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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유기성목사 명설교(199편)

영생문제와 빵문제 요6:60~65 /벧전2:2~3

by 【고동엽】 2024. 11. 22.

영생문제와 빵문제              요6:60~65 /벧전2:2~3         

 

 

◑나는 혹시 군중/무리가 아닙니까?

 

▲영생의 문제는 관심 없고, 오직 빵문제 때문에..,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

우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쉽게 기적을 일으켜 주시지 않으십니다. 로또 사봐야 돈만 버립니다.

 

오늘은 그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하게 이해했으면 합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이유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니 예수님의 말씀하시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겠다든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도 바치겠다는 결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저 분을 우리 왕으로 삼으면, 우리는 평생 배고프지 않고 잘 먹을 수 있겠다.’

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6:26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 기적의 의미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고

오직 계속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떡을 만들어 달라는 사람들에게 “영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영의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떡에 대하여 거부감을 표시했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6:60

 

▲영생의 말씀이 듣기에 지루한 이유

그때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려워서 듣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인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난해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먹고 사는 문제에만 있었기 때문에

영생에 대한 말씀을 듣기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려고 예수님께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 6:63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쉽게 표현하면

먹는 문제 해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짜 너희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중요하다!

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원한 명(영생)의 문제

먹고사는 문제가 소용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현실 문제를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이 먹지 못하여 굶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기적을 통하여 그들을 먹이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것만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배고픈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이 거할 곳은 두 곳 밖에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육신이 배부른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영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옥을 향하여 가는 것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배 고파하는 것도 불쌍하지만

지옥에 가는 것은 더욱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을 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옥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옥을 아시기 때문에 다리를 자르고 눈을 빼서라도

지옥에는 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문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배고픈 문제는 지금 당장 급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떡이나 만들어 주시오. 주님과 무리들 사이의 대화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사람들에게 떡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어 모든 사람들의 속죄 제물이 되겠으니,

누구든지 그것을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적용

 

저는 왜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돈을 쌓아놓고 살게 하지 않으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돈을 좀 쌓아놓고 살게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돈으로 할 일도 많고, 도와줄 일도 얼마나 많은데...

 

하실 수가 없어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쌓아놓고 살면, 우리는 더욱 세상에만 관심가지고 살 것입니다.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문제에는 소홀하게 될 것입니다.

 

왜요? 세상이 너무 재미있고 여기서 사는 것에 만족하니까

그것이 그 사람에게 결코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진짜 중요한 영적인 현실에 맞부딪힐 때가옵니다.

영혼에 대한 아무 준비가 없이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세상에서 잘 산 것이 결코 복이 아니란 말입니다.

 

 

설교에는 ‘어려운 설교’가 있고 ‘쉬운 설교’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말씀, 영생의 말씀, 사명의 말씀이 무조건 어렵습니다.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만 관심을 갖고 신앙생활 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

여러분, 습관적인 죄에 무너집니까?

그리고 자기 성질에 무너지고, 세상살이에 피곤해서 기도 생활 제대로 못하고

말씀도 못 읽고, 사명의 삶이 부담스러워지고 피곤하다, 힘들다는 말이

입에 달렸습니까?

 

우리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돈 문제보다 생명의 말씀이 훨씬 중요하다,’

‘그래서 우선 내 영이 살아야 내 육도 살고 내 삶 전체가 사는 것’이라는

결론이 아직 내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하면서도, 사실상 방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주의 음성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먹고 사는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영적 진단을 잘해야 합니다.

 

▲나는 ‘무리’가 아닙니까?

이 수많은 무리(군중)들이 예수님 앞에 섰지 않아요?

이 무리들은 5천~수 만 명이나 모였지만,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육신의 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먹고 사는 것이 우선적인 관심이었기 때문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영생의 말씀 생명의 말씀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고 어렵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무너지는 이유는 먹고 사는 문제보다 영적 문제가 더 중요하다!

내가 사는 길은 돈이 아니라 영의 말씀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62

 

이렇게 영생의 말씀도 감당하지 못하다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는 것을 볼 때는,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결국 구원/영생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말씀’과 세상의 ‘먹고사는 문제’의 연관성

언뜻 생각하면, 돈 문제/먹고 사는 문제가 영생의 말씀으로 무슨 답이 되겠는가?

지금 내가 부딪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성경 말씀으로 무슨 해답이 되겠는가 하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내게 들려지고 영안이 열려서 정말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달라집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세상 문제에 한 발을 빼게 됩니다, 멀리서 관조하게 됩니다.>

그러면 신기한 것은, 자기가 막 빠져서/몰두해서 할 때보다.. 보통은 더 잘 됩니다.

 

왜냐하면, 욕심과 야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 말하면, 바둑이나 장기 둘 때, 훈수 두는 사람이 항상 더 잘 봅니다.

급수가 한참 낮아도,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정확하게 판세를 읽습니다.

 

말씀이 어떤 사업에 직접적 도움을 주는 경우가 없지 않고 있겠지만,

그런 것보다 말씀이 하는 주된 역할은... 도리어 힘/욕심/야망을 버리게 만듭니다.

영생에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더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데... 오히려 더 잘 되는 것입니다. 

 

영생의 눈이 뜨이고, 생명의 주님인 예수님을 알고 나면

재정의 연단,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말과 평가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육신적인 피곤함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어려운 일이 다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다 쉬워집니다.

 

교회의 사명, 어렵다 힘들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내게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아침마다 출근할 때는 그렇게 힘들지만

설악산 간다, 온천 간다고 하면 전날 밤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 놀러간다는 것만으로도 잠이 안 오는데,

여러분이 진짜 주님을 알고 영생을 알면 피곤한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면 기도도 달라집니다.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오직 감사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나 좋으시며, 완벽하여 실수가 없으시며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 정 떼기                                                   이하09.03.15.설교녹취

 

▲성도의 정체성은 <나그네>

베드로전서 전반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나그네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초대교회 어려움을 겪던 성도들에게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을 똑바로 아십시오. 여러분의 정체성은 <나그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1:1

 

...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17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2:11

 

나그네는,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크게 애착하지 않고

이 땅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으며, 항상 본향을 향해 움직여가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란 - 이 세상에 정붙이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나그네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정 떼기>를 시키십니다.

즉, 우리가 정 붙이고 사는 것들을 훅~ 불어서 다 날려버리십니다.

그제야 우리는 ‘내가 실패해서 다 깨어져 버렸을 때’ 어쩔 수 없이 정을 뗍니다.

 

일찍 일찍 세상에 정을 뗐으면 참 좋으련만...

하나님이 훅~ 불어서 날려버리지 않으실 수도 있었으련만...

 

끝까지 세상에 정 붙이고 살다가,

정을 안 떼려야 안 뗄 수 없는 막판 최후 상황에까지 이르러서야

그제야 할 수 없이 정을 뗍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잘 되고 있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환영과 존경을 받고 있을 때,

그 때 <세상 정 떼기>를 하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깊은 신앙인격의 소유자입니다.

 

일례로, 노아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갈 때도, 모두 다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벧전2:3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이다. 쉽게 말하면 ‘은혜/사랑’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전체 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맛본다는 것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은 다 정확한 것으로 여깁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음이,

최근 인터넷에 떠도는 ‘착시현상’ 사이트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테니스를 칠 때도, 성도들끼리 왕왕 잘 싸우는데,

공이 라인 근처에 떨어질 때, 사람 눈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인’으로 보이고, 다른 사람은 ‘아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맛보는 미각>은 그렇지 않다. 매우 정확하다고 합니다.

요즘은 ‘맛 박사’도 있습니다.

맛을 보는 훈련을 통해서, 맛을 보는 능력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직업은 패스트푸드 가맹점의 맛을 봐 주는/체크 해 주는 것입니다.

맛의 아주 미묘한 작은 차이 때문에, 그 매장의 매상이 크게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 ‘맛박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미각처럼 정확한 감각이 없다고 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했는데,

한 번 그 맛을 들이게 되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맛에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인자하심의 맛에 한 번 취하게 되면

다른 것 안 구하고, 바로 그 맛만 앞으로도 계속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자를 맛 보는 것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과 같습니다.

‘맛보아 알지어다’(2:3)와 ‘사모하라’(2:2)가 같은 맥락입니다.

어린 아기가 엄마 젖을 맛보면, 다른 것 찾지 않습니다.

엄마 젖만 찾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2:2

 

▲인자하심을 맛보면, 내 인생에 방향이 뚜렷이 생깁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성도를 ‘나그네’라고 했는데,

나그네는 이 땅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장점이 있는 대신에

단점이 있는데, ‘나그네는 잘못하면 방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한 편으로 ‘인생을 나그네’라고 말하면서도,

나그네가 방황할 수 있는 소지를 없애줘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맛보는 것입니다.

그 맛을 보면, 그 맛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방향을 흩트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한 인생들은

이 세상에서 방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썩을 양식’이 최고인 줄 알고, 그것을 쫓아 헤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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