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게 서라 고전3:10~15
언급을 하나마나 우리에게 있어서 '인생'이라는 것은 대단히 소중합니다.
그저 어떻게 하다가 태어나서, 뭐 어쩔 수 없이 먹고 살아야 되니까 살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사실 '내 인생'입니다. 내 한 평생인 거죠.
근데 참 안타까운 것은, 그 소중한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살아내는 사람이 그렇게 드물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끝나고 난 다음에 장례식을 치를 때, 그때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가
사람들에게 드러납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 이 사람은 참 소중한 인생을 살았구나'
이렇게 느껴지는 이들을 찾아보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 태어났고, 그리고 그가 어떻게 먹고 입고 살았고,
그리고 시집 장가 갔고, 그리고 또 어떻게 아이들을 낳았고...
그러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간단한 요약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게 우리를 보내셨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죠.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인생을 그렇게 허비하고 삽니다.
여러분의 장례식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장례식에 제가 예배를 인도하러 가서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 거기 찾아온 조문객들에게 뭐라고 제가 설명을 해야 좋을까요?
아마 여러분 스스로도 궁금할 거예요.
'내 장례식은 도대체 우리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하실까?'
'고인이 된 나에 대한 소개는 어떻게 될까?'
조금만 한번 생각해 보면, 대략 여러분이 여러분의 장례식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어요.
▲여러분, 지난 2016년 여러분에게는 어떤 간증이 있었습니까?
올 해 한 해 동안을 사셨는데, 그 한 해 동안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특별한 간증이 있으셨습니까? *2017년 설교
지난 한 달 동안 여러분에게는 어떤 간증이 있었습니까?
이 시간에 앞에 나오시라고 부탁해서, 그래서 한 달 동안 있었던 일을 간증해 달라고...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특별하게, 뚜렷하게 말할게 없다면,
여러분의 장례식 분위기가 그 분위기가 될 것입니다.
'특별하게 말할게 없어요...' 그렇게 한 평생을 사는 겁니다.
그렇게 흐지부지 하루를 살고.. 그게 모여서 한 달이 되고..
그게 쌓여서 1년이 되고.. 그렇게 일평생 80 여년을 산 거죠.
그렇게 나름 열심히 살았는데.. 울기도 많이 울었고, 화내고 싸우기도 했고 그랬는데,
장례식 때 뚜렸하게 할 말이 없어요.
'그냥 먹고 살다가 죽었다' 그 말밖에는 할게 없어요... 이게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너무나 소중한 내 인생, 그저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내 인생,
나는 얼마나 내 인생을 소중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한번 점검해 봐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사명대로 힘써 달려가고 있는지... 한번 재확인해 봐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하나의 '집과 같다, 건축과 같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일평생 어떤 집을 지금 짓고 있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상당히 괜찮은 집을.. 이미 완성 단계에 있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이제 겨우 짓기 시작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공통적으로 다 집을 짓는 것은 똑같습니다.
근데 다 똑같이 열심히 인생을 살지만, 나중에 극명하게 갈라져요.
이게 오늘 설교말씀의 핵심입니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얻는 인생과, 영혼이 버림받는 인생으로 극명하게 갈립니다.
사는 거 보면 다 엇비슷해요.
다 열심히 살고, 고민도 많고, 잘 살아보려고 애도 쓰고...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인생은 쫙 갈라져 버립니다.
그게 너무 이상하죠. 무슨 기준으로 도대체 인생이 그렇게 갈라지는 거죠?
답은 기초예요.
기초를 어디에다 두었나? ... 어디에 기초를 두고 살았는지에 따라서
인생은 마지막 순간에 쫙 갈라집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때 같이 공부하던 신학생들을 '동기'라 그러죠. 신학교 동기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다 같은 신학생이었습니다. 뭐 특별히 다를 바가 별로 없었어요.
신학생이라는 의미에서는 다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 근데 다 목회 현장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고,
이제는 사역하는 현장이 너무 많이 달라요.
신학교 동기라는 거는 같았지만, 30년이 지나서 이렇게 만나보면
서로 처지와 형편이 너무 많이 다릅니다.
여러분들도 초등학교 동기들, 중학교 동기들, 고등학교 동기들을 지금 만나보면
아마 그런 느낌일 거예요.
그때 학생 때는, 다 같이 어울리던 똑같은 무리들이었는데,
지금은 사는게 너무 많이 달라요. 서로 너무 다른 집을 건축한 거예요.
근데 어떻게 사는 사람이 잘 산 것이죠? 어떻게 된 사람이 성공한 동기생인가요?
흔히들 무슨 돈을 많이 벌었고... 높은 지위를 가졌고...
또 세상에서 자기 분야에서 무슨 성공을 했다든지... 이런 걸 부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게 그거예요.
정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생각해 보면,
비로소 그때 '내 집이 어떤 집인지가' 확실히 드러나는 겁니다. 여러분 속으면 안 돼요.
목사도 이렇게 만나 보면, 큰 교회 담임 목사도 있고, 아주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도 있죠.
겉으로 보면 당연히 큰 교회 담임 목사가 훨씬 성공했지요.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우리 하나님 앞에 서 보면, 그때는 하나님이
큰 교회, 작은 교회... 이렇게 구분하시지 않으세요.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중요한 초점은,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낯선 주님으로 만날 건지, 아주 친밀한 주님으로 만날 건지... 결국 그 차이에요.
장례식에 가서 이제 고인을 이렇게 추모해 볼 때,
그분이 얼마나 주님과 친밀했는지... 그러면 그 장례식은 그 자체가 은혜예요.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제는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진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나는 얼마나 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과 얼마나 가깝고 주님과 친밀했는지...'
그러면 정말 좋은 집을 지은 사람이예요.
▲우리의 인생의 기초는 '예수님이냐, 예수님 아니냐'로 갈라집니다.
본문 고전3:11절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 그분이 기초가 되어서, 그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개척자지요.
근데 사도 바울은 그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기초'라고 그랬습니다.
10절에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사도 바울이 처음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터를 닦아두는 (기초 공사) 일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근데 그 터가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예요.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진 겁니다.
◑저는 이 선한목자교회를 재창립한 목사예요.
원래 우리 교회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집'이라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근데 이 예배당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제가 이 교회에 두 번째 담임 목사로 부임해 오면서
선한목자교회로 재 창립을 하게 된 거죠.
앞서 '믿음의 집' 교회가, 예배당이 건축하다가 재정적인 어려움이 심각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가고... 남은 교인은 얼마 되지 않고...
중단된 건축도 해결해야 되고... 또 교회도 부흥시켜야 되었고...
이런 어려운 책임을 맡았습니다.
저는 그걸 해낼 자신이 없었어요. 저는 그런 정도의 일을 해본 적도 없었어요.
제가 이 교회 부임에 오면서, 한 가지 마음에 '내가 해야 될 일'이라고 깨달은 것은
이 교회의 기초를 다시 한번 분명히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해 와서 받은 소명이에요.
저는 예배당 건축을 어떻게 할지, 어떻게 교인들에게 헌금을 독려해 가지고
이 예배당 건축을 다 마무리할지... 저는 방법도 모르겠고, 자신도 없었어요.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이 교회에 찾아와서, 넓은 교회 예배당의 빈 자리를
가득 채울 수 있겠는지... 그 점에 대해서도 저는 자신이 없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제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없어요.
또 하나, 이 교회를 다시 재창립하는데, 재창립 한다는 이야기는
이 교회의 기초를 다시 세워야 되겠는데,
근데 교회의 기초가 뭐지요? 예수 그리스도세요.
그래서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해 와서 했던 일은,
교회 표어를 아주 단순 무식하게 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교회!'
성도들이 금방 이해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리고 계속 붙잡고 나가야 될.. 너무나 분명한 우리의 목표에요.
이 예배당 건축, 그게 우리에게 중요한게 아니고,
얼마나 교인이 많아지는가도 중요한게 아니고,
우리의 오직 관심사는 '예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어요.
저는 교인들에게 '오직 예수님만 계속 바라보자' 그랬습니다.
이 교회에 와서 제가 한 일은, 그거 밖에 없어요. 그게 교회의 기초니까요!
예수님 그분이 우리 교회의 기초이시니까요!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해 와서 했던 메시지의 핵심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입니다.
절대로 예수 믿고 우리가 받은 복음은, 속죄함만 받은 게 아닙니다.
죄만 사함 받은 게 아닙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자'가 된 거예요.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지겹도록 전했습니다.
지겹다는 말이 성도님들 가운데서 나오더라고요.
계속 그런데 참 놀라웁게도, 그렇게 지겹게 듣다 보니까
교인들의 입에서도 그 말이 나와요. '나는 죽고 예수를 산다!'
그렇게 고지식하게 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왜요?
그게 교회 기초공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우리가 정말 예수님이 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교회를 친히 이끌어 가시고,
그리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그 기초위에서 교회가 서는 겁니다.
저는 (이 교회에 오기 전에) 처음에 목회하면서 그걸 몰랐어요.
저는 그저 목사가 목회 잘하는 것은, 설교를 잘 하고, 교인들 심방 잘 하고...
그래서 교인이 점점 늘어나서, 교인들이 많은 큰 교회가 되면,
그걸 '목회 잘 하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 식으로 목회를 잘하고 싶었어요.
그건 큰 교회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큰 교회가 되는가?'
온통 그거 밖에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고, 실제로 제가 여러 교회를 겪어보니까,
큰 교회라고 꼭 좋은 교회는 아니더라고요.
규모는 큰 교회인데, 좋지 않은 교회가 있어요.
규모는 작은데, 참 좋은 교회가 있어요.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궁금했어요.
그 차이는, 그 교회의 기초가 예수님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예수님이 그 교회 기초예요.
온 교우들이 다 주님을 주목해요.
이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인 것을 다 알아요.
목사도 알고, 장로님들도 알고, 교인들도 다 알아요.
항상 '주님의 뜻이 뭘까?' 그 생각을 하는 교회는, 규모가 작아도 좋은 교회에요.
그런데 아무리 규모가 커도, 사람이 주인이고,
그리고 세상 냄새가 많이 나는 교회는... 사람들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여도
우리 주님 앞에서는, 절대로 좋은 교회가 아니에요.
제가 깜짝 놀랐어요. 목회하면서 비로소 깨달은 거예요.
'아 절대로 교회를 이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목회자의 책임이 너무너무 중한(무거운) 거죠.
선한목자교회에 부임해 와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저에게 깨우쳤던 것은
'이 교회에 와서 저로하여금 정확하게 다시 목회를 하도록 그렇게 만드셨다'고 생각하고,
당시 교회가 처한 위기는 대단한 위기였지만, 그건 주님께 다 맡기고
'나는 오직 이 교회가, 예수님이 기초가 되는 교회만 세워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자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굉장히 다른 분위기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증거를,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예배당 공사도 마무리가 됐습니다. 기적적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가 힘을 얻게 해 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또 하나 마음에 깨달아진 것이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끝난게 (소용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나는 죽고 예수를 사는 복음'을 열심히 전했어요.
성도들이 그 말씀을들을 때, 얼굴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아 그래요. 그게 예수 믿는 거였군요.'
'아~ 예수 믿는게 그거였어!'
'내가 그동안에 예수를 뭔가 좀 잘못 믿은 게, 무슨 문제인지를 잘 몰랐는데.. 그거였구나!'
'예수를 믿으면 주님과 함께 죽는 거고,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거였어!'
그 말씀을 들을 때 놀라기도 하고, 충격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무언가 하나님이 이제 눈을 열어 주신 것 같은 기쁨도 있고 그랬는데
조금 지나고 나니까... 성도들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어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가 '난 안 죽었나 봐...' 그런 말이 들려요.
분명히 설교들을 때, 통성 기도할 때는 '나는 죽었습니다!' 그렇게 외쳐놓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내가 안 죽은 거예요.
성질낼 때 보면 '난 안 죽었나'
또 무슨 죄의 유혹 받을 때 '나는 아직 안 죽었나 봐..'
직장 갔다 오면 '나는 안 죽었나 봐!'
제가 그때 알았어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아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이 교회의 주인이심을.. 이걸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걸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만약에 살아내지 못하면, 아직도 예수님이 교회 기초가 아니에요.
내 인생의 기초가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나는 죽고 예수로 (현실의 삶에서) 살아낼 수 있을까?'
그게 또 중요한 문제였어요.
이건 설교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되게 만들려고 하니까
매일 영성일기도 써보라고 권하기 시작한 거예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교회의 기초는 예수님인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에요' 그렇게 교회를 세웠어요.
그리고 난 다음에 사도 바울은, 전도를 하기 위해서 다른 도시로 떠나게 됐고,
아볼로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 고린도 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게 됐습니다.
그분들이, 사도 바울이 기초를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고린도 교회에
그 다음에 이제 설교도 하고, 심방도 하고...
그러면서 이제 고린도 교회가 점점 커져 갔죠. 교인도 많아지게 됐어요.
그런 동안에 뭐 아볼로는 이렇게 목회하고,
그 뒤에 다른 분은 저렇게 목회하면서, *디모데, 사도요한 등
이제 아주 다양하게 교회가 모양을 갖추게 됐습니다.
근데 어떻게 해도 좋은데, 꼭 명심해야 될 것은
'불시험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재료로 잘 만든 집이라면, 그러면 불시험을 거쳐도 잘 견뎌낼 것이고,
만약에 신통치 않은 재료(짚, 나무)를 썼으면.. 그러면 다 불타버릴 것입니다.
고전3:12~13절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분명히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그런데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도 중요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시험을 주세요.
그때 제대로 살아낸 사람,
다시 말하면 진짜 예수님을 인생의 기초로 삼고 살아낸 사람은,
그 불시험을 잘 이길 수 있겠지만,
그저 생각으로만.. 지식으로만..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어' 또는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야'
이 정도 선에서 끝난 경우에는.. 다 불타버리게 되는 거죠.
이건 정말 두려운 말씀입니다.
14절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여러분 명심하셔야 돼요. 여러분이 이제 구원을 받았는데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불시험이 옵니다. 불로 테스트 하는 날이 옵니다.
이미 그런 시험을 겪으시는 분들도 있어요.
예수를 믿어도 제대로 믿지 못하면, 불시험을 받습니다.
그때 '내 믿음이 어디 갔나? 내가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인가?' 그런 탄식이 나옵니다.
'나는 엉터리로 믿었구나..'
제대로 예수님을 진짜 믿었다면, 정말 그 인생이 예수님의 기초 위에 세워진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았다면... 시험이 오면 오히려 더 드러나요.
오히려 그 믿음이 (정금으로) 드러나요.
'야 이분이 훌륭한 분이구나.. 아 이분이 진짜 믿음을 가진 분이구나..'
◑여러분 요한 사도가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교회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4절에 에베소 교회가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러분 이게 진짜 무서운 말씀이에요.
교회에요. 예수 믿는 성도들의 교회예요. 에베소 교회!
그런데 우리 주님이 '촛대를 네게서 옮길 것이다' 이런 말씀까지 하십니다.
계시록3:1절에 보면 사데 교회가 나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행위'를 안다고 그러셨어요. 행위!
'나는 예수 믿었어..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야!'
그런 말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런 생각으로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실제로 가정에서 어떻게 사는지... 일터에서 어떻게 사는지...
속회로 모이면 어떤 모습인지... 선교회로 모이면 어떤 모습인지...
봉사할 때 어떤 모습인지... 그 행위를 아신다는 거예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는, 또는 그 교회는 예수님 위에 인생의 기초가 세워진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떻습니까?
계시록 3:14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이건 정말 무서운 말씀이잖아요.
여러분, '진짜 내 인생이 예수님 위에 세워진 인생인가요?'
그렇다면 거듭난 인생이에요.
전에는 예수 모르고 살고, 그저 돈 벌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자식 잘 기르고...
그게 내 인생이 기초였어요. 근데 그건 완전히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거죠.
내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나는 죽고 예수를 산다' 인생의 기초가 바뀐 거예요.
교회는 당연히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죠.
근데 문제는, 이것을 그냥 지식으로만 알고 있으면, 생각으로만 믿고 있으면
그건 온전히 예수님이 기초가 된 인생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선한목자교회는 우리 주님이 오시면 어떤 평가를 들을까요?
'주님, 우리 새가족 양육 교재가 참 좋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제자훈련 교재를 가지고 이렇게 (맹)훈련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 책 한 번 가져와 봐라. 내용이 괜찮네...
그래, 너희 교회는 좋은 교회구나...' 그렇게 안 하실 거예요.
주님은,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진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느냐?'
'정말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느냐, 정말 사랑만 하며 사느냐?'
우리 주님은 그걸 살펴보시고, 우리 교회가 칭찬 받을 교회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진짜 인생의 기초를 예수님께 두고 있고,
교회의 기초를 예수님께 두고 있는 거 맞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가?'가 제게는 고민이었어요.
'제가 목회하는 선한목자교회 교인들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 삶이 어떤가?'
저는 모르지요. 여러분이 어떻게 사는지...
근데 이렇게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면, 어떤 때는 가슴 철렁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어요.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러고..
'나는 죽고 예수를 살자'고 그랬는데, 왜 그게 여전히 해결이 안 될까?'
그래서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영성일기를 쓰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두 집의 비유'를 말씀하셨어요.
마7: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실제로 1906년에 샌프란시스코에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때 이 말씀 그대로 지진 피해가 드러났어요.
언덕 위, 바위 위에 지은 집들은, 그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도
밤에 지진이 일어난 줄도 잘 모르고, 그냥 대부분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흙 위에, 충적토 위에, 계곡 등 이렇게 흙이 쌓여진 곳 위에 그렇게 지어진 집들,
해변가 매립지 위에 이렇게 지어진 집들은..
완전히 다 무너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한 60초 정도 땅이 흔들렸는데, '일어설 수도 없었다' 그랬어요.
얼마나 집이 흔들렸는지...
그러니까 바위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지진 한번 일어나보면 극명하게 갈려요.
여러분, 우리 인생이 꼭 그와 같다는 겁니다.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사는 거 다 비슷해요.
여기 있는 여러분들도,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앞에 가보면, 영생과 지옥으로 쫙 갈라집니다.
사는게 별로 다를 게 없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극명하게 갈리죠?
그 기초가 달라요. 무슨 기초지요?
예수님이 속죄주 이심을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 보면.. 아니에요.
우리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느냐, 안 했느냐.. 로 갈라지는 거죠.
내 인생 집이.. 지진이 한번 일어났을 때, 그때 무너지는 집인가?
아니면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는 집인가?
그 차이는,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많이 들었던 복음... 거기에 따라 차이가 나는게 아니고,
여러분의 실제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했냐, 안 했느냐... 그 차이로 갈라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기초가 어디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무너진 집도.. '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랬습니다.
듣기는 들었는데, 순종을 안 한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기초를 정말 예수님께 두고 사는지..
여러분 자신이 오늘 깊이 돌아봐야 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정말 폼이 나게,
뭐 집도 근사하고, 재산도 있고, 또 지위도 높고...
그건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정말 선물의 차원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어요.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관심 가져야 될 것은, 주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야 인생의 기초가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항상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 들립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주님이 깨우쳐 주세요.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늘 주님을 바라보고 그렇게 살아 보세요.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여러분 다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을 때, 내가 그대로 순종해요.
그리고 나는 그렇게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해요.
주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해요.
이런 사람은, 기초가 예수님에게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까지도 내가 알지만
실제로 하루를 살 때, 전혀 주님 생각도 안 하고 살아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막 애를 쓴 적도 별로 없어요.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았어요. 급한 대로...
이건 진짜 무서운 일이에요.
여러분, 집을 짓는데, 벽돌을 그냥 생각나는 대로 그냥 쌓아 올려버려요.
그럼 어떤 집이 될까요? 그 집에 들어가서 자기도 무서워요.
어느 순간에 무너져 내려버릴테니까요. 그렇게 집 짓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 심지어 성도들조차도..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요.
집 짓는데 비유하면, 진짜 무서울 일이에요.
그냥 아무렇게나 벽돌을 쌓아요.
하루를 살았는데 아무렇게나 살은 거예요.
급한 일.. 그냥 마음이 분주한 가운데.. 눈앞에 닥친 일.. 거기에 그냥 허겁지겁 살았어요.
그러니까 한 주간 살아도, 뭘 간증하게 없는 거죠.
1년을 살아도 뭘 특별히 간증할게 없어요.
아무렇게나 벽돌 쌓듯이 살았으니까... 지나 놓고 보면 내 인생은 점점 더 어그러지는 거예요.
여러분 언제까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기초'를 완전히 바꾼 사람입니다.
그 말은, 이제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은, 주님이신 예수님께 주목하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아마 성경구절 중에 제일 유명한 성경 구절이 요3:16절입니다.
근데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아마 여러분들도 다 잘 아는 성경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이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잘못 읽혀져서
'내가 예수 믿었으니 영생은 받았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용서를 받았지...'
근데 '나를 믿는 자마다' 라는이 말이 정확히 어떤 말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마다'는 *현재능동분사
'지금 현재에도 계속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마다' 이런 뜻이에요.
계속 되고 있는 상태를 뜻해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자마다' 그런 뜻도 돼요.
영생을 얻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죠?
'내가 과거에 한번 예수를 믿은 적이 있어요. 그때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어요'
그런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온전히 예수님 안에, 내 존재 자체를, 완전히 주님 앞에 둔(드린) 거예요.
'나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계속 예수님 안에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에 담긴 뜻이에요. 3:16
주님은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요15: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은 포도나무고 나는 가지고,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을 내 안에
바로 이게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게 '나를 믿는 자마다'의 뜻입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하나 된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예요.
영어성경 표현으로 말하면 believe Him이 아니고,
believe in Him 이에요.
believe Him 이면, 그냥 지식적으로 알고, 믿는 거예요.
그렇지만 believe in Him이 되면 요3:16
인격적으로 그분을 신뢰한다. 그 분을 인격적으로 믿는다... 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내 인생 전체를 다 맡겨 버렸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믿음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것(믿음)을 어떤 식으로 표현했냐면
갈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인생의 기초가 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항상 주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이건 절대로 이상한게 아닙니다.
'어떻게 24시간 예수님만 바라보고 사느냐?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스토커다.'
그렇게 말하는 분에게, 정말 성경을 다시 읽어 보시라고, 제가 이야기하고 싶어요.
정말 주님과의 관계를 이해 못하는 사람인 거죠.
'우리가 밥을 먹고, 직장도 다녀야 되고, 가정 생활도 해야 되고,
사회생활도 해야 되고, 어떻게 24시간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거냐?'
직장생활을 하던.. 밥을 먹든.. 가정 생활을 하든..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해야 돼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게 정상이에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 그의 인생의 기초인 사람인 거예요.
▲예수님 당시 때 베다니 마을에 살던 마리아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자매, 특별할게 전혀 없는 자매였어요.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어요.
눅10:42절에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는 칭찬을 받았어요.
마리아가 어떻게 했길래?
예수님의 발밑에서 주님의 말씀을 계속 귀 기울여 듣는 일을 했어요.
아 지금 식사 준비도 해야 되는데,
마리아는 그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자기에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주님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는데,
주님은 '네가 더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셨어요.
주님은 그걸 원하신다는 거죠.
저는, 마리아와 같은 갈망이 제 속에 계속 있습니다.
계속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진짜 마리아가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그런 심정이에요.
계속 '주님은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
지금 주님은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싶으실까?'
'주님은 나에게 조금 더 정확하고 깊게, 좀 더 분명하게 역사해 주시면 좋겠는데...'
그게 제 속의 갈망이에요.
저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제 인생의 기초가 이제는 예수님이 되신 거죠.
▲여러분, 우리는 순간순간 정말 주님 위에 굳게 서 있어야 돼요.
저는 요즘 다시 '나는 죽고 예수를 사는' 이 고백을 제가 수시로 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도 고백하고...
새벽기도 달려 나오면서도 짬짬이 '주님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합니다.
제 자신의 육신을 더 분명하게 느끼기 때문에
제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이 육신과, 육신의 욕구와, 또 육신의 충동들...
그런 걸 계속 느끼니까,
전에도 계속 그랬겠지만, 그게 더 강하게 느껴져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어떻게 저 스스로 제 육신을 이길 수 있겠어요?
그래서 믿음의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주님 나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이시고, 내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우리의 힘으로 하라' 그러면 그건 복음이 아니에요.
여러분 인생의 기초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거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게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해주시는 일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계속 주님께 귀 기울이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대로 살 힘을 주세요.
저는 연약해요. 때때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 못할 때가 너무 많아요.
그럴 때 전에는,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순종해야 되겠다' 해서 또 결심하고 또 작정하고
근데 이제는 그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거는 아마 죽을 때까지 해결이 안 될 거예요.
주님은 제가 해야 될 일을, 하나만 말씀하셨어요.
'너는 너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냥 인정해라. 오히려 그걸 감사해라.'
그래서 저는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한 고백을 해요.
'주님 저는 너무나 못된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저를 통해서 역사하시는게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저의 원래 성품이 그렇지 못했고... 그건 저 자신이 알지요.
제 고집, 어리석음, 그리고 육신적인 연약함, 어떤 속물적인 근성,
다 그냥 그대로 있지요.
그런데도 이렇게 목사로서 이렇게 설교를 해야 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제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스스로 해결하고, 어떻게 설 수 있겠어요?
그냥 주님 앞에 고백해요.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 감사합니다.'
왜요? 제가 육신에 끌려가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 힘을 주실 분이 주님이십니까요.
그래서 제가 뭔가 좀 그럴듯한 일을 했다면, 다 전적으로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오히려 간증의 삶을 살아요.
여러분 왜 예수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실까요?
이미 예수 믿을 때 성령은 받았는데, 이미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와 계신데...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여기까지 오신 건데...
왜 오늘 밤에 다시 성령을 받아야 됩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안 계신 사람에게 '성령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이미 우리 안에 오신 성령, 그분을 알아가고, 그 분으로 충만해지라는 겁니다.
너무 모르고 지나니까... 성령님을 모시고 살지만,
전혀 모르고 사니까요...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와 계신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의식이 없어요.
주님이 진짜 여러분 안에,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 영광을 정말 우리가 안다면, 사실 너무 황송해서... 밥도 못 먹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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