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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의 복

by 【고동엽】 2024. 11. 19.

마태복음 5:4


두번째 복(福)에 대해 살펴 봅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것과 같이 하나의 역설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은 인간의 최고의 유익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일반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끄는 세상적 목표들이 삶의 진정한 목표라면 우리 주님 의 말씀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슬퍼하고 위로받는 것보다는 전혀 슬퍼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참 목적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데 있다면 거룩한 슬픔보다 더 좋은 것도 세상에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들로 인정받는 사상가들과 시인들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 동일한 사상을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과는 달리, 특수한 의미가 담긴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장엄함과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깊으며, 인간의 생래적 본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문의 사상을 간단히 둘로 나누어, 즉 하나는 애통하는 자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하나는 그들이 받는 위로가 무엇인가에 대해 살 펴 보겠습니다.

1. 애통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우리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애통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펜데오(헬3996)는'슬퍼하다, 근심하다, 애통하다' 를 뜻하며, 슬픔의 여러 가지 양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단어는 세속 헬 라어에서 죽은 자를 위하여 애곡하는 것에 대해 사용된 말로서 애통을 표현하는 헬라말 중 가장 강한 말입니다.

70인역본에 보면,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이 죽은 것으로 믿고 슬퍼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이 단어는 격심한 비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기서 죽은 자에 대해 애통하는 것과 같은 어떤 생래적 의미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선언하신 복은 어떤 보편적인 복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애통하는 자가 누구나 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일 모든 슬픔이 다 복된 것이라면 인간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 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불행한 사람이 많고 가슴 아픈 사람이 많은 이 세상에 대해, 참으로 그것은 좋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 강해에서 살펴본 바, 그리스도께서 복되도다고 선언하신 가난이 단 순한 환경상의 궁핍, 물질적 궁핍이 아닌 것처럼 이 애통도 단순한 외부적 환경의 변화나 어떤 자연적 원인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번째 복(마 5:3)의 영향력이 모든 팔복에 골고루 미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복 이 있다고 선언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역시 이 복의 근거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외적 조건을 넘어서, 보다 깊은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우선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요든 재난이든 그 어떤 상태도 그 자체가 절 대적, 필연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과, 참된 복의 자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환 경에 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성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애통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첫째로, 이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핍과 무가치성과 추악함과 죄에 대해 통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복이 있다"고 선포하신 애통 하는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 신약성경에서 이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아니는 구약에서 '통회 하는 심령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사66:2).

애통은 영적 가난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영적 가난은 자신의 인격과 결점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인식입니다. 애통해 함은 그러한 인식의 결과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전자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선지자의 통찰과 같은 것이며, 후자는 그와 동시에 외쳤던 이 선지자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곡성과 같 은 것입니다.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자는, 자신이 마땅히 이룩해야 할 인격과 자신의 현 상태 사이의 무서운 괴리를 보고 슬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불행 또는 피할 수 없는 피조물의 연약성이 마음 속에 작용하고 있음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죄악의 현실이 눈 앞에 다가옵니다.개인적 책임과 죄가 사실로 드러납니다. 과거의 실상을 목격하고 자기 존재의 심연을 깊이 내려다 본 영혼은 "애통해 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통회 자복이 모든 도덕적 진보의 기초를 이룹니다.
산상 수훈의 윤리적 가르침은 영의 가난과 죄에 대한 눈물, 이 두 가지를 기초에 깔고 있습니다.
확실히 여러분과 내가 자신의 참 모습을 순간적이나마 살펴본 적이 있다면, 더 나 아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얼굴 빛 앞에 드러내 놓고, 하나님으로부터 비쳐오는, 만물을 샅샅이 드러내는 그 밝은 빛 가운데서 자신의 인격과 행위를 낱낱이 살펴 본 적이 있다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상한 자라 하더라도 "화로 다 나여 망하게 되었
도다"라는 그 절규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세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우리가 어떤 신학적 용어로서가 아니라 한 집착하는 인격적 사실로서, 하나님께 대한 범죄가 무엇이며, 그 범죄로부터 필연적으로 어떤 결과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자비하심이 어떤 역효과를 불러 일으 키며(점차 악화되고 강팍해짐), 우리가 악행을 저지르고 난 다음 입술을 싹 닦고'내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노라'고 얼마나 손쉽게 말하는 가를 진정으로 깨 닫는다면, 우리는 이 죄에 대한 애통의 체험의 깊이를 알고 있었던 것 보다 더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소위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 사실에 대한 보다 강렬한 깨달음, 개인적 죄악의 심각성에 대한 보다 깊은 체험, 바로 이것보다 그 필요성이 더 큰 것은 별로 없다고 봅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자칭 그리스도교라 일컫는, 그 많은 피상적 신앙의 뿌리가 바로 이러한 체험의 결여에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신음하게 하는 거의 모든 악의 근 원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만일 자신을 만족스럽게 그리스도인으로 내세우는 수백만의 사람 들이 단 한번이라도 자기의 참 모습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결부시켜 본다면 큰 충격을 받고 바짝 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확신하는 것은 만일 그들이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이 자기를 성찰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더 충격을 받아 넋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권면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극한 복락을 누리는 저 높이 빛나는 고지에 오르고자 한다면 저 낮은 모퉁이로 깊이 깊 이 내려가, 선지자가 어두운 방에서 목격하였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처럼 우리가 그 깊숙한 곳에서 더러운 것, 가증스러운 것, 정욕적인 것들을 얼마나 혐오스레 경배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이것이 저 높은 곳에 오르는 기초이자 첫 계단 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지저분한 심층부를 살펴보게 될 때 우리는 보다 심오한 영적 빈 곤감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진정한 자아 인격 인식은 복된 애통으로 바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와 대면하고 자기와 자기의 생활을 검토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행한 것 때문에 필연적으로 애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의 원리들을 알아야 합니다. 신령한 생활을 한 성자 들은 항상 자기 검토를 권장하며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하루 일을 마치고 모든 일을 잠깐 멈추고 명상하는 가운데 자기 생활을 훑어 보며,

'내가 무엇을 했는가?
내가 무엇을 말했는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했는가?'라고 자문해 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해서는 안될 일을 했음을 발견한다면, 그 그릇된 행위를 생각 하고 아파하고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그는 여기서 멈춰 서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내 속에서 나를 이렇게 행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찌하여 나는 화를 잘 내는가?
­어찌하여 나의 성질은 이리 못된가?
­어찌하여 나는 내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일까?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불친절하고 시기 많고 악한 생각을 품는 것일까?
­어찌하여 나는 교만하고 이기적인가?
­그것은 내 속의 무엇일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처럼 검토하면서 로마서 7장의 체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그의 지체 속에 있음을 발견하며, 그것을 미워하며, 그것 때문에 애 통해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것이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것을 깨닫고는"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 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었습니다(참조, 롬 7:15-24).만일 내 속에 있는 이런 것들 때문에 애통한다면 나는 참으로 애통하고 있는 사람 인 것입니다. 이런 애통하는 자는 역시 나의 이런 죄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고난당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은 역시 인격을 순화시키고 고상하게 만듭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실상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슬픔을 가진다면,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 자신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존중과 존경 과 경의에 대해 요구하는 거만하고 오만한 태도는 모두 신속히 사라집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 성향, 기호에 대한 경계가 지극히 엄밀해 집니다.
­우리의 행동보다 약간 더 지나치게 행동한, 대동소이하게 행동한 나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관대해 집니다.
­동료들에 대한 자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낮아집니다.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 커집니다.
­이러한 슬픔은 우리를 정신이 바싹들게 만듭니다.
­땅의 화려한 물건들에 대한 욕심에서 우리를 구해줍니다.
­속히 부하려고 하는 자들의 고통과 멸망에서 구해줍니다.
­우리를 보다 진지하고 사려깊게 만들어 줍니다.
­인간을 정복하는 특성인 '슬픔을 자아내는 지혜로운 용기'를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이러한 자기 지식의 부족 때문에, 헛된 환락 가운데서 거품처럼 사라지는 삶, 세칭 '높은 기상'(high spirits)이라는 것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삶, 이것보다 더 경멸할만한 것도 그리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음악치고백치같은 웃음만을 벗삼아 울려오는음악은 없으며구슬픈 음정의 조화없이환희에 맞추어 조율된 현이 없다.
이 시의 작가는 고귀한 인간성이란 단 하나, 웃음과 눈물의 샘이 서로 아주 가까이 놓여 있어 두 물이 함께 뒤섞이는, 그러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솥 아래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인'바보들의 웃음'과 본문의 슬픔에 수반되는 엄숙하고 고귀한 참 기쁨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그러한 애통이 외적인 재난에서 오는 슬픔 속에 주입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외적인 슬픔을 복된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필연적, 보편적으로 복되게 할 수 있는 삶의 어떤 상태는 존재 하지 않습니다. 시인들과 도덕가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함과 향기를 가져다 주는 재난의 영향력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난으로 전보다 더욱 나아진 사람들이 있으나 재난에 대한 슬픔으 로 더욱 상태가 악화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재난의 압박으로 인해 희망을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의무를 망각하고, 이기적이 고 음울하고 완고한 성품으로 변한 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재난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도 있습 니다. 바로 이러한 자들이 본문의 이 축복 선언 범위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외적인 비탄이 복된 슬픔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영적
가난에서 오는 애통의 물감 한 두 방울을 환난의 잔에 슬쩍 떨어뜨리게 되면 그 속의 물은 맑고 향기롭게 변 하며 맛이 쓴 강장제로 바뀝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외적인 손실과 실망과 아픔을 통해 우리의 무가치성을 깨닫게 된다면 이것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향기로운 선물인 것입니다.

여러분, 재난이 단순히 재난으로 끝나지 않게 하십시오.

(2) 둘째로, 이 애통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입니 다. 그는 자기 자신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 동일한 것을 봅니다. 그는 사회의 상태와 세상의 상태에 관심을 가지며, 그가 신문을 읽으면서 보는 것 에나 단순히 그것에 혐오감을 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 들이 이 생에서 그렇게 그들의 삶을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진실로 그는 더 나아가서 인류의 도덕적 혼란과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듣고 읽으면서 온 세상의 상태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는 온 세상이 불건전하고 불행한 상태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그것이 모두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 때문에 애통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인간의 죄악과 불행을 보시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가 고난과 슬픔의 사람이 되고 십자가를 지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멸망당할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그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 을 뻔 하였다"하시면서 우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들어와 인생에 주입하고, 인생을 망치고 불행하게 만든 죄라는 그 무섭고 추악하고 더러운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것 때문에 우셨고 심령으로 고통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것 때문에 애통하셨으며, 참으로 그를 따르는 자, 곧 그의 본질을 받은 사람들도 애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죄 자체의 성격, 그 죄가 세상에 들어와 그 무서운 결과를 초래 하기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것을 보고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렘 4 : 19).에스겔 9 : 4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를 인하여 탄식하고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 게 무엇을 시사해 줍니까? 다른 사람들의 죄와 그것으로 인한 불행을 보고 애통 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근심(슬픔)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 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동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께로 돌아오기를 원한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와 그것으로 인한 불행을 보고 애통하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죄사함받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국가, 사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이제 우는 자는 복이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 이요 … 화있을진저 너회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와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상태를 보고 이제 울고 있습니까? 웃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웃을 때가 아니라 울어야 할 때입 니다.

2. 애통하는 자가 받는 위로가 무엇인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우리 주님은 선언하셨 습니다. 감상주의자들이 모든 슬픔이나 애통은 위로를 받으며 따라서 그것은 복이 있다 라 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슬픔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아픔이 어떤 수단에 의해 감소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소하고 무 가치하고 열등하고 혹은 잘못된 치유책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일로 관심을 돌릴때 위로를 받게 된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뜻하는 애통은, 그것을 소유한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위로를 보장 합니다. 그 위로는 현재적임과 동시에 미래적인 것입니다. 먼저"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에 해당하는 파라클레데손타이(직설 미래 수
동) 팔 라칼레오(헬3870)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파라칼레오는' ~ 곁에, 가까이'를 뜻하는 전치사 파라와 '부르다'를 뜻하는 동 사 칼레오가 결합된 것이며, 따라서 기본 의미는 '아무개를 자기에게로(곁에, 가까이) 부르다'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부르다, 초청하다, 요구(청)하다, 간청(구)하다, 권고(면)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 힘(기운)을 돋구다, 강하게 하다'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히브리어 나함(히1344)의 역어로'가엾게 여기다, 동정하다'란 의미도 함축하고 있습니다(참조: 시 135:14, 삿 2:18).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실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세기에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로"에 관해 말했는데, 그것은 '구 세주에 관한 소망의 성취'를 의미합니다(H. L. Straib와 P. Billerbeck의 탈무드와 미드라쉬에 입각한 신약 성경 주석).누가복음 2:25에 보면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이 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 는 것을 말합니다(참조: G. Braimann. NI DNTT; Stahlini TDNT).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의미들에서 이 "위로"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현세에서 받는 위로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애통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위로를 받습니다. 자기의 죄와 비참 한 상태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이 러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그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구세주에 관한 소망의 성취로 위로를 받습니다. 애통하는 자 의 위로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슬픔과 아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십니까? 당신이 만일 자아에 대해 큰 절망을 느끼고 실망 가운데서도 확신을 가지고 이 위 대하신 주님 앞에 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줄 수 있는 위로가 얼마나 깊고 진 귀한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시오. 그러면 주께서 그러한 위로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애통하는 자들 곁에, 임재하여,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병을 치유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강하게 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복된 약속과 보증, 권면으로 실망과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게 함으로 위로 하십니다(참조: 히 6:18; 롬15:4).
­실망과 절망으로 힘을 잃은 우리에게 힘을 돋구고 격려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불안에 대해"안심하라"는 인사(마9:2, 22)와 평안을 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참조: 요 14:27; 16:33).
둘째로 애통하는 자는 심령의 가난에 기초를 두는 이 애통으로 인하여 특별히 용서와 정화의 위로를 확실하게 받습다. 우리의 죄를 사라지게 하고 악을 향한 고질적 성향을 우리의 본성에서 용해시키는,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손길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자녀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심령에 미칠 것입니다.

사람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애통해하게 되면 그리스도는 필연코 재빠른 응답을 보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할 때, 우리의 죄 때문에 당하신 그리스도 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애통에 대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를 고난당하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애통할 때, 죄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 위로는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충만한 기쁨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이 애통은 가장 고상하고 순결한 기쁨 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그러한 희열이 있어야만 이 애통이 지극히 순결한 체험 이 되는 것입니다.  고귀한 삶에는 그러한 슬픔이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영의 빈곤감 속에서 천국의 부요를 소유한 사람만큼이나, 또한 기뻐할 만한 이유도 그리 많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상호 불일치하고 모순되면서도 함께 뒤섞일 수 있는 이 두가지 감정, 즉 복된 애통과 말할 수 없는 영광이 가득한 기쁨이 나란히 공존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와 같이 공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고후 6:10)라고 하였고, 베드로는 슬픔과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할수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벧전 1:8). 우리 주님은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 니 너희가 웃을 것이요"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 6:21).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죄사함을 받은 기쁨, 화해의 기쁨, 주님과 친교의 기쁨, 우리 앞에 있는 영광의 기쁨과 기대, 영원한 상태에 대한 소망에서 오는 기쁨 등을 가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절망적 상태를 인식하십시오, 주께서 당신을 높이실 것
입 니다. 우리가 심연 속으로 더욱 깊이 내려갈수록 되튀김이 더욱 강렬해지고 정점을 향해 더 높이 오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속 깊숙히 가장 달콤하고 가장 신성하고 가장 은밀한 곳으로 들 어가 거기에서 완전 충족적인 위로를 얻을 사람은, 영의 가난을 느끼고 이로 인해 애통하는 자들, 오직 그러한 자들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외적인 슬픔을 이 자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의식과 결합시키는 자들에게도, 그 위로가 가장 고상하고 가장 흡족한 형태로 다가올 것입니다. .만일 폭포수가 검은 바위에 부딪혀 물보라를 뿌리지 않는다면 햇빛을 받아 무지개 빛깔을 발산하지
못할 것입니다.

(2) 미래의 위로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천국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면(벧전1:8). 저 천국에서는 그 기쁨이 어떻겠습니까? 천국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좋은 것으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계 7:17).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 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계 21:4).
이러한 위로에 대한 소망 자체가 또한 위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죄악의 깊이를 헤아리게 될 때 그 소망은 한층 더 밝아질 것입니다. 서쪽 하늘에 붉게 타 오르는 영묘하기 그지 없는 아름다운 노을이 완연히 비치게 되려면, 땅 위에 어둠 이 내리 깔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땅의 슬픔을 배경 삼아 하늘의 빛이 선명하게 채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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