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영혼의 정원 가꾸기

by 【고동엽】 2024. 11. 19.

영혼의 정원 가꾸기  

 

 

 

                                     13:24-30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                  

 

 

 

 

 이 세상은 공존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밝음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높음과 낮음이, 진리와 비진리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며 공존합니다. 그래서 어두움과 밝음이 서로 마주하며 경쟁관계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정원을 잘 가꾸었습니다. 잔디와 꽃들을 예쁘게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잡초가 돋아났습니다. 뿌리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뽑아도 자꾸만 나옵니다. 고민입니다. 밭을 갈아엎으면 흙냄새가 풍기고 풀 하나가 없습니다. 그곳에 곡식만 심었습니다. 그리고 잘 가꾸었습니다. 그건데 얼마 후 그곳에 잡초가 돋아났습니다. 심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논에 모만 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피가 자라고 있습니다. 뽑아도 더 완강하게 더 크게 더 왕성하게 자랍니다.  

 

 이것은 자연계에도 그렇지만 신앙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잡초는 정신의 세계에도 영혼의 세계에도 돋아납니다. 본문을 보면 잡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잠잘 때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밭에 잡초의 씨를 뿌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에 이 악의 씨인 잡초 씨를 뿌렸다는 말입니다. 잡초는 뽑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제자들이 “잡초를 뽑을까요”하고 묻습니다. 그때 주님은 “가만두어라, 곡식까지 뽑힐까 염려된다” 고 말씀하십니다. 가끔 잡초를 뽑다 보면 곡식도 뽑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만두라,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하면 추수 때까지 입니다. 추수 때는 심판의 때를 말합니다. 그 때는 모든 곡식을 다 거두어 알곡들은 곡간에 넣고 쭉정이 들은 불사르게 됩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이 잡초는 불의를 말하고 어두움을 말하고 쭉정이를 말합니다. 이 잡초는 이 세상 어디에나 다 있습니다.

 

 

 

 

세상의 잡초 인생들

 

 

 

 

 

이 세상은 선한 사람들이 살아야 할 세상입니다. 그런데 악인들도 끼어 삽니다. 그들은 잡초 같은 인생들입니다. 선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갈등을 유발하고 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가만 놔두라고 하십니다. 잡초를 뽑듯 당장 뽑아버리시지 않고 그냥 보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속이 상합니다. 악이 더 번성하는 것처럼 그들은 더 왕성하고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장수하고 죽을 때도 편안히 죽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약이 오릅니다. 하나님도 고민이십니다. 왜 그냥 놔두라고 하시는가 하면 잡초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힐까 걱정되어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당장 없애지 않고 보고만 계십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는가 하면 추수 때 즉 심판 때까지 입니다. 그때 한꺼번에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까지 불가불 싫어도 그 잡초들과 공존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공존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싫어도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내 옆집 사람이 아무리 싫어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제도가 잘못되고 싫어도 따라야 합니다. 그 제도가 모두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면 우리는 그 제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도리입니다. 암이 싫어도 그 암조차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암이 싫다고 억지로 떼어버리려고 하면 암 근원은 더 왕성해집니다. 온 몸에 퍼져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육신을 넘어트립니다. 함께 품고 살아야 합니다.

 

 때로 성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개조하기 위해서 혁명을 하기도 합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한결같이 사정을 합니다. 죄인들을 마구 잡아들입니다. 무섭게 벌을 줍니다. 세상을 그리고 재도를 개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삐뚤어진 인간성은 그런 혁명으로 개조가 안 됩니다. 혁명으로 개조된다면 이미 공산주의는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매일같이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 착각입니다. 월남전 때 베트콩이 분명 숲속 정글에서 나오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또 발견하고 쫒아 가면 정글 속으로 도망하여 숨는데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분명 이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찾아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고엽제라는 무서운 제초제를 그 일대에 뿌려버렸습니다. 그 결과 베트콩들이 출현하고 순간 숨어버리는 지하 동굴을 발견하기는 했는데 그 대신 정글의 우거진 숲들을 완전히 태워 폐허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삼림이 다 말라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선한 사람들이 고엽제 영향으로 암이 발생하고 피부병에 시달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 세상은 혁명으로, 전쟁으로, 사정으로 개혁으로 이미 삐뚤어진 인간성을 바로잡을 수가 없습니다.

 

 밭에 잡초가 있고 논에 피가 있어서 뽑아도 또 나오고 뽑아도 또 나옵니다. 귀찮아도 나올 때마다 뽑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이 정도입니다. 그 일이 어렵다고 고엽제를 뿌려버리면 다 죽습니다. 자연도 죽지만 사람도 죽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악인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들은 더 잘 살고 더 건강하고 부자로 성공하며 왕성하게 살고 죽을 때에도 곤히 죽습니다. 그래서 때로 선한 사람들이 낙심하고 때로 의기소침하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악들을 또 죄인들을 그냥 놓아두십니다. 그것이 가라지 비유에서 밝히신 내용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들을 뽑을까 염려되어 추수 때까지 놓아두시는 것입니다. 논이나 밭에만 잡초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도 잡초 같은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시끄러운 것입니다.

 

 

교회안의 잡초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 아닙니다. 가방을 두고 가 보십시오. 금방 없어집니다. 주차 시 안내 도우미들이 이리 오라 가라 해 보십시오. 눈을 부릅뜨고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대듭니다. 설교를 조금만 이상하게 해 보십시오. 금방 전화가 옵니다. 참으로 무섭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라고 다 천사가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은 집중적으로 공격하셨습니다. “화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 천국의 문을 가로막고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여( 23:13).” 얼마나 무서운 질책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천국의 문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이 다 천사는 아닙니다. 그리고 권사 장로라고 해서 다 천사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잡초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 잡초가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속에 잡초들이 함께 자라고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잡초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교회 안에 잡초 같은 신자가 없겠습니까.  

 

 요즘에는 이단들이 기성교회에 들어와 잡초처럼 동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는 이단의 간부급들만 집중적으로 몰려 들어가서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충성을 다해서 마침내 신임을 얻어 구역장들이 되었습니다. 총 전도주일날에는 자기들 편을 다 끌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잡초 동아리를 크게 틀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어 동아리를 점점 확대해 나갔습니다. 나중에 비로소 알고 뽑아내려고 하니까 동아리가 너무 커져서 곡식들이 다칠까 봐 애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잡초가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그를 속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하였고 함께 십자가의 길까지 갔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를 솎아 냈더라면 12명의 조직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그냥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유다는 본색을 드러내고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교회 안에도 잡초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잡초 같은 신자들이 있어서 교회 공동체를 불화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분열하게 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신자들이 모두 잡초 신자들입니다.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모두 천사로 봅니다. 그래서 천사 수준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교회들이 감당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고민입니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우리 영혼의 잡초

 

 

 

 

이 잡초는 교회 안 뿐 아니고 우리의 영혼에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세례 받고 모두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쯤 되면 100% 옥토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알곡만 나와야 하고 우리는 모두 성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 속에서 자꾸만 음탕한 생각이 떠오르고 탐욕과 욕망과 시기와 거짓이 솟아나오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려는 본성이 나오는 것입니까. 왜 권사가 고부간의 문제 하나를 풀지 못하고 시누이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발생하는 문제 하나를 풀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그럴까요. 그것은 내 영혼에 잡초가 우거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권사가 되고 장로와 목사가 되었는데도 왜 내 속에서 조화의 힘이 나오지 않고 자꾸만 내가 원치 않는 시기와 탐욕과 욕망과 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내 영혼에 잡초가 우거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분명 내가 거듭나고 성결하고 영적 체험을 하고 주님의 사도까지 되었는데 왜 내 마음속에서 내가 원치 않는 이 죄의 뿌리들이 남아있어서 나를 괴롭히느냐고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마침내 탄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죄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각오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잡초는 죽을 때까지 다 뽑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밭에 잡초가 뽑아도 자꾸만 일어나듯이 내 영혼 안에도 이 잡초가 계속 나를 괴롭힐 것입니다. 잡초가 더 우거지게 되면 더 괴롭힐 것이고 덜 우거져 있으면 덜 괴롭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영혼을 가꾸어야 합니다. 잡초가 더 이상 왕성하게 돋아나지 않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잡초들은 단결하는 힘이 있습니다. 잡초는 서로 엉겨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왕성하게 자랍니다. 논바닥의 피를 보면 벼보다 더 왕성합니다. 서로 엉겨서 뽑으면 곡식들이 다치게 됩니다. 악인들 특히 이 세상의 어깨들을 보십시오. 단결력이 얼마나 좋습니까. 의리로 뭉쳐 있습니다. 내 영혼 안에도 이 잡초가 있습니다.

 

 

 

 

관리 방안

 

 

 

 

기도와 말씀과 묵상으로 이 잡초를 다스려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그래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도는 나로 하여금 내안의 죄의 뿌리를 다스리고 억제하게 하는 힘이 있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힘도 공급해 줍니다. 오늘을 3무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무관심과 무책임과 무감동의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시대에 설교해서 감동을 주려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래서 묵상은 중요한 신앙수단 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수단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수단입니다. 묵상기도는 눈을 감는 기도입니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눈을 감는 다는 것은 다른 눈으로 보기 위함 입니다. 그 다른 눈이 영안입니다. 즉 믿음의 눈입니다. 육체의 시각이 아닌 영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오늘 내게 처한 현실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삭막한 현실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이 현실을 보면 소망적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눈을 감고 보면 그 현실 넘어 고난 중에 현존하시고 그리고 고난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묵상할 때에는 눈을 감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현실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기 위함입니다.  

 

 묵상은 사막 교부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수도원에 들어와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수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묵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때부터 입니다. 그때 묵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귀고 2(Guigo II)입니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가르칠까 궁리를 하다가 야곱의 꿈에 나타난 사다리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 보면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사다리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는 그 과정을 보고 4단계로 발전시켰습니다. 하나는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 즉 “성경 읽기”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독서”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메디타치오”(meditatio) 즉 “묵상하기”입니다. 본문 내용의 단어들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일입니다. 왜 이 단어가 나왔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라치오”(oratio) 즉 “기도하기”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를 기도합니다. 그것은 본문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나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 같은 사례의 가장 좋은 샘플은 복음서에 나타난 주기도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필요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의기도 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하나님의 필요가 나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인간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입니다. 네 번째는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 즉 “관조”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바라봅니다. 그때 세밀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때 유념할 것은 처음 묵상할 때에는 온갖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 속 썩이는 아들, 미운 이웃들, 보기 싫은 구역식구들이 생각납니다. 그런 생각들이 내 마음에 남아있는 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상상들과 잡생각들을 정화시키고 몰아내고 내려놓아야 가능합니다. 그때 내 마음에 비로소 고요가 찾아오고 정화와 평정이 찾아오는데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내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안에 떨어지면 그냥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폭발시키는 힘으로 역사를 합니다. 그 힘으로 내 영혼에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억눌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내 영혼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꿀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내안에서 잡초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가득하면 잡초가 없는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채우게 되면 이 세상에 잡초들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잡초 같은 인생들이 발붙일 자리가 적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고 이 세상을 소리 없이 개혁하고 복음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속물근성이 들어있습니다. 밭을 갈고 그냥 방치해 두면 온갖 잡초들로 산을 이루듯이 내 안의 잡초를 그냥 방치해 두면 나는 머지않아 속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주님은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