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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로마에 도착하는 바울(사도행전 28:7~15)

by 【고동엽】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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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도착하는 바울(사도행전 28:715)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석 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는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간절하게 로마에 가고 싶어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수도나 다름없었습니다. 바울은 주로 도시 중심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은 동시에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보다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고, 될 수 있는 대로 한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애썼습니다. 그 당시 정치, 군사, 문화 등 모든 것의 중심은 단연코 로마였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에 가서 꼭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는 바로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안디옥에서 머무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아덴을 거쳐 고린도를 지나 이제는 로마에까지 갑니다. 로마서에 보면 그는 로마뿐만 아니라 그 당시로 볼 때에 지구 끝이었던 서바나까지도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꼭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무리하지는 않았습니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 바울이 가고자 하는 길이 지금 우리처럼 38선이나 철의 장막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무리한 길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순리대로 열려지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인해서 길이 막힐 때, 또한 중요하게 해야할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 뿌리친 채 '나는 로마로 간다. 다 상관없다'하는 식의 무모하거나 고집스러운 전략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순리대로-----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야 되고, 순탄케 해주셔야 되고,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자신에게도 계획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추상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하면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보세요. 주님의 뜻이 따로 있었어요.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전도 시작한 지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제자들은 아직 철이 없어요. 이런 시점에서 내일아침에 죽어야 되겠습니까? 좀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좀더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는 '이 십자가를 이 시간 내게서 지나치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는 자기소원이 있었어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이것이 바로 순리였습니다. 적어도 내 자신의 의견을 완전히 부인한 상태에서 따르는, 이것이 순리입니다. 하늘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단 한마디 끝내시고서 그대로 눈앞의 십자가를 감당하십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저는 이 찬송을 사랑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광산에 끌려가게 됐을 때의 일입니다. 이제 그곳에 가면 죽을는지 살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교회에 갔습니다. 사실은 기도하러 갔는데 한 3시간 동안 그저 계속해서 그 찬송만 불렀어요. 교회에 있는 조그마한 오르간(제가 아주 좋아해서 바람 통이 터지면 풀로 붙이곤 하던)을 치면서 좌우간 "내 주여 뜻대로……" 이 찬송을 얼마나 불렀는지 모릅니다. 다른 기도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어떤 분은 그 찬송 3절을 안 불러요. 왜 안 부르는지 알겠지요?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이 가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아예 '에잇, 나 그 부분은 안 부르련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주여 뜻대로''살든지 죽든지'가 뒤따라야 진짜 '내 주여 뜻대로'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가는 것이 '내 주의 뜻'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 주의 뜻이 아니다' 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보세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라고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김입니다. 결국 바울은 이 편지(로마서)를 쓰고 나서 훨씬 뒤에야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내 주의 뜻'이었어요.

또한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바울의 마음도 그랬어요. 평탄하면 좋지 않겠어요? 기왕이면 걸어가는 것보다 마차 타고 가는 것이, 더욱이 많은 수행원이 따른다면 더 좋고, 환영받으면서 가면 더 좋겠지요. 그리고 영광스럽게 로마에 입성해서 의기양양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또 자유인으로서 로마에 들어가기를 바랐겠지요.

가능하면 사람들이 로마 광장에서 전도집회 준비를 다 해놓고 여기에'바울 선생님'하고 영접해준다면 더 좋겠지요. '좋은 길'---아마도 바울은 무엇인가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좀더 평탄하고, 좀더 효과적이고, 좀더 선교에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길이 열렸으면 했어요. 그래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했는데 그 좋은 길이 자기가 생각하던 것이 아니었어요.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갑니다. 그것도 죽을 고생을 해서 구사일생으로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좋은 길이었어요. 여러분, 대단히 죄송하지만 예수 믿으면서 너무 그렇게 여유 있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제 일생을 돌아봐도, 하나님께서는 꼭 막다른 골목에서만 인도하시더라고요. 때때로 조금 인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왜 그걸 이렇게 하실까?'---그러나 그 길이 아니고는 넓은 길로 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잘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일의 성격도, 결과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좋은 길', 가시밭길로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 바울이 이제 로마로 갑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좋은 길, 그것이 바로 이렇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이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였습니다. 사도행전 2311절은 말씀합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사도 바울은 이 약속을 믿고, 이 약속만을 붙들고 성령 안에서 용기 있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3년만 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일아침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어요. 3년만에, 천신만고 끝에 이제야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에 가기 바로 직전에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나게됩니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이 그것입니다. 저들은 멜리데 섬에서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특별히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7)"의 대접을 받습니다. "제일 높은 사람"----원래 '토프로토'라고 하는 이 말은 '첫째'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보블리오는 이 섬에서 첫째가는 사람, 영주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바울 일행은 이 사람의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왜 대접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먼저는 풍랑 속에서 저들이 겪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많은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를 알았기에 보블리오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이다'하는 한 가닥 경건이 있었기에 저들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또 지난 시간에도 보았듯이 바울이 뱀에 물렸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어요. 그것을 보고 바울을 가리켜 '신이다'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만큼 바울은 높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보세요. 고난 속에서 무사했습니다. 풍랑 속에서 무사했습니다, 뱀에 물렸어도 무사했어요. 보블리오는 '바울이 무사하다'는 그 사실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거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섬의 중요한 인물인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지금 병에 걸려서 죽을 지경이 될 것은 또 뭡니까? 그러나 이 때에 바울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8)"-----그랬더니 또 온 마을의 환자들이 다 몰려옵니다. 당연히 그럴 것 아니겠어요? '바울한테 가면 만병통치라고 하더라'며 많은 사람들이 환자를 데리고 왔어요. 바울은 또 그 환자들을 다 안수하여 고쳐줍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 마을의 가장 높은 사람이 저들을 대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연히 친절을 베풀게 됩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경건도 있고, 얼마간의 신앙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은 보답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자기 고쳐준 것에 대한, 자기 아버지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7,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뱀을 손으로 집으며 독을 마셔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바울은 뱀에게 물렸습니다마는 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주의 일하는 사람들에게 뒤따르는 기적입니다. 그 옛날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많은 고생을 합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풀무 불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적입니다. 또한 이런 기적이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심을 더욱 더 믿고 알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와 같은 일이 오늘 여기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 그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긴 설명은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중요하고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믿는 믿음은 고난 속에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평생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건강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건강의 고마움도 모릅니다. 저는 이런 장로님 한 분을 만나보았어요. 자기는 이제껏 병원에 한번도 안 가봤다고, 그렇게 건강하다고 자신만만해합디다. 그런데 웬걸, 딱 한번 아프더니만 세상을 떠나 버렸어요. 보세요.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몰라요. 안다고 말들은 하지요. 그러나 병원에 갈 때만큼이나 압니까? 그저 병원에서 몇 번 죽을 둥 살 둥 해야 정말로 압니다. 그래, 저는 병원에 가서 입원한 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꼭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그간에 건강하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오늘은 병들었더라도 지금까지 건강했던 것이 바로 능력 아닙니까? 이것이 축복 아닙니까? "그리고 이렇게 병중에서라도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나를 보호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이것,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평범하고 무사하고, 이토록 심한 공해 속에서 무사히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 기적입니까?

저는 때때로 하루 열 시간, 여덟 시간을 운전할 때가 있어요. 지난번에도 열 시간 운전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 한숨 푹 자고 나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몇 번 죽을 뻔했는데……' 그렇지 않아요? 사실은 매일 매일이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 그러면 운전기사를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보다야 차라리 제가 낫지요.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내가 해야지 그것을 누구에게 맡깁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하십니다. 확실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고난 속에서만 알고 깨닫습니다. 인간의 미련함이 여기에 있어요. 흥해서는 안돼요. 그런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피부로 느끼지 못해요. 그런고로 감사도 없고 고마움도 없고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세요. 고난이라고 하는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또 이 사건들을 보고서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듣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또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좀더 겸손하고 온유한 가운데 밝은 마음으로 한번 수용해보세요. 고난이 왜 있어야할 것 같습니까? 왜 가난이 있고 질병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 전략입니다. 바울이 풍랑을 겪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된 바울의 위상이 높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필이면276명이나 되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이 뱀에 물리는 것입니까? 하지만 바울이 물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됨을 증거 하게 되지 않습니까? 또 하필이면 가장 높은 사람의 아버지가 이 때에 병에 걸리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실 이 병에 꼭 걸릴만했어요. 그럴 가치가있었습니다. 자칫 그 아버지는 죽을 뻔했습니다만 이 사건이 있었기에 그 한겨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3개월 동안이나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왜 있어야 하느냐고 우리는 묻지만, 모든 일이 다 지나간 뒤에, 좀더 신앙의 눈으로 바로 볼 때에 고난은 있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했어요. 꼭 필요한 것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장에서는 이것을 모르고 또 인정하지 않으려고 듭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에 그것이 왜 있느냐고 묻지 마세요.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도 묻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십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고난의 선교적 의미, 고난의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려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건지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려 하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선교를 가능하게 하시려 하십니다.

그래서 이천 년 선교사를 잘 살펴보면, 복음의 문은 오직 두 가지경우에만 열렸습니다. 가난과 질병---저는 북녘 땅이 빨리 열리기를 바랍니다. 가능한 한 북녘 땅을 위해서 쓰는 돈이라면 얼마든지 우리가 선교비로 써야 되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도 제가 "우리가 북한을 많이 도와줘야겠는데 줄 것은 없고, 라면 공장을 세워달라고 하는데 30억이 든다는군요. 누구 할 사람 있으면 하시오"라고 말했는데 어떤 분이 "제가하겠습니다"하시더군요. 정말 그곳이 지금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북녘 땅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휴대품 중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것이 종합비타민이라고 합니다. 비타민이라는 것이 사실 어떤 사람에게는 비타민 E가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타민 A가 필요하고, 이렇게 각자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종합해서 먹는 것은 조금 무식한 소치랍니다. 서양사람들의 가정에 가보면 식탁에 여러 가지 비타민제가 많이 있어요. 약이 아니라 음식 모양으로 아이들은 이것을, 어른은 저것을, 노인은 또 다른 것을 먹고…… 사실 그래야 하는 거예요. 심지어는 미국에서 종합 비타민을 만드는 것은 한국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말까지 있어요. 알고 보면 좀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북녘 땅에는 종합비타민이 꼭 필요합니다. 모두가 영양실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픈 데도 많아요. 이 비타민 몇 알만 먹으면 반짝하고 당장에 낫습니다.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영양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그리고 좀 아프다고 하면 약으로 주는 것이 설탕 한 봉지입니다. 설탕을 먹어본 적이 전혀 없고 너무 못 먹었기 때문에 조금만 설탕을 먹어도 웬만한 병이 다 나아요. 또 우리는 병원에 가면 당연히 치료받지만 거기서는 일단 '이 환자가 살 사람인가 죽을 사람인가'하고 살펴봅니다. 그래서 죽을 것 같으면 치료 안 해요. 자신 없는 환자는 아예 치료하지 않습니다. 손도 안댑니다. 쉽게 나을 수 있을 때에만 치료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병들고 아주 어렵습니다.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일 선교가 안 되는 곳이 일본입니다. 나름대로 잘사니까요.

그래서 많은 선교사가 그토록 애를 써도 잘 안됩니다. 그런고로 가난과 질병과 전쟁과 고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맨 처음에 복음화가 된 것도 그 때가 바로 병들었을 때요, 가난하고 어려운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음 문을 여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이 지금 멜리데 섬에 있을 때에 여러 가지 사건이 생깁니다. 질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이 안수로 그 병을 고치고 나니까 문이 확 열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게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오늘의 본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인즉 사실은 바울한사람이 좋은 일을 했는데 나머지 275명이 다 그 덕을 봅니다. 그래서 잠언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악인과 동행하면 욕을 얻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무릇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저들은 바울 덕에 산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 한때 라반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야곱 하나 때문에 우상 섬기는 라반의 집에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에 요사스러운 여자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셉 하나를 보시고 복을 내리셨어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39:5)" 그러니까 여러분, 한 가정의 식구가 다 온전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누구 하나만 똑똑히 예수 믿어도 그 한 사람을 보시고 그 가정에 복을 주십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시는 이 몇 분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오늘날 이 도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요. 오늘의 본문에서도 바울 한 사람 대문에 저들은 다 무사했고, 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후한 대접을 받으며 한겨울을 지내고, 석달 후에 로마로 가게 됩니다.

로마로 가는 중간 기착지에서도 바울은 형제들을 만납니다. '형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이 벌써 바울의 소문을 듣고 있다가 찾아와서 만난 것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이 로마에 도착할 때에 "로마로 가니라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4, 15)" 합니다.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을,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담대함을 얻습니다. 그는 분명히 일 년 전에 죄수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자유인입니다. 지금도 신분상으로는 여전히 죄수입니다. 내적으로는 그실 자유인이요 선교사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얘기입니까? 겉으로는 죄수입니다 마는 내용적으로는 자유인이자 당당한 선교사로 지금 로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겪은 많은 고난에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고난으로만 얻어진 결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하다는 것을 압니다. 죄수로서가 아니라 친구로 대접받고, 사도로 로마에 도착하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가 받은 많은 사랑과 친절,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받은 존경을 감사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선장, 백부장, 군인, 멜리데 섬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간에 만난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적으로 높은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이 고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로마에 교회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곳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로마 전도에 있어서 먼저 믿은 이 사람들과 함께 협력해서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어갈 것이라는 생각에 그 전망이 밝아 보입니다. 그래서 또 감사드립니다. 오랜 숙원 끝에, 그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마는 계획한 지 4년만에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긴 여행에서 있었던 불안은 이제 다 사라지고, 안도하는 마음으로 그는 로마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특별히 모든 일이 사람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주도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에 바울은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례한 다음에 곧바로 그는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합니다. 다시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 다시 앞의 일을 우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 이 담력의 연유를 생각해보십시다.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히 깨닫는 사람은 현재에 감사할 수 있어요. 현재 내게 주신 은혜가 확실하다고 믿는 사람은 미래의 것을 걱정하는 않아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없이 가르쳐주십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다"----과거에 너희를 애굽에서 건지신 그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 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걱정할 때마다 애굽에서 어떻게 건지셨는지, 그것을 줄기차게 일깨워주십니다.

여러분, 과거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감사하고있습니까? 그 은혜가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미래의 문제는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세요. 과거에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내 뜻대로 된 일은 없었습니다. 오직 그 분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확실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입니다. 우리는 역사의식이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담대해지고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에 도착하는 바울(사도행전 28:715)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석 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는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간절하게 로마에 가고 싶어했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수도나 다름없었습니다. 바울은 주로 도시 중심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은 동시에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보다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고, 될 수 있는 대로 한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애썼습니다. 그 당시 정치, 군사, 문화 등 모든 것의 중심은 단연코 로마였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에 가서 꼭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는 바로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안디옥에서 머무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아덴을 거쳐 고린도를 지나 이제는 로마에까지 갑니다. 로마서에 보면 그는 로마뿐만 아니라 그 당시로 볼 때에 지구 끝이었던 서바나까지도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꼭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무리하지는 않았습니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 바울이 가고자 하는 길이 지금 우리처럼 38선이나 철의 장막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무리한 길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순리대로 열려지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인해서 길이 막힐 때, 또한 중요하게 해야할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 뿌리친 채 '나는 로마로 간다. 다 상관없다'하는 식의 무모하거나 고집스러운 전략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순리대로-----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야 되고, 순탄케 해주셔야 되고,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자신에게도 계획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추상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하면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보세요. 주님의 뜻이 따로 있었어요.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전도 시작한 지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제자들은 아직 철이 없어요. 이런 시점에서 내일아침에 죽어야 되겠습니까? 좀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좀더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는 '이 십자가를 이 시간 내게서 지나치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는 자기소원이 있었어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이것이 바로 순리였습니다. 적어도 내 자신의 의견을 완전히 부인한 상태에서 따르는, 이것이 순리입니다. 하늘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단 한마디 끝내시고서 그대로 눈앞의 십자가를 감당하십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저는 이 찬송을 사랑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광산에 끌려가게 됐을 때의 일입니다. 이제 그곳에 가면 죽을는지 살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교회에 갔습니다. 사실은 기도하러 갔는데 한 3시간 동안 그저 계속해서 그 찬송만 불렀어요. 교회에 있는 조그마한 오르간(제가 아주 좋아해서 바람 통이 터지면 풀로 붙이곤 하던)을 치면서 좌우간 "내 주여 뜻대로……" 이 찬송을 얼마나 불렀는지 모릅니다. 다른 기도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어떤 분은 그 찬송 3절을 안 불러요. 왜 안 부르는지 알겠지요?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이 가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아예 '에잇, 나 그 부분은 안 부르련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주여 뜻대로''살든지 죽든지'가 뒤따라야 진짜 '내 주여 뜻대로'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가는 것이 '내 주의 뜻'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 주의 뜻이 아니다' 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보세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라고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김입니다. 결국 바울은 이 편지(로마서)를 쓰고 나서 훨씬 뒤에야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내 주의 뜻'이었어요.

또한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바울의 마음도 그랬어요. 평탄하면 좋지 않겠어요? 기왕이면 걸어가는 것보다 마차 타고 가는 것이, 더욱이 많은 수행원이 따른다면 더 좋고, 환영받으면서 가면 더 좋겠지요. 그리고 영광스럽게 로마에 입성해서 의기양양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또 자유인으로서 로마에 들어가기를 바랐겠지요.

가능하면 사람들이 로마 광장에서 전도집회 준비를 다 해놓고 여기에'바울 선생님'하고 영접해준다면 더 좋겠지요. '좋은 길'---아마도 바울은 무엇인가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좀더 평탄하고, 좀더 효과적이고, 좀더 선교에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길이 열렸으면 했어요. 그래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했는데 그 좋은 길이 자기가 생각하던 것이 아니었어요.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갑니다. 그것도 죽을 고생을 해서 구사일생으로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좋은 길이었어요. 여러분, 대단히 죄송하지만 예수 믿으면서 너무 그렇게 여유 있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제 일생을 돌아봐도, 하나님께서는 꼭 막다른 골목에서만 인도하시더라고요. 때때로 조금 인색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왜 그걸 이렇게 하실까?'---그러나 그 길이 아니고는 넓은 길로 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잘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일의 성격도, 결과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좋은 길', 가시밭길로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 바울이 이제 로마로 갑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좋은 길, 그것이 바로 이렇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이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였습니다. 사도행전 2311절은 말씀합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사도 바울은 이 약속을 믿고, 이 약속만을 붙들고 성령 안에서 용기 있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3년만 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일아침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어요. 3년만에, 천신만고 끝에 이제야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에 가기 바로 직전에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나게됩니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이 그것입니다. 저들은 멜리데 섬에서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특별히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7)"의 대접을 받습니다. "제일 높은 사람"----원래 '토프로토'라고 하는 이 말은 '첫째'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보블리오는 이 섬에서 첫째가는 사람, 영주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바울 일행은 이 사람의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왜 대접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먼저는 풍랑 속에서 저들이 겪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많은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를 알았기에 보블리오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이다'하는 한 가닥 경건이 있었기에 저들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또 지난 시간에도 보았듯이 바울이 뱀에 물렸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어요. 그것을 보고 바울을 가리켜 '신이다'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만큼 바울은 높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보세요. 고난 속에서 무사했습니다. 풍랑 속에서 무사했습니다, 뱀에 물렸어도 무사했어요. 보블리오는 '바울이 무사하다'는 그 사실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거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섬의 중요한 인물인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지금 병에 걸려서 죽을 지경이 될 것은 또 뭡니까? 그러나 이 때에 바울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8)"-----그랬더니 또 온 마을의 환자들이 다 몰려옵니다. 당연히 그럴 것 아니겠어요? '바울한테 가면 만병통치라고 하더라'며 많은 사람들이 환자를 데리고 왔어요. 바울은 또 그 환자들을 다 안수하여 고쳐줍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 마을의 가장 높은 사람이 저들을 대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연히 친절을 베풀게 됩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경건도 있고, 얼마간의 신앙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은 보답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자기 고쳐준 것에 대한, 자기 아버지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617,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뱀을 손으로 집으며 독을 마셔도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바울은 뱀에게 물렸습니다마는 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주의 일하는 사람들에게 뒤따르는 기적입니다. 그 옛날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많은 고생을 합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풀무 불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적입니다. 또한 이런 기적이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심을 더욱 더 믿고 알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와 같은 일이 오늘 여기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 그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긴 설명은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중요하고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믿는 믿음은 고난 속에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평생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건강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건강의 고마움도 모릅니다. 저는 이런 장로님 한 분을 만나보았어요. 자기는 이제껏 병원에 한번도 안 가봤다고, 그렇게 건강하다고 자신만만해합디다. 그런데 웬걸, 딱 한번 아프더니만 세상을 떠나 버렸어요. 보세요.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몰라요. 안다고 말들은 하지요. 그러나 병원에 갈 때만큼이나 압니까? 그저 병원에서 몇 번 죽을 둥 살 둥 해야 정말로 압니다. 그래, 저는 병원에 가서 입원한 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꼭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그간에 건강하게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오늘은 병들었더라도 지금까지 건강했던 것이 바로 능력 아닙니까? 이것이 축복 아닙니까? "그리고 이렇게 병중에서라도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나를 보호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이것,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평범하고 무사하고, 이토록 심한 공해 속에서 무사히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 기적입니까?

저는 때때로 하루 열 시간, 여덟 시간을 운전할 때가 있어요. 지난번에도 열 시간 운전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 한숨 푹 자고 나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몇 번 죽을 뻔했는데……' 그렇지 않아요? 사실은 매일 매일이 그렇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 그러면 운전기사를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보다야 차라리 제가 낫지요.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내가 해야지 그것을 누구에게 맡깁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하십니다. 확실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고난 속에서만 알고 깨닫습니다. 인간의 미련함이 여기에 있어요. 흥해서는 안돼요. 그런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피부로 느끼지 못해요. 그런고로 감사도 없고 고마움도 없고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세요. 고난이라고 하는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또 이 사건들을 보고서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듣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또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좀더 겸손하고 온유한 가운데 밝은 마음으로 한번 수용해보세요. 고난이 왜 있어야할 것 같습니까? 왜 가난이 있고 질병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 전략입니다. 바울이 풍랑을 겪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된 바울의 위상이 높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필이면276명이나 되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울이 뱀에 물리는 것입니까? 하지만 바울이 물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됨을 증거 하게 되지 않습니까? 또 하필이면 가장 높은 사람의 아버지가 이 때에 병에 걸리는 것입니까? 그러나 사실 이 병에 꼭 걸릴만했어요. 그럴 가치가있었습니다. 자칫 그 아버지는 죽을 뻔했습니다만 이 사건이 있었기에 그 한겨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3개월 동안이나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왜 있어야 하느냐고 우리는 묻지만, 모든 일이 다 지나간 뒤에, 좀더 신앙의 눈으로 바로 볼 때에 고난은 있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했어요. 꼭 필요한 것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장에서는 이것을 모르고 또 인정하지 않으려고 듭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에 그것이 왜 있느냐고 묻지 마세요.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도 묻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십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고난의 선교적 의미, 고난의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려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건지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려 하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선교를 가능하게 하시려 하십니다.

그래서 이천 년 선교사를 잘 살펴보면, 복음의 문은 오직 두 가지경우에만 열렸습니다. 가난과 질병---저는 북녘 땅이 빨리 열리기를 바랍니다. 가능한 한 북녘 땅을 위해서 쓰는 돈이라면 얼마든지 우리가 선교비로 써야 되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도 제가 "우리가 북한을 많이 도와줘야겠는데 줄 것은 없고, 라면 공장을 세워달라고 하는데 30억이 든다는군요. 누구 할 사람 있으면 하시오"라고 말했는데 어떤 분이 "제가하겠습니다"하시더군요. 정말 그곳이 지금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북녘 땅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휴대품 중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것이 종합비타민이라고 합니다. 비타민이라는 것이 사실 어떤 사람에게는 비타민 E가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타민 A가 필요하고, 이렇게 각자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종합해서 먹는 것은 조금 무식한 소치랍니다. 서양사람들의 가정에 가보면 식탁에 여러 가지 비타민제가 많이 있어요. 약이 아니라 음식 모양으로 아이들은 이것을, 어른은 저것을, 노인은 또 다른 것을 먹고…… 사실 그래야 하는 거예요. 심지어는 미국에서 종합 비타민을 만드는 것은 한국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말까지 있어요. 알고 보면 좀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북녘 땅에는 종합비타민이 꼭 필요합니다. 모두가 영양실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픈 데도 많아요. 이 비타민 몇 알만 먹으면 반짝하고 당장에 낫습니다.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영양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그리고 좀 아프다고 하면 약으로 주는 것이 설탕 한 봉지입니다. 설탕을 먹어본 적이 전혀 없고 너무 못 먹었기 때문에 조금만 설탕을 먹어도 웬만한 병이 다 나아요. 또 우리는 병원에 가면 당연히 치료받지만 거기서는 일단 '이 환자가 살 사람인가 죽을 사람인가'하고 살펴봅니다. 그래서 죽을 것 같으면 치료 안 해요. 자신 없는 환자는 아예 치료하지 않습니다. 손도 안댑니다. 쉽게 나을 수 있을 때에만 치료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병들고 아주 어렵습니다.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일 선교가 안 되는 곳이 일본입니다. 나름대로 잘사니까요.

그래서 많은 선교사가 그토록 애를 써도 잘 안됩니다. 그런고로 가난과 질병과 전쟁과 고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맨 처음에 복음화가 된 것도 그 때가 바로 병들었을 때요, 가난하고 어려운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음 문을 여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이 지금 멜리데 섬에 있을 때에 여러 가지 사건이 생깁니다. 질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이 안수로 그 병을 고치고 나니까 문이 확 열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게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오늘의 본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인즉 사실은 바울한사람이 좋은 일을 했는데 나머지 275명이 다 그 덕을 봅니다. 그래서 잠언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악인과 동행하면 욕을 얻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무릇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저들은 바울 덕에 산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 한때 라반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야곱 하나 때문에 우상 섬기는 라반의 집에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에 요사스러운 여자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셉 하나를 보시고 복을 내리셨어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39:5)" 그러니까 여러분, 한 가정의 식구가 다 온전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누구 하나만 똑똑히 예수 믿어도 그 한 사람을 보시고 그 가정에 복을 주십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시는 이 몇 분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오늘날 이 도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요. 오늘의 본문에서도 바울 한 사람 대문에 저들은 다 무사했고, 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후한 대접을 받으며 한겨울을 지내고, 석달 후에 로마로 가게 됩니다.

로마로 가는 중간 기착지에서도 바울은 형제들을 만납니다. '형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이 벌써 바울의 소문을 듣고 있다가 찾아와서 만난 것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이 로마에 도착할 때에 "로마로 가니라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4, 15)" 합니다.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을,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담대함을 얻습니다. 그는 분명히 일 년 전에 죄수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자유인입니다. 지금도 신분상으로는 여전히 죄수입니다. 내적으로는 그실 자유인이요 선교사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얘기입니까? 겉으로는 죄수입니다 마는 내용적으로는 자유인이자 당당한 선교사로 지금 로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겪은 많은 고난에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고난으로만 얻어진 결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하다는 것을 압니다. 죄수로서가 아니라 친구로 대접받고, 사도로 로마에 도착하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가 받은 많은 사랑과 친절,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받은 존경을 감사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선장, 백부장, 군인, 멜리데 섬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간에 만난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적으로 높은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이 고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로마에 교회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곳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로마 전도에 있어서 먼저 믿은 이 사람들과 함께 협력해서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어갈 것이라는 생각에 그 전망이 밝아 보입니다. 그래서 또 감사드립니다. 오랜 숙원 끝에, 그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마는 계획한 지 4년만에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긴 여행에서 있었던 불안은 이제 다 사라지고, 안도하는 마음으로 그는 로마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특별히 모든 일이 사람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주도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에 바울은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례한 다음에 곧바로 그는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합니다. 다시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 다시 앞의 일을 우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 이 담력의 연유를 생각해보십시다.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히 깨닫는 사람은 현재에 감사할 수 있어요. 현재 내게 주신 은혜가 확실하다고 믿는 사람은 미래의 것을 걱정하는 않아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없이 가르쳐주십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다"----과거에 너희를 애굽에서 건지신 그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 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걱정할 때마다 애굽에서 어떻게 건지셨는지, 그것을 줄기차게 일깨워주십니다.

여러분, 과거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감사하고있습니까? 그 은혜가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미래의 문제는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세요. 과거에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내 뜻대로 된 일은 없었습니다. 오직 그 분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확실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입니다. 우리는 역사의식이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담대해지고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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