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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우리도 희망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12-15절)

by 【고동엽】 2022. 12. 10.

\부족한 우리도 희망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12-15절

<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생각하면 예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얼마나 순식간에 타락할 수 있는지 그 실상을 알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일전에 전세난이 심각했을 때 한 사람이 구로구 시흥동에 셋방을 얻으러 아내와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들이 가진 돈으로 전세방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오는데 부인이 그만 짜증을 냈습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됩니다. 당시에는 일년이 지나기가 무섭게 전세 값은 마구 오르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부인은 임신 9개월의 몸이라 더욱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따라가면서 투덜댔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천만 원짜리 전세방도 얻을 능력이 없어요?” 그것이 그만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가뜩이나 남편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데 벌집을 쑤신 꼴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 말에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남편이 순식간에 아내와 두 살배기 딸을 목 졸라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배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한 연구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현재 이혼율은 세 가정 당 한 가정이 넘는데, 교회에서 결혼을 올린 가정의 경우 50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또한 매주일 함께 교회를 나가는 가정의 경우 1105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 때 인간의 삶은 그만큼 안전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뒤집혀도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에 은총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예배가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자가 되고 예배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도 실패자가 됩니다. 인류의 첫 살인자 가인과 첫 순교자 아벨의 차이는 무슨 차이였습니까? 예배의 차이였습니다. 예배가 그처럼 사람도 달라지게 하고, 축복도 달라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예배에는 매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중에 보면 그렇게 매인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 가인에게 내려진 저주 > 결국 가인은 제사 문제로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밭 갈아도 효력이 없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벌을 내렸습니다. 그 벌에 대한 가인의 반응이 본문 13-14절에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이 가인의 말에 나오는 ‘나를 만나는 자’가 과연 누구를 의미할까요? 언뜻 생각하기에 당시에는 아담과 하와 및 가인과 아벨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에 땅에서 떠돌아다닐 때 그를 만날 자는 누구일까요? 여기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 요세푸스와 미카엘리스 같은 사람은 이 구절에서 ‘나를 만나는 자’란 사나운 들짐승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슈만과 루이스는 이 구절이 작자의 오류이거나 가인이 지레 겁먹고 공포의 비명을 발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성서의 오류를 인정하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셋째, 델리취와 로젠뮬러 등은 이 구절이 이미 존재했거나 앞으로 존재하게 될 아담의 후손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만 보면 당시에는 아담과 하와 및 가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대개 구속사의 흐름을 중심으로 필요한 인물만을 발췌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에 당시에 아담과 하와와 가인 이외에 다른 사람도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5장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담이 셋을 나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삽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이 구절에 근거하면 셋 출생 이전 아담 생애의 초기 130년 동안에 아담의 후손을 가인과 아벨 두 형제로만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즉 창조 초기의 왕성한 번식력(창 1:28)과 긴 수명(창 5:4-32)을 고려할 때 아담 부부에게는 가인과 아벨 이외의 후손이 있었고 그들이 각처에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 공의 속에 담긴 하나님 사랑 > 그처럼 아벨을 죽인 가인이 자신이 저지른 큰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너무 벌이 큽니다. 저를 만나는 자가 저를 죽일 것입니다.”라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을 하셨습니까? “네가 그렇게 동생을 죽인 죄를 짓고도 너는 살고 싶어서 그러느냐? 네 생명이 소중한 줄 알면 남의 생명도 소중한 줄 알아야지. 너무 뻔뻔스럽구나!”라고 반응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을 하시는 중에서도 사랑의 여지를 남겨두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자녀의 고난과 관련한 3가지 영적인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1. 하나님은 잘못에 대해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그 잘못에 대해 징계의 손길을 펴셔야 하나님은 진정한 우리의 부모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잘못에 대해서는 꼭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그런 징계가 있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현명한 부모는 때려서라도 자녀의 잘못된 버릇을 고칩니다. 남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자식이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고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여간해서 포기하지 않고 싹수가 노랗다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면 잘못을 깨닫게 하고 잘되라는 마음으로 때로는 징계를 합니다. 어떻게 깨닫게 하십니까? 처음에는 점잖게 말씀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강단의 말씀과 여러 사람의 말과 갖가지 환경적인 메시지를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계속 말을 안 들으면 때로 가벼운 징계를 합니다. 그래도 계속 말을 안 들으면 아주 혹독한 징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우리가 무조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부터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환난은 대단히 경감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징계하실 때 꼭 살 여지를 남겨놓고 징계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때리시는 이유는 죽으라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살라고 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징계의 매를 드는 것은 이스라엘을 멸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심판과 징계 속에서도 사랑의 여지를 남겨두십니다. 왜 징계 속에 사랑의 여지를 남기십니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을 그냥 하나님의 공의대로 처리해 버리면 속이 오히려 편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녀를 끊임없이 기다리십니다.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기대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기대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3. 부족한 우리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부족한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계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약 세 번만 기다리시다가 안 되겠다고 하시면 이 자리에 나올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도 없이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범죄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수많은 잘못에도 이렇게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잘못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에게 희망을 걸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잘못됩니다. 반면에 믿어주고 기대하는 사람은 변화됩니다. 아이를 믿어주면 아이는 점차 변화되지만 아이의 싹이 노랗다고 잔소리하면 정말 아이는 나쁜 길로 들어섭니다. 우리는 자식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결코 희망의 끊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 함부로 부정적인 판단과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믿어주어야 합니다. 누군가 조금 삐뚤어 나간다고 해서 그의 근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 자신도 믿어주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생각하며 자신을 믿어주면 반드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때로 아주 힘든 고난을 당할 때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날 때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송가 489장에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가인까지 사랑의 여지를 남겨두신 하나님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사랑의 여지가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탄원까지 들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항상 잃어버린 것보다는 남은 것이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 있게 살아가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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