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 받기를 사모합시다! 행1:4~5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모두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된 것이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전12:3
◑ <성령 받은 것>과 <성령세례 받은 것>은 다르다.
성경에 ‘성령이 임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웠다’ 등의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성령의 감화로 자연인이 신앙고백하고 구원받는 것>을 뜻하지 않고
<성령세례, 성령충만 받는 것>을 뜻한다.
▲성령충만과 성령세례의 구분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는 거의 같은 뜻이지만,
성령세례는.. 성령충만을 난생 처음 받은 것을 표현하는 말이라 본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물세례를 받듯이,
성령충만을 처음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을 쓴다.
사도행전에 ‘성령세례’가 쓰인 용례를 보면, 그렇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고넬료의 집에서,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충만을 처음 경험했을 때,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여러분, 성령세례 받으셨는가?
▲긴가, 민가 하면.. 못 받은 사람
‘내가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긴가 민가 잘 모르겠다’는 사람은
R. A. 토레이 목사님 의견에 의하면 아직 못 받은 사람이다. (그의 말이 맞다)
물론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도,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지만,
일단 첫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그게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행19:2
초신자는 그럴 수 있지만, 교회를 10년 이상 다니고도
아직 성령세례를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은 하지만, 자기 스스로 좀 갑갑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 자체가 지치고 힘든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 같은 모습이다.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너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행19:2
이렇게 물었다.
여기서 바울이 물은 것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케 하시는 성령’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인들은 이미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교인들이었다.
그런 교인들에게 바울이 물은 것은, ‘교인들이여, 성령세례를 받았느냐?’는 뜻이다.
그 때 에베소 교인들의 대답이
‘우리가 그것이 뭔지 모릅니다.
아직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성령세례를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습니다.’ 였다. 행19:3
이 대답을 보시라.
에베소 교인들은, 모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닌 상태였다.
과거 한국의 장로교회 성령론 입장은, 성령과 성령세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연인이 예수 믿는 것이,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이므로
예수 믿은 후에, 더 이상 성령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방언은 성령세례인가?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세례’가 나타난 곳이 4군데인데,
거기에는 반드시 ‘방언’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방언’은(랄랄랄라 말고) ‘성령세례의 증거’가 맞다.
즉,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단, ‘방언 못 받은 사람은, 아직 성령세례 못 받았다’고 말하기는 약간 무리다.
그 말도 절반 이상 맞지만, 10%라도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방언 못 받은 사람 중에도,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사도행전에 성령세례 받은 4곳에, 4번 다 방언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경 어디에도 ‘방언이 성령세례 받은 증거다’라는 구절은 없으며,
‘방언 받지 않고도 성령세례 받은 것’이 성경에 기록이 누락되었을 수도 있다.
과거 미국과 한국에서 성령운동이 핍박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가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다’라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었다.
방언 안 받은 사람들이 ‘그럼 우리는 성령세례 못 받았다는 것인가?’라고
겉으로 노골적인 표현은 안 해도, 속으로 대단히 기분 나빠했고,
오순절파들이 스스로 영적우월감을 가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강력한 성령세례, 성령충만을 주시면서도
하나님이 방언을 안 주시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 겸손하라고.
또한 성령의 9가지 은사가 있는데, 방언은 그 중에 1가지이다.
성경 어디에도, 방언이 <성도의 기본 공통 은사, 필수 은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즉, 9가지 중에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이, 방언은 못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註1)
▲그러므로 꼭 방언이 아니더라도, 입신을 체험할 수도 있고, 예언을 할 수도 있고,
방언 통변을 할 수도 있고, 그 외 성령의 9가지 은사가 골고루 나타날 수 있다.
어쨌든 ‘성령세례를 받고서 신앙생활 하자는 것이다.’
그냥 밋밋하게 육신적으로 하지 말고!
이런 오순절적 주장(성령세례 강조 주장)에 대해, 다른 교단에서는
‘성령을 너무 외적 표징 쪽으로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
성령의 인격적/내적 열매(갈5:22)를 무시하는 잘못이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물론 그 말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성경에 나타난 명백한 성령세례의 역사(각종 은사의 나타남)를
고의적으로 부인하고, 무시하고, 기대조차도 하지 않는 것은... 엄연한 잘못이다.
◑성령세례 받으려면
▲설교의 요지는,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분은.. 간절히 사모해서 받자는 것이다.
에베소 교인들처럼, '그런 것이 있는 줄 알지도 못했다'고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전에 성령세례를 받았지만, 계속 성령충만으로 이어지지 못한 분들도
다시금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성령충만을 계속적으로 받자는 것이다.
①예수님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행1:4
그러면 우리가 (비판하지 말고) 겸허히 기다리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기다리라’는 말에는 ‘기도하라, 사모하라, 믿으라’는 뜻이 들어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4
②‘너희들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기다리고 사모하는 심령은 그렇게 성령세례를 받는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1:5
(※여기서도 예수님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엄연히 구분하신다)
③‘그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절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행1:4
성령세례 받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직 기도와 사모함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회개'도 포함된다.
▲꼭 그래야만 하나, 그냥 성경읽고, 큐티하고 그러면서 신앙생활 하면 안 되나?
여러분, 방언을 처음 받은 날은, 참 신기한 날이다. 거기에 감격이 있다.
기타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때는.. 거기에 놀라운 영광과 능력이 서려 있다.
(물론 처음 받은 순수한 은사가
나중에 극히 일부사람에 의해서 오용, 남용되기도 했다.
자기 교만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위의 ①②③ 말씀을 그냥 있는 그대로 겸허히 받아들이시라.
그리고 자기가 아직 예수를 오래 믿었으나,
‘긴가 민가 하는 것은 아직 성령 세례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란다.
‘성령받았다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실망했다’ 그런 소리 마시고,
내가 아직 그것이 뭔지 모르면, 자기가 직접 체험해 보면 된다.
예수님 ①②③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고, 자기 삶에 적용하면 된다.
▲성령세례는 한 번 받은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성령께서 에베소 교회에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는데,
과거에 한 번 성령세례 받고, 계속 못 받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성령세례는 한 번 받고 끝내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
계속 충만하지 않으면, 금방 밧데리 닳는 것처럼 닳아 없어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의 진흙더미가 계속 튕겨 와서 달라붙기 때문이다.
자동차 연료가 소모되듯, 성령충만도 금방 소모되어 없어져 버릴 수 있다.
우리가 만약 성령충만을 잃어버렸다면,
이번 특별새벽기도 기간에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복된 기회가 되시기 바란다.
▲고넬료 가정을 보면, 예수를 믿은 즉시로 성령세례를 받았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도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믿은 즉시 강력한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
<예수를 믿는 즉시로 성령세례를 받는 경우>다.
(그런데 즉시 방언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즉시 눈이 소경되었다는 기록뿐이다.
물론 혹자는 이것은 성령세례 체험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이 다메섹 체험이 사도행전에 3번이나 반복 기록된 점을 감안하면,
성령세례로 봄이 옳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 예수를 믿고 물세례를 받지만, 나중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 물세례를 줄 때,
집례자가 ‘장차 곧 성령세례도 받을지어다’며 축복해 주기도 한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렇게 선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실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 마3:11
▲성령세례를 주시는 이유는, 황홀한 체험 때문이 아니다.
성령세례를 주시는 목적은.. 전도를 위해서이다.
또한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다.
전도가 잘 안 된다.
교회 봉사하기가 힘들다.
교회에 미운 사람이 많다...
-이 모든 이유가,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거나,
이전에 받았어도 지금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경우이다.
여러분, 주님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내 힘, 내 능력>으로 못 한다. 금방 하다가 지쳐서 뒤로 나자빠진다.
자기만 힘들고, 역사도 별로 안 나타난다.
12제자도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 이미 신앙고백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이후에
모두 뛰어난 복음 전하는 사도로서 살 수 있었다.
여러분은 지금 4복음서적인 제자인가, 아니면 사도행전적 제자인가?
.......................
註1) ‘모두가 방언하는 자겠느냐?’ 고전12:30
이 구절을 근거로, 혹자는 ‘모든 사람이 방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방언은 성령세례의 증거다’ 라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이에 대한 오순절 신학자들의 답변은 이렇다.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에, 오늘날의 성가대석처럼, ‘방언대’가 있었고,
(당시에 성가대는 없었을 것임) 또한 ‘예언대’도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모두가 방언하는 자겠느냐?’는.. 모두가 ‘방언대원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모두가 ‘예언하는 자겠느냐?’는.. 모두가 ‘예언 대원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신학자들은, ‘방언은 성령세례의 증거가 맞고
성령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모두 방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만 ‘모두가 방언하는 자겠느냐?’는
<모두가 방언하지만, 그들이 모두 방언대원(오늘날의 성가대원처럼)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결론은,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알지만,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고전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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