이긴 것 같았는데, 또 한두 달 지나면 비참하게 허물어지는 자신을 
또 경험하고 또 경험하고...
 
이러다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결국 떠나요.
그냥 아무 감정 없는 무뚝뚝한 선데이 크리스찬 되든지..
아니면 교회를 아예 나가버려요.
 
제가 그랬어요. 제가 중국에서 정말 뜨겁게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때부터 나는 죄를 안 지으려고 온갖 노력들을 다 했어요.
 
그리고 한국에 왔는데 윤리 도덕적으로 저보다 굉장히 수준 높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근데 더 당황스런 것은, 그 사람은 예수도 안 믿어요,
불교도 안 믿어요..  근데 윤리적으로 너무 수준 높은 거예요.
그럼 나는 한없이 비참해져요. '도대체 나는 예수 믿는다는 사람인데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하고 도대체 뭐가 다르지?'
 
정직의 눈으로 내면을 바라보면요.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추하게 질투했고 미워했고
분노했고 음란했고 너무 너무 못한 거예요. 

그러다가 '나는 과연 예수님이 날 죄에서 구원한 거 맞아?'
의심하기 시작했고요.
어디까지 갔냐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셔?' 여기까지 갔어요.

그러면서 점점 교회 나가기가 싫어지고 
교회에서 하는 온갖 행사들은 다 쇼처럼 보이고
그냥 형식적인 행사처럼 보이고.. 하나도 감동이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한 때 교회를 떠났던 적도 과거에 있었습니다.

반드시 지고, 지고, 또 지다 보면.. 결국 이렇게 떠나요. 이렇게 주저앉아요.
이게 한 가지 극단입니다.   *율법주의, 도덕주의적 기독교

2) 또 다른 극단은, 이렇게 죄와 싸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처음에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죄악 싸우면서 좀 이겨요.
자질구레한 죄들을 안 지어요.
이제는 그래서 인정을 받는다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한테서 '경건하다. 거룩하다' 그래서 인정을 받아서
시간이 지나서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심지어 목사까지 돼요.

근데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건, 본인이 신앙생활 몇 년만 해 봐도 압니다.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요.
그러면 자기는 여전히 똑같은데
여전히 죄를 짓는데 이미 감투란 감수는 다 뒤집어쓰고 있는 거예요.
 
뒤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교회 떠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너무 깊이 들어봤어 빠꾸 back 해서 못 가는 거예요.
 
그러니 그럼 어떻게 하는 수밖에 없죠? 어떻게 해야 되죠?
이제는 죄 안 짓는 척, 위선적으로, 바리새인이 되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그러니까 교회 나오면 거룩한 척, 평소에 죄 하나도 안 짓는 척...
이러고 사는 거예요.

근데 어디 가서 들키는지 아세요? 집에 가면 다 들켜요.
아이들이 다 봐요. 그 삶을!

그래서 교회 직분자들의 자녀들이 고등학생 때까지는 부모들한테 끌려 나오는데
대학교만 가면 다 교회를 떠나버려요. 안 나와요.
왜요? 자기 부모들의 삶을 보니까, 세상 사람들하고 너무 똑같으니까,
변하는 게 없으니까 차라리 세상에 나가서 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기독교는요 다음 세대를 걱정하면서 살고 있어요.
왜 이렇게 된지 아세요?
그 사람들이 나빠서 그렇게 된게 아니고, 죄와 싸웠기 때문에
이길 수 없는 존재와 싸웠기 때문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과연 이게 복음일까요?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렇게 나약할까요?
기껏 그런 삶을 선물하려고, 예수님이 그 비참한 죽음을 당하신 걸까요?
이건 뭔가 아니잖아요.

이거는 분명히 잘못돼도 너무 잘못됐잖아요. 
저는 그래서 그때부터 심각한 의심에 빠졌어요.
 
그래서 나는 교회 다니기도 싫은데, 
하나님이 (제 마음에 감동으로) 신학교에 가래요.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자꾸 강권하시고, 삶의 환경도 제가 내몰리면서,
그래서 직장 관두고 (광나루) 신학교에 갔죠.
 
가서 저는 막 한없이 삐딱하게 살았어요.
저는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데
나는 어느새 전도사가 되어 있고, '믿어라'는 말을 해야 되는 전도사가 된 거예요.
 
나는 스스로 한없이 위선적으로 사는 것 같아서 너무 괴롭고
너무 나를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근데 주변 전도사들 보면 다들 너무나 거룩해 보였어요.
난 이게 거짓인 거, 위선인 것을 알아요...
 
그래서 교우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이런 위선적인 삶, 기독교 종교라는 형식적 신앙을 떠나서
진짜 참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참 복음은 분명히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 거잖아요...
 
▲자 그렇다면, 정말 성인 같은 사람이 기독교인일까요?
사탄은요. 세상은요. 우리에게 터무니없는 명백한 거짓말은 안 해요.
교묘하게 본질과 비본질을 뒤바꿔 놓습니다. 아주 참 말과 비슷한 거짓말을 해요.

우리에게 '너 예수 믿는다 하면서,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이제는 죄 짓지 말아야지.. 성인 같은 삶을 살아야지..' 이렇게 요구하는데
이게 얼마나 큰 거짓말인지 아세요?

경건한 사람 중에서 성인 같은 성품이 가진 사람이 나타납니다. 
근데 이거는 그 사람이 죄를 안 지어서 이렇게 되는게 아니고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거의 하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서 성인처럼 보이는 거지..

죄와 싸워서 늘 이겨서 성인이 된게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세상은 이것을 뒤집어 놓는 거예요.

마치 인간이 한없이 고매해져, 죄를 하나도 안 지어 가지고 성인이 되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한테 죄를 짓지 마라고 완벽주의를 요구하는 거예요.
 
마치 마귀가 그 사실 금식을 하신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요구하잖아요.
'이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봐, 그럼 내가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줄게!'
마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야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이 성전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널 안 죽게 해줄 거야!
이런 기적이 일어나야만 난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줄게!'
그래야만 하나님이 아들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하셨나요? 예수님이 왜 그 마귀의 요청대로 안 하셨을까요?
그걸 해낸다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게 아니니까!
 
예수님은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지금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데
돌로 떡을 만들어서 먹어서 하나님 아들이 되는게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완벽한 성자가 되었다고 해서,
고매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죄와 싸워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지 못합니다. 
(죄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님)

왠지 아세요? 우리는 죄를 이기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와서 대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다고요. 

그래서 믿는 자녀에게 우리 신분을 거듭남으로 바꾸어 주셨고, 
그 다음에는 성령을 보내사, 우리 속에 내주하게 하심으로써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우리는 죄를 이기는 성숙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게 되죠.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 가지고 "성령충만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주님의 형상을 날마다 본 받아 성숙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점점 죄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명예에 대해서,
질병과 죽음에 대해서 자유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요8:32
쉼이 있는 삶을 살게 되죠.  요14:6

하나님은요. 우리에게 죄와 싸우는 길도 아니고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
윤리 도덕적으로 성인이 되는 길도 아닌 
전혀 새로운 길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 길이 뭐냐?        주1)

그래서 로마서를 잘못 배우면, 
성도가, 죄와의 싸움을 멈추는 거예요. 

왜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길 수 없는 상대이기 때문에 이제는 외면해 버리는 거예요.

그럼 죄를 (칭의 구원 받았다고) 맘대로 지어도 되나요? 
그건 또 아니잖아요. 

제가 여기까지 하면 구원파가 돼 버립니다. 이단입니다. 큰일나요.
그들은 칭의 구원 받았다고,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구원파는 여기까지만 깨달았어요. 여기까진 제대로 깨달았어요. 
그래서 구원파는 어떻게 주장하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가셨어요.
맞아요. 우리 모든 죄를 가져갔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짓는 미래의 죄까지도 다 가져갔어요.

그렇게 한 면만 믿으니까, 제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요. 
이게 구원파예요.

▲그럼 도대체 뭐냐? 진정한 구원, 참 구원은 뭐냐?
롬1~4장에 '칭의구원'을 받은 성도가
변화된 심정으로 
롬5~8장까지 '성화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나의 (습관적인)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마1:21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주님의 계명을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명과 사명을 지키는 삶을 따라간다면 
반드시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성령이 와요. 
성령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만 (강하게) 옵니다. 왜 오는지 아세요?

이렇게 죄에서 구원받는 삶, 주님의 계명을 자원해서 지키는 삶이란
맨날 교회와서 예수님 찬양하고, 기도만 하는 그런 삶인가요? 아니죠.

예수 믿는다, 예수 따라간다.. 이 말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간다는 말인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제자들에게 '내가 새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게 로맨스 하라는 게 아니고,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죠.
'나 처럼 진리안에서 서로 사랑해!' 이걸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윤리도덕적으로 좀 완벽하지 않더라도
율법이 기준으로 좀 어긋하더라도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면 돼요.

'사랑'이란 큰 계명 아래,   마22:27~39
다른 자잘한 계명들이 다 흡수되는 거죠.

성령님이 오신 것은, 우리 인생의 문제(질병, 경제, 자녀)를 해결하려고 오신 게
아니라, 우리가 예수 따라가는 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오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그 뜻을 이루는데 우리의 좀 못난 것들이 있어서 걸리적거리면 
그걸 툭툭 쳐주는 거예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거죠.  마1:21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도 가지각색인데, 가짜가 있을 수 있어요. 
어떤 게 참 성령인지 아세요?

감정적으로 임하시든지/말든지.. 성령이 진짜 임하면, 죄에서 돌이키게 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죄에서 돌이키게 되죠.
아무리 중병을 고치든/말든지.. 죄에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가짜 성령이에요.

그리고 우리 안에 어떤 의지가 막 생기냐면?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가 막 생겨요. 
왜냐면 그분은 말씀의 영이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이게 진짜 성령이에요. 

그런데 이거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막 감정만 고양됐다가 식어버려... 이게 성령의 역사일까요?
의심해 봐야 돼요.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없는이 감정적인 충만들이 많거든요. 
그건 정말 의심해 봐야 됩니다. 

△자 그래서 막 이렇게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임해서 
말씀을 추구하고 '나 이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래! 하면서 
갑자기 미워했던 남편도 막 예뻐해주고 
날마다 성경 묵상하고 살면... 이 사람 앞으로 죄를 지을까요, 안 지을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죄를 짓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를 한순간에 핵가닥 뒤집어서 성자로 만들지 않아요. 

우리의 변화/성숙/성화는 점진적이고 아주 느립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아세요? 인격이니까 그래요.

핵가닥 180도로 변화된다면, 그건 로봇이고 기계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로 안 만들었거든요. 

인격적인 교감을 통해서,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통해서 
스스로 변화되게 만들게끔 독립적인 인격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분은 애초부터 우리를 성인 만들려고 오셨나요? 아니요.
그분은 뭘 하려고 오셨다.고요.

죄에서 돌이켜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성령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죄와 싸워야 되나요. 열심히 죄와 싸워서 이기면 성령이 올까요? 

안 옵니다. 예수님 따라가세요.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명령을 따라가세요.
그러면 성령이 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되는데
천천히 변화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돼요. 
☞ https://rfcdrfcd.tistory.com/15980553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이 죄가 없던가요? 
놀랍게도 성경은 가감없이 기록했어요. 성자들이 아니라고요!

아브라함도 너무 연약해서 너무너무 많이 넘어졌고요. 

이삭도, 치명적으로 실수하잖아요. 
믿음이 후계자를 선택하는데 
끝까지 하나님한테 대들고, 에서를 선택하려고 하잖아요.
그러다가 혼났죠. 

야곱은 뭐 더 말할 필요도 없죠. 
이 사람들이 완벽하지도 않았고, 연약해서 자꾸 넘어졌고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들을 볼까요? 
이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하고 같이 살면서 하는 꼴을 봐요. 
맨날 자기들끼리 싸워요. 시기했고 질투했고 견제했고 
예수님이 부활해서 아침밥 먹자는데 거기서도 싸워요. 

베드로 보고 '야 너 훗날 언젠가는 죽는다' 했더니
질투해 가지고 '얘는 어떻게 됩니까?' 막 이랬잖아요. 
자 죄 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근데 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은 하나님이 제시한 길을 갔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거예요. 

그들이 죄짓기는 유다나 베드로나 똑같았어요. 
근데 베드로는 죄를 지어도 예수 따라왔고요.
유다는 자기 길을 가버렸어요. 그래서 그는 멸망했어요.

이런 걸 성경을 우리가 다 보여주는 거예요. 
아직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짓는 내가 부끄럽고 죄의식이 충만합니까? 
그게 경건해 보입니까? 

그래서 오늘도 또 하나님께 나오는데 죄의식이 너무 충만해서 
'하나님 내가 또 죄지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반복하는게 경건해 보이나요?

저는 목사인데, 제 옛날 습성이 아직도 많이 자꾸 나와요. 
그래서 집에 막 아내한테 화 잘 내요. 막 신경질 부릴 때도 있고요.

그러면 제 딸이 '목사가 그러면 되냐고, 그러면서 설교 하냐고'

내가 만약 복음을 몰랐다면, 그 말을 듣고 찌그러져 가지고 
의기소침해서 며칠을 지냈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안 그래요. 나는 당당해요. 왠지 아세요?

'그래, 나는 이렇다. 이런 나를 목사로 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큰 거지.. 
하나님이 뜻이 커서 내가 목사로서 섬기는 거지.. 
내가 무흠해서.. 내가 거룩해서 목사로 서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저는 '죄 없는 영성'을 추구하지 않아요. 
그건 교만이라고 알기 때문에요. 

그래서 제가 새신자 교육 할 때, 끝에 가서 항상 이렇게 가르쳐요. 
'나 완전하지 않아요. 나보고 뭐 시험 들었네 말았네 하지 마세요!'

그러나 분명한 건, 나에게 주신 사명 앞에서는 
저는 재보고 재보고 또 점검해요. 이거 실수할까 봐!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러면 나는 맨날 죄 짓는 사람으로, 요모양 요꼴로 계속 살까요? 
아니요. 나는 변화돼요. 어떻게 변화되는지 아세요?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내 안에 그분이 계심을 어떻게 느끼냐면요. 
어제 밤에 아내하고 대판 싸우면,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가 잘 안 되지요.

그러면 침대에서 자는 아내한테 달려가서 또 사과하고 비비고
'어제 하나도 안 싸웠던 것처럼..' 
외식이 아니라 진짜 사랑스럽거든요.

이게 누구 힘이죠? 내 안에 있는 그분이 빛이고 생명이라는 걸 나는 알아요. 
그래서 나는 점점 더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데 
언젠가 나는 해처럼 빛나는 존재로 변화될 거예요. 

그때는 인간이 설정한 윤리 도덕이라는 기준은, 너무 초라해질 정도로
높은 자리로 올라갈 거예요. 이게 예수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제 보이죠? 그 무거운 쇠덩이를 진 것 같은 죄와 싸우는 길을 
아직도 고집하렵니까? 그게 가지 마세요. 그건 죽음의 길이에요. 

스스로 정결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좀 해내면
대가로 복을 구해요. '내가 이만큼 해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아요. 그건 경건이 아니니까요. 

만약 우리에게 임하신 그분의 능력으로, 내 술이 끊어진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 자리를 안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내 의지로 술을 끊었다면, 장담하는데 그 사람은 돌아갑니다.

조금만 시험 들면 '애라, 하나님 안 계시네!'
그러고 또 술집으로 뛰어가겠죠. 누구 능력을 하는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향한 삶을 살 때 
나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겨내고, 
그 죄에서 자유하고, 그 길에는 성령이 함께 하니까요!

▲이제 예수 따라가는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금 알겠죠?
자 무거워 보여요, 가벼워 보이나요? 
가볍다는게 보이나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줄게, 내 짐은 가벼워!' 
왜요? 성령님이 같이 들어주니까 가볍고 즐거워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은 믿는데,
자기 삶을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아요.

믿기는 하는데, 의지는 안 하죠.

예수님은 '네 인생을 나한테 맡기라!'는 거예요. 
이제 맡길 수 있나요?

복음의 삶이란.. 맡기는 거예요. 
그러면 당장 이번 달 월세 감당이 안 되는데..
마음이 평안해요. 그럼 월세 펑크 날 거예요. 
하나님이 또 기적의 손으로 해결을 안 해줍니다. 

그런 문제 해결하려고 오신 분은 아니니까.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이 될 거예요. 
맡기는 자에게!

이제 복음의 삶이라는 것은,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거는 내 시간표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지난주에 사역자 회의를 했어요. 내년도 사역을 위해서. 
뭐 했는지 아세요? 

과거에 저는 부교육자 시절 때, 이맘때면 내년도 사역 계획을 세우느라
머리털이 다 빠져요. 
몇 월 달에는 무슨 행사하고, 몇 달에는 전도 행사하고 
몇 월 달에는 수련회 하는데, 어디 장소를 정해야 되고, 예약이 끝나야 되고... 
근데 저는 내년 2023년에 팀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그것만 나눠주고, 내년도에 뭐 할까 계획이 없어요. 

만약 내가 계획해 놓고, 계획된 한 대로 우리 교회가 돌아간다면 
여러분이 이 교회의 주인은 목사가 되는 거예요. 
내가 계획한 대로 돌아간다면, 이 교회 주인은 예수가 아니고 김성근 목사예요.
계획을 안 세우는게 좋다는 게 아니라, 모든 계획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거죠.

근데 내 계획과 뜻대로 된 적이 없거든요... 
올해 2022년도 나는 구체적 계획도 없었는데 
우리 교회 올해를 뒤돌아보면 충만했어요. 

하나님이 계획과 뜻대로 돌아가니까 너무 즐거웠어요. 

이게 성탄의 선물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만들어진 전혀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라서
이 길을 가는 사람이면 기쁨이 있고, 변화가 있고, 만족이 있고, 쉼이 있어요. 

그래서 일은 더 빡세게 하는데, 마음은 즐거워요.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짐이 무겁나요? 아니요. 가벼워요. 한없이 가벼워요. 

그리고 이웃을 정죄하지 마요. 원래 그랬잖아요. 나도 그랬고... 
다만 죄를 짓고 넘어지는 사람은 죄와 싸워다 너무 연약해 넘어지는게 아니라 
그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오질 않아서 넘어지는 거예요. 
성령의 힘을 못 받은 거예요. 

그럼 그런 사람에게 우리가 '죄 짓지 마!'하고 재판관이 되는게 아니라 
어디로 인도해야 되죠? '예수께로 가자. 그러면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점점 더 변화시켜 주실 거야'

이게 아름다운 길이 맞죠. 
이 성탄의 선물을 가지고 집에 가서 남편을 안아주세요.

직장 가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못돼먹은 사람이 있으면 
이해해 주세요. 
'그럴 수 있다. 예수 안 믿는데 그만큼이라도 하면 그건 잘한 거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해주고, 그 사람하고 따뜻하게 지내면, 
그렇게 해서 우리가 진짜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됩시다. 
종교인이 되지 말고 진짜 참 신앙인이 됩시다.


......................................................

주1)
로마서 3장 21절에 이제는 율법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율법이라는 건 죄와 싸우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조항들이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킨다는 말은 
다른 말로 죄와 싸운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이 율법을 치워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의로운 길이 나타났대요. 
그게 뭐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나는 길(칭의)인데
이 길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다 준대요. 차별이 없대요.

이거 새로운 하나님의 새로운 길이래요. 
우리에게 주신 이 길은
죄와 싸우는 길도 아니요.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길도 아니요. 
무슨 길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요, 이게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예수교지, 유대교가 아니에요. 

그런데 이거를 이해 못한다는 거예요.
이 단순한 것을 그래서 성경은 히브리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10:20절에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희생 가운데 열어 놓으신 
새로운 길이요. 살아있는 길이다..' 이렇게 기록해요. 

전혀 새로운 길이 인류가 걸어보지 못했던 예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 
죄와 싸우는 길도 아니고,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는 길도 아니고 
누구 따라가는 길이라고요. 예수 따라가는 길이라고요.
(롬1~4장은 '칭의구원', 5~8장은 '성화구원'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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