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신명기 27장 11-26절) < 균형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균형을 좋아하신다. 균형은 같은 두 개를 통해 이뤄지기보다 다른 두 개를 통해 이뤄진다. 다른 것에 대해 너무 충격 받거나 놀라지 말라. 하나님의 균형적인 시각을 가지고 다른 것에 대해 관용을 베풀면 된다. 사도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다(빌 4:5). 관용이란 나와 다른 견해나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을 용납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내가 소중한 것처럼 남도 소중하게 여기라.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방법은 다르다.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내가 가는 길이나 생각하는 길과 다른 길을 무조건 틀린 길로 생각하지 말라. 교회마다 다르다. 복음의 본질만 지킨다면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이 아름답다.
자기 생각과 방식에 너무 치우치지 말라. 여호수아 1장을 보면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주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었다. 은혜는 ‘더해주는 성격’을 가진 것이고 진리는 ‘다듬고 빼는 성격’을 가진 것이다. 하나님은 성격이 다른 것을 통해 균형을 이뤄 가신다. 그런 사례는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사람에게는 두 개의 손이 있다. 그것은 균형의 필요성을 암시한다. 하나님께도 비유적으로 두 개의 손이 있다. 본문을 통해 비유하면 두 개의 손은 에발산이라는 손과 그리심산이라는 손이다. 에발산은 저주의 손이고 그리심산은 축복의 손이다. 하나님은 그 2가지 손의 균형을 통해 성도를 건강하고 성숙한 자녀로 만들어 가신다.
시편 23편 4절에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는 고백이 있다. 지팡이는 ‘축복을 내리는 도구’를 상징하고 막대기는 ‘징계를 내리는 도구’를 상징한다. 자녀를 키울 때도 칭찬하는 손과 징계하는 손이 함께 필요하다. 가정에서 어머니는 축복을 내리는 그리심산 역할을 주로 하고 아버지는 징계를 내리는 에발산 역할을 주로 할 때가 많다. 축복과 징계가 겸비될 때 아름다운 인격체가 나온다.
< 말씀에 “아멘!” 하라 >
본문에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의식을 행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 의식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12지파를 둘로 나누어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의 6지파는 축복의 선포를 위해 그리심 산에 서라고 했고 르우벤, 스불론, 단, 납, 갓, 아셀 지파의 6지파는 저주의 선포를 위해 에발 산에 서라고 했다. 그 의식은 그리심산에 선 지파는 축복받고 에발산에 선 지파는 저주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식이다.
본문에는 저주받을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15-26절에는 매 구절마다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언급한다. 말씀대로 살려면 먼저 “아멘!”의 심정으로 말씀에 반응해야 한다. “아멘!”이란 말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이뤄지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는 뜻이 담긴 표현이다. “아멘!”을 잘하라. 성경에서 제일 “아멘!”을 많이 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신 말씀은 “내가 ‘아멘!’하며 이르노니.”란 말씀이다. ‘아멘’이란 ‘진실로’란 뜻이다.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말씀으로 돌아가자! 오직 성경!”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끔 이런 구호를 듣는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러나 초대교회에도 갈등과 문제가 많았다. 초대교회로 돌아가도 별 수 없다. 세상에 완벽한 교회와 완벽한 사람은 없다. 말씀으로 돌아가라. 말씀 중심적인 삶만큼 복된 삶은 없다. 말씀에 열려있고 말씀을 통해 깨달음과 감동이 있는 영혼은 살아있는 영혼이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어느 것도 대적할 수 없는 무적의 영혼이 된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거룩한 감동을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영혼에 어둠과 이끼가 끼지 않게 하실 것이다. 시편 119편 169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시인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달라고 한 것은 물질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말씀 중심적으로 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인생을 복된 길로 이끌고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최대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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